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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자존심 혹은 우울한 고집―홍희표 시인
이은봉
지난 2012년 9월 24일(월) 오후였다. 얼떨결에 대전의 홍희표 시인이 작고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전 9시 20분, 그동안 앓아왔던 식도암이 전이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정신이 아뜩했다. 홍희표 선생님과 함께 살아온 날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것은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정년을 한지 채 2년이 안 되었을 때이다.
정년을 즈음해 선생님은 목원대학교 교정에 자신의 시비를 세우고 조촐한 행사를 연 적이 있다. 그날 거기서 나는 선생님의 시세계와 관련해 조그만 강의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하고 씩씩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다니!
내게 홍희표 선생님은 단순히 알고 지내는 선배시인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선생님과 함께 해온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오후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나는 광주발 대전행 고속버스를 탔다. 다음 날은 야간강의가 있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빈소는 충남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이었다.
급한 마음으로 빈소에 들어서니 선생님의 외동딸인 홍나리 양이 조문을 받았다. 홍나리 양은 오래 전부터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은 다른 일로 바쁜 듯 자리에 있지 않았다. 조문객이 많지 않아 빈소의 분위기가 조금 허전하고 쓸쓸했다. 문득 선생님이 자신의 딸 홍나리 양을 두고 노래한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라일락 꽃잎을 헤치듯 얼음판 위를 달리듯 네가 아빠하고 부르면 나리, 너의 고운 목청의 떨림에 개울물에 잠긴 흰 조약돌처럼 찡하니 마음이 시럽단다. 이 지구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순수한 언어, 나무들의 숨소리 같은 그 언어들을 나리, 네가 일깨워 준다. 숙취 끝에 떨리는 안개, 손톱에 끼이는 때, 한낮을 울리는 백묵에, 긴 하품, 의자에 삐걱이는 바지통, 마른 수양버들, 담뱃재, 하염없이 잠든 뮤즈, 그런 틈바구니에서 나는 종종 네 목청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꽃술 위에 피어나는 햇빛으로 나의 일상은 별이 돌고 뜨거운 것으로 내안(內岸)에 가득 찬다.
―「지구 끝에서」 전문
이 시의 주인공인 홍나리 양이 아버지의 빈소에서 조문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화자인 선생님은 이 시에서 아빠하고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지구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순수한 언어, 나무들의 숨소리 같은 그 언어”라고 말한다. 딸에 대한 사랑이 깊이 묻어 있는 구절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사모님과 인사를 마치고 상청(喪廳)을 둘러보니 내 또래의 조문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은 낯설었다. 조재훈, 김수남, 나태주, 이장희, 변재열 등 선배 시인들 틈에 끼어 후딱 국밥 한 그릇을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또 직장이 있는 광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고속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한 시인이 죽음이 너무도 허망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2학기 초였는데, 작문시간이었다. 시작종이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선생님 한 분이 수업에 들어왔다. 홍희표 선생님……. 시인이기도 한 선생님은 자신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막 졸업하고 모교에 부임한 선배라고 소개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한자로 作文(작문)이라고 크게 썼다. 그러고는 이 단어의 훈과 음인 글월 문(文), 지을 작(作)을 큰 소리로 따라 읽으라고 했다. 너무 초보적인 공부라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재미있게 큰소리로 따라 읽었다.
선생님은 말이 조금 으집었는데, 때로는 더듬기까지 했다. 말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수업은 늘 진지했다.
이 무렵 홍희표 선생님은 박용래 시인과 친하게 지냈다. 박용래 시인이 「산문(山門)에서」라는 시를 지어주기도 해 홍희표 선생님은 늘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당시에는 대전을 대표하는 시인이 박용래였다. 가늘고도 여린 서정과 차가우면서도 따듯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박용래 시인은 지금까지도 1960년대와 1970년의 대전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는 나도 박용래 시인과 같이 오류동에 살아 두 분이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그러니까 1970년 봄의 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학교차원에서 시와 산문을 공모했다. 내가 다니던 대전의 보문고등학교는 갑사에서 세운 불교종립학교였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학교에서 작은 문학축제를 갖기로 한 듯했다. 홍희표 선생님이 이 행사를 주관했는데, 나도 시 2편을 응모를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 일로 하여 나는 차하인지 장려인지 하는 작은 상을 받았다. 상장은 없었지만 부상은 있었는데, 노트, 볼펜 등이었다.
