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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 기상.
세면을 마친 후에 어젯밤 술잔치가 벌어진 우리 방의 풍경을 보니, 대장님께서 깨끗하게 치워놓았다.
한 쪽에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는 수십 병의 맥주병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다.
'방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빈 맥주병을 팔면, 청소하는 서비스 팁값은 충분히 나오겠네..'
-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8:30), 배낭정리를 한다.
- 호텔 로비에 집합하여, 대절버스를 타고 도문국경으로 향한다 (9:10).
이 대절버스는 내일 백두산 관광 후 돈화시까지 우리를 태워다줄 버스이다.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달려 도문 톨게이트를 뻐져나와, 도문 시가지를 지난 얼마후에
도문국경에 도착했다 (10:00).
(*) 도문 (圖們) :
-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시로, 2008년 기준으로 인구는 13만 6천명이고, 조선족이 7만 8천명으로 57%를 점한다.
(도문 톨게이트)
- 한겨울철이기 때문인지 관광객은 우리 일행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아,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풍경이다.
- 두만강 위에 세워진 도문대교 저편의 북한 땅을 바라보노라니,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현실에 다들 마음이 울적해지는 모양이다.
주변 풍경을 사진찍고, 기념품가게에 들러 상품들도 둘러보며, 커피도 마셔본다.
- 중국측 국경관문 건물에 있는 매표소에서, 도문대교를 걸어볼 수 있는 입장권을 사려고 했는데, 매표소 창구가 닫혀있다.
김정일 사망 이후에 도문대교 입장권 판매를 중지하고 있다고 한다.
(도문대교 - 다리의 빨간 분분이 중국에 속하고, 파란색 부분은 북한에 속한다.
얼어붙은 두만강에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철조망이 보인다)
(강 건너편은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이다)
(중국측 국경관문 건물)
(국경관문 건물에 있는 도문대교 입장권 판매 창구)
- 30분 정도 도문국경을 관람한 후,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두만강광장 빙설제'축제장소에 도착했다 (10:35).
- 두만강광장은 두만강 옆에 위치한 광장으로, 금년에는 1.15~2.6일까지 빙설제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이곳 역시 사람이 별로없는
쓸쓸한 풍경이다.
-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걸어서 북한 땅 앞까지 가보는 여행기를 보았기에, 나는 '도문강관광부두' 옆으로 해서 얼어있는 두만강 위로
내려가보려고 했다.
그 순간, 중국 군인 두명이 소리치며 다가와 무어라고 한다.
김종진님의 통역에 의하면, 두만강으로 내려갈 수 없으며, 사진기에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한다.
우리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고 별일이 없었는지 그냥 자리를 뜨면서, 강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몸짓을 한다.
아마 이곳에서도, 김정일 사망 이후에 보안감시가 철저해졌나보다.
이렇게 되어,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 서서 김정구님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두만강광장 입구)
(두만강 빙설제 안내판)
(두만강광장에서)
(도문강관광부두)
(얼어있는 두만강 -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가 도문대교인 것 같다)
(강 위로 내려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다가온 중국 군인 / 사진 제공 : 파인트리님)
(저편 언덕 위에 있는 회원들께서, 나보고 두만강 위로 내려가보라고 응원(?)하고 있다)
(광장에 있는 스케이트장)
(광장을 나서며)
- 두만강광장 관람을 마친 후, 버스에 올라 용정시를 향해 출발한다 (10:45).
두만강을 따라 달리면서, 북한 땅이 바로 지척일만치 가까운 강폭이 좁은 곳도 바라보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연변지역을 방문할 때 기차를 타고 건넜다는 철교도 구경한다.
- 두만강변을 벗어나 평원으로 들어선 얼마후에, 용정시에 있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11:45).
(*) 용정 (龍井) :
-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시로, 연길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져있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는 26만명이며, 조선족이 67%를 점하고 있다.
- 백두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 가운데로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른다.
- 가곡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일송정, 해란강과 일제시대에 항일교육의 요람이었던 대성중학교가 위치하며,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 겨울방학 때문인지 학교 정문이 닫혀있다.
대장님께서 정문 수위실에 있는 아저씨와 얘기를 한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는 말에, 수위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와서 정문을 열어주어, 학교 안으로 버스가 들어갔다.
- 수위아저씨 말이, 학교 안을 안내해줄 선생님에게 연락을 했으니 20분 후면 선생님이 학교에 도착할 것이라 한다.
일행들이 학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한 여자선생님이 나타난다.
(대성중학교 -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윤동주 시비 앞에서)
(금년부터 사용할 예정이라는 새로 지은 건물 - 수위아저씨의 안내로, 이곳의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는 30대의 아름다운 김춘실선생님에게, 농삼아 말을 건네본다.
