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22 - 호구(虎丘)를 생각하고 옛날 북문이었던 성문을 찾아 구경하다!
2023년 26일 쑤저우역 북광장에 있는 호텔을 나와 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소에서 호구
(虎丘)로 갈지 아님 옛날 쑤저우성의 북문이었던 성문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성문을
먼저 보기로 하는데 저 호구는 옛날 쑤저우에 처음 왔을 때 한번 구경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왔을때 후추(虎丘 호구) 에 도착해 올라가니 매표소의 호구공원 입장료는 40元 이었던 것 같은데...
후추 (虎丘 호구) 는 옛날 "오나라 왕 합려의 무덤" 이니 우리가 계단으로 산을 오르니 가마를 타랍니다?
중국에서는 관광지의 산길은 모두 흙길이 아닌 돌 계단 으로 되어 있는게 언제 생각해
보아도 특이한데.... 무시하고 걷자니 5분도 안되어 한 우물이 나타나고
이른바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그 우물 "감천" 의 유래가 이 우물이랍니다. 글쎄.....
내가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귀에 닳도록 들어 왔던 그 "지성이면 감천" 이란 말의 유래가 우리나라
속담이 아니고 중국의 이 우물 이었다니? 하기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나 오월동주(吳越同舟),
아전인수(我田引水) 등 사자성어(四字成語) 는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보이느니 너무 초라해서 좀 허무하기도 하고 두꺼비 처럼 생긴 돌 도 보이는데, 글쎄 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중이 혼자서 팠으니 오히려 변변찮은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런지도모르겠는데...
지성(至誠) 이면 감천(感天) 이란 속담은 옛적에 땡땡이 중이 절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
까지 가기 귀찮아서 절 가까이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동료 중이 그긴 물이
나올 땅이 아니니 포기하거라! 만일 물이 나오면 내가 두꺼비가 되어도 좋다고 극언을 합니다.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오랜 세월 우물파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물이 나오고 그 중은 두꺼비가 됐다나요...
다시 2 - 3분 더 걸으면 길가에 초라한 모양새로, 넓이 5cm 간격으로 일자로 갈라진 5m 정도의
바위 가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호랑이를 내리친 진시황의 검이 바위를 쪼갠 ‘시검석 (詩劍石)’ 이라네요?
척 들어도 허황된 것이니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란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또 5분여를 걸어 올라
가니 넓고 평평한 바위‘천인석’ 이 나오고 그 앞이 이른바 ‘젠츠 ( 檢池 검지 )’ 이니 협곡인 데, 진시황이
오나라 왕 합려의 검 3,000정(청동검)이 탐이나서 무덤을 파헤친 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오왕 합려가 죽은 후에 능이 호구산에 조성되었으니 합려의 아들 부차는 능의 위치를 아는
이들이 후일 도굴할 것을 우려해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을 연회에 초대한후 취한
틈에 죽이니, 그들이 모여 앉았던 바위에 피가 스며 붉게 물들었다는데..... 이를
천인석 (千人石) 이라는데, 실제로는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유문암이기에 붉은 것이랍니다.
와신상담 [臥薪嘗膽] 의 고사에서 보듯이.... 소주의 오나라 왕 합려가 항주의 월나라를 침공하나
구천에게 패배했으며, 합려의 아들 부차가 장작 위에 자며 그 원수를 되새기니 구천이
공격하다가 패하고 회계산에서 항복하니 아들 부차가 아버지의 한을 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 오나라 왕 부차가 아버지 합려를 위해 조성한 무덤이 이 호구(虎丘)라는
데... 실제로 청동검 3천자루 를 묻었던 것일까요?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흰호랑이 가 나타나 묘를 지켰다고해서 후추 (虎丘 호구) 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호구산의 2번째 산문인 단량전(斷梁殿)은 6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유적으로,
원(元) 대의 건물이니.... 두 대들보를 이어 만들어 하중을 분산시킨 것이 특징
이고 내부에는 호구산의 역사와 호구탑의 축조를 설명하는 4개의 비석이 있습니다.
다시 바위를 돌아서 5분을 오르니 우뚝 솟은 전탑으로 소위 ‘후추타( 虎邱塔호구탑)’ 라고 불리우는
데.... 높이가 47m 요, 7층의 8각탑으로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으며 진시황과
후대의 손권이 3천자루의 청동검이 탐이나서 젠츠 ( 劍池 검지 ) 를 파느라 지반이 침하된 탓일까요?