잘 알다시피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인 1981년 3월부터 나는 혜천여중고에서 국어교사로 일했다. 혜천여중고는 Y셔츠, 점퍼 등을 만드는 동방산업의 부설학교였다. 제품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어 나 스스로 찾아간 곳이었다.
3월 초에 부임을 했는데, 4월 하순이 되자 학생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노동의 강도가 심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파업이었다. 고3의 담임이었고, 젊은 선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이 일의 수습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른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병익 이사장은 그러한 나를 배후주동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시에 나는 노동법에 대해, 파업 등 노동쟁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들 일에 대해서는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을 때였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역사와 시대가 내게 부여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매사에 능동적으로 임했다. 우선은 파업으로 회사에서 해직된 10여명의 학생노동자들을 다른 산업체 부설학교로 전학시키는 일이 급했다. 원미섬유, 충남방적 등 다른 산업체 중고교로 이들 10여명의 학생노동자들을 전학시키기 위해 나는 동서남북으로 뛰었다. 그럴 수 있는 데는 무엇보다 대전시 교육청의 도움이 컸다.
1981년 한 해가 이렇게 동동거리며 지나갔다. 고3 담임을 맡아 대학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친 1982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병익 이사장의 뜻이라며 혜천여중고의 신임 황교장이 나를 부르더니 사표를 내라고 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던 전임 남두희 교장선생님은 이미 권고 사직된 지 오래였다. 나는 사표를 내더라도 일단 이병익 이사장을 만나 직접 뜻을 확인하고 내겠다고 버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앞길이 막막했다. 은사인 박요순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사표를 내고 모교인 한남대학의 교양국어 강의를 조금 더 맡으라고 했다. 지난 학기부터 시작한 대학의 교양국어 강의였다.
혜천여중고 학생노동자들의 파업사건은 대전시 교육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의 배후주동자로 알려져 나는 대전 시내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러니 공부를 하며 대학에서 강의나 더 구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목원대학 국어교육과에 있는 홍희표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미 내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대전의 바닥이 워낙 좁다 보니 벌써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듯싶었다.
선생님은 내게 목원대학에서도 교양국어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애를 쓴 덕분에 1984년 3월부터는 목원대학에서도 교양국어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목원대학에서 교양국어 강의를 막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연구실에 들렀더니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강사료 받으면 학과 전임교수님들에게 조그맣게 인사를 해. 그게, 그게 관례야.”
“……예?”
내가 선생님의 말뜻을 잘 못 알아들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번만 인사를 갖춰! 중앙시장에 가면 치약, 칫솔, 비누 등을 모아 만든 세트 같은 것이 있어. 비싸지 않아. 그런 것 몇 개 사.”
“아, 예, 알았어요.”
“이은봉 선생한테까지 내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다니…….”
선생님의 표정이 아주 어색했다. 내가 워낙 세상물정에 어두우니 이렇게라도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대로 하기는 했지만 어색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홍희표 선생님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시나 논문을 쓰면 선생님께 보여드린 뒤 이런저런 코멘트를 받기도 했다. 선생님이 논문이나 평론을 쓸 때는 자료 등을 준비해드린 적도 있었다.
1984년 가을에는 선생님의 시집 『살풀이』(문학과지성사)가 상재되기도 했는데, 나는 「선적 인식 혹은 새로움의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집에 대한 서평을 쓰기도 했다. 이런저런 도움을 드려도 홍희표 선생님이 내게 무슨 특별한 혜택을 주지는 않았다. 조병화 선생의 회갑이 가깝던 무렵이었다. 조병화 선생의 시집 한 권을 대상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고 해 선생님께 이런저런 도움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이 선생! 오늘은 조금 이르지만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앞장을 섰고, 나는 뒤를 따랐다.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중교다리 근처의 어느 일식집이었다.
