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용권, 김택의 홍범도 장군을 읽고(2011.11.3)
홍범도 장군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2006년3월 홍범도 장군이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다녀왔다. 그때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최근 읽었던 조정래 선생의 황홀한 글감옥에서 언급되었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에 생각이 머물렀다가 도서관에서 홍범도장군에 대한 책을 뽑아 들었다.
조정래 선생은 홍범도장군이 소련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그의 혁혁한 독립운동에 대한 활약상을 감추었으며 특히 청산리전투에 대해서도 홍범도장군의 승리를 견인하는 활약상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고 밝혔다.
강용권, 김택이 지은 홍범도 장군은 다양한 자료를 모아 엮었다. 홍범도 장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에 대한 노력을 깊이 있게 서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홍범도 장군의 성장과정, 그가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고 노력했던 이유, 그리고 소련 공산당 빨치산이 된 이유 등에 대해서 밝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학계의 노력으로 좀더 나은 책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머리말
한국출판에 즈음하여
홍범도 장군의 생애
외롭게 자란 불행한 소년
1868년 음력8월27일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 부근의 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맏아들로 태어남/어머니는 홍범도를 낳고 7일만에 사망, 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사망
암울했던 청년시절
반일의기의 기치를 들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홍범도의 사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단독의병활동 3년후 함경도 북청군에서 부인 이옥녀 만남-당시 아들이 7살(용범), 그후 7년간 단란한 생활 둘째아들 용환을 봄
재기의 반일의기
1904년(갑진년) 2월 러일전쟁
반일의병대의 창립
1907년11월15일 홍범도는 안평면과 안산면 두 곳의 포수 60여명을 단합하여 북청군 파발리 엄방동에서 마침내 정숙하고 장엄한 모임을 갖고 봉기
후치령 전투
후치령은 북청에서 삼수, 갑산, 혜산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였다.
의병대의 재편성
1907년12월 초에 홍범도는 엄방동에서 수하의 의병대를 재편성했다. 후치령전투는 의병대의 포수들이 생존권을 위한 화승총 탈환투쟁으로부터 본격적인 반일무장투쟁에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홍범도는 첫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의병대를 더욱 굳건히 묶어 세우기 위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의병대의 확대편성(재건)과 무기 탄약의 제작
1907년12월 하순 삼수전투 직전에 두 번째로 의병대를 개편했다. 전 의병대를 각기 독립적인 작전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4개부대로 편성하였는바 홍범도가 직접 영솔하는 의병대는 삼수, 갑산 지방에서, 송상봉이 영솔하는 의병대는 장진지방에서, 전주익이 이끄는 의병대는 단천 지방에서, 홍사영이 이끄는 의병대는 홍원지방에서 각기 분산되어 활동하도록 했다.
삼수, 갑산 싸움
1908년2월21일 홍범도는 갑산군 지읍사 세골로 토벌하러 나온 일군들을 섬멸, 격퇴했다.
홍범도 의병대의 거듭되는 습격은 함경남도 북청, 갑산, 혜산, 단천 지방의 기고만장하던 일본 수비대의 기개를 꺾어버렸다. 근대서양식 군사조련을 받았고 러일, 청일전쟁을 거쳐 장기간의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일군 장교들도 상상 밖으로 허실과 진퇴를 적절하게 운용하는 홍범도의 능란한 산지유격전술에 골탕을 먹고 대처할 바를 몰랐다. 일제침략자들 앞에 막아 나선 홍범도 의병장은 놈들의 이마를 때려놓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뒤통수를 후려쳐서 놈들마저 나는 장군으로 부르는 신출귀몰한 인물이었다.
일제의 회유책과 차도선의 귀순
1907년8월부터 12월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반일항전에 참가한 전국 각지의 의병수는 도합 4만1천116명이나 되었고 교전 횟수는 323회나 되었다. 1908년 1월 한달만 해도 일제와의 격전에 참가한 의병 수는 9천명이 넘었고 교전 수는 123회나 되었다.
지방 관리들은 의병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돈과 쌀을 주었고 남편이나 아들을 홍범도 의병대에서 이탈하여 산에서 내려오도록 강권하는 따위의 회유와 협박을 교묘히 구사했다.
