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린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로 했어요."
"......"
"우린 형님의 시신을 해부하기로 정식으로 결정했습니다."
"......"
발인을 앞둔 엄효진의 연이은 폭탄적인 선언이었다. 집안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 살기마저 팽배했다. 누구나 숨을 죽였다.
효진의 선언은 상가의 어둡고 무거운 공기를 뒤흔들어 놓기에 족한 것이었다.
김강민은 누구보다도 엄청나게 실색했고 기겁했다.
그러나 민하경은 시동생의 폭탄적인 선언에 눈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다만 그 눈꼬리가 치켜올라갔을 뿐이다. 효진의 선언을 예상해서일까?
강민은 그 사이 얼마간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하경의 신속하고도 매우 적절한 조처로 해서 엄씨 일가의 사람들은 어느새 그녀의 기치 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문의 장로격인 엄노훈 씨도, 무섭도록 이기적인 엄채영도......
황정빈 박사가 그들에게 포섭된 것도 여간 듬직하지 않았다.
강민은 하경에 의해 공모자로 포섭된 사람들이 누구 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황박사를 제외하고는.
"강민씬 알 필요가 없어요. 그건 서로에게 위험한 일이에요. 만일을 생각해서에요."
하경은 그렇게 말했었다.
사람들은 엄대진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였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말이다.
엄대진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으며 그 심지도 그 불꽃도 가냘프기만 하다고 여겨왔었다.
하경이 그녀의 입김으로 불어 끄긴 했지만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엄대진은 그사이 병세가 진행되어 호흡곤란과 부종(浮腫)의 증세도 보였었다.
강민은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저으기 안도했었다.
비록 독살된 시신이 집안에 놓여 있다 해도 말이다.
적어도 3일장을 치러야 하니 집안에 독살된 시신을 3일간은 안치해야 했다.
도고온천에서 올라온 엄효진과 함께 2층 침실에 함께 들렀을 때는 그 순간을 넘기기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었다.
비소 중독에 의한 사망!
그 사실을 아는 강민인지라 영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창백한 시신을 한번만 눈여겨봐도 누구나 대뜸 의혹이 스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건 독살이요, 독살!"
효진의 외침이 금세 들려올 것만 같았다.
"김형, 어젯밤 얘기를 해주시겠소?"
효진은 강민과 함께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효진은 그의 형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형의 심복 이라 할 강민을 당연히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 그의 형을 독살한 여자의 편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그들 두 사람은 동년배인데다가 젊은 패기와 담백한 기질 탓으로 평소에도 부담없이 어울렸었다.
"초저녁에 형님과 형수가 몹시 다투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요."
"뭐 대단치는 않았어요. 다만......"
"다만?"
"여느 때보다는 좀 심각했어요."
"재산 때문이었소?"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럼?"
"손수란(孫秀蘭) 때문이었소."
"살롱 밀회의 손마담 말이요?"
"그래요."
"그래서?"
"부인이 부아가 잔뜩 돋아 나가기에 내가 따라 나섰소.
술도 들었고 해서...... 지난번처럼 차사고라도 낼까봐......"
"흐음."
"사장님께서도 홧김에 밀회에 다녀오셨나 보더군. 술도 들고...... 내가 손마담에게 확인해 봤어요."
일단 아래층 거실에 내려선 두 사람은 자연스레 거실의 모서리에 마련된 홈바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 아침나절부터 술을 들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이 한적해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그래, 대충 몇 시쯤이오? 돌아가신 시간이......" 효진은 수툴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어젯밤 11시 반께가 아닌가 싶어요."
강민은 여느 때와는 달리 효진의 눈길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벌써부터 효진의 시선을 피하는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어젯밤에 형수가 집을 나간 것은 몇 시께요?"
"밤 9시께요."
"용인 별장을 다녀왔나 보던데......"
"그래요."
"집에 돌아온 것은?"
"새벽 두 시께요."
"그렇다면 형수에겐 철벽 같은 알리바이가 있다는 얘기구려."
"그런 셈이요."
"내내 김형과 함께 였소?"
"그래요."
효진은 두 남녀가 숲속의 별장에서 한밤중에 벌였음 직한 황홀한 정사보다는
그의 형수의 확고한 알리바이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러나 효진은 서서히 깨닫는 듯 싶었다. 눈앞의 사내가 형의 심복이라기보 다는 형수의
정부일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효진은 말없이 강민 앞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그의 눈에 불신의 빛이 깃드는 것을 강민은
놓치지 않았다.
