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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사상 최악의 영국군 작전
로버트 허톤
1942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 젊은 암호전문가 레오 막스는 런던 베이커 스트리스의 한 사무실에 앉아 – 자기 귀로 듣는 황당한 걸 이해하려 노력했다.
막스가 마주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 사보타주를 ‘유럽 회복’이란 이름으로 명명한 영국 특수작전실행국(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레오 막스가 담당한 것은 독일군 점령 하 스파이들의 통신 개량 문제. 무전기를 이용한 모스 전송,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네덜란드에서 SOE 대원이 보내는 무선 전문이다.
22세 레오 막스가 해결할 문제는 다분히 많았다 : 비 타협적인 성격에, 여자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으며, 이웃 사람들은 군복을 안 입은 막스를 소심한 놈으로 여기고 있었다.
무선 전송의 시작은 보안성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알파벳을 일부러 틀리게 하는 비밀 약어 정도를 썼다. 처음에는 독일군에게 잡혀서 ‘강압에 의한 전송’이란 개념이 없었다. 영국 본부는 어떤 스파이가 잡혔을 때 고문 때문에 비밀을 엄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네덜란드에 침투한 어느 스파이는 검증도 되지 않았고, 어느 스파이는 잘 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느 순간 무선전문의 보안성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42년 초부터 합류한 막스는 끔찍한 기분이 든다. 생각처럼 순조롭게 돌아갔던 것이 아니었고, 그 보안성에 본인의 관여가 정말 컸다. 이제, 공중으로 날아오는 전파를 다 믿을 수 없게 된 것.
처음에는 스파이도 전파도 많지 않았었다. 한 스파이가 전송을 시작하면 독일군은 전파 발원점 사냥을 시작한다. 잡힌 스파이는 고문 당하고 죽었다. 어떤 경우, 스파이가 추가 전문을 전송했는데, 암호화에 오류를 만들어서 풀리지 않게 했다.
마크가 불려온 이유는, 네덜란드에서 다시 SOE로 전문이 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물은 것이다. 마크 생각에는 불필요한 위험이었다. 이제 마크는 날아온 전문을 평가하여 진짜 가짜를 구분하는 교육을 특수작전부 통신반 교관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전파가 아예 사라진 스파이는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막스는 고심했고, 한 네덜란드 스파이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내는 전문은 완벽하게 해역되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서 뭐가 이상하다 깨닫기 시작했다.
(사진) 그리스에서 암호화 전문을 휴대용 무전기로 전송하는 SOE 대원과 당시 사용한 무전기. 무전기 운영은 위험했다. 하나의 스파이 전파가 등장하면 나치는 목숨 걸고 전파를 추적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의 네덜란드, 한 젊은 SOE 대원은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이름은 조한 우빅. 21세 SOE 무전수. 그는 사실 독일군 감옥에 있었다.
우빅의 SOE 암호명은 ‘쪽파’. 네덜란드 작전의 대원들은 모두 암호명으로 불렸다. 최초는 네덜란드 해군장교 출신으로 영국에서 스웨덴, 러시아, 이란, 인도까지 활동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 42년 11월부터 스파이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처음엔 네덜란드 동료들이었다.
스파이들은 낙하산을 타고 나치 점령하 네덜란드에 들어가,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공부터 시작한 ‘secret army’, 네덜란드 지역 레지스탕스와 접촉하여 작전했다. 만나는 레지스탕스를 ‘접대 위원회’라 불렸다.
조한 우빅도 동료 한 명과 낙하산으로 들어가 6인 레지스탕스와 연결되었다. 처음 만난 레지스탕스는 독일군 수색대가 온다며 권총을 건네라고 요구했다. 우빅은 내키지 않았지만 건넸고, 약간 말을 주고받고 나서, 갑자기 여섯에게 포위되었다. 그들은 나치를 위해 일하는 네덜란드 경찰이었다.
독일군에게 처음 취조를 시작할 때, 우빅은 생각보다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커피와 담배를 주었고, 우빅은 이름-나이-출생장소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빅에게 어디서 훈련받았고, 교관은 누구였으며, 동료 훈련병들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들은 네덜란드로 들어온 모든 스파이가 잡혔다고 압박하며 우빅의 심리를 깨려 했다.
불면의 며칠 간 취조로 결국 우빅은 굴복한다. 아는 것을 모두 불었고, 무전기 암호까지 털어놓았다.
