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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송(玄松) 주창균(朱昌均) 회장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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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지난해인 2012년 12월 29일(음력 11월 17일)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신 현송(玄松) 주창균(朱昌均) 회장님을 기리기 위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에서의 회장님에 대한 호칭은 <현송(玄松)>으로 하겠습니다.
또한 여기에 올리는 글의 밑바탕은 우리 회원님이시며 또 현재
<현송교육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계시는 김정일 님께서 정리하시고
2008년 11월에 발행하신 자료인 <玄松 文化財團 33年史(1975~2008)>와
<玄松 朱昌均 論叢-2008>에서 나왔음을 말씀드리며,
훌륭한 자료를 만들어주신 김정일 이사장님께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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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碑石) 제막(除幕) ]
2013년 04월 13일 토요일, 회장님께서 영원히 잠들어계시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서는 현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비석(碑石)을 세우고 제막(除幕)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회장님을 그리는 분들은 이곳을 찾아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면서
다시 기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석의 글은 성균관대학교 교수이신 송재소(宋載邵) 박사님께서 지으셨고,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이신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님이 새기셨습니다.
다음에 송재소 박사님의 글 중에서 일부를 옮깁니다.
< .... 날마다 새롭게 또 날마다 새롭게
탕(湯)임금 뜻을 이어 공업입국(工業立國) 이루었네.
중도에 비바람 몰아쳤지만
꿋꿋한 소나무는 꺾이지 않아
조국 사랑 인재육성에 한 몸을 바쳤으니
푸른 빛 영원히 시들지 않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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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송(玄松) 선생 흉상(胸像) 이전 및 기념실 개관 ]
지난 2013년 11월 7일 현송의 생신을 맞아 유족, 럭비인들, 신안 주씨 회원들
그리고 일신 출신의 선생을 흠모하는 여러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럭비경기장 내
다른 자리에 건립되어 있던 현송의 흉상(胸像)을 이전하고 또한 선생께서 남기신
각종 유품들을 모아 기념실을 개관하였습니다.
이 흉상은 당초 현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5월 우리나라 럭비인들이
힘을 모아 서울럭비경기장 내에 건립하였던 것입니다.
* 다음은 럭비선수 출신인 고(故) 조병화(趙炳華) 시인이
흉상의 기단 앞면에 쓴 헌사(獻辭)입니다.
승리의 요람
지혜와 용맹과 염동
희생과 명예로운 승리
그 숭고한
인간정신이 어린
이곳 우리들 라가의 요람
이 푸른 요람을 마련해 주신
주창균 라가
그 은혜 이곳에 영원 하리
- 염동(念動) : 초자연적 힘, 정신만으로 물체를 움직임
- 라가 : Rugger = 럭비(Rugby)를 하는 사람, 즉 럭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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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업입국(工業立國)의 선봉(先鋒) ]
우리나라의 철강공업의 선구자이시면서 또 더욱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과 학술문화연구의 지원 및 사회복지사업을 펼치시는 등
평생을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신 현송선생님을 기리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현송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선생께서 말씀하신 1998년 2월 17일
“현송교육문화재단” 설립 23주년 기념사 중의 일부를 옮깁니다.
“…… 내가 부산 피난시절에 창업을 할 때에는 남한에는 철강공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과 북한에서 제철소 엔지니어와 책임자로 일했던 나로서는 꿈과 자부심이
대단했었기에 무언가 이루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철강기술자로
교육받고 제1호 기술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조국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창업이념을 <공업입국(工業立國)의 선봉(先鋒)>이라고 다소
거창하게 붙이게 된 데에는 그 같은 연유가 있었다. 그 당시 나와 내 협력자들은 모두들
공업입국의 선봉이라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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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제1부 출생에서 철강사업 까지
제2부 국가산업에의 공헌과 사회적 활동
제3부 인재를 길러낸 토양, 현송교육문화재단(玄松敎育文化財團)
제4부 못 다한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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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출생에서 철강사업 까지
1. 출 생
- 현송은 1921년 11월 7일 평안북도(平安北道) 삭주군(朔州郡) 구곡면(九曲面)
신안동(新安洞) 147번지에서 면장을 지내신 부친 주형규(朱炯圭) 선생과
모친 오동주(吳桐珠) 여사의 3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 신안동은 400여년을 이어온 주씨(朱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송의 댁이
종가(宗家)이었기 때문에 “종가 집 막내아들”로서 어려서부터 근검절약정신과
희생정신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 “신안 주씨(新安 朱氏)”
- 현송의 본관(本貫)은 “신안(新安)”이신데, 여기서의 “신안(新安)”은
중국(中國) 안휘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 신안(新安) 지역을 말합니다.
-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송(宋)나라때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주자(朱子) = 주희(朱熹) : (1130~1200)>선생을 “중조(中祖)=중시조(中始祖)”로
모시는데,
- 우리나라에서의 시조는 1224년 중국에서 고려(高麗)로 망명한
<주자(朱子)>의 증손(曾孫)인 <주잠(朱潛)>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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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력관계
가. 초등학교
- 일찍이 집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집에서 15리(6km) 떨어진
“삭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3월에 졸업합니다.
- 이 때 3학년 때부터 자전거로 등하교를 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훗날의
럭비선수가 될 수 있는 다리의 힘과 또 자전거 수리기술을 익히게 됩니다.
나. 고등학교
-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별도로 구분되지 않았던 때이었는데 평안북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신의주(新義州)에 있는 명문인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7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1940년 3월 졸업을 합니다.
- 이 때 학교에서 마라톤과 럭비를 하게 되는데 신의주고보가 당시
서북(西北)지방의 럭비 최강팀이 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게 되며
또한 훗날 럭비구장을 짓고 대한럭비회장과 아시아럭비연맹회장을 지내게 되는
계기가 시작되며 또한 아주 건강하게 장수(長壽)하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 럭비를 사랑하는 사유 (2004. 10. 12 / 대한럭비협회 총회에서)
(1) 팀플레이 정신, 특히 용감한 희생정신
(2) 정정당당한 Fair Play 정신
(3) 최후 순간까지 감투(敢鬪)하는 정신
(4) 경기 후, 승패를 초월한 우애(友愛) 정신
⇒ 한국이 품위 있고 우수한 민족, 국가가 되기 위하여 청소년은 럭비정신이 꼭 필요하다.
다. 일본 유학
- 1940년 신의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관립(官立) <우베공업전문학교
(宇部工業專門學校) = 현재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學) 공학부의 전신(前身)>에
7.2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1942년 10월 졸업합니다.
* 당시는 전쟁상태이어서 공대생들을 산업전선에 일찍 투입하기 위하여
6개월 빨리 졸업하게 됩니다.