강민은 효진이 황박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눈여겨 보았다.
"자형, 혹시 약물중독은 아닙니까?"
하고 묻는 효진의 얼굴에 필사적인 애원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약물중독이라니...... 이 사람좀 봐...... 그 무슨 당치 않은......"
황박사의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대꾸였다. 그가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리허설한 대사인 것을. 그리고 벌써 여러번 대뇌인 대사이기도 했다.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암, 장담할 수 있구 말구."
"제가 원한다면 법정에서 증언하실 수도 있구요?"
"물론...... 얼마든지......"
강민은 황박사가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에 악마적인 기쁨마저 느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고이지 시작했다.
황후 아그리피나도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할 때 궁정의 시의(侍醫)부터 포섭했었다고 했었다.
하경은 초저녁에 윤세화로 하여금 엄대진이 즐겨먹는 버섯요리에다 미량의 비소를
투여케 했었다. 비소 는 습관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치사량의 10배에 대항하는 양에도 견디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위가 음식으로 가득차 있게 되면 몇 시간 뒤에나 증세를 보일 때가 있다.
아무튼 엄대진은 살롱 밀회에서 돌아왔을 즈음해
서 아내에 의해 독약이 투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발열과 구토와 설사! 그때가 밤 11시께였다.
강민과 하경이 용인의 별장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엄대진은 재빨리 황박사를 불렀다.
그리고 재빨리 해독제를 먹었다.
황박사가 며칠 전에 해독제라며 지어준 약을. 그건 하얀 분말의 약이었다. 비소라는 이름의......
황박사가 달려왔을 때는 엄대진은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따라서 정원사인 곽만길 씨도 전속 간호원인 윤세화도 김강민과 민하경 그리고 황박사의
현장부재를 증언할 수가 있었다. 엄대진이 죽었을 밤 11시 반 전후의 알리바이를 말이다.
물론 운전기사 아저씨 권대수(權大秀)와 그의 아내 김옥자(金玉子)도 그 사실을 증언할 수
가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최악의 경우에 대처하는 공모자들의 최종적인 대비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효진아, 현명하게 행동해야 해.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구. 손해보는 건 우리야. 우리......"
채영이 그의 동생을 다독거리는 소리도 귓전에 들려 왔다.
엄대진의 유언장이 따로 없다면야 채영이도 효진도 법적으로는 제3순위에 불과하다.
제1순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직계비속인 엄희수다.
그리고 민하경이 공동상속인이 될 것이다. 효진이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길은 하경의 살인을
증언할 때만이 가능하다. 아니면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감쪽같이 살해하던가.
"아무 증거도 없이 떠들어대서는 안 돼. 자형의 말로는......"
"......"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마. 우리한테도 단단히 한몫 떼어준다고 했어.
효진아, 너, 빈 깡통을 차고 싶어?"
채영은 효진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효진이 윤세화를 창가로 끌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세화씨!"
윤세화를 부르는 효진의 눈길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예전엔, 세화씨! 하며 불러본 일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거들떠 보지도 않던 여자였다.
윤세화가 구석진 곳에서 그의 잘 생긴 옆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나직이 새어나오는
한숨을 깨무는 것을 효진은 알고 있었다.
'오,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효진은 그런 윤세화를 재미있어 했을 뿐이었다. 그런 무시하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
지금은 효진이 그녀의 손목까지 잡고 있다.
"세화씨, 혹시 약물중독은 아닙니까?"
"그렇진 안아요. 효진씨......"
윤세화는 마음만 먹는다면 눈앞의 잘생긴 사내를 그녀의 침실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기회인 것이다. 늘 간절히 꿈꾸던 일이 아니던가.
"비소중독은 아니냐구요. 시신을 보니 너무 창백하더라구요."
"심부전은 원래 청색증을 나타내어요. 부종증과 함께요. 아시잖아요."
"세화씨, 지금 내가 믿을 사람은 세화씨뿐입니다."
"기본적인 치료는 안전이예요. 근데 그걸 크게 해쳤 어요. 특히 오늘밤에요."
"세화씨......"
그러나 윤세화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젖고 있었다. 그런 윤세화를 효진은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체념한 듯 돌아서고 있었다. 그가 윤세화에게 걸었던 희망도 끊긴 것이다.
