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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39권 잡저(雜著) 독서기(讀書記) 효경외전 하(孝經外傳下)
○ 천자의 기상은 목목(穆穆)하고, 제후는 황황(皇皇)하고, 대부는 제제(濟濟)하고, 사는 창창(蹌蹌)하고, 서인은 초초(焦焦)하다. - 모두가 행동거지의 모습들이다. 《의례(儀禮)》 빙례(聘禮)에 이르기를, “빈(賓)이 문에 들 때 황황(皇皇)하다.” 하고, 또 “뭇 개자[介]가 북면을 할 때 쟁쟁(鏘鏘)하다.”고 했다. 대체로 행동 모습은 신분이 높으면 태연해 보이고, 낮은 이는 위축되어 보인다. - 천자가 죽으면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는 훙(薨)이라고 하고, 대부는 졸(卒)이라고 하고, 사는 불록(不祿)이라고 하고, 서인은 사(死)라고 한다. - 윗부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붕(崩)이고, 훙은 무너져 내리는 소리이다. 졸은 끝남이다. 불록은 녹을 끝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는 점차라는 말이니 정신이 점차 다한다는 뜻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는 훙(薨)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 조선의 임금이 죽으면 붕(崩)이겠습니까? 훙(薨)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으로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훙(薨)이 맞습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과 그외의 문집에도 조선의 임금이 죽었을때 훙(薨)이라 기록한 기록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록은 일관성을 지녀야 합당한 기록이 됩니다. 지금까지 배워 온 지식으로 볼때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조선의 임금이 죽었을때 훙(薨)이라는 기록으로
일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상촌선생집 부록2 유제문(諭祭文)
선조(宣祖)가 승하하면서 운세가 나빠져 / 否運蘗於天崩
세상이 참혹하게 더럽혀졌는데 / 乾坤爲之慘黷
동문선 제8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일본 중 수인(壽藺)의 시축(詩軸)에 제하여[題日本僧壽藺詩軸] 신숙주(申叔舟)
하늘의 운행이 광대하여 멈춤이 없고 / 天運坱圠無停機 인사가 변화하여 수시로 옮기니 / 人事變化隨遷移
상전이 벽해 됨도 앉아서 볼 수 있고 / 坐見桑田爲蒼海 틈으로 사마 지나듯 재빠른 세월 / 隙駟滅沒須臾期
선왕께서 운을 타 / 先王乘運撫瑤圖 손수 건곤을 정돈하사 기강을 세우시니 / 手整乾坤提綱維
덕의 향기가 상제께 사무쳐 / 至治馨香徹上帝 기이한 상서가 연하여 나타났네 / 奇祥異瑞爭紛披
아름다운 소문 어진 교화가 원근에 퍼지니 / 休聲仁化暢遐邇 축하의 사절들 만리 밖에서 다투어 왔네 / 梯航萬里來相追
그때 인사도 먼 곳에서 이르니 / 當時藺師亦遠至 두 눈썹에 나타난 표연한 풍격 / 風格飄然來雙眉
선왕이 인견하시고 국서와 폐백을 주시며 / 先王一見授書幣 돌아가 국왕에게 드리라 명하셨네 / 面命歸報國王知
스님이 눈을 씻고 영우에 감격되어 / 上人拭目感榮遇 손 들어 명 받잡고 단치에서 물러나온 뒤 / 擧手拜命辭丹墀
그럭저럭 3년, 이제야 귀국하려는데 / 間關三載今始回 선왕께서 승하하사 빈궁이 적막하시니 / 殯宮寂寞垂玄帷
국서를 손에 받들고 구명을 아뢸 제 / 手擎國書復舊命 향연 심지에 슬픈 바람이 불어 / 爐煙一炷悲風吹
사람들 스님 보고 모두 슬퍼하였고 / 人人見師暗悽惻 노신은 피눈물이 줄줄이 흘렀네 / 老臣血淚雙漣洏
생각하니 스님의 왕복이 겨우 몇 해인데 / 念師往復只數載 천붕지탁(천자(天子)가 죽는 것을 말하나다)의 실로 뜻밖의 일 / 天崩地拆非所期
스님 말이, 바닷물결 무섭지 않사외다 / 師言鯨濤不足畏 나라 가득히 칼 놀음이 벌어져 / 滿國白刃交參差
몇 해째 전쟁이 아직 안 멎은 판국 / 連年鼙鼔尙未已 왕도에도 성을 쌓고 각기 상지하는 터이니 / 都中列壘方相持
만사일생으로 목숨을 내걸고 / 萬死一生捐性命 창검 사이로 출입함을 큰길같이 하였소 / 出入劍㦸如坦夷
천어(임금의 말)가 정녕하여 아직도 귀에 쟁쟁 / 天語丁寧猶在耳 지우를 입사온 터라 한 몸 위험을 논하리까 / 敢爲知遇論嶮危
그 의에 죽고 약속을 존중하는 태도 / 殉義輕身重然諾 연ㆍ조다운 강개에 가을 바람도 슬퍼하네 / 慷慨燕趙秋風悲
위의 상촌집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승하하면서 운세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상촌집의 저자는 조선 선조때의 문신인 상촌 신흠 입니다. 상촌집의 저자는 조선 그 당대의 임금인 선조 임금이 죽었을때 이 죽음을 천붕(天崩)이라 했습니다.