- 고등학교 시절, 마라톤과 럭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현송은 대학에서는
유도와 축구, 바둑, 장기 등등 만능에 가까운 실력을 뽐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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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진출
가. 일본제철 입사
-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의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 = NSC)>의 전신인
<일본제철(日本製鐵)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에 ”조선인 기사 제1호“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나. 귀국과 겸이포제철소 근무
- 입사 이듬해 5월, 교육국장과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조선의 <겸이포(兼二浦)
제철소>로의 전출을 희망하여 귀국하여 제철소의 압연과 후판계로 부임합니다.
- 이 때 더 나은 자리인 본사근무를 그만두고 귀국하려한 까닭은 <야하타제철소>
에서는 전문기술을 익히기에는 좋지만 제철공정 전체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작은 규모의 <겸이포제철소>가 더욱 낫다는 판단을 한 까닭입니다.
- 모범적인 근무와 훌륭한 업적을 보인 현송 덕분으로 <겸이포제철소>에서는
매년 조선인기술자를 1명씩 채용하게 되며 생산량 증대와 원가절감 등에
혁혁한 공로를 세워서 1945년 1월에는 “박판공장장 서리(薄板工場長 署理)”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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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혼과 광복
가. 결혼
- 현송은 태평양전쟁의 말기인 1944년 10월 18일 24세 때,
고향인 평안북도 삭주에서 “강형빈(姜亨斌)” 규수(閨秀)와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회갑이 넘으신 노모가 며느리를
맞게 되는데, 당시는 전쟁으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식량이나 물자도
매우 귀할 때이었습니다.
- 그리고 현송은 “1남4녀”를 두게 됩니다.
나. 광복이후
- 해방이전에는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이후 현송은 부분적인 제조공정만 이해하는 기능공들을 데리고
공장을 운영해 나갔고 또 공산적위대(共産赤衛隊)와 소련인들에 대항하며
오히려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업적을 올립니다.
다. 평양공대 교수와 북한정부 산업성 근무
- 해방 후 <겸이포제철소>는 <황해제철소(黃海製鐵所)>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현송은 1946년 휴직원을 제출하고 새로이 설립된 “평양공대(平壤工大)
금속가공과(金屬加工科)”의 강좌장(講座長)을 맡아 3~4학년생들에게
강의를 합니다.
- 이때의 강좌장(講座長)은 지금의 학과장(學科長)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 또한 한편으로는 북한정부의 산업성(産業省) 금속공업관리국(金屬工業管理局)
압연과장(壓延課長)을 겸직하다가 얼마 후 기술부장(技術部長)으로 승진되어
전국의 제철소와 금속공장을 관리 지도하는 업무를 관할하기도 합니다.
라. 황해제철소 소장
- 1949년 12월 당시 <황해제철소>는 생산량이 감소하고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여
현송이 다시 돌아와 소장 직을 맡아서 운영을 하였는데 이 당시 제철소 종업원이
18,000여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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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25 전쟁과 월남(越南)
가. 월남(越南)
-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현송의 집안은 “지주(地主)의 후손”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으나 “고급기술자”이었기 때문에 제철소 및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는데,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을 하자
북한정부는 <황해제철소>의 주요 기술자들에게 평안남도 진남포로 피난하라는
지령을 하였는데 현송은 도중에 대열을 벗어나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합니다.
나. 피난시절
- 1951년 1월, 부산에서 현송은 가까운 친구가 있는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에 잠시 있다가 배의 Shaft를 녹여서 압축하여
학생들 교복에 다는 단추와 모표(帽標) 등의 용품을 만드는
“부산금속(釜山金屬)”의 공장장을 몇 개월 동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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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업(創業)
가. 신생금속공업사(新生金屬工業社) 설립
- “부산금속”에 있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포탄(砲彈)의 탄피(彈皮)인 놋쇠와
철강고철, 그리고 군수물자(軍需物資)로 쓰이던 알루미늄 고철, 수명을 다한
전투기의 잔해 등이 풍부한 것에 착안하여 당시 주방용품을 생산하고 있던
“동양법랑”의 생산라인 일부를 빌리고 스스로 압연기를 설계하고 만들어서
당시 부족하던 주전자, 냄비 등 주방용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시장에 내놓기가
무섭게 잘 팔려서 엄청난 인기와 이익을 얻게 됩니다.
- 그래서 현송은 1952년 8월 알루미늄공장을 시작한지 채 1년도 안되어
“동양법랑” 부산공장 전체를 사들여 <신생금속공업사(新生金屬工業社)>를
설립합니다.
- 이때가 현송의 나이 31세 때이었는데, 현송은 국내최고의 기술자로서
“이것은 나의 본업(本業)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별*표* 함석과 신생산업(新生産業)
- 지금도 후진국에 가면 볼 수 있듯이 전후복구에 가장 필요한 것이 집이었고
또 당시 형편으로는 함석만큼 좋고 편리한 지붕재가 없다는 것에 착안하게
됩니다.
- 따라서 현송은 1954년 8월,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구 양평동에 스스로 설계하고
제작한 설비를 갖추고 <신생산업(新生産業)>을 설립하고 “아연도철판(함석)”을
생산합니다.
* UN 통계에 의하면 1950년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최빈국(最貧國) 중의 하나로
국민 1인당 GNP가 102달러에 불과했습니다.
- 당시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의 복구와 주택재건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었기
때문에 “아연도철판”의 수요는 나날이 증가했고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설비의 증설을 계속하여 양평동 공장에는 도금기가 4대까지 이르렀습니다.
- 그러나 “아연도철판”의 인기가 좋고 수요도 크게 늘어나자
경쟁회사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 당시 “아연도철판”의 생산능력은 연간 18,000톤이었으며
곧 동남아수출에도 성공합니다.
* 당시 *별*표* 함석의 인기는 대단해서 *별*표* 는 함석의 대명사에까지 이르렀는데
특히 지방에서는 1980년대 초 까지도 계속 찾기도 했습니다.
- 그래서 평소 “남들이 하지 못하는 신제품을 개발해야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현송은 한 단계 도약을 준비합니다.
즉 원래의 꿈이었던 “종합제철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철판가공 산업이 기초소재로 사용하는 “박강판(薄鋼板)“을 국산화하게 되면
국가적으로 공업의 발전은 물론, 철강 산업의 기술적 진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 그래서 현송은 부산에서의 알루미늄제품(1952년), 서울 양평동의 아연도강판
생산(1954년)과 강관생산(1961년), 그리고 오류동에서의 냉연강판 생산
(1967년), 그리고 또 전기로 설치 및 쇳물생산(1976년)에 이르기까지
종합제철로 나아가는 계단을 하나씩 꾸준히 밟아 나갑니다.
