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
제목 최선을 다하라
본문 빌립보서 1:20-24
인도의 한 여인은 영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일이지만, 성실하게 일함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이 그를 향해서 천천히 하라, 게으름을 피우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아들은 학교에서 탑을 차지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반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미움을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엉터리 같은 세상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삶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나 시대조류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옥에 갇혀 있어서 인간적으로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을 목표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부끄럽지 않으려면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야할지도 중요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이타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최선을 다함은 위험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민족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그의 서시를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민족 앞에서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에도 꺼림이 없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금 신상 앞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졌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신자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역린이란 영화에서 학문 경연을 자주 하던 정조는 신하들에게 중용 23장을 외우느냐 묻습니다. 아무도 외우는 자가 없었지만, 서책을 관리하던 사람이 나직하게 외웁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직 작은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느니라.”
드라마에서 요양사가 케어자의 요양일지를 꼼꼼하게 써서 일을 그만둘 때 남겨줍니다. 도움 받은 사람은 그의 성실함을 보고 우리 회사에서 일할 것을 제의합니다. 나중에 손녀와 결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도 맡기신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세상이 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오리 떼라면 우리는 한 마리의 백조입니다. 백조는 오리 궁둥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럼 없어야 합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라
20절 하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은 아무 일이든지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함이 바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바울은 도둑질이나 도박하다가 잡히는 부끄러움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최선을 다하지 못함을 더욱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20절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함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있고,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도 육신을 가진 자였으니 옥중생활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오늘의 교도소처럼 편의시설을 갖춘 곳이 아닙니다. 지하여서 어둡고, 눅눅하고, 냄새가 납니다. 춥고 배고프고 뼈마디가 쑤십니다. 흉악한 범죄자들 사이에 끼어 있으려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바울도 자유로운 삶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출옥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면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21절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순교의 제물이 되더라도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갇혀 있음은 물론 생명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의 삶의 주제는 언제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함이 삶의 의미였고 전부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어떤 혜택을 입을 것이냐에 있지 않고 자신으로 인하여 주님이 높아지는 데에만 삶의 방향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매우 민감합니다. 교회에 나오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 주일예배 때문에 회사 친목회나 가족 행사에 빠지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에 대해 고민이 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까에 신경을 씁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여기실까’를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드릴까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향해 최선을 다하라
바울은 교회를 향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러나 그가 살아서 육신으로 남아 있다면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살겠다고 했습니다. 24절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여기서 너희는 빌립보교회입니다.
바울은 사형집행을 면하게 되면 그 몸으로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살겠다고 합니다. 교회를 향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할 것이니”라고 했고, 빌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교회를 위함이었고 성도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5절에서도 다시 한번 함께 살게 되면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 진보와 기쁨을 회복하는 일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잘되고 교인들이 잘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김치성 장로님 모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늘 감동이 됩니다. 불편한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예배당으로 오시는 서증석 집사님과 허업덕 집사님은 최선을 다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찬양도 앞에 나와서 부를 때만 아니라 회중석에서도 최선을 다해 불러야 합니다. 교회를 가꾸고 청소하는 일, 헌금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모두가 그러해야 합니다.
나도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지만, 옆 사람도 격려하고 일으켜서 최선을 다하여 섬기도록 하면 더욱 좋습니다. 기러기는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뒤에 있는 자가 바람 저항이 많은 앞자리로 바꾸어 가면서 낙오 없는 비행을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까?
결론/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큰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최선을 다하며, 교회 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차선은 없습니다. 최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