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천의 성거산 자락에 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교우촌은 현 북면의 소학골과 목천의 서들골로, 이들은 박해기는 물론 전교 자유기 이후까지 변함없이 신앙 공동체가 유지된 정주형 교우촌이요, 구성원에서 볼 때는 신자 공동체형 교우촌이었다. 반면에 그 인근에 있던 목천의 장자동, 북면의 복구정, 병천의 공심리, 북면 베장골 등에도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전이형 공동체요 혼거형 교우촌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처럼 성거산의 소학골과 서들골은 보기 드문 박해기의 정주형․신앙 공동체형 교우촌이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거산 성지는 1860년때 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서덕골, 서들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교우촌(공소)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에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 사목 방문을 하면서 거쳐가는 경로였다. 먹방이 교우촌은 서덕골 바로 이웃에 있다.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할 때, 성거산의 소학골과 서들골은 1850년 이후 사제들의 사목 순방을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1861년 10월 전국이 8개의 지역 본당으로 구분되기 이전까지는 최양업 신부, 다블뤼 신부, 메스트르 신부, 페롱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이들 교우촌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했는데, 메스트르․페롱 신부와는 달리 최양업․다블뤼․프티니콜라 신부는 사목 중심지를 소학골에서 가까운 진천 배티와 동골 교우촌에 두고 있었다.
서덜골 이웃의 묵방이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거산 일대의 교우촌(공소)은 교회측 기록에서 모두 7개로 나타나지만, 실제는 5개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일제 치하인 1910년대 이후에는 공소 이름이 교우촌이 아닌 리(里) 단위로 나타나는데, 이때의 리 단위 공소는 이전 교우촌의 한곳을 지칭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즉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1910년 이후 먹방이, 서덕골, 매일골 공소는 석천리 공소로, 소학골, 사리목 공소는 도촌, 납안리 공소로 봉합되었을 것이다.(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교세통계표)(차기진)
성거산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교우촌 설립 현황은 다음과 같다.(설립순)
1) 서덕골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 목천면 송출리
2)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28명 : 목천면 석천리
3) 소학골 교우촌(1888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14명 : 북면 납안리
4)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 목천면 송출리
5)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신부)
6)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 베드로 신부) 112명 : 목천면 석천리
7) 도 촌 교우촌(1919년, 공 베드로 신부) 110명 : 북면 납안리
8)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 베드로 신부) 51명 [출처 : 성거산 성지 홈페이지]

최초로 공소가 이루어진 서덕골과 같은 해에 먹방이 교우촌도 두세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신자수 128명이라는 적지 않은 크기의 공소였다. 이러한 통합·변모 과정에서 이 일대의 교우촌들은 충청도 일대를 사목하던 두세(Doucet, 丁加彌)신부으 관할 아래 있다가 1887년에는 일시 드게트(Deguette, 崔東鎭 , 당시 강원도 사목) 신부의 방문을 받았다.
목천 지역의 순교사는 1866년 음력 10월부터 1871년 무렵까지 지속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모두 23명의 순교자가 목천 지역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성거산의 소학골과 흑성산의 장자동에 거주하다가 병인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이 7명이고, 정묘년 이후 소학골·복구정·공심리·베장골 등지에서 체포된 순교자들이 8명이었다. 그리고 성거산의 서들골을 포함하여 목천 지역에 거주하다가 타지로 피신한 신자들 중에서는 모두 8명이 정묘년 이후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먹방이 교우촌에는 순교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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