다. 강관설비 국산화
- 사업의 방향을 확정한 현송은 1957년, 한국의 실정에 맞는 강관제조설비를
구매하기 위하여 서독으로 날아가는데, 현지에서 세밀한 조사와 기술 분석을
하고나서 수입신청을 하자 당국에서는 “신청을 각하(却下)한다.”는
답신이 옵니다.
- 이는 당시 자전거를 생산하던 K산업이 자전거용 파이프를 독점할 생각으로
관계기관에 압력을 넣어 강관설비의 수입을 각하시킨 것입니다.
- 그래서 현송은 강관설비를 자체제작하기로 하고 회사와 집에 제도판(製圖板)을
마련해 놓고 도면을 설계하게 됩니다. 또한 시장에 나가서 구매 가능한 부품을
구입하고 여기에 맞추어 도면을 수정해나가면서 6개월 동안 밤잠도 자지 않고
설계하여, 설비제작에 3개월, 가동준비에 6개월, 합해서 15개월 만에
강관제조설비를 자력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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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신산업주식회사(日新産業株式會社)
가. 상호(商號) 변경
- 4・19가 일어나던 해인 1960년 8월, 현송은 상호(商號)를
<일신산업주식회사(日新産業株式會社)>로 바꾸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섭니다.
- “일신(日新)”은 유교경전(儒敎經典)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 중에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에서
따 왔는데 즉, “하루하루를 새롭게, 나날이 새롭게, 또 하루를 더욱 새롭게 하라.”
라는 아주 심오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 그리고 현송은 다음과 같은 사시(社是)를 정합니다.
*** 정직 성실(正直 誠實), 인내 정도(忍耐 正道),
신뢰 질서(信賴 秩序), 창의 혁신(創意 革新) ***
나. 강관 생산
-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관제조설비를 설치한 후에
밤낮으로 설계도와 기계를 수정하여 드디어 1961년 3월 1일 양평동공장에서
연산 22,000톤의 연속조관기(連續造管機)의 정상화에 성공합니다.
- 당시에는 상수도(上水道)용 강관만을 생산하였지만 계속하여 신기술과 신제품을
개발하여 후일 유정용(油井用) 강관까지 생산하게 됩니다.
다. 월남전 특수(越南戰 特需)와 고속성장
- 강관공장을 준공한 이듬해인 1962년, 당시 월남전이 점점 격화되면서
“전쟁특수(戰爭特需)”로 월남에 아연도철판을 수출하게 되는데 타 회사보다
우수한 품질과 보다 큰 생산능력으로 독보적 위치의 수출에 힘입어 빠른 성장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곧 60년대~70년대의 <일신>의 고속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 그리하여 1963년 11월 1일 “수출의 날”에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당분간 <일신산업>의 수출실적은 “대한중석”에 이어 2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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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류동 시절
가. <오류동시대>를 열다
- 아연도철판과 강관의 성공적 가동과 생산에 힘입어 현송은 다음단계로
부가가치가 더욱 높은 “냉간압연사업”에 착수하기로 결심합니다.
- 냉간압연시설은 대규모 설비를 필요로 하는 사업이어서 이미 함석과 파이프
생산만으로도 비좁은 양평동공장으로서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따라서 여러 곳의 후보지를 선정하고 검토한 결과 수요(需要)의 중심이면서도
수출항구가 가까운 경인지구(京仁地區)의 오류동(梧柳洞)으로 입지를 정합니다.
나. 외화(外貨) 절약
- 당시 우리나라는 외화(外貨)가 매우 부족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현송은
입지(立地)를 정하고 부지매입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최소의 자금으로 최대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냉간압연공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국산화가 가능한 설비와
외국으로부터의 도입이 불가피한 설비를 나누어 검토하였습니다.
- 당시 비록 아연도철판의 수출호조로 사내 유보금(留保金)이 준비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나 구미일(歐美日)의 외국 기계제작사로부터 설비견적서를 받아
검토한 후에 공장건설에 필요한 외자(外資)도입액을 U$700,000으로 결정합니다.
* 당시 미국유학을 떠났던 선배들의 말씀에 의하면 일인당 외화 소지액의 한도가 U$50에
불과하였으며 또한 항공편은 이용하지 못하고 선박 편으로 미국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다. 냉연강판과 열연강판의 논쟁
- 이러는 중에 냉연공장 건설계획은 또 다른 논쟁에 휩쓸립니다.
- 그것은 바로 “냉간압연(冷間壓延)”이냐, “열간압연(熱間壓延)”이냐를 둘러싸고
빚어진 논란(論難)때문이었습니다.
- 당시 이미 열간압연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쪽에서 “우리나라는 냉간압연시설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을 내세웠고 냉간압연시설을 도입하려는 측은
도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 이 논쟁은 약 4년간 계속되었는데 당시는 “냉간압연”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모두들 우왕좌왕하며 언론과 학계와 그리고 심지어는 국회에서까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 다음은 당시인 1964년 5월 30일자의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입니다.
<..... 연합철강은 냉간압연공장의 건설을 위해 대일(對日) 상업차관을 들여오기로 하고
이에 대한 정부지불보증 승인을 요청했는데 “외자도입촉진위원회”는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이에 대하여 대외확정채무액의 증가로 한은의 공신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을 우려하고 또 “외자도입운용방침”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자도입운용방침”이란 외자 도입 시 한은의 지불보증과 착수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한해 외자도입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
* 한편 당시 저는 공과대학 금속과의 초년생이었는데 학교에서도 관련업체의 담당하시는
분들과 담당교수와 학생들이 참석하여 “냉간압연”과 “열간압연”의 장단점과 효용성을
가리는 세미나를 개최할 정도이었으니까, 참으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 그런데 당시인 1964년은 “대일굴욕외교(對日屈辱外交)” 반대 학생데모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무렵이어서 이 논란의 추이는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일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 <일신산업>은 직접적으로는 끼어들지 않았는데,
그 사유는 <일신산업>은 외자도입(=차관-借款)에 의한 자금조달이 아니고
자가 수출에 의한 유보금으로 설비를 도입하겠다고 수입신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라. 냉간압연강판 공장 준공
- 냉간압연에 대한 찬반 공방으로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현송은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열연박판”으로는 소비자의 고품질요구를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으며 특히 당시는 가전제품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여서 “냉연박판”이 더욱 필요함을 역설하여 결국은 냉연설비의 도입허가를
얻어냅니다.
- 이리하여 주요설비를 서독으로부터 수입하여 1966년 3월 착공된
<냉간압연강판공장>은 이듬해인 1967년 10월 준공됩니다.
- 착공한지 1년 7개월 만에 완공된 연산 10만 톤 규모의 오류동 냉간압연공장
준공식에는 당시의 국무총리인 정일권씨를 비롯하여 많은 귀빈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합니다.