네덜란드 나치의 군사정보부 수장인 46세 헤르만 기스케스는 1차대전 참전자로, 원래는 가족의 담배 사업을 오래 하던 사람이다. 2차대전이 나자 해외방첩청(Abwehr)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기스케스도 영국 특수작전부가 네덜란드 영토에서 그런 작전을 하는지 믿지도 않았었다. 이다. 41년 말, 영국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물자를 부낸다는 소리를 들었고, 믿지 않았다. “그딴 소리 북극에나 가서 해!” 그러나 보고는 옳았다. 42년 3월 SOE 스파이 두 명이 잡히면서 ‘북극’이 실체로 들어난 것. 한 명은 후베르투스 라오베르스란 무전병이었다.
라오베르스는 26세로, 전쟁 전에는 싱가폴의 고무농장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네 달 전에 네덜란드로 침투했다. 잡히기 전까지는 훈련받은 것처럼 꽤 보고도 잘했고 보안도 잘 지켰다.
기스케스는 라오베르스에게 독일 해외방첩국에서 요구하는 전문을 영국으로 송신할 것이며, 만약 문제가 생기면 본인과 동료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기스케스는 전문 보안의 방법을 물었고, 라오베르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섞어 진술했다. SOE가 영리해서 위장전문으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제로 전문을 날려야 했고, 영국 본부는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 전문을 받은 영국 본부는 [위장성 생략, 진실성 생략] 보안 점검을 생략하고 보안성은 무시되었다. 그때 의문을 품은 유일한 사람이 몇 달 전에 SOE로 합류한 막스였다.
(사진) 무전수 후베르투스 라오베르스. 라오베르스는 강제로 보낸 전문에 경고를 섞었는데, 영국은 못 알아봤고, 독일은 눈치 채고 라오베르스 대신 다른 사람으로 대치했다.
라오베르스의 무전기는 신호도 약했고, 암호의 (고의적) 실수로 내용에 오역이 있어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커 스트리트의 본부는 라오베르스가 잡혀서 날린 위장전문이란 의문을 무시했다. 당시 SOE는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엄청난 보고 전문을 받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스파이 모집과 침투도 버거운 상태였다. 첫 스파이 활동도 42년 3월이었다. 이후 침투 스파이들이 모두 안전하다 믿었고, 꽤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 방첩청 Abwehr :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정보기관의 설치를 금지당했지만, 1920년 국가방위부 내부에 방첩 부서를 만들어 Abwehr로 명명했다. 사전적 의미는 ‘방어’다.)
실수는 실수를 양산한다. 이후 두 달 동안 네덜란드로 스파이 8명을 보냈는데, 한 명은 낙하산 접지에서 크게 다치자, 모든 스파이들이 휴대한 청산가리를 삼켜버렸다. 방첩국은 게슈타포와 같이 공조하여 다른 7명을 모두 잡았고, 그들을 통해서 접선자 레게오르기우스 드레싱도 찾아냈다.
당시 유일하게 생존한 드레싱은 암호명 ‘당근’으로, 접선해야할 7명이 모두 나치에게 잡혔다는 걸 몰았다. 나치는 위장요원으로 접선을 시도했는데, 누군가로부터 귀에 “게슈타포!” 말을 듣고 빠져나간다. 드레싱은 무전요원이 아니라서 런던과 교신할 방법이 없었다. 접선해야할 침투 요원들 중 무전병이 없어진 것. 암스텔담에서 몇 개월 머문 드레싱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 스위스로 탈출한다.
결국 SOE는 접대위원회(레지스탕스)를 믿고 보냈던 대원을 모두 잃었고, 42년 말까지 낙하산으로 투입한 25명이 우빅 포함 모두 체포되었다. 거의 다 착륙장소에서 잡혔다.
방첩국은 잡힌 스파이 무리를 분쇄하는 최선의 방법은, 런던의 누군가가 먼저 배신해서 당신들이 잡혔다고 교란하는 것. 대부분 이 말을 믿었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람들도 점차 믿게 됐고, 다수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내용을 감추려고 노력하던 우빅조차 넘어간다. 잡힌 대원들은 하찮은? 진실을 알게 된다 – 독일 방첩국은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기스케스에게 잡힌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 장비, 어떤 무전기를 사용하고 어느 정도 돈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도 알게 된 것.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접선해야할 조직의 신원도 추정했다. 자칫하면 레지스탕스까지 소탕될 위험에 처한다. 독일 방첩국은 성공적으로 대처했고, 기스케스 국장의 말로 인해서 SOE 런던 첩자들과 작전을 ‘북극’이라 불렀는데, 게슈타포 쪽에서 누설될 가능성 때문에 새운 명칭을 정했다. ‘Das Englandspiel’ 영어로 ‘The England Game’.
