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인본주의'(humanism)는 중세 십자군 운동 이후, 기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 시대'의 자유로운 인간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시대적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르네상스 운동의 기초가 되지요. 한편 우리 시대에 기독교에서 '인본주의'라 할 때는 역사상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보다 인간의 경험에 의한 신앙생활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저에게 질문한 인본주의에 관한 질문은 후자에 관한 것이라 짐작됩니다. 형제의 관심은 '인본주의가 하나님 중심과 반대되는 개념인지,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보완적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것인 듯 합니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형제가 서신에서 이미 고백한 것처럼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람이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는 말과 더불어 인본주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면 여간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에서는 모든 인본주의란 악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본주의'라는 말과 '인간적'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적'이라 할 때는 인간이 인격이 없는 다른 동물과 같지 않은 존재로서의 인간미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신앙'이라 하면 인간의 경험과 판단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그것에 의해 가치판단을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오로지 성경말씀에 기초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개혁의 기치로 삼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만을 신학과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성경의 해석을 동반하지 않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은 결코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찬양하는 일은 성경의 해석을 통해서만 그 진위를 밝혀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교회는 이미 전반적으로 인본주의화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화로움이 자신의 종교적 기분이나 느낌과 일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열정이 하나님의 영광과 일치할 것이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열심히 기도하거나 찬송을 부르면서 자기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이 마땅히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의한 주관적 사고일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종교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분 여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열성적인 종교심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것은 그러한 이성과 경험을 신앙의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2)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 뒤에 따르는 말씀을 보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문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 꼭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 손을 씻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위 신앙이 좋다는 다수의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만든 그 전통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나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전통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어기는 것을 보며 분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조상의 전통을 지키는데 왜 당신들은 그 전통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그런 전통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되게 하고 있다"(3,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의 인본적 전통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가 질문한 인본주의에 관한 내용도 이와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기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그 기준을 제시합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할지 아닐지 생각해 보면 모르느냐?'는 이성적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성경을 통해 밝혀 말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 자체로써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해석이 없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되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