- 냉연강판은 준공 된지 불과 얼마만인 1970년대 초반부터 수출상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반면, 열연강판의 수요는 점차로 줄어들어 결국 공장 문을 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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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업의 확장
가. 중구경 강관(中口徑 鋼管) 제조
- 냉연공장이 준공되는 1967년 가을, 이미 제1호 조관기(造管機)를 국내에서
설계제작 하였던 현송은 조관기 3대를 추가 제작하여 중구경강관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며 또한 당시 낙후된 “저주파(低周波) 용접기”와 “가스 용접기”
에서 일층 발전한 “고주파(高周波) 용접기”를 도입하여 강판과 강관 분야
모두에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여 수요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줍니다.
나. 인천제강소 신축
- 오류동 냉연공장의 1차 확장에 이어서 현송은 곧바로 2차 설비확장을 추진하여
제1호기 냉연설비보다 더 광폭(廣幅) 제품을 생산할 수 있고 품질도 우수한
냉연설비를 미국에서 도입하여 1972년 12월 준공하여 냉연생산능력을
450,000톤으로 증가시킵니다.
- 이리하여 대지가 77,000여 평의 오류동공장으로서는 더 이상 설비확장이
어려워지자, 현송은 수출입이 용이한 인천시 서구 가좌동의 대지 10만 평을
마련하여 신 공장을 설립합니다.
- <인천공장>에는 1975년 초 가동을 시작한 경량 H-형강공장을 시작으로
전기로제강공장(1976년), 중구경강관공장(1977년), 석도강판공장(1977년),
아연도강판공장(1980년), 칼라강판공장(1980년)을 건설하게 됩니다.
다. 부산 강관공장 인수와 확장
- 또한 1977년 6월, 현송은 당시 경영이 어려운 부산의 “동서파이프”를 인수하여
설비합리화와 추가라인설치로 48,000톤의 생산능력을 가진 <부산강관공장>을
가동하여 전국적으로 3개 사업장을 운영하게 됩니다.
라. 민간 최대의 종합철강회사
- 이렇게 하여 현송은 설비의 신설, 개조와 확장을 통하여 1982년 기준으로
총 170만 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국내에서는 포항제철에 다음가는
“민간 최대의 종합철강회사”로 부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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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신제강주식회사(日新製鋼株式會社)와 사업장 확대
가. 기업공개
- <일신산업>은 1973년 7월, 정부의 기업공개정책에 호응하여 주식을 주식시장에
상장하고 기업을 공개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기업으로 나아갑니다.
나. 상호변경
- 오랜 꿈인 종합철강메이커로 나아갈 자신을 얻게 되자 현송은 1975년 5월,
상호를 <일신제강주식회사(日新製鋼株式會社)>로 바꾸어 본격적인 도약을
준비합니다.
다. 미국지사 설립
- <일신산업> 시절인 1970년 9월 강판과 강관을 주된 사업범위로 하는 자회사
<일신강관판매주식회사(日新鋼管販賣株式會社)>를 미국 New York에 설립하고
1975년에는 <일신산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 “Ilssin Steel America, Inc."
- 그리고 계속되는 수출호조와 함께 1975년에는 미국 Los Angeles에도 지사를
설립하여 미국수출은 물론, 해외 거래선의 확대와 선진 철강기업으로서
정보수집의 기지로 활용합니다.
라. 삼창강재주식회사(三昌鋼材株式會社) 설립
- 1975년에는 자회사인 <삼창강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건설공사
현장에서 사용되는 가설재인 “강관비계(鋼管飛階)”를 생산하며 또한 수출산업이
활성화되면서 포장용 자재인 “Steel Strapping Band”의 수요가 급증하자
이에 사용하는 다양한 폭의 대강(帶鋼)을 개발하여 제조 판매합니다.
마. 본사신축
- 종합철강메이커로서의 오랜 숙원사업을 하나하나 실현시켜나가던 현송은
1978년 9월에 약 2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당시 삼양식품이 소유한 종로구
수송동의 옛 "종로국민학교" 부지 1천 평을 매입하여 지하2층, 지상 10층,
옥탑 2층, 연건평 5,500평의 본사 사옥(社屋)을 신축하여 본사와 국내 3개
사업장과 해외지사까지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대기업으로 성장합니다.
- 당시 이 건물은 외모와 내부구조와 실용성까지 두루 갖추어서
대한건설협회로부터 “올해의 건물”로까지 지정되었습니다.
* 2009년 8월, 제가 “아인학당”의 “칠궁(七宮)”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잠시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당시 삼양식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 저의 모교(母校)인
“종로국민학교(鐘路國民學校)” 자리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일신사옥”의 자리는
바로 “음악당” 자리이었습니다.
- 제가 학교에 다닐 때의 음악선생님이 지금도 널리 불리는 “과수원길”을 작곡하신
“김공선 선생님”이었는데, 노랫말은 “박화목” 시인이 지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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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흑자도산
- 승승장구하던 <일신제강>은 지속적인 매출증대에도 불구하고
1982년 소위 “장영자(張英子)-이철희(李哲熙) 어음사기사건”에 휘말려
부도를 맞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 부도당시인 1982년 5월, 자산규모 3천억 원, 그 전해인 1981년의 매출액
1,220억 원, 재계순위 28위이었으며 은행대출도 없이 기업경영에서
“바른생활의 경영자”로 불렸던 현송에게는 청천벽력의 일이었습니다.
- “외화대부(外貨貸付 = 수출신용장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차입하는 방식)”과
평균예금 잔고에 비례해서 “당좌대월(當座貸越)”을 받고 있던 현송에게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전직 은행장이 장씨 부부를 소개하였는데 이들은 처음 만나는
현송에게 “무담보로 자금을 빌려주겠다.”라고 연막을 피우고는 그 대신
“10억을 빌려주면 어음기간만큼의 위험부담을 고려해서 20억짜리 어음을
발행해서 내게 맡겨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 조금 꺼림칙하기는 하였지만 상환기간 이전에 갚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어음의 특성인 만큼 그리 위험하다고는 생각지 않고 어음을 발행해 주게 됩니다.
- 장씨 부부는 이 어음을 할인해서 현금을 만들어 다시 그 돈을 빌려주면서
두 배 짜리 어음을 받고 또 다시 현금으로 할인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자신들의 돈을 불려나갔습니다.
- 그러다가 장씨 부부는 그동안 받았던 어음을 모두 풀었고
“공영토건(共營土建)”을 시작으로 <일신제강>도 부도를 맞게 됩니다.