후베르투스 라우베르스는 방첩국이 요구하는 전문을 계속 보냈다. 기스케스는 일부러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자기 부하의 모오스 타전 특징이 확실히 달랐기 때문이다. 라우베르스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영국이 금방 알아챌 것 같았다. 손이 다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SOE는 자신의 강압 전문을 간파한 것 같지 않았고, 라우베르스는 다른 방법으로 경고하려 노력한다. ‘QRU’(무선 공용어로 ‘I have nothing further’) 대신해 ‘CAU’를 치기 시작했다. 또한 주파수를 바꾸고 싶을 때는 ‘QSY’를 전송해야 했는데, 대신 ‘GHT’를 전송했다. 영국의 누군가가 ‘CAUGHT(잡혔다)’로 인식하길 바란 것이다.
방첩국은 전문 전송 시작과 끝에 일반 언어 송신을 허용했다. 라우베르스는 그걸 이용했다. 예를 들어 [Worked BY JERRY SINCE MARCH SIX]라고도 쳤는데, 좀 위험하다 생각한 방첩국은 이런 형태를 금지시킨다.
(잇빨 주 : 3월 6일부터 독일놈이 보내고 있다, 정도?)
런던은 눈치 못 챘다. 오히려 그걸 알아챈 건 라우베르스를 잡고 있는 방첩국이었다. 결국 라우베르스를 빼고 라오베르스의 타전 신호를 똑같이 연습시킨 독일인으로 대체했는데, 이마저도 영국은 눈치채지 못한다.
43년 초, 레오 막스가 네덜란드에서 오는 신호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챈다. 다른 나라를 담당하는 무선반은 스파이들의 전문 암호화에 실수들을 마주하곤 했는데, 이상하게 네덜란드만 실수가 전혀 없지? 사실, 그렇게 단기간 훈련을 한 사람들이 그렇게 고도의 숙련된 무선병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전문들을 조사하며 이상한 것들을 발견한다.
이 한 명의 SOE 첩자 통신병만 유일하게 혼신으로 인한 재송 요청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이 네덜란드 통신병의 무전기가 다른 스파이들이 가진 무전기보다 성릉이 좋은 것이란 결론. 게다가 상대가 잘못 받거나 자기가 잘못 칠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 보였다. 막스는 이 송신자가 예전에 이미 잡혔다고 믿기 시작한다.
레오 막스는 확신했다. 그러나 실수가 부족하단 이유로 첩보원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막스의 상관들은 이러한 의구심을 오히려 의심했다. 네덜란드를 담당하는 파트 모든 사람이 잘 굴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국 정보부의 관료주의와 싸우고 있었고, 그 대상은 MI6라 알려진 영국 비밀정보국이다. MI6는 SOE를 시작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사보타주를 한다고 나치에 균열이 생긴다는 자체를 불신했다. 만약, 막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SOE가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막스의 의견을 들은 SOE의 응답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것에 관해 아무 것도 하지마라”였다. 그동안 계속해서 네덜란드에 낙하산으로 뛰어 내리고 있었다. 43년 2월에 8명이 뛰어내렸고, 3월에 다시 3명이 낙하산을 탔다.
3월의 3명 중 하나는 24세 비에테르 도울레인, 전직 경찰이자 선원이다. 도울레인의 SOE 보고서 인용. [평상시에는 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며 종종 부끄러움도 탄다. 그러나 화가 나면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1941년 네덜란드 나치당원을 죽였고, 그로 인해 구명보트를 훔쳐 영국으로 도망쳤다. 나치 점령 하에서 대범하고 부실한 장비로 탈출한 사람이다. SOE는 도울레인에게 접촉해 같이 일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암호명 ‘작은 싹(Sprout)’.
도울레인의 팀은 네덜란드에 뛰어내린 다른 SOE 팀과 같은 경험을 했다. 반갑게 레지스탕스를 만났고, 종종 영국 담배와 위스키도 제공 받았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뒤에, 뒤에서 붙잡혀 수갑이 채였다.