윤세화도 그녀에게 어렵게 다가선 기회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효진은 마지막으로 그의 숙부에게로 다가갔다.
"장례를 망치려 하다니, 자네 돌았나. 이제보니 집안 망신을 시키려드는군."
효진은 그의 숙부가 이미 적의 편에 선 것을 알지 못했다.
"숙부님!"
"재산문제는 나중 문제야, 나중......"
효진이 발견한 것이라고는 그의 일족이 그의 곁에서 떠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경의 유혹에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강민은 효진의 얼굴에 절망의 베일이 짙게 드리워지 는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는 아마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을 되씹고 있을 것이었다.
효진은 더구나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처지였다.
강민은 효진이 지금 비싼 사랑놀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1그룹 의 장회장과 결합해서 말이다.
"관은 어떤 것을 쓰시겠습니까?"
마침내 장의사에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강민은 저으기 안도했다.
비소중독의 증세를 일깨우는 창백한 모습의 시신을 입관하기만해도 지금의 숨막히는
상황에서 얼마간 벗어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최고로 좋은 것으로 하세요."
"칠관(漆棺)도 있고, 금속제의 침관(寢棺)도 있습니다만...... 외국제품입니다."
"제일 비싼 것으로 하시라니까요."
"암튼 샘플를 두 개 갖고 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뭘 말입니까?"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 네, 그렇습니까."
엄대진을 화장하기로 한 것이 아니면 이번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매장하는 경우라면 독살된 시신을 고스란히 보존해 두는 격이 된다. 비록 땅속이라고 해도.
언제 어떻게 파헤쳐 부검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민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돋았다.
"문명인이란 모름지기 화장하는 법이오."
엄대진은 특별히 종교적인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생전에 그가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사실 화장은 문명화된 모든 민족이라면 널리 행하는 장법이기도 하다.
"강물에 훨훨 띄워 보내는 게 좋을 거요. 화려한 무덤을 만든들 죽은 다음에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런데 한강이 이 추위에 얼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얼음을 깨고 흘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엄효진이 민하경의 공모자들이 그들의 희생자를 화장하기도 전에 부검하려 했다.
십중팔구 검시관은 엄대진이 비소중독으로 사망했음 을 가려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말이다. 왜냐하면 비소만큼 검출이 쉬운 독약도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소는 독살모의의 무서운 비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자의
독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것이다.
하경은 왜 효진을 구워삼지 않는 걸까. 재산의 절반 이라도 뚝 떼어주고 말이다.
"포섭할 사람이 따로 있지...... 효진이 그 사람만큼은 절대 안돼요." 하경은 고개를 내저었었다.
"공연히 애 쓸 필요가 없다니까요."
"......"
"강민씨, 우린 적과 동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해요."
하경은 싸울 사람과는 싸우고 손을 잡을 사람하고는 손을 잡자는 생각이었다.
"엄씨 일가의 그 누구와 한번쯤 겨루어야 한다면 그 상대는 바로 시동생이에요."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요. 효진이 그 친구를 적으로 돌리는 일 말이요.
겉모습과는 달리 무섭도록 모진데가 있어요."
"알아요. 모진 데가 있다는 건...... 하지만 그만한 위험은 각오해야 하잖아요?"
"흐음."
"모든 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강민씨, 나에게도 생각이 있어요."
"어떤?"
"고립시켜 격파하는 거예요."
"......"
하경이 효진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대처하려는지는 분명치 않았으니,
효진이야말로 안전핀을 뽑을 위인이었다.
효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뭔가 모색하고 있다는 느낌만은 분명했다.
그런대로 발인의 날까지 아무 탈 없이 시간은 흘렀다.
강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일이 싱겁게 끝나가고 있다는 아쉬움 비슷한 것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발인의 날에 효진이 마침내 폭탄선언을 하지 않는가. 형의 시신을 부검할 것이라고.
그가 마침내 안전핀을 뽑은 것이다.
"우린 당신한테 우리 제의에 동의하길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
"우린 형님의 시신을 부검할 겁니다."
"......"
"그냥 이대로 장례를 치를 수는 없어요."
강민은 일순 만사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벼랑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눈 앞에 그릴 수가 있었다. 강민은 이렇듯 그의 종말이 빨리다가설 줄은 미처 몰랐다.