- 현송은 불법임을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신제강>이 부도처리 되고
사회여론이 악화되자 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서 진정서를 내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당시 공기업이던 POSCO가 일시 관리하다가 동부그룹에
매도되어 <동부제강>을 거쳐 현재의 <동부제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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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제강>이 부도를 맞은 1982년은 온 나라가 온통 이 이야기로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 당시 <일신제강> 뿐만 아니라 “공영토건”, “해태제과”, “삼익주택”, “라이프”,
“태양금속” 등 6개 기업이 도산하였고 조흥은행장, 상업은행장 등 기업인과
금융인 32명이 구속되었으며 권력층의 내부개편이 단행되는 등,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 1982년 5월,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는 대다수 국민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이었고 서민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공황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당시 “장영자(張英子)-이철희(李哲熙)” 두 사람이 유통시킨 어음은 총 7,111억 원
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금융혁신”이 일어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금융실명제”가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 또한 “제5공화국”의 실세였던 허삼수, 허화평 등이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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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시의 생산능력
- 다음은 부도당시의 생산능력입니다.
강관 : 오류동공장(40만 톤), 인천공장(24만 톤), 부산공장(14.4만 톤) = 78.8만 톤
냉간압연강판 : 45만 톤
아연도금강판 : 12만 톤
칼라강판 : 4.8만 톤
전기석도강판 : 12.5만 톤
합계 : 상기 생산능력에 기타 경량 H-형강 등을 합하여 170만 톤의
1982년 당시 “민간 최대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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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국가산업에의 공헌과 사회적 활동
1. 국가산업에의 공헌
가. 외국산 도입설비의 개조
- 현송은 이미 도입한 외국산 제조설비나 시설도 한국적 생산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세밀한 검토를 거쳐 우리 실정에 맞게 개조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 뿐만 아니라 도입설비의 시운전을 위하여 초청한 Operator도 당초 그들이
제시한 일정보다 며칠씩 단축시켜서 기술전수를 받음으로서 한 푼의 외화라도
절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 이 방침은 그 후에도 지속되어 당초 설정한 공기(工期)를 앞당기는 것이
일신의 전통이 됩니다.
나. 설비국산화
- 새로운 설비를 구상할 때는 언제나 현송은 설비의 국산화 비중을 높이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여 외화 사용을 줄였으며 또한 기술자를 해외에 파견할 때에도
파견자의 본분인 기술습득에 주력하되, 틈틈이 해당 공장의 설비를 스케치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지시하여 향후의 설비국산화에 적용하곤 하였습니다.
다. 철강업계 사관학교
- 일신이 보유한 경쟁력의 비결은 바로 “앞선 기술과 첨단설비의 발 빠른 도입”에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타사에서는 생산하기 어려운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의
특화제품(特化製品)을 생산하여 고속(高速)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또한 그는 경쟁우위의 핵심역량과 사업가적 마인드를 가진 최고의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 그래서 일신제강 출신의 뛰어난 인재들은 우리나라의 철강업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철강업계 사관학교> 라는 별칭을 얻기도 합니다.
라. 기능공 양성
- 현송은 1960년대 초에 “한국금속공업협회”, “한국무역협회”,
“한국비철금속공업협회” 등의 이사로 선임되어 활약한데 이어
1964년 9월에는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 운영위원장직을 맡아
기능공 양성에 심혈을 쏟습니다.
- 그리고 이어서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 경인지방(京仁地方)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이 기구가 둘로 분리되어 1969년부터는 서울지방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 또한 일신도 사내에 직업훈련소를 설립하여 필요한 기능공을 양성하여
자체수요를 충당합니다.
- 당시부터 우리나라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하여 매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손재주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국위선양을 하는 데에는 현송의 물심양면의 지원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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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적 활동
가. 일신장학금
- 현송은 철강공업에 참여한 이래, 기술 인력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수한 기술자들이 많이 확보되어야 기간산업을 발전시켜
갈 수 있다고 판단한 현송은 산업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일신장학생(日新獎學生)”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 1962년 시작된 이 사업은 초창기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금속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에서 시작하여 점차 대상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 즉, 현송은 "한국은 공업이 발전해야만 나라가 부강해 질수 있는데,
기능인력 양성을 위하여 공고생(工高生)들을 지원해야 한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공업고등학교 재학생까지 지원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74년 11월 <현송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인재육성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 점차 사업을 확대해 나갑니다.
* 현재 <현송교육문화재단>의 “김정일 이사장님”도 “일신장학생” 출신이십니다.
나. 경제단체 활동
- 1970년대에 들어와서 사회 및 경제단체의 중책을 맡아 기업경영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활약합니다.
- 즉, 경제단체로는 “한국경제동우회(韓國經濟同友會)”와 “한국경영자협회
(韓國經營者協會)“의 부회장 및 ”한국경제인연합회(韓國經濟人聯合會
= 전경련)“의 이사, “서울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의 부회장 등으로 선임되어
다각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합니다.
- 또한 1960년대 초의 “한국금속공업협회(韓國金屬工業協會)”, “한국무역협회
(韓國貿易協會)”, “한국비철금속공업협회(韓國非鐵金屬工業協會)”의 이사를
비롯하여 1970년 2월부터 1982년 12월 까지는 “한국강관협회(韓國鋼管協會)”
회장직을 5대나 연임(제2, 3, 4, 5, 6대)합니다.
- 또한 1975년 7월부터는 “한국철강협회(韓國鐵鋼協會)” 부회장직을
3대(제1, 2, 3대) 연임합니다.
다. 럭비구장 건설 및 아시아럭비풋볼연맹회장
- 현송은 “신의주고보(新義州高普)” 시절, 그 자신이 럭비선수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선수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1973년에는
영등포구 오류동에 국제경기가 가능한 <서울럭비경기장>을 건립하여
한국럭비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앞장섭니다.
- 이 공로로 1974년에는 문교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체육공로상”을 수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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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여름, 현송은 사재(私財)를 털어 한국럭비선수대표단을 이끌고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럭비선수권대회>에 참가합니다.
- 이때 선수들은 각 대학에서 몇 명씩 선발되어 단체훈련도 하지 못하고 비행기에 오른
이른바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습니다.
젊은 패기만 있었지 기초체력도 부족하고 연습도 모자랐으니 팀플레이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대표단은 온갖 수모를 당하며 대회 내내 졸전을 벌인 끝에 꼴찌에서
두 번째의 참담한 성적을 안고 돌아옵니다.
-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굴을 붉힌 채 귀국 비행기에 오른 현송은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즉, 한국럭비의 발전을 위해서 제대로 된 국제규격의 럭비전용구장을 짓기로 한
것입니다.
- 그리고 경기장이 완성된 이후 선수들의 몸짓이 달라져서 마음껏 훈련을 하며
체력과 기술을 다져나가게 됩니다.
- 그리하여 3년 후부터는 <아시아럭비선수권대회> 7인제와 15인제에서
각각 우승을 할 만큼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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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현송은 1970년 11월부터 1983년 1월까지 <대한럭비협회> 회장직을
맡다가 그 후 1983년 1월부터 계속 명예회장을 맡으셨습니다.