(사진) 네덜란드 하렌의 신학대학. 독일군은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했다. 천여 명이 잡혀 있었고, 사로잡힌 SOE 대원들도 여기 있었다.
잡힌 대원들은 네덜란드 남부 하렌의 가톨릭 신학대학으로 끌려갔다. 도울레인은 다른 SOE 동료들이 탈옥을 꿈도 꾸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 불가능해도 보였고, 해봤자 무익하단 결론의 장소기도 했다. SOE 대원들이 겉으론 제법 안전해 보였다. 독일 방첩국 간수들은 잘 대우했고, 독일에 협조하는한 죽이지 않을 거라 약속했다.
도울레인은 MI6와 접촉하고 있는 감옥 내 네덜란드 민간인을 통해서 SOE에 연락을 시도한다. 그러나 SOE는 도울레인이 잘 도착했는지조차 몰랐고, 메시지 전달은 성공했으나 내용이 사람과 사람을 거치면서 문제가 생긴다.
전달한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 뚜렷했으나, 내용에 대한 확신이 불충분했다. 도울레인이 보낸 [나 도울레인을 포함한 낙하산병들이 잡혀서 수감되어 있다.]... 이를 받은 MI6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접수하고 2주나 지나서 SOE에 전달한다.
SOE는 자신들이 침투시키는 첩보원의 신원을 안전하기 위해 다른 부대 기관과 연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독일 치하 유럽으로 계속 보냈다.
1943년 5월, 영국 왕립공군은 더 이상 네덜란드 상공으로 비행하지 않겠다고 SOE에 통보한다. 이건 방첩국장 기스케스의 실수였다. SOE가 영국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로 날아올 때마다 독일 전투기 공격을 받았는데, 그것도 꼭 돌아갈 때만 공격했다. 마치 알고 있는 듯한 이 공격으로 영국공군 조종사들은 극히 위험한 장소로 인식했다.
이때 SOE는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고, 일부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다시, 또 묵살한다.
하렌의 도울레인은 나치의 말을 안 믿었다.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감자들은 벽이나 라지에터 파이프를 모스 부호로 두들기며 인접한 방과 소통했는데, 도울레인은 우빅이 바로 옆방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유일하게 우빅은 탈출에 흥미를 느낀다. 둘은 중간의 벽 아래 작은 구멍을 뚫고 속삭임으로 계획을 짠다.
(사진) 위. 피에테르 도울레인, 아래는 조한 우빅.
각 호실의 문 위쪽에는 격자가 달린 문이 있었고, 두 SOE 대원은 교육에서 탈출 기술에 관한 설명을 들은 바 있었다. 그 교육은 1차대전 당시 독일군 수용소에서 탈출했던 영국군 참전자들이 했다.
그때 들은 팁 중 하나는, 감옥 문의 걸쇠가 생각만큼 꽉 조여지지 않는다는 것. (창을 통해) 실 조각을 이용해서 시도해보니, 손잡이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은 침대 시트를 이용해서 로프를 만들었고, 둘 다 선원 출신이라 매듭을 알았다. 이제 준비하고, 그리고 기회를 옅본다.
선택의 날은 1943년 8월 말일. 무월광이었다.
그날 밤, 둘은 저녁 카트가 방으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다울레인의 방에 같이 있던 수감자 한 명이 “너 총에 맞아 죽어.” 극렬히 탈출에 반대했으나 다울레인은 결연했다.
감옥의 문이 쾅! 열렸고, 방마다 식판을 들이밀기 시작한다. 카트가 코너를 도는 소리가 들리자 다울레인은 벽을 두드렸고, 가자! 신호였다. 도울리엔은 감옥 문의 창문을 조용히 열었고, 쇠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민다. 머리를 돌리니 옆방의 우빅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둘이 눈을 마주한 건 그때가 처음이다.
문을 열고, 빈 방이 있는 곳으로 종종걸음 이동한다. 그 안에 숨어서 저녁밥 카트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고, 이어서 보초들이 사용하는 목욕실로 기어간다. 자정까지 거기 숨어 있기도 했다.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둘은 속삭임으로 대화하며 들키지 않기를 기도했다. 문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 탈옥하기 훌륭한 날씨였다.
자정이 다가오자, 둘은 목욕실 창문을 연다. 밖은 보초 한 명이 서치라이트를 감옥 창문들을 비추고 있었다. 둘은 목욕실 창문을 서치라이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창문 창살에 로프를 매고, 차례로 꽉 잡고 땅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남은 건 철조망이다.