또 위의 동문선의 기록된 시문의 저자는 신숙주 입니다. 이 무렵은 일본과 관련된 글과 1443년(세종 25)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이 당대는 조선의 임금 세종때 이며 위의 기록에서 천붕지탁의 뜻밖의 일은 세종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는 글 입니다. 세종임금의 죽음에 대해 신숙주는 천붕(天崩)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위의 추강집의 저자는 조선 전기의 학자·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입니다.
연산군 1년 을묘(1495,홍치 8) 2월28일 (임오)
제천 현감(堤川縣監) 권경유(權景裕)가 상소하기를,
“신이 변변하지 못한 자격으로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모시게 되매, 외람되이 난육(卵育)의 은혜를 입었고, 연애(涓埃)의 보답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거의 심력을 다하여 견마(犬馬)의 천치(賤齒)를 마쳐야 할 처지인데, 천붕(天崩)의 화가 갑자기 이때에 미칠 줄을 어찌 알았으리까. 멀리 궁벽한 고을에 있으면서 듣자오니, 전하께서 출천(出天)의 효성으로 한결같이 예법을 준수하시어 어질다는 소문이 사방에 넘치고,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환희에 차서 한길 가에 나와 서로 경축하니, 종사(宗社)와 신민의 복이라 어찌 말로 다 형용하리까. 대행 대왕께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밝으심이 일월과 어울리시어 털끝만한 과오도 없으시니, 온 나라 신민이 우러르기를 일월 같이 하고 추대하기를 천지와 같이 하였는데, 신민이 복이 없어서 문득 모든 신하를 버리고 가시니, 모두 하늘을 부르짖어 통곡하며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업을 받으시고, 지성(至聖)의 뒤를 이으셨으므로, 만약 한 가지 정사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신민의 설움은 더욱 더할 것입니다. 신이 한 모퉁이 벽지에 치우쳐 있으므로 자상히 들을 수는 없습니다만, 그 사이에 한두 가지 부당한 것이 있습니다.
명종 22년 정묘(1567,융경 1) 5월21일 (을해)
사신은 논한다. 이 무렵에 항간이 떠들썩하기를 ‘만약 부묘례를 시행하게 되면 반드시 이양의 무리를 방환시켜서 다시 서용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근거가 없는 말이었으나 사람들이 다 의구해 하였다. 전 좌상 심통원이 비록 물의에 핍박되어 서반으로 되돌아가기를 주청하였으나 아직도 기회를 보아 다시 입상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심들이 다 안정되지 못하여 장차 무슨 일이 발생할는지 알지 못해 하는데, 이번에 상이 수상의 사면(辭免)을 자청함으로 인하여 바로 윤허하니 온 진신(搢紳)이 서로 보고 놀라며 저마다 상기되었다. 부제학 진식 등이 이같이 적절한 기회에 차자를 올려 상의 뜻을 돌린 지 한 달도 못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변괴[天崩之變]를 만났다. 만약 이준경이 이미 한산한 곳에 물러나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일체의 시사(時事)가 심통원의 수중에 맡겨졌다면 종사가 결국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 다행한 일이다.