- 또한 1974년 스리랑카 콜롬보의 아시아선수권대회 때 열린 연맹총회에서
<아시아럭비풋볼연맹> 회장으로 피선되며, 우리 선수단은 우승합니다.
- 그리고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서울로 유치하는데 성공하여
1976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됩니다.
- 이와 같은 현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나라 럭비인들이 힘을 모아
1988년 5월 서울럭비경기장 내에 현송의 흉상(胸像)을 건립하였는데,
2013년 11월 7일 선생의 생신을 맞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라.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 현송은 1974년 5월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제9대 총재로 취임하는데
2년 후에 다시 재선되어 제10대 총재까지 지냅니다.
“보이스카우트 운동이 단순히 소년단(少年團) 운동으로 인식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학교교육, 가정교육, 사회교육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청소년들의 완전한 인격이
형성될 것이며 이런 면에서 장래 우리사회를 밝게 개척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리더를
양성하는 데에는 보이스카우트운동이 절대 필요합니다.“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시켜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현송이 총재로 취임할 당시에는 회원이 6만 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1년 후에는
15만 명으로 대폭 늘어나는데, 이는 문교부의 협조를 얻어 전국의 교육감을
책임자로 하는 민관협력조직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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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송의 주요 상훈(賞勳)
가. 산업부문
1970. 11 : 수출유공 대통령표창
1973. 11 : 수출유공 은탑산업훈장
1974. 11 : 수출유공 금탑산업훈장
1976. 05 : 한국능률협회 1976년도 한국의 경영자상
1979. 11 : 수출 1억불탑상
나. 과학부문
1972. 08 : 과학 분야 발전유공 국민훈장 동백장
1996. 10 : 대한금속학회 창립50주년 기념 특별공로상
1999. 10 : 대한금속학회 금속상
다. 체육부문
1974. 04 : 대한민국 체육공로상
1988. 06 : 대한럭비협회, 흉상건립 기증
라. 사회부문
1975. 03 :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최고훈장 “무궁화장” 수상
1976. 02 : 이란스카우트 최고훈장 수상
1988. 01 : 세계보이스카우트연맹 최고공로상 “Bronze Wolf"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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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인재를 길러낸 토양, 현송교육문화재단(玄松敎育文化財團)
1. 현송교육문화재단 설립
가. 현송교육문화재단 설립의 배경
- 일본에서 현재의 “야마구치(山口 )대학”의 전신인 “우베(宇部)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철에 입사하여 “조선인 출신 기술자 제1호”가 된 것을 알고부터,
일신의 상호아래 사업을 경영해 나가면서 평생을 철강기술자로서 남보다 한걸음
앞서 시대와 기술의 변화를 읽고 남보다 두 배 노력한다는 신조를 추구한
현송은 “기술제일”, “기술입국” 그리고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였는데
그 결실이 <현송교육문화재단>의 설립입니다.
- 다음은 1998년 2월 7일 재단 창립 제23주년 기념식에서의 현송의 회고입니다.
“..... 나는 기업에서 생기는 이윤은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나를 위해서는
1원도 안 쓰기로 하고 실행해 왔다. 가계생계비는 월급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3년 기업공개 이후부터는 법에 의하여 배당을 안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내가 대한럭비협회 회장직에 있을 무렵이어서 <서울럭비경기장>을 조성하여
아시아 최강의 럭비팀을 만들었고, 우리 세대에 못 다한 한(恨)을 풀기 위하여
일본 등 열강에 지지 않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이 재단을 만들었다. .....”
나. 현송교육문화재단의 뿌리
(1) 일신장학금
- 위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1960년대 초부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하여 차츰 확대해 나간 “일신장학금”이 재단의 한 뿌리가
되었는데, 당시 다른 기업에서 지급하던 장학금은 그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스카우트하려는 목적으로 입사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일신장학금”은 아무런 전제조건이 붙지 않은 순수한 장학금이었습니다.
(2) 서울럭비경기장
- 역시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1973년 7월 18일, 부지 11,769평에 제1차로
잔디럭비운동장과 테니스코트 5면을 완성하여 개장하고 수익사업을 시작한 이래,
차츰 시설을 확대하여 나가면서 사업영역도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다. 현송교육문화재단 운영
- 1975년 2월 7일 문교부의 인가를 취득하고 1975년 2월 13일 법인설립등기를
마치고 사업을 시작한 <현송교육문화재단>의 운영은 설립 시 현송이 출연한
기금으로 출발하였지만 잇따른 현송의 추가 출연 및 서울럭비경기장 일대의
여러 가지 시설과 부지의 임대사업 등으로 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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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송교육문화재단의 발전
<현송교육문화재단>이 현재 시행중인 사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장학금 지급
- 현재 대상이 확대되어 매년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나. 럭비풋볼 진흥 지원금
- 당초 대한럭비협회와 일반 및 대학, 중고교 럭비팀 중에서 선정된 팀에 대하여
지원금을 지급하여 왔으나, 현재는 여러 사정에 의하여 지원금 지급은
중단하였습니다만, 운동장만은 럭비인들에게 무료로 대여하고 있습니다.
다. 현송 주자학상 (玄松 朱子學賞)
- 1990년대 들어서 국민소득이 증대하면서 국민정서가 물질문명에 치중되어
도덕성이 추락하는 추세를 안타까워하던 현송은 우리의 전통문화 진작이
도덕성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주자학 부흥에 일조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 즉, 주자학 부흥이 “인애(仁愛), 신의(信義), 충효(忠孝), 지혜(知慧)” 등
“사덕(四德)”을 진작하고 윤리도덕심의 향상으로 사회기강을 확립하여
건전한 교양인으로서의 지성(知性), 품성(品性), 감성(感性)을 함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데에 있습니다.
- 따라서 1993년 “주자학상(朱子學賞)”을 제정하여 매년 주자학 관련
연구업적이 뛰어난 전공자에게 수여하였습니다.
- 그러나 최근 동양철학의 쇠퇴와 주자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급격한 감소로
그 대상을 선정하기가 어려워서 몇 년 전부터는 격년제로 시상하고 있습니다.
* <주씨 종친회(朱氏 宗親會)>
- 현송은 1974년 5월, 한국의 <주씨 종친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직을 맡은 이래
1985년의 회장을 거쳐 계속 명예회장으로 계셨으며 또한 1993년 5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세계 주씨 연합회”의 초대, 2대, 3대 회장을 역임하고
그 이후는 “영원명예회장”으로 계셨습니다.