땅에 배를 대고 철조망을 긴다. 보초 한 명이 지나갔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빅이 철조망을 먼저 넘었고 도울레인이 따라 넘었다. 장비는 없었고, 소매를 당겨서 천을 손에 쥐고 날카로운 가시 철조망을 넘었다. 넘자마자 달려서 우빅을 따라잡았고, 이어 둘은 sprinting for freedom.
감옥을 나온 것은 하나의 관문이었다. 이제 네덜란드를 벗어날 도전이 남았다. 옷은 낡았고 진흙 투성이. 독일군은 탈출 직후 (아마도 로프로) 탈출을 알아차렸고, 추적대가 따라오기 시작한다.
둘은 원을 그리며 돌거나 방향을 바꾸면서 주로 도랑을 타고 이동하며 근처 마을로 간다. 그리고 마을의 가톨릭 신부님에게 자비를 요청한다. 운은 좋았다. 신부는 믿을만한 마을 사람에게 데려가 숨겨줬고, 거기서 탈출 계획을 짠다. 진행은 몇 주일이나 걸리며 느렸다. 독일군이 일대를 이잡듯이 뒤져서 이방인이 움직이거나 숨을 곳이 없었고, 그렇게 힘겹게 벨기에로 갔고, 거기서 파리로 간 다음, 다시 남으로 내려와 1943년 11월 스위스 국경에 도달한다.
(잇빨 주 : 제대로 된 로프가 있었거나 - 좀 더 훈련을 받았다면 쇠창살에 레펠 확보용 ‘회수 매듭’으로 묶고 내려온 뒤에, 한쪽 로프를 당겨서 풀었다면 아침에나 알았을 것을... 다만, 로프가 쇠창살에서 땅까지 두 배 길이에 가까워야 한다. [사람이 안전하게 점프해서 떨어질 길이는 제외할 수 있다.] 노력하신 분들에게 죄송. 고등산악 때 배웠는데, 묶고 하강하고 나서 당기니 졸라 안 풀림. 인간 체중으로 두세 번 내리 당겨야 간신히... 체중이 강하게 당겨서 옥매듭처럼 정말 꽁꽁 묶임. 로프에 매달려서 여러 번 당겨야 풀릴까 말까.)
둘의 보고는 영국 군사정보국으로 넘어갔고, SOE 네덜란드 담당 부서는 총체적인 충격에 빠진다.
LOSING THE GAME
드디어 베이커 스트리트는 잘못된 걸 알았다. MI6가 보낸 마지막 경고문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SOE는 묵과했다. 경고는 하나가 아니었다. 게오르기우스 드레싱은 런던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벌어진 일을 보고했다. SOE가 너무 많이 묵살한 것이다. 사실로 인정하기 꺼림직한 이유도 있었다.
도울레인과 우빅의 탈출 이후, 헤르만 기스케스는 경보를 발령하면서도, 그 둘이 게슈타포에게 잡혀 이관된 것으로 서류를 꾸몄다. 일부 SOE 관계자는 스위스에 도착한 두 탈출자를 나치가 SOE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역공작이라고 믿으려 했고, 네덜란드 정보망이 아직 견고하다고 믿기까지 했다. 심지어, 다음 해에 둘이 영국까지 왔을 때, 노르망디 상륙 이후까지 보초를 붙여 나치 동조자로 의심하며 수감했다.
1944년 1월이 되자 SOE도 더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근 1년 넘게 SOE가 뚫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에게까기 보고되었다.
(사진) 1998년의 레오 막스. 암호가 적힌 실크 스카프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에 불편한 표정이다. SOE 대원 많은 수가 탈출 이후 죽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아래 사진의 헤르만 기스케스는 성공적으로 런던을 조롱했다.
기스케스는 게임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기스케스는 1943년 12월에 수신한 SOE 전문을 보고 점차 조심스러워졌고, 마지막으로 엿을 먹이기로 결심했다. 1944년 4월 1일, 기스케스는 아래의 비 암호 평문을 런던으로 전송한다.
[한동안 우리의 도움 없이 귀하의 네덜란드 사업이 굴러가지 못한 걸 우린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더 길게 당신들의 유일한 대변자 노릇을 하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어쩌면 우리 상호간의 만족 아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값비싼 스케일로 대륙에 특사들을 파견하신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따뜻하게 환영할 것을 장담합니다. Hoping to see you.]