"선생님, 광철이는 요새 잘 지냅니까 ?" 하였더니, 뜻밖에도
"아니, 광철이를 어떻게 아십네까 ? 내가 광철이 담임선생입네다." 하시며 깜짝 놀라신다.
"광철이가 공부는 잘 합니까 ?" 하자,
"네, 우리 반 반장입네다." 하신다.
-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일행들이 모두 웃고, 우리 대장님께서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하여, 투어인케이씨카페의 케이씨대장님(김광철)께서는 용정 대성중학교의 반장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대장님에게 "야 광철이가 반장도 다하고 공부를 잘하는 모양이네" 하였더니, 대장님께서 "어, 나 학교 다닐 때
반장 많이 했어요" 하신다.
- 사연을 듣게된 여선생님도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짓는다.
방학 때가 아니었으면, 대성중학교의 광철이와 투어인케이씨카페의 광철대장님이 만나, 악수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장님, 다음에 대성중학교에 가시면 꼭 광철이를 만나고 오시길 바랍니다..)
- 여선생님을 따라 학교 2층에 마련된 전시관에 들어섰다.
학교의 역사와 졸업생,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항일 독립투사들에 관한 자료가 비치된 전시실을 돌면서,
여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 전시관을 나서는 곳에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어, 일행 모두 방명록을 작성한 후 얼마씩의 후원금을 기부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서)
(여선생님이 비치된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윤동주시인과 문익환목사님)
- 1층에 마련된 '윤동주교실'에 들어가니, 어릴 적에 다녔던 우리네의 교실 풍경과 비슷하게 꾸며져있다.
어릴 때의 학창시절이 생각나서인지, 모두들 즐거워한다.
('윤동주 교실' 표지판)
('윤동주 교실'에서 - 어릴 적에 양철 도시락 (당시말로 , 벤또)을 난로 위에 올려서 데워먹던 추억이..)
(담임선생님과 반장인 광철이가 - 그런데 어째, 학생이 선생님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네..)
- 여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학교를 나서면서 기원해본다.
일제치하의 그 어두운 시절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 훌륭한 항일투사와 여러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과 기상을 이어받아,
앞으로도 조선족사회와 중국사회를 이끌어갈 동량들을 길러내는 학교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 용정시내에 있는 한식당에서, 김치찌개와 육계장, 소고기볶음밥 등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12:45).
식사가 나오기 전에, 김교수님의 선창으로 '선구자'를 합창해본다.
(점심식사 식당인, '미미사'))
(점심식사 중)
- 식당을 나와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한 후, 눈이 쌓여 미끄러운 산길을 20분 정도 걸어올라 일송정에 도착했다 (오후 1:30).
- 항일 독립투사들께서, 해란강을 바라보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도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새로 지어진 정자와 새로 심어진 소나무이긴 하나, 이곳에 서서 용정시내를 흐르고 있는 해란강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감회는 깊을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 모여서, "이일송정 푸른 솔은 흐을러 흘러 가았어도 ~~"를 목청 높이 부르며,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를 그려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
(일송정)
(용정 시내와 해란강)
(주차장에 있는 일송정 휴게소 건물 - 안타깝게도 영업이 중지된 채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 백두산을 가기 위하여 이도백하를 향해 출발한다 (오후 2:10).
아도백하로 가는 길은 눈이 쌓이고 빙판길이 많기 때문에, 해가 있을 때 지나가야한다고 한다.
-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서, 아차하면 대형사고가 날 눈길을 운전기사가 잔뜩 긴장하여 운전한다.
관망대 표지가 있는 곳을 지나기에, 잠시 내려 사진을 찍고 가자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더니, 이 운전기사가 화를 내면서
무어라 큰소리로 고함을 친다.
대장님께서, 이런 오르막 눈길에 정차했다가는 언덕길을 다시 올라가기 힘들다고 한다.
(잠시 들른 휴게소 출입문)
(휴게소 안에서)
(관망대 표지판이 보인다)
- 조수석에 앉아 운전기사를 살펴보니, 차 앞에서 비추는 따가운 햇빛과 하얀눈의 반사광 때문인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서,
굳은 표정으로 조심히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눈치이다.
매년 겨울철에 백두산을 여행할 때마다 이렇게 눈이 쌓인 빙판길이냐고 대장님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 화룡현을 지나 안도현에 접어들어 얼마를 달리니, 제설작업을 한 아스팔트길에 들어선다.
이때쯤에야 운전기사가 선글라스를 벗고서 긴장을 풀고 운전한다.