“대구탕이나 알탕 중에서 골라! 나는 대구탕을 하려고 해.”
대구탕도 알탕도 내게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와보는 일식집이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알탕을 시켰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알탕의 맛이 기가 막혔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짓이지만 그날은 감탄을 하며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는 선생님이나 나나 모두 석사였다. 따라서 어느 대학교에서든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은 석사과정에 이어 박사과정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하고 싶어 했다.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일 듯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나는 동국대학교에 가 함께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물론 우리 모두 영어실력이 신통치 않아 박사과정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1984년을 전후해 나는 친구들과 함께 종합문예무크지 『삶의문학』을 편집하는 일에 앞장섰다. 1978년부터 발행해오던 『창과벽』의 제호를 바꿔 출간한 『삶의문학』(1983)은 당시에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나와 친구들은 이 『삶의문학』을 통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된 『창작과비평』을 대신하고 싶어했다. 『삶의문학』은 그만큼 알찬 진보성을 갖고 있었다.
『삶의문학』 6집(1984)에는 홍희표 선생님도 시를 실었다. 주목을 많이 받았던 만큼 『삶의문학』에 시를 싣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시 원고를 주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무크지로 나오던 『창작과비평』이나 『실천문학』에 글을 싣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찰을 받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희표 선생은 1987년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적 변용을 담은 시집 『금빛은빛』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하기까지 했다. 더불어 나는 이 시집의 말미에 해설을 붙이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이후 선생님은 대전충남 민족문학인협의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무슨 실천적인 행동에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절약을 하며 살다 보니 이 모임에 물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의 어느 초봄이었다. 날씨가 아직 추웠다. 선생님이 내게 서울에 가니 역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실천문학에 들러 이문구 선생을 만나야 하는데, 날더러 안내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문구 선생이 실천문학사의 사장으로 있던 무렵이었다. 실천문학사의 사무실은 서대문의 경기대 근처, 인창고등학교 근처에 있었다. 서울역에서 만난 선생님과 나는 택시를 타고 서대문의 실천문학사로 향했다. 사장실에서 이문구 선생님을 만나 무슨 얘기인가를 나눈 뒤 홍희표 선생님은 이내 밖으로 나왔다. 나도 따라 밖으로 나왔는데, 느닷없이 선생님은 근처의 구멍가게에 들러 담배 세 보루와 맥주 세 병을 샀다,
“담배와 맥주를 어쩌려고요?”
“음, 따라 와! 근처에서 찾아뵐 분이 있어? 이은봉 선생도 그분과 인사를 해 둬!”
선생님은 이내 낡고 허름한 한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 여기 말이야. 현대시학사야. 전봉건 선생이 계시는…….”
선생님이 먼저 삐꺽대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는데, 문을 열자마자 담배냄새가 화락 밀려왔다. 너무 캄캄해 실내가 잘 보이지 않는데도 홍희표 선생님이 말했다.
“전봉건 선생님! 대전의 홍희표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봉건 선생님이 낡은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반백의 전봉건 선생은 꼬마전등의 불빛 속에서 담배꽁초를 입에 문 채 무슨 원고뭉치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이 마치 동굴 속 같았다. 책상 위에 담배와 맥주를 올려놓으며 홍희표 선생님은 전봉건 선생님과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이 선생도 인사를 해! 이 사람, 시를 쓰는 이은봉입니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아, 그래요. 여기 앉아요.”
“아 예, 선생님! 저는 이은봉입니다.”