라. 현송 공학상 (玄松 工學賞)
- 공학부문의 전문연구자들에 대한 학술문화연구 보조를 위하여 “현송 공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대한 금속・재료학회"의 추천에 의한 금속부문과
”대한 정밀공학회“의 추천에 의한 기계부문의 공학전문연구자에게
상당금액의 상금을 수여하고 지원합니다.
- 현재 금속・재료・기계 부문에 대한 민간단체의 지원이 거의 없는 실정으로
젊은 연구가들이 지원을 받을 기회가 없는데, “현송 공학상”은 관련분야에서
크게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마. 미인장학금 (美人獎學金)
- 현송의 부인으로 지난 2004년 8월 돌아가신 “강형빈(姜亨斌)”여사께서
생전에 출연하신 자금을 바탕으로 불우고아의 장학금이나 생활지원금으로
지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 여사께서는 한국전쟁 중 월남하면서 당시는 잠시 몸을 피했다가 금방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두 딸인 “인경”과 “미경"을 미쳐 데리고 오지 못했는데 이 일이
평생의 한이 되어서 그동안 근검절약하시면서 평생 모아둔 전 재산을 출연하고
두 딸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미인장학금(美人獎學金)”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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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못 다한 내용들
1. 서류정리와 다방면에 걸친 지식
가. 서류정리와 표 만들기
- 현송은 평소 서류정리를 잘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 한번은 담당자가 결재를 받기 위하여 서류철을 들고 사장실에 들어갔는데,
서류상의 숫자가 현송의 기억과 달라 미심쩍어 보이자 수년전에 사본으로 가지고
있던 서류를 즉시 찾아내어 지적한 일도 있었습니다.
- 이는 평소 서류의 분류를 철저히 한 덕분인데 그래서 직원들도 서류정리를
항목별, 목차별로 차분하게 정리하는 습관이 들어서 후에 다른 회사로 옮겨간
사람들도 그곳에서 금방 눈에 띄고, 앞에 나설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 또한 현송은 여러 가지 내용을 쉽게 알아보고 또 비교, 검토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표(表 = Table)"을 아주 잘 만들었는데 이를 보면 모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가 있어서 일신 출신들은 대부분 ”표“를 잘 만듭니다.
나. 메모습관
- 현송은 늘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곳에는
기업경영과 관련된 인사, 기술 자료는 물론 역사와 철학 등 그가 관심을 가진
주요사항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는 습관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 대담하는 중에도
즐겨 그 수첩을 펼치며 적힌 자료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불분명한 이야기로 아는 체 하다가는 즉각 반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출퇴근 시에도 서류를 들고 다니며 차안에서 검토를 할 정도로
업무에 충실하였고 그만큼 현장의 감각에 능한 경영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 이렇게 현송이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일신 사람들도 모두 수첩을
들고 다니며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매년 말이면 당시에는 매우 귀했던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수첩을 구하려고 몹시 바빴습니다.
*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수첩은 주로 일본 상사들이 만든 수첩이었는데
그중에서도 “Sumitomo Shoji(住友商事)"에서 만든 수첩이 조그만 연필까지 끼어 있어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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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글・한자(漢字) 혼용론(混用論)
- 현송은 철강엔지니어로서 또 철강기업의 경영자로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면서도
기술과 경영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와 철학, 정치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독서와 토론을 즐겼는데 재단에 출근하면서 평소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직원들에게 강론하고 또 토론을 하도록 하여 세상사에 대한 식견을 높이도록
하였습니다.
- 그리고 칠판에 “중용(中庸)”의 글귀인 “박학 심문 신사 명변(博學 審問 愼思
明辯 = 널리 배우며, 살펴서 물으며, 삼가서 생각하며, 밝게 분별한다)“을
적어놓고 학습하는 과정은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가. 한글전용론의 폐단(弊端)
* 다음은 현송의 여러 말씀 중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강조하였고 또 우리도 함께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한글・한자(漢字) 혼용론(混用論)”에 대하여 올리려고 합니다.
- <한글전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글은 “배우기 쉽고 문맹(文盲)을 퇴치할 수
있는 첩경(捷徑)”이라고 주장하며 한편으로는 “애국사상(愛國思想)”을
강조하였는데 그러나 그 논리는 “낡은 쇄국주의적(鎖國主義的)이며 또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편견(偏見)과 근시안적(近視眼的인 단견(短見)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국민의 의식수준 저하와 우량 전통문화와의 단절(斷切), 그리고
한중일(韓中日) 삼국간의 의사소통불능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라고
주장하면서 한편, 현송은 “당시에는 공론(公論)도 미흡한 상태에서 서둘러
시행하여 한국의 문화후퇴(文化後退)라는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사건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나. 한자(漢字)의 특징(特徵)과 그 응용(應用)
(1) 한자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서 순간적(瞬間的)으로 인식(認識)이 가능하다.
(2) 한자는 자의(字意 = 글자의 뜻)를 알 수 있다.
(3) 한글과 같은 발음도 할 수 있다.
(4) 상용한자(常用漢字) 2,000자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약자(略字)를 늘려서 쉽게 사용할 수 있다.
(5) 한자, 한글, Alphabet, Hyphen의 네 가지 도구 이외에 상용 외래어까지
다섯 종류의 혼용문을 사용하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글”이 된다.
다. 한글과 한자 혼용문(混用文)의 장점
* 다음은 현송이 평소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1) <한자혼용문>은 <한글전용문> 보다 능률적이고 효율 높은 글이다.
- <한자혼용문>을 100으로 할 때, 중국어(한자)로 번역하면 길이가 30% 짧아지고,
영어로 번역하면 30% 길어진다고 한다.
- 이를 <한글전용문>으로 풀어쓰면 또한 그만큼 길어질 뿐만 아니라
독서속도가 1/4.5 로 줄어들고, 문장표현효율도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결국은 동양문화경쟁에서 밀려난다.
- 한중일 삼국의 한자문화권인구가 세계인구의 1/3인 20억에 가깝다.
그리고 한국관광객의 80%가 한자문화권이므로 한자를 쓰면
관광객이 증가할 것이며 상용한자(常用漢字) 2,000자만 알면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도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 한자교육은 영어, 독일어 교육보다도 실용적이다.
따라서 한자혼용교육을 조기에 실시해야 한다.
- 일본은 초등학교에서 한자 1,006자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의 “石井勳” 박사는 “한자는 세계에서 가장 쉬운 문자이며 두뇌를 명석하게
하고 또한 한자는 21세기의 국제문자가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2) 한자혼용은 한글전용보다 독서속도가 4.5배 빠르고 정확하다.
- 한글은 “표음문자(表音文字 = 소리글자)”일 뿐이며,
한자는 “상형(象形), 표의문자(表意文字) 겸 표음문자(表音文字)“이므로
시각적으로, 순간적으로, 그 뜻을 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 실험결과에 의하면, 한자의 인식속도는 한글문자의 10배 이상이라고 한다.
