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에 구름같이 일어난 전각유파와 풍격의 다양성
중국의 전각은 명나라 중엽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약 500년간 독특하고 예술적인 유파가 나오면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명청시대 대표적인 전각유파는 문팽(文彭)을 대표로하는 오문파(吳門派), 하진(何震)을 대표로하는 휘파(徽派), 정경(丁敬)을 대표로하는 절파(浙派), 등석여(鄧石如)를 대표로하는 등파(鄧派), 이 외에도 양주파(揚州派), 운간파(雲間派), 여고파(如皐派) 등이 있다.
문팽은 오문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육서(六書)와 문자학에 정통했고, 전각은 육서를 알아야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전각풍은 주문의 경우 가장자리를 가늘게 하고 소전의 결구를 원용하여 둥글고 굳세면서 수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그림1) 백문은 한인을 바탕으로 격조있는 굵직한 느낌을 준다. 특히 쌍도법으로 운필하면서 행서로 변관(邊款)을 하여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쌍벽을 이루었던 하진과 더불어 ‘문하(文何)’라고 불렀다. 그는 어떻게 전통을 수용하여 변혁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유방(李流芳), 진만언(陳萬言), 귀창세(歸昌世) 등이 그의 전각풍을 이어받았다.
하진은 전각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문팽과 더불어 오랫동안 남경에 있었는데 육서를 함께 토론하면서 심미안을 기르는 토대가 되었다. 주량공(周亮工), 이유방(李流芳) 등이 “하진은 근대의 명수이자 중국제일의 전각가이다”라고 평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그림2) 정원(程原)은 그가 죽자 사방에서 그가 남긴 전각 수천방을 수집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천방 정도를 정선하여 자신의 아들인 정박(程樸)에게 모각하게 하여 천계(天啓) 6년(162년)《인초당인선(忍草堂印選)》을 펴내었다. 그의 전각풍격은 ‘황산파(黃山派)’라고 불렀으나 후에는 ‘휘파(徽派)’라고 일컬어졌고, 오충(吳充) 정원, 정박 부자가 그의 맥을 이어 유파를 형성하였다.
명말에 두각을 나타낸 작가는 왕관(汪關)과 주간(朱簡)이다. 왕관은 한인에 정통하였는데 칼을 밀어내는 충도법(衝刀法)을 사용하여 소박한 면모를 보여주며 장법은 빈틈이 없다.(그림3) 사람들은 그를 누동파(婁東派)라고 부르는데 심세화(沈世和), 임고(林皐)와 더불어 양주파(揚州派)라고 한다. 주관은 칼로 끊어서 새기는 절도법(切刀法)을 애용하면서 문자의 모양보다 운치를 중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개성이 넘치면서 호방한 편이다.(그림4) 주관은 전각이론연구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만력 39년(1611년)에《印品》을 썼다.
완관과 주간 보다 뒷사람인 정수(程邃)는 여러 전각가의 장점을 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었는데 주문에서는 대전을 백문에서는 한인을 즐겨 사용하여 육중한 필의를 살리고 있다.(그림5) 문팽과 하진의 풍을 벗어난 그의 독창적인 전각풍을 추숭하는 사람들을 환파(皖派)라고 불렀다.
청나라 초의 유명한 전각가는 호정언(胡正言), 정수(程邃), 심세화(沈世和)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명말의 유민들이다. 호정언은 《十竹齋書畵譜印》, 《胡氏篆草》 등의 저서를 남기는 저술가로도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주요 전각가로는 임고(林皐)(그림6), 오선성(吳先聲)(그림7) 등이 있다. 임고는 수려한 장법에 힘있는 도법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의 유파는 주로 절강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임파(林派)’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그의 각풍은 형식과 기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청나라 중엽은 전각예술이 발전한 전성기이다. 이 시기에는 전각가로 명성을 높힌 사람이 구름처럼 많아졌다. 고봉한(高鳳翰)(그림8), 왕사신(汪士愼), 정경(丁敬), 등석여(鄧石如), 파위조(巴慰祖) 등이 그들이다. 정경과 등석여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경은 주간의 절도법을 이용하였는데 한인을 바탕으로 예서의 필법과 각 체를 수용하여 소박하고 웅건한 풍격으로 절파(浙派)의 일가를 이루었다.(그림9) 등석여는 정수의 충도법을 채택하여 창경하면서 소박한 풍격을 창출하였다.(그림10) 그의 인풍은 등파(鄧派) 혹은 휘파(徽派)라고 불리운다. 정경과 등석여는 고전을 바탕으로 신풍을 보인 전각가로 명청전각예술의 발전에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청나라 말기의 초기전각예술에서는 절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가운데 진홍수(陳鴻壽)(그림11), 조지침(趙之琛)(그림12)은 도법이 가장 뛰어난 전각가였다. 그들의 각풍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형태만 본받을 뿐 정신은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등석여의 제자인 오희재(吳熙載)가 등장하면서 볼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한인과 등석여의 각풍 및 서풍을 익힌 뒤 다채롭고 천연스러운 맛을 보여주고 있다.(그림13) 그이 말기 작품은 당시의 교태롭고 부드러움을 추구하던 각풍에서 벗어나 빼어난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청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전각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송(錢松)(그림14)은 항주출신으로 서령팔가의 한 사람이다. 서령팔가 가운데 전송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파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오희재의 영향을 받았으며 두터우면서 소박한 의취를 보여주고 있다.
조지겸(趙之謙)은 처음에 절파를 배웠으나 차츰 고새, 진한인, 환파를 골고루 익혔다. 그는 등석여의 비각전문을 인장에 도입하는가 하면 진한인의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다.(그림15) 도법도 절도법과 쌍도법 및 충도법을 혼용하여 다양함을 보여주었고, 북위서를 변관에 채용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아울러 서화와 전각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다재다능하였다.
오창석(吳昌碩)은 석고문으로 서예에 있어 일가를 이루었다. 전각에서도 등석여와 조지겸의 각법을 이어받고 여기에 석고문, 옥인, 조판, 세백문 등등을 부가하여 독창적인 서체를 만들었다. 또한 회화적인 감각을 불어놓어 일신시키는가 하면 봉니기법으로 인면을 뭉게서 독창적인 풍격을 창출하였다.(그림16) 간결하면서 고박한 그의 인풍은 우리나라에도 크게 유행하였다.
황사릉(黃士陵)은 초기에 오희재를 공부하였고, 다시 금문, 도문의 서법을 각법에 도입하여 독자적인 각풍을 보여준다.(그림17) 전각작품의 가장자리 모서리를 일부러 두드리는 것을 반대한 그는 수식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평실하면서도 험경한 의취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명청시대는 전각가가 많이 나왔고 이에 따라 다양한 유파도 생겨났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전각사의 흐름상 세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명대 만력시기(1573~1620)로 문팽, 하진, 왕관, 주간, 정수 등이 대표적인 전각가들이다. 둘째는 청대 건륭(1736~1795)과 가경(1796~1820)시기로 정경과 등석여가 대표적인 전각가이다. 세 번째는 만청시기로 전송, 오희재, 조지겸, 오창석, 황사릉 등이 대표적인 전각가라고 할 수 있다.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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