홍희표 선생님과 나는 나무로 만든 동그란 의자, 곧 만화방의자에 덜썩 주저앉았다. 조금쯤 시간이 지나자 눈이 밝아지고 책으로 가득한 사무실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대시학』의 발행인이자 주간인 전봉건 시인을 뵈었다. 모두 홍희표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1985년 7월 중순을 막 넘긴 어느 날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느닷없이 『민중교육』 창간호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민중교육』은 『오월시』 동인 몇몇, 『삶의문학』 동인 몇몇, 〈Y교사협의회〉 회원 몇몇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한 교육전문무크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전두환 군사정권의 이 짓이 학원안정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쇼라고 했다. 저들의 이번 발광으로 서울과 대전의 수많은 교사들이 한꺼번에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대전의 『삶의문학』 쪽에서만 해도 중고교의 교사로 있던 유도혁, 전인순, 전무용, 강병철, 황재학, 최교진, 송대헌, 조재도, 민병순(교장) 등 10여명이 해직되었다.
이들은 처음 강경경찰서로 출두를 했다. 사건이 커지자 전인순, 전무용, 강병철, 황재학 등 후배 시인들은 나를 배후주동자로 지목하기로 입을 모았다. 배후주동자로 지목했으니 잘 알아 잘 대처하라고 전인순한테서 내게 따로 전화가 오기도 했다.
졸지에 나는 ‘『민중교육』 사건’의 『삶의문학』 쪽 배후주동자가 되었다. 『민중교육』 지를 발간하는데 내가 일정하게 관여한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내가 『민중교육』 지의 제작까지 직접 맡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을 맡았던 것은 송기원 주간 등의 실천문학사의 실무진이었다.
그때도 나는 서울에서 살았다. 장가를 든 뒤 아내를 따라 정릉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전의 목원대학, 침례교신학대학 등에서 시간강의를 하기는 했다. 따라서 저들로서는 내게 불이익을 주기가 별로 마땅치 않았다.
저들은 내가 몇 년 전 동방산업 부설학교인 혜천여중고에서 강제로 해직된 전직교사라는 것도, 지금은 목원대학, 침례교신학대학 등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여름방학 중이기는 했지만 더는 내가 이들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여름은 땀을 흘리며 지나갔고, 어느덧 8월 하순이 되었다. 홍희표 선생님한테서 한 번 들르라는 연락이 왔다.
때를 맞춰 연구실로 찾아갔더니 선생님이 한숨부터 쉬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선생한테는 강의를 주지 말라는 거야. 어떻게 하지?”
“……누가 강의를 주지 말라는 해요?”
“보안사 쪽에 아는 사람 없어? 안기부 쪽에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해놨어, 이 선생을. 마침 안기부의 책임자가 동국대학교 출신이거든. 내가 조금 알아.”
“……강의를 꼭 해야 하나요?”
“왜? 정치하려고? 이 선생은 정치와 안 어울려. 공부를 하며 시를 써야지.
“……………….”
“아마도 송하섭 선생님은 보안사 쪽에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학원담당 책임자는 최 계장이야. 계급도 높지 않아. 중사일 거야. 일단은 송하섭 선생을 한 번 찾아가 봐. 가서 사정을 말해 봐.”
대전간호대학에 계시는 송하섭 선생님은 홍희표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모교의 선배이기도 하고 은사이기도 했다. 나중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총장을 역임한 뒤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를 했다.
댁으로 찾아뵙자 송하섭 선생님은 한참 동안 명함철을 뒤적이더니 창학사의 신종갑 사장님을 소개해주었다. 학회지와 동인지를 만들며 자주 뵈어 창학사의 신종갑 사장님은 진작부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삶의문학』의 전신인 『창과벽』을 창학사에서 제작한 적이 있는데, 신종갑 사장님은 그때도 여러 차례 내 시에 대해 호의를 보이고는 했다. 댁으로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하자 신종갑 사장은 곧바로 보안사의 최 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은봉 선생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 내가 잘 알아요. 시를 잘 쓰는 젊은 사람이에요. 내가 책임질 테니 강의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줘요.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최 계장과 무슨 말인가를 한참 주고받다가 신종갑 사장님이 전화를 끓고 내게 말했다.
“이 선생! 다 잘 되었어. 학교에 가면 학장이 뭐 한 장 쓰라고 할 거야. 눈 딱 감고 써. 별것 아니야.”
