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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朝鮮 世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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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
지위 | |
조선 국왕 | |
재위 | 1418년 9월 9일-1450년 4월 8일 |
전임자 | 태종 |
후임자 | 문종 |
섭정 | 상왕 태종 이방원 (1418년~1422년) 왕세자 이향 (1442년~1450년) |
재상 | 의정부(議政府) |
이름 | |
휘 | 이도(李祹) |
별호 | 초명은 막동(莫同), 자는 원정(元正)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능호 | 영릉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97년 5월 15일(1397-05-15)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준수방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
사망일 | 1450년 4월 8일 (52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
왕조 | 조선 |
가문 | 전주 이씨 |
부친 | 태종 |
모친 | 원경왕후 |
배우자 | 소헌왕후 |
자녀 | 총 22명 중 적자녀 10명: 정소공주 (1412년 출생), 문문종종 (1414년 출생), 정의공주 (1415년 출생), 세세조조 (1417년 출생), 안평대군 (1418년 출생), 임영대군 (1419년 출생), 광평대군 (1425년 출생), 금성대군 (1426년 출생), 평원대군 (1427년 출생), 영응대군 (1434년 출생)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대승불교) |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세종은 묘호이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 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며,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2][3]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4]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한반도10월 9일은 한글날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 민씨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효빈 김씨 소생의 경녕군
1400년(정종 2) 2월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왕의 즉위 후 1408년이래(李來)와 변계량태종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誠寧大君)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5]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5]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6]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7]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2]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
세종은 신분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1422년
[5]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5]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郡)을, 김종서와 이징옥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이종무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계해약조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 1433)과 함길도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2]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음운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 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 암클, 언문 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언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8]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와 하위지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김종서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9]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9]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9]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9]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9]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소갈증 등을 앓던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10]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10]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10]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태종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금은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부가 빠져나갔으며 세종 즉위 후 1430년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중종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8]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李純之)와 김담[3]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1431년과 1446년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3]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3]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1435년
어려서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눠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1423년(세종 5)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온천대식가1446년 왕비 소헌왕후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소갈증 (당뇨병) 합병증과 중풍등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8] 죽기 전 급하게 우찬성 김종서를 고명대신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 근처인 구룡산
1450년 (문종 1) 4월 21일 (음력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여 묘호6월 30일 (음력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 를 높이고 종(宗)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中國)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恩寵)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 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372) 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 을 누리고,
순희(純禧) 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인 1469년(예종 1) 경기도 여주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
조선 세종대왕은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11] 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이 그의 묘호를 따 세종대학교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
1972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상석,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1974년 5월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10] 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
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거들어 두었고, 매우 정력가이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
세종이 시각장애인
아버지 태종
조선 세종의 조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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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397 ~ 1450 / 재위: 1418 ~ 1450) - 31년 6개월
연도 | 방송사 | 제목 |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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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KBS | 세종대왕 | 남일우 |
1980년 | KBS | 파천무 | 남성우 |
1983년~1984년 | MBC | 뿌리깊은 나무 | 한인수 |
1994년 | KBS | 한명회 | 김원배 |
1996년~1998년 | KBS | 용의 눈물 | 안재모 |
1998년~2000년 | KBS | 왕과 비 | 송재호 |
2007년 | KBS | 사육신 | 김준식 |
2008년 | KBS | 대왕 세종 | 김상경, 이현우, 김도현 |
2011년 | SBS | 뿌리깊은 나무 | 한석규, 송중기, 강산 |
2011년~2012년 | JTBC | 인수대비 | 전무송 |
2015년~2016년 | MBC | 퐁당퐁당 Love | 윤두준 |
2016년 | KBS | 장영실 | 김상경 |
2016년 | SBS | 육룡이 나르샤 | 남다름 |
2016년 | 채널 A |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 김경응 |
연도 | 제목 | 배우 |
---|---|---|
1962년 | 주유천하 | 김운하 |
1964년 | 세종대왕 | 최남현 |
1978년 | 세종대왕 | 신성일 |
2008년 | 신기전 | 안성기 |
2012년 | 나는 왕이로소이다 | 주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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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조선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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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 ~ 1450년 | 후 임 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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