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徐廷柱) ․유치환(柳致環) 편/장부일
■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시,「자화상」은 시인 서정주를 그린 자화상은 자화상이되, 생활인(일상인)으로서의 서정주가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미당(시인으로 즐겨 사용하던 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의 구절과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점과 관련하여, 이 시에서 ‘종’이라고 했던 아버지의 신분이 실제로는 종이 아니라 마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생활인으로서의 서정주가 아닌 시인이란 존재로서의 미당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로부터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다시 서정주에게로 이어진 피의 혈통은, 피 그 자체보다,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과 탐색, 격정의 이어짐이 더 중요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런 태생과 관련된 이어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랐고, 무엇에 의해 키워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시의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라는 고백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앞서 말한 아버지, 어머니, 외할어버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키운 ‘바람’이며 또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이다. 이마는 신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수직적 존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절정에 시의 이슬이 맺혀 있다. 그리고 이 시에는 언제나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다. ‘피’는 육체적인 것, 유전적인 것, 자기 존재 이전에 이미 운명적으로 주워진 것으로, ‘이슬’처럼 맑고 순수할 수만은 없는 시인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인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는 서정주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자의식인데, 스스로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그대로 시인이란 존재에 대한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시가 시인으로서의 서정주의 자화상인 동시에 시인인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지점은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떠오르게 한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에서 시인의 모습을 보았다. 보들레르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순간이 아니라 선원들에게 잡혀 갑판에 묶여 있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에서 시인의 존재를 읽어내었듯이, 서정주는 힘들지만 끈질기게 달려온 병든 수캐의 모습에서 시인의 천형을 겹쳐놓은 것은 아닐까.
「자화상」의 시인,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고보·고창고보 등에서 수학하였으나 졸업은 하지 못하였고, 방랑생활 중 불문(佛門)에도 발을 들여 놓았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壁)」이 당선되면서 등단하는 한편,『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을 지냈으며,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1949), 예술원 문학분과위원장(1954),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 등을 역임하였다.
서정주는 한국의 보들레르라 칭해진 대로 악마주의적·관능주의적인 소재와 버림받은 자로서의 심각한 소외의식으로부터 작품세계를 출발하여 1930년대 중·후반 문단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광복기를 거치면서 그의 시는 초기의 갈등과 열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인생파로서의 모습『귀촉도(歸蜀途)』(1948), 신화적인 영원의 세계『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을 거쳐 한국적 설화와 향수의 탐구『질마재 신화』(1975)로 이어졌다.
서정주의 시세계는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는‘ 영원성’으로 요약되며,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는 총체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동양적 전통사상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서정주의 시세계의 변화양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던 것은 ‘영원성’이라는 테마였는데, 그는 영원성에 대한 추구와 함께 언어의 미학적 사용에도 주목하였다. 1975년에 간행된 시집『질마재 신화』에는 신화적 세계에 대한 묘사와 함께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가 추구하는 영원의 세계가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시작품에는 현실로서의 역사공간이 없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나,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인간관의 제시와 함께, 한국적 토속미를 독자적으로 제시하는 귀중한 시사적 위치를 지닌다고 평가받고 있다.
■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隣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億年非情의 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에서와 같이 유치환 시세계에서 돌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소재이다. 산이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이며 완성적인 인간상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돌은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시인이 가지는 정신, 마음의 상태와 지향을 보여주는 형상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자주 돌은 시인의 육체나 내면으로 묘사된다.
유치환의 시세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추구되는 것은 「소리개」와 「바위」, 「단장 16」에서 나오듯 “동물성의 땅의 집념을 떠나서 / 모든 애념과 인연의 번쇄함을 떠난” 소리개와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바위, 그리고 ‘마침내 뉘우침이 없는’ 강물이다. 「소리개」에서는 “동물성의 땅의 집념을 떠나고”, “애념과 인연의 번쇄을 떠나고”, “사람이 다스리는 세계를 떠나고” 등 ‘떠나고’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바위」에서 반복되는 ‘않고’에 대응된다. 억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은 영원을 은유하는데, 이 시간 동안 시인은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또한, 「강물」에서는 이러한 부정어법이 ‘가서 쉼 없는’, ‘돌아오지 없는’, ‘뉘우침이 없는’으로 변주된다. 이 세 시에 나타난 ‘떠나고’와 ‘않고’, ‘없는’의 부정 어법은 부정적인 현시이지만 오히려 더 강력하게 영혼을 팽창시킨다.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은 이렇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보여지게 되는데, 그것은 표상의 영역 자체 속에서는 표상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역설이다. 집념이나 애련, 희노는 유치환에게는 거부되어야하는 감정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비록 선량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이고 노예적인 감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뉘우침 역시 거부되는 감정인데, 시인에게 뉘우침은 반성이기보다는 오히려 회한이나 후회에 가까운 것이며,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고, 신념 없이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치환에게 바람직한 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정념과 경향이 의지로서 부정된 후에 남는 것들이다.
유치환의 호는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요야마〔豊山〕중학, 동래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 등에서 수학하였고, 1931년 문단에 등단하였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익문단 활동에 몸을 담았으며, 이후 충무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67년 사망하였다. 그는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로 불리면서 1930년대 시단에 나오게 된다. ‘생명파’란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적이며 감각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인간의 정신적·생명적 요소를 중시하는 경향을 추구한 작가들을 말하는데, 서정주가 중심이 된『시인부락』의 동인들이 이러한 방향을 추구하였다.
유치환의 시는 현세적 세계를 초월적인 세계와 대비시키면서 인간은 그 현세적 삶이 일회성 및 허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세 속에서 끊임없이 초월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시는 언제나 사변적·명상적 어조를 띠면서 초월적 세계에 실존적으로 대결해 가는 비장한 자세를 보여 주면서 나름의 시적 개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그가 등단하여 활동하게 된 시기가 일제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어 가던 1930년대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일정한 사상적 의미 역시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시가 지닌 주제의식이 현실을 뛰어넘는 그 나름의 미래관을 열어 보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일제강점기 말까지 초기의‘ 비장한 허무의 포즈’가 지속되고 있었던 점은, 유치환 자신의 사상적·미학적 출발점이 현실과 충분히 교섭하지 못한 하나의 반복적인 시적 포즈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