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만난 그녀> 1. 이번 여행지는 인도로 정했다. 작년 내내 힘들었기에 생각해 둔 곳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이면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어떤 깨달음을 얻어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인도라는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었고,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에 대한 설레임도 느끼고 싶었다. 2. 혼자 떠나는 여행은 도전이었다. 출발 날짜가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나서 ‘여행을 포기할까’ 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저질러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반반이었다. 4. 홍콩을 경우하여 늦은 밤 비행기로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니 안개인지 매연인지 모르는 흐릿한 밤공기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개들이 나를 맞이했다. 5. 여행멤버는 부부팀이 셋, 모자팀, 언니 동생팀, 나머지 혼자 온 여자 3명이었다. 혼자 온 여자 3명 중에 내가 나이로는 중간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은 조용히 여행을 즐기는 스타일이고 어린 여자는 진한 대구 사투리를 쓰며 활동적이었다. 긴 머리의 작은 체구의 그녀와 자연스레 친하게 지내고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편안함과 일회성의 만남이 주는 가벼움 때문인지 그 여자는 뜬금없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7. 아버지가 북한에서 혼자 월남하신 분이고, 부모의 나이 차이가 많았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한겨울 밤에 냇가에서 빨래하다 손이 얼어 고생했던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그런 환경에서 살았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8. 두 살 위인 오빠와 남녀 차별이 심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정폭력이 난무했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연좌제에 묶여 경찰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한문학과를 지원한 그녀는 대만으로 혼자 유학을 갔다. 그런데 한중수교 사태가 일어나면서 대만의 보복조치로 인해 한국사람에게는 음식을 팔지 않았다. 굶다시피 하다가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겨우 짐을 싸서 돌아왔다고 한다. 9. 빚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사를 했다. 경양식 장사에서 보신탕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돈도 많이 벌었지만 무거운 그릇을 많이 들어서 관절에 무리가 왔다. 그녀는 하지정맥류 수술을 하고 다리에 압박붕대를 하고 있었다. 10. 서른이 넘은 나이에 또 다른 도전을 해서 중국과 무역을 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심양에서 3년간의 해외 근무까지 한 그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감금되다시피 하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돌보고 여동생의 결혼 생활까지 챙겨주며 바쁘게 사느라 다니지 못했던 여행을 이제야 자주 다닌다고 했다. 11. 그녀는 비혼주의자였다. 자라 온 환경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이 없단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20대를 억척같이 일만 하고 산 그녀로서는 적령기를 놓친 탓도 있으리라. 그녀보다 20살이나 어린 남자 친구와 자유롭게 연애하면서 산단다. 12.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었겠지만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담금질 된 그녀의 삶은 겉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마음은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을 살갑게 챙기고 앞서서 도와주었다. 13. 며칠에 걸쳐 그녀가 살아온 힘겨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그녀의 고단한 인생이 나를 짓눌렀고 그녀가 안쓰러웠다. 힘들었던 마음을 풀려고 떠난 여행에서 힘들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온통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에너지로 쓰였다. 그녀 앞에서 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14.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서로 경쟁하듯이 힘들게 살아온 역사를 읊어대었다. 내가 제일 힘들게 살았다고, 너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슬픔은 수치를 내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와 다른 색깔일 뿐, 다 나름대로 힘들고 슬프기 때문이다. 같은 고통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 받아들이는 크기가 달라진다. 15. 누군가의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위로가 된다. 여행이 끝나 갈 때쯤 조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속을 보여준 그녀의 불편했을 마음과 지친 내 마음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16. 우리들은 ‘자기가 쓰는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자기만의 드라마를 상영 중이리라. 어느 사람이나 구구절절한 사연이 왜 없을까. 나의 이야기는 모두 특별한 것이다. 17. 여행에서 보았던 그 아름답다던 타지마할도 갠지즈강의 시체를 태우던 연기도 오래된 건축물도, 그녀만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여행은 결국 사람을 만나고 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18.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나’ 라는 화두를 얻었다. 고단했던 일도 있었고 슬프고 절망적이었던 이야기도 있지만 마무리는 유쾌하고 재미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졌다. 인도에서 만난 그녀도 이제는 즐겁고 행복한 주인공이 되어 나머지 드라마를 완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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