놈들이 실시한 회유책은 비록 예상했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
홍범도는 차도선의 가짜 귀순 행동을 투항행위로 간주하고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차도선은 홍범도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되리라고만 믿으면서 태양욱과 더불어 3월17일 약 2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신풍리로 갔다. 북청 수비연대 연대장 오꾸무라 중좌는 10일 전의 담판 약속을 어기고 즉시 의병대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켰다. 차도선은 이때에야 후회 막급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일군들에게 해제당한 무기는 화승총 136자루, 30식총 3자루, 단발총 9자루, 10연발총 2자루 등 동합 150자루였다.
불사조정신
홍범도의 아내 이옥녀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을 당했으나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다.
나같은 계집의 실오리 같은 목숨은 없어지면 그뿐이다. 계집의 글자로 영웅호걸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니 망상이로다. 네놈들은 나와 상대하려 하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
석 달간의 반 토벌투쟁
1908년5월7일 각지 의병장들이 홍범도의 창의에 호응하여 대오를 거느리고 연화산 병풍바위골에 모여들었다. 홍범도는 집합한 의병 도합 1천864명을 재편성하여 11개 중대와 33개 소대를 구성하고 중대장 11명과 소대장 33명을 지정한 후 하세가와의 토벌에 대처할 방안을 토의하고 새롭게 작전포진을 조정했다.
함경도에서 유행한 민요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 가는 길에는
눈비가 쏟아진다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련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괴탁리 원석택 중대장님은
산고개 싸움에서 승리하셨소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홍범도 대장님은 동산리에서
왜적 순사대 열 한 놈 몰살시켰소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던지고
동해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엥헤야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중국으로부터 탄약을 구입해 들이려던 홍범도의 조치는 타락한 자들의 변절행위로 성취되지 못했다.
연해주에서의 활동
1864년 이후부터 191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10만 이상의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여 피땀 흘려 그곳 개척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우국지사와 의병장들이 일제를 피해 이곳으로 망명해왔다. 그들은 국권회복의 이념 하에 조선인들 가운데서 반일 민족계몽교육을 실시하고 독립군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전개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항의했고 러시아는 연해주에서의 조선인 의병활동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의병대의 둔전과 국내 진격전
1910년8월29일 -이때부터 2천만 백의동포는 36년간이나 일제 침략자들의 강압적 통치와 야만적 약탈에 시달리면서 조선 역사상에서 가장 어두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911년3월 홍범도 부대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출작전의 첫발을 내딛었다. 함경북도 경원에 이르러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홍범도 장군이 친히 지휘하여 승리한 이 싸움은 경술국치 후 해외 의병부대의 첫 국내 진출전투로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고난으로 점철된 대기의 나날
1913년 홍범도는 자그마한 의병대오를 거느리고 러시아 원동지방으로 넘어갔다. 홍범도가 소부대를 인솔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 것은 전반적인 국세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또한 5년간의 곡절 많은 의병투쟁경험을 살려 취한 앞을 내다보는 주도적 행동이었다.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는 홍범도로 하여금 한반도도 이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 후 가난한 백성들이 주인이 되고 압박과 착취 제도가 없는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연변에서의 재기
3.1운동 전에 만들어진 반일단체: 중광단, 사우계, 철혈광복단, 철우단, 혈서단, 부민단
3.1운동 이후에 창립된 반일(무장)단체: 간도국민회, 간도 군민회, 간도 청년회, 의군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도독부, 대한 정의 군정사, 신민단, 의민단, 광복단 혹은 광복회, 야단, 서로군정서, 기원독립단, 자신계, 의열단, 복황단, 보약사, 농무계, 포수단
본격적인 국내 진격전
독립군가
1.나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때를 기다려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자유, 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2.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캐 말발굽에 짓밟히는 모양
듣느냐 2천만 단군의 혈손
원수의 칼 아래서 우짖는 소리
양만춘, 을지문덕 피를 받았고
이순신 임경업의 후손 아니냐
나라 위해 목숨을 터럭과 같이
싸우던 네 조상의 후손 아니냐
3.탄환이 빗발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길을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한 독립군사야
나가고 나가고 다시 나가자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최후의 네 살점이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 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
4.독립군 백만 용사 달리는 곳에
압록강 어별들이 다리를 놓고
독립군의 붉은 피가 내뿜는 열매
백두산 굳은 바위 길을 열리라
현해탄 푸른 물이 핏빛이 되고
독립군의 벽력같은 고함소리에
부사산 솟은 봉이 무너지누나
5.나가세 독립군아 한호령 밑에
질풍 같이 물결 같이 달려나가세
하느님의 도우심이 우리에 있고
조상의 신령 오셔 인도하리니
원수군세 산과 같고 구름 같아도
우리 앞에 티끌 같이 흩어지리니
영광의 최후 승리 우리 것이니
독립군아 질풍 같이 달려나가세
6.하늘은 밝았도다 땅은 열렸네
영광의 독립군기 높이 날리네
수풀 같은 창과 칼에 흠뻑 젖은 것은
십 년 원한 씻어내던 핏줄기로세
빛이 낡고 해어진 우리 군복은
장백산, 낭림산을 장구한 표요
우뢰 같이 들려오는 만세소리는
한양성 대승리의 개가이로다.