'효진을 포섭했어야 했어.'
강민에게 뼈아픈 회한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렇듯 파국이 다가서는 것도 모른 채 하경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픈 아내의 역할을
착실하게 연출 했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인이 기뻐하실 겁니다."
과장되지 않은 하경의 잘 억제된 행동거지가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도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불안은 감내하며 시간의 흐름만을 지켜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젠 입관을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들의 충복격인 곽만길 씨가 나서서 말을 했을 때 그들은 기뻐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려온 소식이 전해진 느낌이었다.
시신의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엄포를 묶는 염습(斂襲)의 절차가 끝나고
입관절차마저 끝났을 때 강민도 하경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은 하경의 세 번째 공모자라고 할 곽씨가 도맡아 처리하다시피 했다.
안방의 병풍 뒷편에서 장의사 직원들과 함께.
장의사에서는 큼직한 관을 두 개씩이나 갖고 와서는 고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하는 칠관이라고 하는 목관이구요.
이건 외국의 새로운 풍습이라고 합니다만 금속제의 침관으로서, 이곳에 유체를 넣어 납땜
을 해서 밀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은 색다른 광경이었다.
관을두 개씩이나 갖고 와서 세일즈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 친구들 무슨 꿍꿍이 속셈이 있어 보였다.
"우린 환장을 할 거요, 화장을." 강민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일깨우듯이 말했다.
"화장을 하시더라도 입관을 하셔야지요."
"누가 아니래요."
"화장을 하시면 물론 일시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지만요."
"이걸로 합시다." 강민이 마침내 선택한 것은 붉은 무늬가 있는 칠관이었다.
그런데 장의사에서 온 세 사람의 모습이 인상 적이었다.
그들한테서 풍기는 느낌이 생각보다 깔끔했고 젊었다. 그리고 매우 기능적이었다.
여느 종합상사의 능률적인 직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기업화된 장의사가 생겼다고 들은바가 있다.
특히 검은 색조의 의상을 걸친 리더격의 젊은 여자한테서는 일종의 기품이랄까,
프로의식 같은 것이 풍겼다. 그녀가 건네어준 명함에 박힌 설지숙(薛 知淑)이라는 이름도
인상에 남았다. 강민은 이상하게도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낯선 파티장에 잘못 찾아온 손님만큼이나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곽씨가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 성싶었다.
모든 장례절차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독경소리도 끊이지 않았고,
조문객의 분향의 대열도 끊이지 않았다. 그에따라 시간도 흘렀다.
강민은 그사이 몇번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치르고는 했는데,
조문객으로 엄영진(嚴榮震)씨가 나타났을 때는 저절로 움찔했다.
엄영진 총경!
지금 치안본부 외사과에서 근무하는 엄대진의 혈족이다. 엄대진과는 6촌사이라고 했다.
아무튼 현역 경찰간부가 살인현장에 모습을 드러낸것이다.
비록 살인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말이다.
엄총경은 입관절차를 막 끝냈을 즈음해서 모습을 나 타냈다.
그는 마치 이 집안의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 탓일까,
그는 누구보다도 환영을 받았다. 피아 어느 편에서도.
효진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도 강민은 놓치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이 심장이 좀 약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없이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엄총경은 분향을 끝내고 술상이 마련된 좌석으로 다가서며 그의 일족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50대 초반은 되었을까.
근무하는 곳이 치안본부고 외사과라서인지 경찰관치고는 제법 댄디한 이미지를 풍겼다.
그 몸놀림도 의젓했고 그 얼굴에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 온화한 마스크 뒤의 모습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자, 술 한잔 들어요."
누군가가 권했다.
"아네요, 금세 사무실로 돌아가야 해요."
하면서도 그는 술잔만은 받아드는 것이었다.
"요즘 의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했는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다니 말이나 되나."
엄총경의 별 의미없이 던지는 말에도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강민과 하경이 "우리 황박사의 손으로도 어쩔 수 없었나 부곤. 손을 든 것을보니......"
엄총경은 황박사를 건네어보며 말했다.
"장본인이 어디 절제했어야지." 황박사가 떠듬떠듬 말했다.
"하긴 장본인이 투병생활을 했어야 말이지." 엄총경은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기나
하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뭐예요, 그 심부전 탓인가요?"
"그래요."
"나 원, 사람의 심장이 그렇게 약하다니......"
