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0. 주일예배 설교
누가복음 4장 16-19절
하나님의 꿈, 사람 사는 세상
■ 하나님은 무엇을 꿈꾸며 이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세상?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깜박 죽는 세상?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꿈꾸지 않으셨습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꿈꾸신 세상은 꿈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좋은 것이죠. 그러나 꿈을 꾼다는 것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재의 부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면 꿈을 꾸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러운 표현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는 꿈꾸지 않으셨습니다.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신 하나님이 완벽한 작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내주신 것도 완벽한 작업이셨습니다. 결코 실수도 실패도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꿈꾸기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남용하는 바람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과는 정반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꿈을 꾸셨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하나님의 꿈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예수의 평범한 일상 중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시는 일상입니다. “늘 하시던 대로”.
그런데 그날 “늘 하시던 대로” 읽으신 성서의 본문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 이하의 내용이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8-19)
예사롭지 않은 이 말씀은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 주신 이 말씀이 예수께 왔을 때는 예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어떤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명확하게 소개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종의 ‘예수 사명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명서에 하나님의 꿈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망가뜨린 세상,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꿈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꿈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존재론적 교리 때문에 이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임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사시기 위해 만들어진 곳을 착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사시려고 만드신 곳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심혈을 기울이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가진 이 세상을 보고 아파하신 것입니다. 그 아픔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을 회복시키시는데 전력을 다하신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의 자리로 들어가 볼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18-19절에 소개 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일반적으로 소외 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천시/천대 받는 사람들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혐오와 배제와 차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살펴봅시다. 가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면서부터 가난한 흙수저들입니다. 상황에 의해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포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권력에 의해 모든 삶을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눈 멈, 원치 않는 질병에 의해 시력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교육에 의해 옳지 않은 관점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눌림, 폭력에 의해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형편에 처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억압당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혐오와 배제와 차별을 하지 말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내 형상을 더럽히지 말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 새번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든 일체의 분위기와 구조를 해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대접 받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좋으시겠다고 이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사람들 좋으라고 이러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님 당신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심혈을 기울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을 참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세상’을 위해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구조를 해체시키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드는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는 세상’의 의미를 담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혐오와 배제와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모두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습니까?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시려고 이곳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편하자고 부릴 목적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좋으라고 이 모든 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 그러나 망가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 망가진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사야에게, 예수에게,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과제를 주셨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제주4·3, 광주5·18 등과 같은 민중항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항하고 저항하고 저항함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끔 해야 합니다. 이 과제는 누구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군사문화, 승리주의, 정복주의, 그리고 이런 사상에서 나온 혐오주의, 배제사상, 차별주의의 신앙화와 신학화를 추구해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변질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로부터 욕을 먹고 외면당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를 향해 이런 말까지 합니다. ‘너희 하나님은 죽었다!’ 아, 얼마나 심각한 말인가요?
오래전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포이에르바하의 뒤를 이어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전세계 그리스도교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니체를 향해 사탄이니 마귀니 하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그가 의미한 하나님은 바로 비뚤어진 신관에 비친 가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잘못된 하나님, 사람들을 속박하고 노예화하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은 죽어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므로 이 땅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군사문화, 승리주의, 정복주의를 해체시켜야 합니다. 이런 사상에서 나온 혐오주의, 배제사상, 차별주의들을 해체시켜야 합니다. 대신에 평등과 공평, 정의와 화해, 사랑과 포용이 복원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더욱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좀 더 불편한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누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위해 사는 것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