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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나비평화기행④>밀라이박물관에서 평화의 길을 보다
2015년은 베트남전쟁 종전 40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베트남전쟁이 왜 발발했고,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대해 천착해왔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있을 뿐, 가해자는 진실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전쟁이 왜'라는 물음을 넘어서 한국사회는 "왜 민간인을 학살했는가",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해 늦었지만 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어야 합니다.
<통일뉴스>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나비기금>이 마련한 '베트남 나비평화기행'(2~9일)에 함께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당사자가 사죄하고 해결에 나서기를 바라며 평화를 찾는 동행기를 마련했습니다. |
▲ 베트남 꽝아이성 밀라이박물관. 박물관은 1968년 3월 16일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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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 명의 남녀와 아이들의 시신이 쌓여있었다. 거기서 세 살 남짓의 사내아이를 발견했는데 그 아이는 피와 진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내내 울었다."
미군이 자행한 밀라이 학살사건 당시 민간인을 죽이는 광경에 충격받은 허그 톰슨 준위는 현장에서 아이를 구출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이 벌인 밀라이 학살사건의 잔학함을 고발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2015 나비기금과 함께하는 나비평화기행' 참가자 20여 명이 6일 베트남 꽝아이성 밀라이학살 증적박물관을 찾았다.
▲ 밀라이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명단. 총 503명으로 아이, 노인, 여자가 대부분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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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16일. 미군 육군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찰리중대는 선미마을로 진입했다. 그리고 양민 503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돌아가 1계급씩 특진했다. 미군은 선미마을에서 자행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1969년까지 폭격을 가해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밀라이 학살사건의 전모다. 학살이 벌어진 지역은 선미(山美)지역으로 미군이 발음하기에 어려워 작전상 편리를 위해 '밀라이 1, 2, 3' 등으로 불린 지역 중 하나이다. 그래서 선미학살, 밀라이학살이라고 불린다.
▲ 박물관 내에 있는 밀라이 학살 당시 사진. 종군기자 로버트 해벌이 찍은 사진으로 밀라이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 로버트 해벌 기자가 찍은 밀라이 학살사건 당시 상황. 왼쪽 사진 속 여성들은 미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으며 사진에 찍힌 뒤 모두 사살됐다. 오른쪽 사진은 미군이 선미마을에 들어오는 순간 촬영된 장면으로 형이 동생을 총알을 피해 끌어안는 모습으로 이 아이들은 여기서 사망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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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묻힐 줄 알았던 밀라이 학살사건은 종군사진기자였던 로버트 해벌의 사진에 그대로 찍혔다. 전투에 나서는 줄 알았던 기자는 민간인을 향한 강간, 살해를 보고 '학살'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필름을 만년필에 숨겨 미국으로 돌아갔고 세상에 알렸다.
평소와 같이 전투현장을 향해 헬기를 몰던 허그 톰슨 준위. 동료가 어느 하사관이 구덩이 속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가 사람들을 학살할 때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총을 쏘았던 것을 떠올렸다. 민간인들이 병사들에게 쫓겨 방공호로 달아가는 것을 봤다.
헬기를 착륙시켜 방공호 속 민간인을 구출했다. 그리고 살상을 막기 위해 헬기를 이동시키라고 교신을 했다. 시신더미 속에서 살아 숨쉬는 3살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내내 울었다. 자신의 아들이 떠올랐다.
밀라이 학살사건은 미국 등지에 베트남전쟁 저항운동을 불러왔다. 그리고 학살의 진실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실은 피해자의 증언에서도 나왔지만 종군기자와 참전 군인에게서도 확인됐다. 그리고 미국정부를 움직였다.
진실을 밝히는 용기는 양심에서 나온다. 해벌 기자가 사진을 공개하지 않고 버렸더라면, 톰슨 준위가 민간인을 구출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구출했더라도 침묵했다면 밀라이 학살사건은 피해자만의 기억이 됐을 것이다.
물론, 미국정부가 처음부터 밀라이 학살사건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1998년 초까지 미군은 톰슨 준위의 행적을 '미군'이 아니라 "베트콩으로부터 밀라이 양민을 보호한 것"으로 기록해왔다. 또한, 조직적인 학살의 주범으로 캘리 소위만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3년 뒤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미국은 학살의 진실을 요구하는 물음에 끝까지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1998년 3월 미 국방부는 학살사건 30년 만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학살의 주범이 자신이었다고 기록으로 남겼다.
톰슨 준위는 명예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노근리 사건 미국 측 실무조사단으로도 활동한 미 육군감찰감 마이클 애커먼 소장은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라며 "톰슨 준위 일행은 모든 군인들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기준을 세웠다"고 강조했다.
이를 계기로 미군은 현재까지도 모든 사관학교 장교 후보생들에게 '밀라이 학살사건'을 필수내용으로 가르친다. 또한, 톰슨 준위의 인터뷰가 포함된 비디오테이프를 보도록 하고 있다.
▲ 밀라이 학살사건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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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국정부는 꽝아이성 40여 개 현마다 초현대식 병원을 세웠고, 읍마다 학교를 건립하고 있으며, 녹지사업도 지원하고 있다. 학살피해자 504명의 유가족들은 개인배상을 받았다. 미국 참전 군인들은 이곳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있으며, 해마다 열리는 위령제에 참석해 참회의 기도를 올린다.
미국의 맹방 한국의 모습. 1999년 9월 베트남 중부 5개성 한국군 학살 피해자 르포가 국내 언론에 등장했다. 10월에는 퐁니.퐁넛 사건 피해자의 증언이 처음 보도됐다. 이에 2000년 6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해당 언론사에 난입했다.
2015년 4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 행사장 주변에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3백여 명의 참전군인들이 둘러싸고 "우리들이 양민 학살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고 고함을 내질렀다. "어느 나라 전쟁이든 소수 양민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왔다.
▲ 밀라이 학살사건의 진실을 증언한 허그 톰슨 준위. 베트남은 이 군인을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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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의 맹방 미국. 밀라이학살 30년, 톰슨 준위는 적군이었음에도 영웅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들은 "너무나 고맙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내 가족을 몰살한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유일하게 주범으로 지목된 캘리 소위는 학살 40년만인 2009년 8월, "그날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목숨을 잃은 베트남인과 그 가족, 사건에 연루된 미군과 그 가족 모두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미안하다"라고 뉘우쳤다.
▲ 박물관에는 밀라이 학살사건의 책임자로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 대통령, 미군과 함께 한국군의 사진을 걸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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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이박물관에는 아이젠하워, 존슨 미 대통령과 응오딘지엠,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의 사진이 걸렸다. 그 옆에 베트남 참전 미군, 한국군의 사진이 나란히 붙여있다. 민간인 학살의 주범들이라는 의미다.
밀라이 학살의 최고책임자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는 가해의 진실 앞에 뉘우침의 실천을 보이는 미국정부에 피해자들은 해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에게는 여전히 증오가 서려있다.
한국과 미국. 동맹관계인 두 나라는 가해의 진실을 묻는 질문에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선진국 미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은 진실의 물음에 색깔을 칠하고 있다. 진실을 위한 용기를 내지 못하는 한국은 여전히 용렬한 졸장부의 모습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