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고원을 넘어 두 차례에 걸쳐 서역을 정벌했던 고구려 출신의 명장 고선지(高仙芝). 동아시아의 해상을 장악하고 국제무역으로 거부를 쌓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이들과 동시대를 살면서 세계제국인 당(唐)의 심장부 산동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왕국을 세운 뒤 4대에 걸쳐 55년 동안 당조정과 대립했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이정기는 당의 혼란기에 안록산 반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입신해 당의 최대 강번(强藩)으로 성장한 끝에 직접 당과 대결했다. 그러다 그의 아들인 납(納)은 스스로를 제왕(齊王)으로 칭하면서 당과 당당히 맞서, 한때 덕종(德宗)이 장안을 떠나 섬서성 건현·남정현 등지로 피난하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한민족의 활동 범주를 한 발자국 넓힐 수 있는 역사적 쾌거였지만, 이정기 일가의 활약상은 우리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사대주의 역사서술에 의해 잊혀진 영웅이 되어버린 셈이다. 현대 역사가들마저 그들의 치적에 대해서는 필(筆)을 아껴, 그들에게 당이라는 세계제국에 대항하다 토벌된 번진(藩鎭)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사에서 그들에 대한 언급은 고작 일제 통치 때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역사』에서 나타날 뿐이며 오히려 중국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안록산의 亂 토벌로 入身
이정기(본명 懷玉)는 영주(營州) 땅에서 고구려가 패망(668년)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태어났다. 그의 선대(先代)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패망 당시 당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유민들 중 일부였거나 이전부터 영주에 정착해온 고구려 인으로 보인다. 당의 최대 혼란기로 꼽히는 「안록산의 난」 때 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외모에 관한 기사는 그의 신체가 건장하고 담대한 용력을 가졌다고만 쓰여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신당서』의 기사내용. 안록산 난 당시 반군 토벌에 동원되었던 위글(군의 대장)이 자신의 전공과 완력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정기가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하자 군사들이 이정기를 추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정기는 당시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의 비장(裨將)으로 자신과 내외종 사이었던 후희일(侯希逸)과 평로군에서 함께 복무했다. 후희일은 이정기의 고종사촌으로 그보다는 손위였다. 이러한 후희일이 난이 한창일 때,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와 공모해 안록산의 친장(親將)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徐歸道)를 죽이고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옹립한다. 그런 왕현지는 곧 병사하고(758년), 당조정이 그 아들에게 절도사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추대했다.
후희일은 이전부터 반군 합류를 종용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안록산의 사신(使臣)를 참수해버리는 등 철저히 반 안록산 노선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평로군은 안록산 군대로부터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奚族)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761년 부장(副將) 이정기와 함께 후희일은 근왕군(勤王軍) 2만명을 데리고 발해만의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등주(登州)로 상륙한다. 평로군은 인근 청주(靑州)에서 관군과 합류했는데, 당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후희일에게 치주(淄州)·청주(靑州) 등 6개주를 관장케 하고,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의 관작을 내린다. 이때부터 「평로」의 군호가 치청(淄靑)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東아시아 외교창구와 무역요지를 점령
그러나 말기의 후희일은 정사에 태만하고, 불사(佛寺) 건축 등 큰 건설공사를 무리하게 일으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즈음 치청군 내부에서 이정기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후희일은 이정기를 해임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은 765년 후희일을 쫓아내고, 이정기를 수령으로 추대했다. 당조정도 할 수 없이 회옥(懷玉)에게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내리고, 「평로치청 절도 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라는 관직을 주었다. 이어 조정은 이정기에게 요양군왕(饒陽郡王)에 봉하는 등 무마책을 쓴다. 하지만 이정기는 점차 산동 일대를 치청에 복속시켜 10개주를 확보했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당시 당조정과 대립한 최대 번진으로 꼽힌 하북 3진(河北三鎭)의 위박(魏博)·성덕(成德) ·노룡(盧龍) 등의 군사력이 각각 5만∼9만명이었고, 그들의 세력권이 7∼9주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이정기의 군사력과 통치범위는 단연 괄목할 만했다. 그는 『자치통감』의 기록대로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할」 강번으로 성장했다.
이정기는 어느 정도 세력기반이 다져지자 관리임명권·조세 수취권 등 행정과 경제·군사· 외교권 등을 독점하면서 반당(反唐) 노선을 걷게 된다. 이웃 번진 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777년에 그는 이영요(李靈曜)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의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서주(徐州) 등 내륙 5개주를 추가 점령, 명실공히 반당 최대 강번으로 자리잡았다. 이어 내륙 경략에 더욱 치중하기 위해 청주에 있던 치소(治所)를 운주로 옮긴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면서 이정기는 청주를 아들 납(納)에게 맡겼다. 서주로 말하자면 초한(楚漢) 전쟁시기 초패왕 항우의 도성인 팽성(彭城)이며, 예로부터 중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육운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로 꼽혔던 곳이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장안은 경제적 대공황에 빠져들었다. 다급해진 덕종(780∼804년)은 780년 3월 하북 3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변주에 축성하고, 이정기 제압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해 변주와 가까운 조주(曹州) 제음(濟陰)에서 병을 징발하여 훈련케 하고, 사촌형인 이유(李洧)에게 서주자사(徐州刺史)를 맡긴 뒤 증원군대를 파견한다(이유는 이정기가 죽은 뒤 이납 대에 와서 조정이 보낸 백거이의 회유에 빠져 당조정에 투항한다). 이 와중에 이정기 군대는 당군을 연파하면서 서주와 가까운 용교(埇橋)·와구(渦口)마저 점령해 대운하를 통한 남쪽지방으로부터의 물산운송을 완전히 두절시킨다.