(맞은편에서 트럭이 내려오고 있다)
(안도현에 들어선다)
(나무를 실은 트럭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자 운전기사가 긴장을 푼다)
(길가에 있는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 일송정을 출발하여 3시간만에 이도백하의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 5:10).
산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오는 법인지라, 주위에는 캄캄한 어둠이 깔려있다.
(*) 이도백하 (二道白河) :
- 백두산 북쪽의 해발 500m 지점에 위치한 백두산 아래 첫동네로, 백두산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 상류의 이도백하 강변에 있어 이런 지명이 붙었다.
- 삼림이 전체 면적의 94%에 달하여 삼림자원이 풍부하며, 특히 장백낙엽송을 비롯한 경제적 가치가 높은
30여종의 수목이 자란다.
마을곳곳에 보이는 미인송(美人松)은 이도백하의 명물로서, 미인송이란 곁가지가 많지 않고 위로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를 말한다.
- 인구는 6만명 정도이며, 조선족이 많이 거주한다.
(숙소인 '미산빈관')
- 호텔로비에서 방 배정을 한다.
내 룸메이트는 대장님이다.
나는 어젯밤의 악몽(?)을 떠올리며, "룸 메이트 바꾸실 분 안계세요? 대장님과 같이 방 쓰실 분을 찾습니다." 했더니,
모두들 웃기만 할 뿐 손을 든 분이 아무도 없다.
대장님께서 나에게, "그러면 모회원님과 같이 방을 쓰실래요? 그런데, 코를 심하게 골기 때문에 주무시기 힘들텐데요."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꼼짝없이 이번 여행이 끝날 때까지 대장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 방에서 배낭을 정리하고 있노라니, 또다시 정구님께서 웃으며 방으로 들어서며, " 이 방이 우리방보다 더 큰데요." 한다.
'아니, 한번 속지 두번 속나'라는 심정으로, "머시 그럴 턱이 있나. 어디 정구씨 방으로 가보더라고" 하며,
정구님 방으로 향한다.
"더 크긴 머가 더 커? 똑 같구만. 오늘밤 본부석은 여기서 하든지, 우리방이 더 크다면 방을 바꾸어줄께." 하고 돌아왔다.
- 숙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오후 6:00).
소갈비 신선로 형태의 요리인데, 입맛에 맞았던지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 식당)
(내일 백두산 천지를 잘 볼 수 있도록 화창한 날씨가 펼쳐지길 기원하며, 우리 모두 "건배 !" )
(저녁식사 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술과 안주를 구입하여)
(호텔방에서의 술자리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벼웁게 걸어가는 중)
- 호텔로 돌아와 본격적인 술파티가 시작된다 (오후 7:40).
그동안 나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오늘의 본부석은 다른 방에 설치되었다.
- 나는 술자리에 잠깐 참석하였다가, 내일의 백두산행에 대비하여 내방으로 돌아와 일찍 취침에 든다 (밤 9:00).
'아, 외롭고 힘든 투쟁 끝에, 편하게 잘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였구나.
그란디, 오늘은 술자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라고, 술이 떨어져 타게 되는 사다리의 제물은 누가 될랑가 무지 궁금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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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여행 6일자 일정을 올려 주셨는데, 해설과 함께 동선을 시간대 별로 기록해 주셔서, 나름 추억의 그림을 그리기에 편하군요~
오늘도 즐겁게 감상하였습니다~~^^
선배님 건의대로 조선족 민가에 들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 쪽에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는 수십 병의 맥주병" 이글을 읽으니
약수터님이 대학다닐때 대현동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하숙방 선반에 고량주병이 주루루 정열되어 있었다고
그 하숙집을 놀러간 친구가 뭔가 베일에 가려진 친구로 봤다고 후일담을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납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하숙집이 학교 근처였는데 항상 쓰레빠를 질질끌고 수업에 지각을 하였다는 소문등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 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몇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
'생략"
1945년 2월 28세의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가 생체 실험에 희생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예전 40여명의 초,중학생들과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5박6일간의 여행을 위해 그학생들모두 20권이 넘는 역사관련 책을 보고왔떠라구요... 뭐든 미리 보고 준비하면 배가 되게 얻어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초,중학생 40여명을 인솔했으면, 힘도 들었겠지만 매우 재미도 있었겠네요.
책을 많이 읽고온 학생들이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여, 땀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를 느낀 하루였답니다.
회원들께서 말을 안해서 그렇지, 모두들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을 겁니다.
일송정에서 '선구자'를, 두만강변에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백두산 천지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져라 불러보았더라면, 울적하고 답답한 가슴이 아마 조금은 풀어졌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송정을 버스에서 지나면서 보앗는데 이곳에서 확실하게 볼수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