"그러게말요."
"그럼 내일 발인할 때 다시 들르겠어요."
엄총경은 조금은 어수선한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떠나는 엄총경을 하경이 현관까지 배웅했다. 아무래도 그가 오늘의 무대의 주역처럼 비쳤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엄총경이 하경을 위로했다.
"아니예요. 간병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내가 잘 압니다. 그 사람이 어디 보통사람이었습니
다. 성깔도 고약하고...... 애 많이 쓰셨어요."
"고맙습니다."
하경은 두 손을 맞잡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다시 들르지요."
하면서 엄총경은 잠시 아름다운 미망인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읽으려는 듯이. 이윽고 엄총경은 모습을 감추었다.
하경은 한동안 현관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엄총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총경이 그렇게 사라지자 사람들은 묘하게도 안도감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무엇이 터지기를 바라는 심리와 조용하게 넘어가기를 바라는 심리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엄총경이 들고 온 작은 폭풍은 집안을 조용히 휘젓고는 지나갔다.
놀랍게도 효진은 침묵을 했다. 그는 엄총경에게 다가서지도 않았다.
"저 친구가 뭔가를 노려야 한다면 그리고 그 어떤 효과를 겨냥해야 한다면 지금이
절호의 찬스가 아닐까?"
누군가가 속삭였다.
"흠, 그러게 말야."
누군가의 열기 없는 대꾸도 있었다.
"잘못하면 저 친구 기회를 상실하는 거 아냐?"
"글세......"
그런데 효진은 좀더 결정적인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발인을 앞두고 일가 어른들이 빠짐없이 모일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문객으로 강민의 관심을 끈 두 번째 사나이는 마동권(馬東權)이라는 이름의 인물이었다.
마동권!
나이는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인상이 좋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절름발이었다.
몇해 전의 총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가을날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오는 다란 국제공항에서 그가 암살하려는 사나이한테서
서브머신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범죄조직의 암살자였다. 살인자 M으로 통하는... 아마도 마가(馬哥)라는
그의 성의 이니셜을 딴 듯이 보였다. 그는 숱한 총세례 속에서 살아 남았다고 했다.
"다리 부상을 당한 뒤로는 일선에서 은퇴해서 지내고 있다지, 아마......"
"그런가 보더군."
한때는 쓸모가 없어진 마동권을 조직에서는 비정하게도 말살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는 것이다.
"마동권이 지닌 비밀이 너무 많아서라더군."
"그 사람을 자유롭게 유영시키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는게야."
"조직으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는군. 상대가 너무 강해서 말야."
"흐음."
누가 뭐래도 그는 진짜로 위험한 암살자였다. 비정 하고 냉혹하고......
그의 특기는 총에 의한 암살이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권총은 총기 설계의 천재 죤 부로우닝의 최고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구경 9밀리의 부로우닝 하이파 워였다.
이른바 다탄수장전(多彈數裝塡)이 가능한 권총으로 적어도 13발을 장전할 수 있는
매거진을 지니고 있다.
그 사용하는 실탄은 9밀리 파라베람이라고 하는 강력탄(强力彈).
그는 살인을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도락으로 하는 듯이 보였다고 했다.
퇴역한 암살자!
키는 컸으나 마른 몸매였다. 그리고 사뭇 특징 있는 얼굴이었다.
살인자 타입은 따로 없다고 했지만 마동권은 첫눈에 인간의 심장에 능히 방아쇠를
당길 위인으로 보였다. 눈은 들어갔으며 콧날은 앙상했고, 광대뼈는 나왔고
볼은 깊이 파여 있었다. 어딘가 동물적인 사나움이 깃 들어 있었는데,
그 얄팍한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고 눈에서 흰자위가 크게 드러나 있었다.
전형적인 살인자 타입이라고나 할까. 엄대진은 생전에 마동권과 가까이 지냈었다.
그것은 사업상의 이유에서였다.
다이아몬드 보석상이 주종업체인 엄대진은 밀수조직과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것 저것 다 넘겨주어도 다이아몬드 판매시 장만큼은 넘겨줄 수가 없다구요."
하경이 산하업체를 아낌없이 엄씨 일가의 사람들한테 넘겨주자,
사뭇 아쉬워하는 강민한테 건넨 말이었다.
"이것만큼은 우리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해요."
"......"