이튿날 홍희표 선생님을 연구실로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자 너털웃음을 웃으며 좋아했다. 조금쯤 뒤 학장실로 불려갔는데, 이른바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당시에 목원대학은 종합대학교이 아니었다. 학장실까지 따라온 홍희표 선생님이 말했다.
“……『민중교육』 지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써. 대충 김진경 시인과의 관계를……, 무조건 잘 모른다고 써.”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하나. 난감하기만 했다. 김진경 시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문단행사 때 우연히 그를 만났다고 말 그대로 대충 몇 마디 쓰는 것으로 경위서를 채웠다.
이런 통과과정을 거친 뒤 목원대학에서 교양국어 강의를 계속하게 되자 홍희표 선생님이 나보다 더 좋아했다. 목원대학교에서는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침례교 신학대학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홍희표 선생님이 그때 나서지 않았으면 내 앞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리라. 어쩌면 대전 운동권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을는지도 모른. 그렇게 되었으면 별을 몇 개 단 뒤 야당의 지구당위원장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홍희표 선생님이야말로 내가 시의 길로, 대학교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분이었다.
1986년 4월에는 내 첫 시집 『좋은 세상』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일독을 한 후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이은봉이 진짜 충청도의 시인이여. 시집에 포용하는 마음, 따뜻하고 부드러운 충청도의 마음이 잘 담겨 있잖어.”
선생님은 늘 자신을 두고 대전 토박이 시인, 한밭 토박이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말년에는 한밭풍물시라는 부제를 단 시집인 『이스렝이 버드나무에서 춤추며』, 『늙은 호박 속에는 뭐시 들어 있을까유우』를 출간하기도 했다. 다음은 선생님이 자신을 두고 직접 한밭 토박이라고 노래한 시의 예이다.
보문산은 보문산은
한밭 토박이인 나에게
푸른 조선솔이 되라고 하네
욕망이라는 엘리베이터 타고
고속상승하는
나에게 어화둥둥
찰떡을 찔거나
콩떡을 찔거나
금강물은 금강물은
한밭토박이인 나에게
곰나루의 바위나 되라고 하나
허명이라는 엘리베이터 타고
고속하강하는
나에게 어화둥둥
인절미를 찔까나
수수떡을 찔거나
―「한밭 토박이」 전문
자기 희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에서 홍희표 선생님은 저 자신을 한밭 토박이라고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다. 늘 이런 생각을 해오던 선생님이 나를 두고 진짜 충청도의 시인이라니? 다소 황송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선생님이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건방졌던 시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충청도의 시인으로서, 한밭의 시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어려서부터 폭력을 싫어해 같은 대전에 살면서도 모 시인과는 평생을 두고 불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천박한 짓, 질 떨어지는 짓을 하는 시인과는 구태여 인간관계를 계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홍희표 선생님은 세속의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끝내 자존심을 포기하거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 홍희표 선생님이다. 따라서 저승으로 돌아가기 전 술친구로서는 소설가 김수남 선생님 등이 고작이었고, 말 친구로서는 시인 조재훈 선생님 등이 고작이었다.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는 평소에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던 나태주 시인과도 얼마간 자별하게 지냈다. 성님이라고 부르던 조재훈 선생님한테는 더욱 각별하게 따랐다. 그러다 보니 1주기 추모모임도 대강은 이들을 중심으로 치러졌다.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해 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이었다. 깜짝 놀라 병원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더니 곧 일어날 것이라며 그런 뒤에나 만나자고 했다. 말씀이 워낙 담담해 나는 정말 곧바로 투병생활을 끝내고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빠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이승을 떠났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생전에 한 번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벌써 2주기가 지났거니와,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하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발표된 선생님의 시에 관한 글들을 모아 내 이름으로 『홍희표 시인연구』(푸른사상, 2011)을 간행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이 책을 통해 선생님의 시세계 전반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책은 선생님의 강한 의지가 없었으면 출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푸른사상』 201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