도심 중북부에 위치한 원옌스(운태사) 후치우 탑(虎丘塔, 호구탑) 은 '중국의 피사의 사탑이라
불리니 실제로 색깔도 비슷하고, 연대는 훨씬 더 오래되었는데 오대십국 시대 오월
정권 하에서 건설이 시작되어 반세기 후인 961년 완공되었으며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탑을 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라는 시를 남겨 유명해졌습니다.
기반이 돌 반, 흙 반으로 지어졌기에 3.5도 기울게 되었으며, 명청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끝에
1957년 시멘트를 주입하여 안정시켰다는데, 높이는 47m, 무게는 7,000톤에 달하며
본래 꼭대기에 올라가 전망을 볼 수 있었으나, 안전과 보존 문제로 2010년 부로 금지 되었습니다.
이곳은 경치가 좋아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데 산허리 까지 공원으로 꾸며져서 산책을 하자면
반나절은 잡아야 할까 본데..... 이곳 후추타(호구탑) 이 소주의 유명한 관광지 인데다가 또
그 구성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다보니 관광객의 절반은 한국인 단체 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기 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 정류소에서는 거의 모든 버스가 다 북문인 성(城)에 가는 것 같으니 올라
타서 두번째 정거장인 핑먼(平門)에 내리는데.... 중국은 땅이 넓어 그러지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소 구간 거리가 우리나라 보다 훨씬 긴지라 버스가 너무 내려왔으니 다시 오던 길로 올라갑니다.
100여 미터를 걸어서 쑤저우 미술관 앞 광장에 도착하니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데....
옆에 보니 지도자가 있어 구령에 맞추어 열심히 연습을 하는데 그렇다고 태극권(太極拳) 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도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보니 중국은 10차선 정도 도로라면 도로는 편도 2차선씩
4차선에 불과하고 화단이 3개니 2차선에 가깝고 오토바이 도로가 양쪽에
있으니 2차선이며 또 인도가 양쪽에 넓게 자리하니 2차선이 넘어 3차선에 가깝습니다?
그러고는 길가에 자전거가 아주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는데..... 아마도 돈을 내고 타는 자전거로 다른 곳에
반납해도 되는것 같으며, 오토바이는 앞쪽에 천으로 둘러친게 먼지나 흙 또는 추위를 막기 위함인가 봅니다?
7~8분을 걸으니 드디어 큰 강이 나오고 거기 강 이쪽에 성문이 서 있는데.... 여긴 현재 쑤저우
(소주) 에 단 하나 남아있다는 성문으로 북문인가 본데, 내려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 문은 사람이 드나든다기 보다는 강(운하에서 배를 타고 쑤저우로 들어오는 문인가 봅니다?
이 도시 쑤저우(苏州 소주) 에는 쑤저우역과 쑤저우베이역이 있고 쑤저우항은 중국
내에서 유명한 큰 항구이며 버스는 여름과 겨울철에는 2 또는 3위안이고
봄, 여름은 1위안이라 저렴하며 그리고 쑤저우 지하철은 모두 7개 노선에 달합니다.
아열대기후로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춥고 도시 북쪽으로는 양쯔강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 타이호, 양청호, 진지호 등 여러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끼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상하이, 북서쪽 난징, 전장, 창저우, 우시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후저우, 항저우 등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경제력이 장쑤성의 성도인 난징과 비슷한 수준이고 관광산업과
공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미국의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 코스트코 (开市客) 점포가 후추구에 중국 본토
에서 두번째로 세워졌고 중국산 전기버스 모델 하이퍼스 시리즈 버스 제조 회사인 하이거의 본사가 있습니다.
상고시대에 월족의 일파인 백월족(白越族) 의 땅이었으며 상(商)나라 말기에는 희성 주씨의
수령인 고공단보(古公檀父)의 아들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현명한 계력(季歷) 에게
양보하고자 섬서성 기산의 주원을 떠나 남쪽으로 달아나 장강 이남의 고소(姑蘇)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구오(勾吳) 혹은 공오(工吳) 라고 칭해지는 오(吳)나라 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周) 간왕 15년(기원전 585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오(吳)나라 군주인 수몽(壽夢)이 칭왕
을 하고 패권을 다투던 초(楚)나라를 견제하려고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쑤저우는 수도로서 기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부차가 다스리던 오나라 입니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으로 주(周) 영왕 12년(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으며 주 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가 즉위하면서 고소성을 새롭게 고쳐
쌓았고 주 원왕 3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의 영역에 들었습니다.