숙종 9년 계해(1683,강희 22) 12월28일 (을축)
후(后)께서 갑인년 가을 대상(大喪) 때부터 애훼(哀毁)하신 것이 병이 되었는데, 계해년 12월에 이르러 위예(違豫)한 환후(患候)가 문득 위중해졌다. 애자(哀子)가 밤낮으로 전오(煎熬)하여 무릇 보호(保護)하는 방법을 지극하게 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나, 정성과 효성이 천박(淺薄)하여 신명(神明)께 죄를 얻어 마침내 종천(終天)하는 망극(罔極)의 아픔을 당하게 되었다. 자안(慈顔)을 영원히 이별하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슬프다. 초상(初喪)의 교금(絞紟)·복습(複褶) 등속에서부터 크고 작은 제전(祭奠)에 이르기까지, 무릇 소민(小民)에게 끼칠 백 가지의 폐(弊)는 유교(遺敎)를 준봉(遵奉)하여 힘써 검약(儉約)함을 따를 것이니, 그 길이 어짊과 두터운 은택을 어찌 다만 한 나라의 신민(臣民)만이 공경히 찬송하며 슬퍼하며 사모할 따름이겠는가? 또한 장차 만세(萬世)에 찬사(讚辭)가 있을 것이다. 아! 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보잘것없이 작은 소자(小子)의 몸에 재앙(災殃)이 쌓이어, 미처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갑자기 천붕(天崩)의 아픔을 만났다. 그리하여 그 밤낮으로 우러러 모실 분은 오직 우리 자성(慈聖)뿐이었으므로, 복록(福祿)을 끝없이 받으시어 강릉(岡陵)과 같은 수(壽)를 누리시며, 뜻과 물건을 다해 봉양(奉養)할 것을 바랐는데, 황천(皇天)이 재앙을 내리었다. 근자에 소자(小子)가 병을 얻음으로 인하여 성모(聖母)께 근심을 끼쳐드리자, 더욱더 몸이 상하시어 숙환(宿患)이 갑자기 위중해지셨고, 자리에 누워 있은 나머지 관대(冠帶)의 봉양을 능히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더욱더 운절(隕絶)하게 하였으니, 곧 죽고 싶다. 아! 슬프다. 아! 슬프다.”
하였다.
영조 즉위년 갑진(1724,옹정 2) 9월22일 (임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나는 성효(誠孝)가 천박(淺薄)하여 5년 안에 천붕(天崩)의 애통함을 두 번이나 당했는데,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도 미치지 못하여 마음이 찢어지는 것과 같았다. 지금 재능도 없도 덕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이 자리를 이어받고 나니 밤낮없이 두려운 마음으로 마치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것 같다. 바야흐로 나라 일이 위태롭고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진 때를 당했으니, 장차 어떤 계책으로 이를 구제(救濟)해야 하겠는가? 아!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다. 요즈음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에게는 아침저녁의 밑천이 없는데, 의탁할 데가 없어서 떠도는 사람에게 신포(身布)를 침범해 징수하여 혹은 인족(隣族)이나 혹은 백골(白骨)에게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온 문중(門中)의 역사(役事)를 겸하고 있다 하니, 슬프다, 우리 백성들이 살아서는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신역(身役)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두 왕조(王朝)에서 보살펴온 백성들이 장차 다 죽고야 말겠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니 먹을 것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는가? 양역청(良役廳)이라고 이름을 정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진대, 한두 달 동안에 전연 타당한 대책이 없어 백성의 목숨이 끊기게 되었으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는가마는, 관장할 사람을 마땅히 곧 강구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아! 그대들 중외(中外)의 신료(臣僚)는 선조(先朝)에서 백성을 사랑하던 뜻을 본받고 나의 간곡(懇曲)한 말을 생각하여 나라의 간우(艱虞)를 폐부(肺腑)의 병으로 여기고 백성의 괴로움을 한몸의 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뜻은 모두 제거되고 공변된 마음이 다시 밝아질 것이니, 송(宋)나라 현인(賢人)의 서명(西銘)이 오늘의 약석(藥石)이 될 것이다.