1919년8월 국내 진입의 첫 작전 개시-200여명 혜산진에 접근 -혜산진은 압록강 남안의 군사요충지 -3일간 격전을 벌려 70여명 적들을 살상
1919년12월 총병력은 2천여명
독립군의 책략과 작전특징
봉오동 승전
1.반일 무장부대의 연합행동
봉오동은 두만강변에서 중국 국경도시인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는 골짜기로써 매복전에 아주 유리한 천연적인 요새였다.
봉오동승전이란 삼툰자전투, 후안산전투, 봉오골전투와 피파골전투를 통합해서 일컫는 것이다.
2.삼툰자전투
3.후안산전투
4.봉오동전투
야스가와 소좌의 지휘하에 그의 19사단 소속 부대와 아라요시 중위의 남야수비대 도합 3백여 명의 일본군들이 봉오동 상촌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각 독립군부대는 이미 홍범도의 지휘에 따라 작전준비를 끝마쳤다.
봉오동전투에서 소련 홍군전사 3명이 참가했다.
5.피파골전투
6.승첩 경축활동과 추도회
일본군의 연변 침입과 독립군의 연합이동
협동작전을 위한 노력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연하부대의 지휘자들과 김좌진장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부대의 지휘자들은 부득불 피전책을 포기하고 적당한 기회에 이상적인 지점에서 오만하고도 발광적으로 침범해오는 적군을 습격하여 섬멸하자는 합의를 보게 되었다.
청산리대첩
1920년10월21일부터 10월26일까지 있었던 청산리 백운평전투, 와룡구 어랑촌전투와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 차례의 싸움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부대의 백운평매복전의 승리로 시작되어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의 고동하전투 승리로서 끝났다.
1.청산리 싸움터
2.전투태세 및 작전포진
3.백운평승전
4.어량촌 승전
5.고동하승전
6.일본침략군의 야수적 만행
연해주로의 이동
자유시사변
레닌의 고향에서
사회주의 건설자로서의 업적
1923년부터 홍범도 장군은 이만의 카자린 구역에서 꼼무나 관리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근 20성상 풍찬노숙하며 사지를 넘나들던 군인생활과는 전혀 다른 농장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농촌건설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후 1927년에는 소련 볼세비키당에 가입했다.
장군의 만년 생활
1940년12월15일 태장춘 선생은 실화희곡 홍범도를 완성했고 1941년1월16일에는 한인극장 직원들이 정성 들여 노력한 보람으로 크즐오르다에서 첫 공연의 막을 올렸다.
1943년10월25일 홍범도 장군은 크즐오르다에서 75세의 일기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소련에서의 추모와 기념활동
홍범도 장군의 반신상은 소련 미술계의 한인 조각가로서 카라간다시 공예품 생산작업소에서 일하는 최 니콜라이와 미술가 허 블라지미르가 제작했다. 카자흐스탄공화국과 우즈베크스탄공화국의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이 홍범도 장군 청동상 수립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가했고 조직사업은 공화국 특별연금수헤자 김국천 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 지도했다.