➜ (0.06초 : 0.7초). 또한 빠르고 뜻이 정확하다.
- “한자와 가다가나(カタカナ)를 혼용하는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독서를 4.5배
많이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나는 일본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한문을 혼용한 일본책 5권을 보는 동안 한글전용의 한국 책은 한권 밖에 볼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지루하다. 한글세대는 이러한 비능률도 모르고
“한글전용에 문제가 없다.”라고 한다. 코가 막히고 답답한 실정이다.
(3) 한자는 정확하고, 깊은 뜻을 표현 할 수 있다.
- 우리말의 70~75%가 한자이며 한자어의 80%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 평균 21개)이다. 따라서 한자가 아닌 한글로는 정확하고, 다양하고, 깊은 뜻을
표현 할 수 없다.
* 예 : 방화 = 放火, 防火, 邦貨, 邦畵, 榜花, 芳花, 訪花, 芳華
➜ 뜻(차례대로) : “일부러 불을 지름”, “불이 나지 않도록 미리 막음”,
“우리나라 또는 자기나라의 화폐”, “자기나라에서 만든 국산 영화”,
“과거에 급제한 사람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지체가 가장 놓은 사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아름다운 꽃을 찾음“, ”향기롭고 아름다움“
- 특히 과학용어, 철학용어, 법학용어는 그에 해당하는 한글이름이 없으므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자가 필수이다.
- 한자를 혼용한 한국어는, “한글”, “한자(漢字)”, "Alphabet", "Hyphen"의
네 가지 도구이외에 "상용외래어(常用外來語)"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글로 발전시켜야 한다.
- 일본은 “히라가나(ひらがな)”, “가다가나(カタカナ)”, "한자(漢字)“, ”Alphabet",
"Hyphen"의 다섯 가지 도구를 편리에 따라 사용하여 독서를 편리하게 하고
있으며 또한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한글 전용령"은 한국어를 비능률적으로 왜곡하였으며,
어휘(語彙)의 퇴보 등 한국어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한국역사와 전통문화를 단절(斷切)되도록 하고 있다.
(4) 한자는 조어력(造語力)이 풍부하고, 단축어(短縮語)로 간소하게 표현 할 수
있어서 대단히 능률적이고 편리하며 예술적이다.
- 한자 2,000자를 알면, 20,000자의 숙어(熟語)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 예 : 梨大(梨花女子大學校), 合參(合同參謀本部) 등
- 한글세대는 한자를 모르는 탓으로 인터넷으로 일본과 중국의 특허(特許),
논문(論文)을 읽을 수 없다. 한자문맹(漢字文盲)이기 때문이다.
한자를 모르면 일본과 중국과의 문화교류(文化交流)도 할 수 없다.
라. 결론
- 한글전용으로 1940년대 80%에 이르던 문맹자가 20~30년 안으로 거의 퇴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글은 초기단계에서는 배우기 쉬우나 다음 단계인 표현력,
어휘력, 사고력 및 다양한 용어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간이나 교육받고도 기초한자(基礎漢字)가 섞인
신문(新聞)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부모성명(父母姓名)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또한 족보(族譜)도 볼 줄 모르는 한자문맹(漢字文盲)이 범람하는 세상이 되었다.
- 따라서 우리나라가 국제화되고 한 단계 더 높은 발전을 이루려면
초등학교에서부터 최소 2,000자의 한자교육을 조속히 실천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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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회장님을 기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인이되신 현송을 다시 한번 기리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신과 저는 몇가지 인연이 있는데, 저희 부모님이 고향에서 정혼 한후 1.4 후퇴 때 함께 월남 하시다가 대구에서 헤어져 부산에서 다시 재회 하셨는데 당시 아버지 대학 동기가 신생 금속에 계셔 신생에 들렀다가 주회장님을 만나 냄비 등을 선물받아 살림을 시작하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입사전 중경단 방위로 복무 중이었는데 현송의 아들 주종남과 4개월 남짓 함께 근무 하면서 종씨라 서로 관심을 갖고 친밀하게 지냈지요. 일신 입사 후에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도 같은 길을..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주사장님의 일신과의 인연은 아버님부터 본인 그리고 아드님까지 이어지니 굉장합니다. 저도 학교때부터 이어진 인연이 희로애락이 모두 점철되어 있어서 감개무량하여 이 글을 썼는데 몇 달 걸렸습니다.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일신에서의 계급이 준사원-사원-과장대리(대리)-과장직무대리-과장-소장직무대리-소장을 거쳐서 동진과 동부에서 차장-부장대리-부장-이사대우-이사를 거쳤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호칭을 거쳤는데 정작 회사를 그만두고는 상무-전무-고문-사장을 거쳤으니 아직 붙여보지 못한 직위는 부사장과 회장입니다. 둘 다 앞으로 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니 아쉽습니다.ㅎㅎ
학장님의 노력에 다시 한번 옛이야기를 눈에 보는 것 같습니다. 일신에서 만 6년 5개월, 그 아스라한 추억이 주마등 처럼 스쳐갑니다. 그 때 배웠던 철강 무역이 지금의 업이 되었고, 그 때 맺었던 인연이 지금의 생활의 근간이 된 것을 보면 저와 일신의 인연도 우연은 아닌것 같습니다. 정리해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신에서 근무했던 분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겠습니다만, 위에서 말씀드렸던 표 만들기와 메모 습관과 또 철강업계 사관학교라는 표현에 모두들 공감합니다. 그래서 조리있게 또 조직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그 곳에서 배운 경험과 실력이 그 이후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쳐서 일신 출신들은 대부분 그리 잘못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고 또 주 회장님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위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학장님 11/7 추모식 끝내고 같이 점심 하면서 카페에서 보자고 하시더니 할말이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생생하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추억에 젖어서 한참동안 생각 또 생각 ... 학장님이 오류동 공장 생산과장 부임 하면서 그때
여러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후처리 생산계획서 중 0,23 골판 (함석) 도금공장에 생산의뢰 하면서 수요가들 독촉 때문에 생산을지켜 보면서 "박화동 직장님" 보고 빨리 부탁한다고 ..... 지금 그 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보고 싶습니다
고 대장님, 박화동 직장님을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훌륭한 분이신데 말씀대로 지금 어떻게 보내시는지....저는 오류동공장 어느 것 하나도 정들고 관심 가지 않는 것은 없지만 특히 그 도금공장에 관심이 많아서 철판도 밀어넣어보고 도장 찍는 일도 해보기도 하고 또 품질이나 라인 개선에 신경 썼었는데,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아연부산물을 다시 정제(리사이클링)하는 것도 추진하였고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일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 해도 핫코일에 관련된 일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