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5일 토요일 광복절
둘러본 곳 - 광성보, 고려궁지, 성공회 성당,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 초지진
강화 고인돌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지석묘(支石墓) - 지탱할支, 돌石, 무덤墓
우리나라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마치 탁자 모양을 하고 있는 이 고인돌 처럼 생겨서
'탁자식' 고인돌 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제일 잘 생긴 고인돌 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고인돌 무게는 50톤
50톤이 되는 고인돌 무덤을 어떻게 세웠을까?
박상용 선생님 계산에 따르면 500명 × 5 = 2500명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인력을 동원해 커다란 무덤을 만들고...
돌덩이 하나로 지배자의 힘을 나타내고, 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칙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 오래~전 청동기 시대부터~
강화군 관광 안내도를 가리키시면서 우리가 둘러볼 곳을
안내해 주십니다.
광성보 안내지도
박물관 5진 7보 53돈대 설명글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성(城)이었다.
그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대대(大隊) 병력이 주둔하도록 설치한 - 鎭(진)
그보다 더 작은 규모로 중대(中隊) 병력이 주둔하도록 설치한 - 堡(보)
그 보다 더 작은 규모로 소대(小隊) 병력이 주둔하도록 설치한 - 墩臺(돈대)
돈대는 진과 보의 관할 하에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의 크기
돈→보→진→성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숙종은 국방강화를 위하여 5진 7보 53돈대 설치를 완료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용진진, 던진진, 초지진 3개가 있고
7개의 보 중에서 광성보 하나만 남아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광성보를 보러 먼 길을 왔는데
광성보에 소속되어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손돌목돈대와 강화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쑥
내밀어 있는 용두돈대(龍頭墩臺)의 아름다운 모습을 못 보게
되어 아쉬웠다.
언제 또 와서 보게될끄나
용두돈대여~!
손돌목돈대여~!
광성보 정문 안해루에서 ~ 를 날리며 ~
광성보(廣城堡) 정문 안해루(安海樓)
늦은 한걸음 단체사진에 빠진 지각생 가족
여기 선생님 딸들은 중3, 중1
요즘 친구들 사진 안찍는다고 난리인데...
중3 친구는 왜 나는 안찍어주냐고 투정부리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중 하나이다.
대포, 소포, 불랑기포 쓰임새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병자호란때 봉림대군(효종)이 형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복수를 위한 시설 중의 하나로 광성보를 요새화 해야겠다.
하면서 설치했다고 한다.
'효종은 청나라에 갔다 왔다를 떠올리자!'라고 말씀하셨다.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신미순의총 가는 길목의 소나무
얽히고 설킨 소나무 뿌리들이 강화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가 가야할 길을 막고 공사중이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안내판에서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이름없는
51명 병사들의 무덤이다.
신미양요 때 활약한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무덤은 충북에 안장했다고 한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쌍충비각을 설명하시면서
오늘 일행중 최연소 6세의 쌍둥이 유치원생
누가 세상에 먼저 나온 형일까? 알아맞추기 재치있는 질문~
형이 손을 들고 있다. 시원한 웃음으로 더위를 식히는 순간이었다.
오늘 참가한 최연소 유치원생 쌍둥이 형제
신미순의총
이름없는 병사 51명의 신원을 알수없어 7기의 무덤에
합장하여 안장했다고 한다.
몽골이, 청나라군이, 미국 해군이, 프랑스군이, 저기 보이는 바닷길로
찾아와 우리의 강화를 노렸을 것이다.
역사의 섬 강. 화. 도~
2년전 광복절에도 강화도를 찾아 이 식당에서 제육볶음 백반을 먹었다.
반찬도 여러가지, 간이 잘맞아 맛도좋고, 친절한 서비스
죽여주는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용흥궁 전설의 마녀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
용흥궁(龍興宮)
조선 철종의 옛 집터
순조, 헌종 후사없이 돌아가시자
왕을 이을만한 쓸만한 왕족을 물색한다.
누가? 당시 조선을 주물럭, 주물럭 했던 세도정치가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일파가~
허수아비 왕으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조선 25대 철종~!
할아버지 은언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오면서
부모없이 고아로 외롭게 살아가던 농사꾼 강화도령 원범이(철종)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아버지는 전계대원군이다.
사도세자(정조)의 증손자 이다.
사도세자의 묘자리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당이라고 한다.
묘자리를 잘 써서 왕을 잇는 후손들이 많았을것 이라고...
일명 '강화도령 원범'이 나무하러 간 사이
어가로 임금이된 원범을 모시러왔다
어느 날 들이닥친 궁궐의 무리들 자신을 잡으러 온줄만 알고
도망치다 붙잡혀 그 날로 나라의 지존 왕이 되었다 한다.
강화에서 사랑을 꿈꾸던 봉이(일명 양순)와 이별해야 했고
글을 전혀 배우지 않아 일자무식했던 원범
사랑하는 그녀를 잊고, 나라의 왕이라지만 내 마음대로 하나도
제대로 할 수없었던 인고(忍苦)의 시간들을 어찌 보냈을까?