1988년8월, 소련과학원 동양연구소에서 조선민족영웅이며 반일 무장투쟁의 탁월한 지도자이며 소련국내 전쟁참가자인 홍범도 장군 탄생 120돌을 맞으며 주최한 기념대회.
박미하일- 홍범도는 민족독립과 사회진보를 위한 투쟁에 대한 동요될 수 없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그런 조선 애국자들에 속합니다. 그의 모습은 오늘도 한인들을 탄복시키고 있고 민족통일과 사회적 공정성을 이룩하는 것과 같은 그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고무적 자극으로 복무하고 있다.
맺는말
한반도와 중국, 소련 세 나라 땅에 남긴 홍범도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사료를 수집하기에 불가결한 국제적 연계를 취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아직 국제적 학술교류와 합작 관계가 열려있지 않은 시점에 수신인의 주소와 성명마저 명확히 쓸 수 없는 막연한 서한을 띄우는 그런 곡절도 겪었다.
홍범도 장군에 관한 저서와 논문
논문1-왜곡된 청산리전투사를 논함-김택-홍범도 장군의 주도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청산리전투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홍범도 장군이다. 2개월 전부터 도착.
홍범도 장군과 그의 독립군부대가 청산리대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1919년8월부터 1920년10월에 이르는 1년 남짓한 기간 연변지구에서의 반일무장투쟁 정형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3.1운동 후 연변땅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반일무장투쟁 가운데서도 홍범도 장군과 그의 독립군부대가 줄곧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연변지구의 여러 반일 무장단체 지휘자들 가운데서 홍범도 장군이 처한 위치, 서로간의 관계 및 그의 남다른 자질, 그리고 홍범도 장군 휘하 독립군부대의 자질과 그가 집행한 작전방침 등에 연유되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논문2-홍범도 장군의 전투경로와 소련에서의 망명생활-김기철
김세일의 장편소설 홍범도-장군의 전투경로 소개
홍범도장군의 일기책을 기초로 희곡 홍범도 와 장편소설 홍범도가 쓰여졌다.
적위병 및 붉은빨치산의 이력서 제05606호에서
성명 홍범도
생년월일 1868년8월27일
민족별 조선인
사회출신 빈농민
지식정도 자습자
직업(전문) 혁명가
현직 1929년부터 연금생활
당별 러시아공산당(볼세비키)
당증 번호 5784492
가족사항(가족수, 성명 및 년령)
처-이인복 60세
1919~1920년까지 홍범도부대에 있으면서 일했음.
수상경력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마르세르식 권총과 금화 1백 루블 정치학교를 다녔음
홍범도 서명
자서전
나 홍범도는 1868년8월27일 조선 평양시 빈민가정에서 출생했다. 친숙부의 집에서 15세까지 자라며 일했다. 1883년부터 1887년까지 평양 진위대에서 신호병으로 복무했고 1888~1893년까지 황해도 수안군 총령관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1894년 제지공장에 출근하던 그 촌에서 도망쳐 강원도 철원군 산촌에 가서 3백99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강도들과 싸우기 위한 부대를 조직하였다.
일본침략자들과의 투쟁에 대한 길이 확정되었다. 부대인원 수가 1천4백 명까지 격증되어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일제와의 유혈전투를 진행했다.
1904년 나는 북청군에서 체포되었는데 6개월 후에 탈옥하여 북청, 정평, 영흥, 흥원, 단천, 이원, 길주, 갑산, 무산 등지에서 일본 침략자들과의 전투를 계속 진행하였다. 산간벽지에 집결된 대원 수가 무려 2천5백 명에 달했다.
1913년7월 왜적들의 추격이 심하여 조선국내에서 배겨낼 수 없으므로 조선을 떠나 현재 소련 원동에 옮겨와서 1919년까지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차후의 투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을 잘하고 탄약이 많아야 좋다는 생각으로 무기와 탄약 장만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1919년9월에 항일 전우들 중에서 선발한 정예대원 150명을 거느리고 도중에 중국 마적들의 잔당들과 로령안덕의 백파악당 및 경찰들을 격파하면서 북만주로 떠났다. 북만주에서 대원수가 1천백 명으로 증가되어 1920년에 봉오골, 노도구, 보민거우(봉밀구-편자), 청산리, 오도양차에서 전투를 했다.