韓半島보다 더 넓은 영토를 통치
치청으로 서는 당시가 최고 융성기였다. 『신당서』에는 치청 지역의 정치가 엄정하고 법령이 일치하고 부세(賦稅)가 가벼우며 형벌이 엄중했다고 적혀 있다. 이정기가 통치했던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강소성의 일부까지 포괄, 현재의 한반도보다 넓었다. 인구도 패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보다 많았다. 고구려 멸망 당시 고구려의 호구가 69만이었는데, 치청의 호구는 84만(5백40만명)이었으니 치청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정기는 781년 8월 등창으로 갑자기 병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과 함께 치청과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山南東道)의 양숭의(梁崇義)마저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망, 주변상황도 불리하게 전개됐다. 아들 이납은 아버지의 죽음을 숨긴 채 내륙경략에 박차를 가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그의 당숙으로 서주자사에 있던 이유와 덕주의 이사진(李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卿) 등이 작당해 종실을 배반하고 당에 투항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운하통운은 1년만에 재개되고 장안도 평상 분위기를 되찾게 됐다. 그러나 이납은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이듬해인 782년 회서(淮西)의 이희열(李希烈)과 남북 양동작전을 전개해 변주를 재탈환한다. 운하통운은 1년 만에 다시 불통됐다. 다급해진 덕종은 멀리 영남(지금의 廣州 일대)에까지 총 동원령을 내리고, 선무(宣武)절도사 유현좌 (劉玄佐)를 앞세워 이납을 치게 한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도 무리한 군사징발과 논공행상에 대한 무장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급기야 783년 장안 서북방에서 치청토벌을 위해 관동(關東)으로 출병하던 경원군(涇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만다. 치청으로서는 위기일발의 순간, 뜻하지 않게 호재를 만난 격이었다. 덕종은 어쩔 수 없이 봉천(奉天)·양주(梁州) 등지로 피란했고, 반당행위를 해온 번진들에게 오히려 관직을 내리면서 무마책을 구사했다.
이납은 이 무렵 전국시대의 제(齊)의 국호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백관(百官)을 두었다. 그러나 말기의 이납은 당조정과 화해하고 수성(守成)에 전력하게 된다. 그런 이납도 792년 서른넷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이정기로부터 통치기반을 물려받은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덕종은 이납이 죽자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사(朝事)를 폐했다. 그 뒤로 이납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정사를 이었다. 이사고는 망명자를 후하게 대해주고, 범죄자까지 끌어들여 치청의 세력을 강화해 갔다. 특히 이사고는 외임자(外任者)를 쓸 때 이들의 배반을 경계하여 반드시 처자를 치소(治所)에 머물게 하는 수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사고 대에는 당조정과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이뤘으나 번진 간의 영토쟁탈전이 오히려 가열되었다. 치청 소재 염산지(鹽産地)로 유명한 체주와 이납 대로부터 군사요충지로 활용돼 온 덕주(德州)를 사이에 두고, 치청과 성덕(成德)간의 국지전이 계속되었다. 이사고가 806년에 죽자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師道)가 뒤를 이었다. 마침 같은 시기 장안에서는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헌종(憲宗)이 즉위했다.
李氏왕국의 몰락과 장보고 해상왕국의 등장
차례로 군소 반당 번진들을 토벌한 헌종은 815년 12월부터 강회의 번진들과 투항해온 번진들을 앞세워 치청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에 앞선 814년 헌종이 회서(淮西)를 치자 이사도는 이듬해 강회(江淮)의 재부(財賦)가 쌓여 있던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불살라버리고 교량들을 파괴하는 등 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하음창(河陰倉)은 당조정이 회서와 치청 토벌을 위해 1백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해뒀던 곳으로 저장된 쌀만 2백만석에 달하였다. 이어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河南府)에 10여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군인과 스파이를 상주시켰던 이사도는 장안까지 자객을 보내 당시 번진토벌론을 주창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고 배도(裵度)에게 중상을 입혀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후방교란 전술은 한때 조정을 긴장시켜 치청에 대한 토벌반대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헌종은 타협론을 단호히 배격했다. 당조정의 치청 토벌작전에는 당시 강회의 모든 친당 번진들과 투항해온 번진들이 속속 참가해 치청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사도도 포대매(蒲大妹)·상칠랑(裳七娘), 두 측근 비녀의 진언을 받아들여 당과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당시 조정의 토벌군 선봉은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군중소장으로 속해 있던 무령군(武寧軍) 이었다. 816년 치청의 평음(平陰)까지 무령군의 선봉장 왕지흥(王智興)에게 점령 당하고 만다. 819년에는 선무(宣武)·위박(魏博)·의성(義成)·무령군 등의 협공을 받던 이사도는 같은 해 주력군인 위박의 전홍정(田弘正)에게 운주와 동아(東阿)에서 잇따라 패하고, 군사 8만명을 잃게 된다. 한때 치청과 동맹관계였던 군벌들까지도 당연합군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였던 유오(劉悟)는 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운주성에서 이사도를 죽이고 당에 투항해버린다. 당헌종 13년(819) 2월. 당의 심장부에서 55년을 유지해왔던 이씨 일가의 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정기 일가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 불씨까지 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교민과 고구려·백제유민들이 또다시 일어나 당시 세계무역 판도를 양분, 황해무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군사력보다는 비즈니스로 재도전한 것이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의 주역들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