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1392~1398)가 조선을 건국한 후 몇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피비린내가 온통 궁을 덮었고,뒤를 이은 정종(1398~1400)은 겨우 2년여 통치하다
태종(1400~1418)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그때 양녕 대군의 나이가 열한 살이었다.
양녕은 자신이 좋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냈고 동생인 충녕 대군의
머리가 비상함을 알고 망나니 짓을 서슴없이 감행하여 동생 충녕이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했다.양녕의 파격적인 난봉 버라이티 쇼는 그를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나기에 충분했다.정말 대단한 연기력의 소유자 양녕이다.
지금은 서로 그 자리 차지할려고 지랄들인데...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敵!
세종(1418~1450)이 왕위에 오르자 많은 대신들은 양녕을 올해의 요주의 인물로
선정했다.양녕이 방배동의 유래를 남기고 떠나기전까지 해마다 요주의 인물은
양녕이었다.왜냐하면 살아 있는 왕의 兄은 왕의 남자보다도 분란을 일으킬
여지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세종의 충직한 대신들은 양녕을 경계할 것을
수시로 건의했지만 세종은 단호했다.
"그대들은 내 형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오.모르기 때문에 그렇듯 말할 수
있는 것이오."
당시 양녕은 한강 이남에서만 활동했다.강을 건너면 도성이고 그곳에 나타나면
어떤 말들이 생겨날지를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강남族으로 활동했다.
아무래도 도성 가까이 있는 것은 세종에게나 스스로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제 떠나간다.내 동생 충녕아,부디 요순에 버금가는 훌륭한 군왕이
되어라."
양녕은 동생이 있는 북악 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양녕은 이내 한강을 등지고 南으로 내려왔다.
방배(方背)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방배동은 양녕이 이곳에서 등을 지고
떠난 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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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 숭고한뜻이 있였군요 잘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