1921년에 탄약이 떨어진 데다가 일군의 추격이 심하여 7백 명의 전사들로 된 부대를 거느리고 러시아령으로 넘어왔다. 제2군사령부 명령에 의하여 대원 380명은 미만에 남겨두고 나는 220명의 빨치산들과 함께 자유시로 갔다. 자유시에서 나는 카란다 스윌리부대에 편입되어 5월에 이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갔다. 여기에서 나는 제5군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어Trek.
1921년11월에 나는 조선빨치산부대 대표단에 들어 모스크바로 레닌에게 보고하러 갔다.(이때 홍범도는 기명권총을 상으로 받고 금화 1백 루블을 탔다-필자주) 1922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이르크츠크로 돌아왔다. 1923년부터 1927년에 이르기까지 스코또브구역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27년 이곳에서 당에 들었다. 1928년부터 현재까지 한카이 구역 한카이별 콤무나에서 일함.
이전 빨치산부대 대장 홍범도
홍범도의 서명을 신두 한카촌소비에트 입증
소비에트위원장 서명(서명희미) 원문
논문3-홍범도 장군에 대한 새로운 조명-고송무
김 마트웨이 치모페예위치(1901~1983)가 쓴 저서 원동에서 1918~1922년 소비에트 주권을 위하여 투쟁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모스크바 1979년 로문판)이 있다.- 이 글을 고송무가 한국말올 옮겨서 구주신문 제33호(1985년5월31일)에 실었다. 여기에 홍범도의 생애가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었다.
논문4-최근 홍범도 연구에 나타난 몇가지 문제-송우혜
소련측과 중국측의 홍범도 관계 자료가 상호 보완적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철저히 배격하고 부인한다는 데서 발생했다.
홍범도 연보 도움말 모음
시나리오/태장춘 작
일어나서 우리 손으로, 우리 가슴으로, 우리 힘으로 원수들을 물리쳐야 될 거시오.
사냥총을 한 자루 몸에 지니고 높은 산 깊은 골을 타고 넘으면서 맹수를 좋아 달음질치는 생활에서 홍범도는 자유와 의리에 사는 참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 언제나 생기에 넘치는 정신력, 불의에 대항하는 의협심, 억압에 굴하지 않는 투지와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모르고 후퇴를 모르는 강인한 성격은 그의 장대한 체구와 굿굿한 몸매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김택
1936년7월27일 출생
1956년부터 23년간 군무생활
전업 후 연변일보사 부총편집, 주당위판공실 부주임,주정협판공실 주임을 역임.
현재 주정협 부비서장 겸 문사자료위원회 주임사업.
중화통신학원에서 5년간 고대한어를 전수, 중앙민족학원에서 철학, 정치경제학을 전수
저서로는 실화문학집 동존서, 학술서적 용정개척사 등이 있고 사설, 논문, 통신, 기사 350여편이 있음.
강용권
1945년8월8일 흑룡강서 목단강시 출생
1970년 연변대학 조선어 문학부 졸업
1970년부터 1983년까지 길림성 안도현에서 교원으로 재직
1983년부터 연변역사연구소연구위원으로 재직중.
홍범도 장군
지은이 김택 강용권
초판1쇄 발행 1996년1월3일
발행처 도서출판 장산
발행인 변명섭
편집 김지운
등록번호 제1-1700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4가 5번지
전화번호 02)929-8340
첫댓글 언제 독서감상문집내실거예요.? 국장님의 열정을 구경하기조차 버거우니 원... 힘을 내야겠어요.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지금 책을 펼치세요. 그리고 한 줄 한 줄 읽어가세요. 그리고 그 속에 빠지세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화이팅 하시고요!!!
홍범도님은 언제나 생기에 넘치는 정신력, 불의에 대항하는 의협심, 억압에 굴하지 않는 투지와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모르고 후퇴를 모르는 강인한 성격은 그의 장대한 체구와 굿굿한 몸매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는 글에서 보듯이 배울점이 참 많으신 분이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