주(周) 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
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으며 초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의 봉토가 되었고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과 항연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었습니다.
통일후 진시황이 초군(楚郡) 을 설치해 군현제가 실시되었으며 초군은 훗날 구강군, 장군(鄣郡), 회계군으로
분할되었는데 진시황 21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룩해 전국을 36개 군과 그 하위의
현으로 분할해 다스렸으니 고소 땅은 회계군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고소에는 오현(吳縣) 이 설치되었습니다.
진 이세황제 원년(BC 209년), 항연의 아들과 손자인 항량과 항우 숙질은 이곳에서 진(秦)나라에 대항
하기 위해 거병했으니 진나라를 멸한 뒤 초한쟁패기에 항우의 봉토인 서초에 속했으며 한고조
5년(기원전 209년),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를 멸하고 장수 관영 (灌嬰)을 파견해 차지했고 그 뒤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초왕에 봉했다가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사촌형 유가를 형왕에 봉합니다.
한헌제 흥평 2년(195년), 손책(孫策)이 엄백호(嚴白虎)를 쫓아낸뒤 주치(朱治)에게 오군을 다스리게하니
손책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손권이 오(吳)나라를 세우면서
강남이 개발되었고 쑤저우의 경제도 발전하였는데 특히 양쯔강 일대의 비옥한 환경, 동서남북
모두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유리했으며 손권의 손자인 손호 대에는 오흥군 소속이 됩니다.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한 뒤 고소의 이름을 따 소주가 되었다가 오주를 거쳐,
다시 오군이 되었으며..... 당나라 대에 이름이 소주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리고 강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강남동도 소속이 되었습니다.
특히 송(宋)나라가 들어설 무렵이면 이미 경제력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니....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이 도시에도 규모가 큰 신라방이 있었을 정도로 강남지방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전류가 오월왕이 되면서 오월의 영토가 됩니다.
주원장은 이곳 쑤저우의 잠재력을 두려워해서 강남성 소속으로 두어 막대한 세금을 매기고 부유한
가문을 난징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쑤저우를 탄압했지만
그러나 발달할 대로 발달한 도시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고, 쑤저우의 명성은 명대에도 이어집니다.
쑤저우는 경제력을 보면 다른 도시와 단위가 다른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여주니. 명나라 때 수도 베이징
이나 난징의 인구가 100만에서 120만 선이었다면 쑤저우의 인구는 200만에서 240만에 달했습니다.
청나라가 건국된 이래 강소성 소속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가
점령하였고, 나중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중일전쟁 당시에는
한산사와 더불어 소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던 운암사가 파괴되었고, 호구탑만이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도시 내부를 가로지르는 운하 때문에 동양의 베네치아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으니 베네치아
와 다른 동양적인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천국에 빗댄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 그러나 쑤저우시 일대에서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현대건축물이
여러 채 세워지고, 많은 운하가 메워지면서 안타깝게도 옛 정취가 많이 사라진 편이랍니다.
서양의 여행 가이드북인 론리플래닛에서도 이에 대해 엄청난 혹평을 남겼는데.....
그나마 쑤저우 근교에는 좀 더 원형을 보존한 퉁리, 저우장 등 운하 도시
들이 남아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쑤저우 근교로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도 많이 있어 정원의 도시라고도 불리니 대표적인 정원들은
쑤저우 4대 정원(창랑정, 유원, 사자림, 졸정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오래된 도시답게 4대 정원과 같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산사 등 명승고적들도 많습니다.
오나라 왕 합려가 천하를 얻기 위해 만든 간장·막야 설화와 관련이 있는 호구산의 검지 (劍池) 도
유명한데..... 월나라 사람에게서 명검을 얻은 합려는 그 예리함을 시험하기 위해 호구산의
바위를 내려쳤고, 두동강이 나자 흡족해 했다는 설화가 있으니 이는 현재 시검석 (試劍石)인데,
실제로는 풍화 작용에 의해 갈라진 것이며 후일 왕희지가 검지 글자를 새긴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