아! 움막집에 사는 백성이 비록 애통한 마음을 구중궁궐에 한 번 진달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목민관(牧民官)에 이르기까지 만약 구활(救活)할 대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다하도록 하라. 말은 비록 갑과 을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참작할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본받아 지극히 기대하는 일을 저비리지 말도록 하라. 승지(承旨)는 이를 대신 초안(草案)하여 중외(中外)에 선포(宣布)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그것을 비망록(備忘錄)에 올려 중외에 널리 알리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세 번 계청하니, 비로소 따랐다.
순조 3년 계해(1803,가경 8) 12월28일 (기축)
이시수 등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국가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이것이 누구의 공덕(功德)입니까? 선조(先朝)의 유업을 주고 받을 때를 당하여 묵묵히 대책(大策)을 협찬(協贊)하여 성궁(聖躬)을 보호하신 것은 곧 우리 자성 전하의 공이었고, 기미에 밝아 간사한 싹을 꺾어 종사(宗社)를 부지하여 안정시킴으로써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을 계도(啓導)한 것도 또한 우리 자성의 공이었습니다. 경신년에 천붕(天崩)의 슬픔을 당하여 애통하고 황급함이 갑자기 닥쳐 국사(國事)를 어찌할 바를 몰라 신 등이 눈물을 흘리며 청하자, 자성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굽어 따르시고, 동조(東朝)에 광림(光臨)하여 조용히 온화하게 수렴 청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원(初元)의 정사를 인도하여 나라가 반석(盤石)같이 공고해지고, 의리를 천명(闡明)하여 일성(日星)같이 밝히셨습니다. 간흉(奸凶)을 물리쳐 조정이 청명(淸明)해지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덕화(德化)가 충만해졌습니다.
위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연산군일기에서 천붕(天崩)은 성종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며,명종실록에서의 천붕(天崩)은 명종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며,숙종실록에서의 천붕(天崩)은 현종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며,영조실록의 기록에서의 천붕(天崩)은 숙종임금과
경종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며,순조실록의 천붕(天崩)은 정조임금의 죽음을 의미하는 기록 입니다. 위에서 말한바 처럼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는 훙(薨)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다른 기록에서도 조선의 임금의 죽음에 대해 훙(薨)이라 기록한 기록도 많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것처럼 정사(正史)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임금의 죽음을 붕(崩)이라 기록하고 있고 다른 학자들의 문집에서도 조선의 임금의 죽음에 대해 붕(崩)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며 또는 조선은 제후와 천자의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누군가의 의도대로 이를 뒤섞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전제군주 시대에 제후가 함부로 제후 임금의 죽음에 대해 붕(崩)이라 말할수 없습니다. 붕(崩)이라 표현하는것 자체가 반역 입니다. 위의 영조실록의 기록을 보면,"아! 움막집에 사는 백성이 비록 애통한 마음을 구중궁궐에 한 번 진달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될 수가 있겠는가? 위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목민관(牧民官)에 이르기까지 만약 구활(救活)할 대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다하도록 하라. 말은 비록 갑과 을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땅히 참작할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본받아 지극히 기대하는 일을 저비리지 말도록 하라. 승지(承旨)는 이를 대신 초안(草案)하여 중외(中外)에 선포(宣布)하도록 하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천자(天子)의 사당인 칠묘(七廟)=구묘(九廟)였으며 또 다산시문집의 기록처럼 황제(皇帝)의 수도인 동경,서경,남경,북경 등이 있는 국가이며
또 기록에서 조선의 임금은 만승(萬乘)의 임금이며, 또 위의 기록에서 조선 임금의 죽음은 붕(崩)=천붕(天崩)이므로 위의 기록에서 "중외(中外)에 선포(宣布)하도록 하라."에서 중외(中外)의 의미는 수도를 의미하는 신주(神州),적현(赤縣),기현(畿縣)인 경기(京畿)
즉 중국과 중국(수도)의 그 이외의 지역(지방)에 선포하라는 의미로 조선의 임금이 천자(天子) 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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