"아시죠? 강민씨......
우리 나라에서 한해 동안 다이아몬드를 암거래하는 액수가 줄잡아 5천억 원은
된다는 사실을요. 아시겠어요? 5천억 원이에요. 5천억 원!"
"......"
"게다가 전체 보석 거래액의 90프로를 점유한다는 사실을요."
"......"
"그러니 우린 이 조직만은 장악해야 해요."
"......"
"우리 나라는 다이아몬드의 황금시장이란 말예요, 황금시장!"
"......"
마동권은 말없이 분향하고는 돌아갔었다. 그
는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눈엔 시종 뭔가 강하게 비난하는 빛이 감돌았다.
그는 검은 캐시미어의 긴 코드를, '트래드 클럽'에서나 샀을 법한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 색안경도 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색달랐다. 어둡고 음산하고 그러했다.
아무튼 여간해서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사내였다.
강민은 대문 밖까지 나가서 그를 전송했다.
"마선생!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강민이 인사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차에 오르며 말했다.
"다시 들를 거요!"
그건 마치 복수를 다짐하는 자의 말투와도 같았다.
강민은 한동안 사라지는 마동권의 회색의 외제차 볼보를 바라보며 장차 마동권이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강민씨, 방금 다녀간 그 사람, 누구예요?"
마동권의 미풍처럼 숨죽인 움직임이 하경의 예민한 신경에 민감하게 와닿는 듯했다.
"그 사람, 공연히 숨막히는 거 있지요."
"마동권이라는 사람이요."
"어머, 그래요......"
하경은 마동권이라는 살인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 비정함과 함께.
강민은 하경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는 걸 놓치지 않았다.
마동권한테서 미신적인 불안이라도 느끼는 걸까.
"우리가 그 사람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소."
강민은 하경의 그늘져가는 표정을 살피며 달래듯이 말했다.
아니 그 자신을 달래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 공연한 이유없는 불안인 것이다.
마동권, 그는 지금 조직의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과 거래하는 조직의 관리자도 아니다.
그는 다만 퇴역한 암살자인 것이다.
"그래요, 우리가 왜 그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지요."
강민은 그러나 처음으로 하경의 겁먹은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엄사장과 친했던 건 틀림없어요. 그것도 극진한 사이였소. 하지만 그뿐이요."
"그래요. 그 뿐이에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마동권이 신경에 와닿는 걸까?
특히 마동권이 절룩거리며 내는 구둣발 소리가 강민의 귓전에서 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리는 영원히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강민은 머리가 질끈 아파왔다.
마침내 발인의 날 아침은 밝아왔다. 밖은 한겨울의 한파가 넘실거렸고 눈마저 소록소록
내렸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한강은 아직 얼지 않았다고 했다.
오후가 되면 엄대진은 한 줌의 잿가루가 되어 강물 위에 띄워지리라.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발인 시간은 아침 10시였다.
수석장로격인 엄노훈 씨를 비롯해서 일가 어른들이 빠짐없이 모였다.
엄채영도 황정빈 박사도, 엄영진 총경도 그리고 조동표 전무와 회사 중역들도 모습을 보였다.
곽만길씨와 윤세화에 운전기사 권대수와 그의 아내도 빠지지 않았다.
다시 들르겠다던 마동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관할서의 강력계 형사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은 이 살인사건에 관한 한 소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곧 눈을 뜨게 될 것이고 달려올 것이었다.
왜냐하면 엄효진이 일가 어른들 앞 에서 포문을 열었으므로.
"우린 오늘의 장례를 미루기로 했습니다."
"......"
"우린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정식으로 캐기로 했습니다."
"......"
효진은 하경이 앞에 우뚝 마주 서며 말했다.
그는어떻게 보면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서 그의 형수에게 도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에게는 사도(使徒)에게서나 볼 수 있는 사명감 비슷한 것마저 감돌고 있었다.
"형님의 죽음의 원인을 캐요?"
하경은 그 아름다운 미간을 잔뜩 모으고 있었다. 한 점 어두운 먹구름이 닥쳤을 때처럼.
일가의 사람들과 회사의 중역들이 그들 두 사람을 에워싸다시피 했다.
그들은 내심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시동생과 형수의 목숨을 건 처절한 도박이 눈 앞에서 펼쳐지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려움에 가까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린 형님의 시신을 사직당국의 손으로 검시하기로 했습니다. 해부를 해야 한다면 해부를 하구요."