철종은 부인이 8명이었고 자식들은 죽고 딸만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 딸이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터가 왕이 나왔던 터다~ 용흥궁
천주성전
우리나라에 교회가 처음 들어올 때 한국식 모양으로 지었던 건물.
지붕 꼭대기에 십자가가 보인다.
고려 궁터(고려시대 궁궐이 있었던 터) 내부
고려궁터 안에 3개의 안내판 글이 있다.
고려궁지 연혁, 고려시대, 조선시대
시원한 그늘을 찾아 설명해주신다.
고려 중기 이후 당시 최강대국 몽골침입
몽골은 기마민족으로서 속전속결로 승리할수 있었다.
고려 침입 당시 고려 수도 개경(개성)을 버리고 도읍을 옮겨
강화도에 임시 수도를 세워 39년 동안 몽골과 대치 하면서
지냈던 곳.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 강화도를 얘기해주셨다.
명위헌(明威軒)
여기는 명위헌
강화도 유적을 곳곳에서 공사중
찾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줬다
큰 마음 먹고 가는 길인데...
명위헌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당시 사또가 있었던 곳.
오늘 날 군청역할
인조 때 강화 유슈부로 승격되었다. 요즘 광역시 정도이다.
도읍지 한양을 보호하기 위한 유수부를 4군데 두었는데
(동쪽 - 광주, 서쪽 - 이곳 강화, 남쪽 - 화성, 북쪽 - 개성)
한양에서 뱃길로 통하는 강화도는 한양을 보호하는 도시로
유수(광역시장)가 근무했던 곳이다.
외규장각
조선 정조 임금이 글과 그림(궁궐 의궤)을 소중히 여겨
좋은 책들이 없어질것을 염려하여 안전한 곳에 보관하자 해서
밖에 규장각을 만들었다. 그래서 외규장각이라 한다.
프랑스군이 일으켰던 병인양요로 인해 안전하게 보관되었던 유물이
약탈당했거나 불에 탄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강화동종이 있는 곳
병인양요때 강화동종을 가져가려다 못가져 가고
갯벌에 버리고 간 것을 발견해 도로 가져왔다고 한다.
진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있고
아곳엔 복제품을 달아 놓았다.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吏房廳)
강화 고인돌
고인돌에 관해 설명해 주십시다.
북방식, 남방식 설명 부분이었을까?
최고로 적극적인 여학생 필사적으로 적는다.
바닥에 엎드리면서까지 적는 기록정신 짱~!
신미양요때 어재연 장군의 帥(수) 자기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성단
백두산과 딱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곳
전국체전이 열릴때 이곳제단에서 성화 봉송을 한다고 한다.
세계 거석(巨石) 문화에 대해서 찾아보고 정리하기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沙蓮花紋瓢形注子)
고려시대 무신 최항의 무덤에서 도굴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귀한 고려 청자는 죽은 사람을
무덤에 묻을때 주둥이라든가 위 꼭지를 살짝 깨서
묻었다고 한다.
(무덤을 파고 도굴해 갈것 을 염려해서...)
무인정권시기 힘있는 왕이나 벼슬아치들은
깨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묻었단다.
힘이 너무 쎄서 감히 누가 훔쳐갈 생각을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라고 한다.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광성보 전투 모형
이때 싸움에서 우리 군인은 250 명이 전사하고
미국 해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위쪽 벽면에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 깃발이 있었는데
우리는 놓치고 못보고 말았다.
강화자연사 박물관에서
"아이들 진짜 고래뼈 맞아요~?"
초지진(草芝鎭)
조선 말기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일본 군함 운요호사건(1875)을
막아내던 격전지였다.
공사로 인해 못가본 곳이 아쉬워 박상용선생님께서는
일부러 일정에 없는 초지진에 들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초지진에 있는 포탄 맞은 소나무
초지진 대포
조선 시대 후기 당시에 사용되었던 이 대포는 진품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떠난 강화도 여행
왠지 전날부터 유독 설레기 시작했다.
차량도 막히지않고 가고오는 길에 빠른 속도로 이동해서 좋았다.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를 거닐지 못한것이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
잘 있거라 강화도여~~
첫댓글 오메~ 난 왜 저리 뒷모습만. ㅋㅋ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강화도. ㅋ
나중에 우리가 못가본곳도 한번 더 가서 봐야할것 같아요. 고생~많으셨어요.
담번엔 앞모습만 나오도록 해드려야겠어요.~
먼길 여행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사진 한장 한장이 다 작품이네요. . 몇곳이 보수공사중이라 너무 아쉬웠어요. 훗날기약.
안가봤던 초지진도 가보고 포탄맞은 초지진 소나무가 인상적이었고,
모르고 보면 감흥이 덜 하겠지만 조선말기 사용했다는 대포도 알고보니 감동이
짠~ 했어요.~ 즐거웠습니다.~
먼 길이라 갈까 말까 몇번을 망설였는데... 다녀온 후기 보니 마치 다녀온 듯 합니다. 감사드려요...
우리나라님~ 담번엔 먼 길일지라도 갈까말까 망설이지말고 손잡고 다녀오시게요.
다녀오면 후회없는 여행이 되잖아요~
후기 읽어주셔셔 저도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