이 조크는 런던 사람들에게 결코 웃기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접대도 결코 웃기지 않을 수준이 된다. SOE는 게임에서 잃었지만, 망신을 잊진 않았다. 곧 네덜란드로 수만 대의 글라이더를 날린다. (주 : 마켓 가든) 그때 들인 돈은 현재 화폐 가치로 2백만 달러에 달한다.
네덜란드 작전은 SOE 작전 중 인적 대가가 가장 컸다. 41년 11월부터 43년 5월까지 SOE 대원 53명이 네덜란드에 뛰어내렸고, 51명이 나치에게 잡혔다.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은 47명의 죽음으로 끝났고, 마지막은 SS 친위대 손에 맡겼다. 탈출한 둘을 제외하면 체포 대원 4명만 살아남았다.
(사진) 신화의 이카루스를 조형으로 ‘The England Game’으로 희생한 대원 47명을 위한 위령비가 1980년 레이그에 건립되었다. 문구. “They jumped in death for our freedom.”
레오 막스는 자기가 옳았다는 약간의 기쁨을 얻었지만, 수년을 두고 용감한 대원을 희생했다는 분노가 사그러들지 않았다. 레오 막스는 전쟁 후 희곡과 시나리오 작가다 되었다. SOE 첩보원 바이올렛 스자보를 바탕을 쓴 영화 [Carve Her Name with Pride]가 가장 알려졌다. 1943년 막스가 그녀를 위해 썼던 시를 바탕으로 썼다. 레오 막스가 전문을 번역했을 때 바이올렛 스자보는 종종 이런 말을 썼다. “The Life That I Have.”
(바이올렛 라인느 엘리자베스 스자보: 1921. 6. 26 ~ 1945. 2. 5. 2차 세계 대전 때 영국 특수작전집행부에 소속된 첩보요원. 프랑스에서 임무 수행 중 독일군에게 잡혀 심문 및 고문을 당한 뒤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공식 소속은 영국 의용응급간호대였으며 최종 계급은 해군소위. 사후 조지 십자 훈장이 서훈되었다.)
SOE의 네덜란드 작전은 이른바 a double game이었다. 이 작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제 볼 수 없다. 전쟁 후 런던 화재 때, 일부러 기록을 파괴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1998년 기록들이 드러났는데, 그저 “전쟁이라 어쩔 수 없었어” 말처럼 그저 슬프고 슬픈 이야기일 뿐이었다. 진실을 규명하기엔 60년이나 지나버렸고.
[끝]
p.s 비슷한 주제로 함경도의 별에 한 챕터가 곧 올라갑니다.
첫댓글 역시... 자기 기득권 지키기는 어디가나 있군요...
그넘의 책상머리 아이디어에... 현실을 무시하는... ㅡ,.ㅡ;
안탓깝습니다....
악어굴에 퐁당퐁당
경직된 조직의 수순을 봅니다.
나찌가 잘한것보다 영국조직의 경직성이 만든 참극이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교육을 생각해내고 응용해서 탈출하여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까지 도달한 대원을 보니 그 대원들의 능력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분들이 허망하게 가셨다니 안타깝군요
최근 미군 특수부대들도 통신보안을 매우 강조하는 것 같더군요.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예전 아프간 레드윙작전에서도 무선통신문제가 있었고,
그렇다고 위성통신기를 민감한 작전에 사용하는 것도 보안상 어떤 약점이 있는 것 같아서
아마도 미군의 모든 작전에도 해당되겠지만 특수작전시 상공에서 지원하는 E-11A BACN 전자전 항공기에서 운용하는 중계기와 비화된 무전기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pNIPhmM2I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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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비화기 무전기는 기지국끼리는 전원도 출력도 충분한 장비를 써서 가능하나, 장거리 저 출력 무선통신은 그거 힘듭니다. '비화'란, 대표적으로 전파의 벡터(위상) 재구성 송신과 재구성 수신을 의미하는데, 비화기 무전기끼리는 동일 음성 동일 신호로 들리지만, 같은 주파수 타 무전기는 잡음으로 들리죠. (그다음은 주파수 위상의 일부분만 사용) 장거리 저 출력 통신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요즘은 기업도 무선은 다 비화기 씁니다. 사실, 애니그마도 당시 독일 기업의 비화 암호 장비를 독일군이 받아들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