효진은 내내 우리라는 말을 앞세웠으나 지금 형편으로는 그의 주장이나 견해에 동조하는 일
족은 별로 없 었다.
"시신을 해부해요? 아니 무엇 때문에요?"
"우린 형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머, 그래요?"
이 위기의 순간을 대처하는 하경의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남편을 살해한 여자답게 그 뱃심도 보통은 넘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서 불퇴전의 자세를 엿볼 수가 있었다.
의연했고 당당했다.
서릿발 같은 기상이 감도는가 싶으면 일순 미소짓는 여유마저 보였다.
"아니, 그럼 내가 독살이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심지어 역습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효진이조차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대담하기 그지 없는 배팅이었다.
"자, 어서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도련님의 생각을요."
"......"
"우리 황박사님의 사망진단도 못 믿을 만큼 의혹을 지녔나본데, 아닌가요?
적어도 자형은 순환기질환에 관한한 사계의 권위자예요."
"......"
"그리도 못 믿겠든가요?"
"......"
일가의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여자가 남편을 독살 했을는지도 모른다는 한 점
의혹이 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박사의 증언도 있고 해서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터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지금 하경의 편에 서 있었다. 단물이 소원이었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효진이 나서는 것도 싫었고 설치는 것도 싫었다.
"혹시 딴 속셈으로 이러시는 거라면, 도련님, 연극은 관두세요.
형님께서 아우님께 나누어주고 싶어했던 재산은 고스란히 드릴 테니까요.
네, 물론 도련님이 소원 하던 호텔 건립사업도 계속 추진하시구요.
암튼 이집 재산의 절반은 도련님 거예요. 형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신가요? 이렇게 나서시게......"
"으음."
효진이 일순 휘청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로서는 뜻밖인 듯했다.
그에게 재산의 절반이라도 돌아 온다면 그가 칼을 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강민도 하경이 재산의 절반을 효진에게 떼어줄 생각이라면 왜 진작 협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다시금 밀려왔다. 이 난리를 겪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든가.
"우리마저 제거하고 독차지하는 것이 도련님의 소원 이라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요.
혹시 지나친 욕심을 부리시는 거 아네요?"
"......"
"그렇담 저도 당할 수만은 없어요."
"암튼 장례는 못 치릅니다!"
일순 밀리는 듯 싶던 효진이 다시 나서며 말했다.
이왕에 칼을 빼든 몸, 사내 체면을 구기며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내친 김에 밀고 나가려는 듯이 보였다.
"검시가 끝나기 전엔 한 발짝도 나설 수가 없습니 다."
"왜 이래요?" 하경의 옥타브가 높아졌다.
"마땅히 진상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이대로 묻어버릴 순 없어요."
효진의 옥타브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건 비소중독이에요, 비소중독!"
효진은 이제 외치듯이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그가 겨냥한 순간처럼 보였다.
그의 눈엔 핏발이 서렸다. 아니 살기마저 서렸다.
사람들은 대뜸 술렁거렸다. 그들의 눈에도 점차 핏 발이 서리기 시작했다.
강민은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실신 일보 전의 기분을 맛보았다.
어떻게해서 효진은 진상에 다가설 수가 있었을까? 그가 비소 중독에 관해 알 리가 없다.
누군가가, 우리들 공모자를 가운데서, 그에게 뒤뜸이라도 한 걸까?
"형님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 알아요."
"언제는 창백하지 않았던가요?"
"어쨌거나 오늘 장례는 못 치릅니다."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는 안 돼요, 멋대로는요."
"누가 뭐래도 우린 우리의 뜻을 관철합니다."
"당신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아요. 장례는 예정대로 치를 거예요."
두 사람의 칼날 같은 입씨름은 옆에서 보기에도 서슬 푸르렀다.
누구든지 상처를 입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안 됩니다!" 효진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잘생긴 얼굴도 노기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안 된다구요? 그 무슨...... 저리 비켜요!"
"왜 이래요?"
"누구든지 내 말을 거역하면 이 집에서 내 쫓겠어요. 물론 회사에서도 내칠 거구요."
하경의 말투도 거칠었고 기세도 등등했다. 누구도 감히 나서려하지 않았다.
하경은 그녀의 말을 거역하면 국물도 없다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칼자루는 하경이 쥐고 있는 듯 싶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법적으로 처리하세요. 경찰에 정식으로 고발하던가......
난 말리지 않아요. 하지만......"
"......"
"그 결과에 대해선 누구든지 책임을 져야 해요. 모조리 무고죄로 고발할 테니까요."
"......"
"암튼 법원의 압수수색영장이라도 갖고 오기 전엔 시신을 내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되어 발인예식을 밟고 시신은 평창동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이 순간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숙부인 엄노훈씨였다.
"이 집엔 어른도 없나? 이 무슨 난린가. 어서 장례를 치르지않고 뭣들 해!"
엄노훈 씨는 이 순간에서조차 하경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았다.
"자넨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단단히 작심했나 보군."
그는 효진도 나무랬고, 장례를 치르는 일손도 질타했다.
효진으로서도 일가의 장로격인 인물이 나서서 재단하는데야 주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듯만 싶은 엄영진 총격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하경도 효진도 지금 그를 의식하고 포문을 열고 있는데 그는 어느편을 들기에도 난감했다.
자칫 잘못하면 누구보다도 스타일을 구기는 사람은 그 자신이다.
그는 현역 경찰간부로서가 아니라 일가의 조문객으로만 있고 싶었다.
황정빈 박사는 다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그가 말없는 가운데 효진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눈치채고 있는 일이었다.
"효진아, 이럼 안 돼!" 채영은 효진을 달래기에 바빴다.
조동표 전무도 고개를 돌린 채 이 모든 광경에 둔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곽만길 씨와 윤세화가 날렵하게 움직였다.
설지숙이라는 차가운 느낌의 여자가 이끄는 세 명의 장례팀의 움직임도 부산했고 또한 민첩했다.
시신은 마침내 장의차로 옮겨졌다.
관에 매달리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는 효진을 강민이 밀어붙였다.
강민의 얼굴에 번지는 조롱의 빛도 효진은 분명히 읽었다.
"볼썽 사납게 왜 이러시오."
효진의 얼굴에는 '부루터스, 너 마저도'하는 표정이 완연히 떠올라 있었다.
강민은 그런 효진을 무시했다.
얼마 후, 아니 금세 엄대진의 관을 실은 장의차는 평창동 집을 떠났다.
벽제 화장터까지는 눈이 오고 있으니 넉넉잡고 한 시간이면 도착할 것이다.
화장을 끝내는 데에는 두 시 간이면 족할 것이고, 모두 세 시간이면 잿가루가 되어
산에 뿌려지거나 강에 띄워보내질 수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세 시간 뒷면 승부가 결판 나는 것이다. 세 시간뒤면......
"강민씨, 거긴 집에 남아 있어요."
하경은 장의차에 오르며 강민에게 말했다.
그녀의 눈엔 '잘 살피셔야 해요'하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강민은 말없는 가운데 고개만을 끄덕거려 보였다. 집엔 엄총경과 황박사도 남았다.
엄총경은 그를 의식하고 그의 앞에서 펼쳐진 하경과 효진의 냉전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 왔다.
필경은 효진의 편에 서야 했다. 그도 혹시나 하는 의혹을 지녔었다.
그 의혹의 심지에 효진은 불을 당신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의혹은 불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황박사가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지 아니한가.
아무튼 잘못 처신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효진은 뭔가 부수어버리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가하면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그 자신을 다스리는 것 같은 모습을 짓고 있었다.
강민은 그런 효진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효진은 기회를 상실한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의 그의 편이었다. 적어도 세 시간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비록 엄대진의 시신이 불태워진다 해도 한 조각의 뼈만 남게 되면 아니 한 줌의 재만
얻게 되어도 비소 중독은 가려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느 독약과는 달리.
얼마 후 엄대진의 시신이 화장터에 당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곧 7번 화구(火口)에서 화장하게 될 거라는 소식도 전해왔다.
"그건, 안 돼!"
효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로서는 이제 후퇴할래야 후퇴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아 있는 것이다.
효진이 수화기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경찰에 정식으로 고발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찰이지요? 강력계를 부탁합니다."
효진은 상상외로 침착했고 말투도 차분했다.
"나, 엄효진이라는 사람입니다."
"......"
"살인사건입니다!"
"......"
"네에, 정식으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
"피살자는 저의 형님이시고 살인자는 저의 형수올시
다."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