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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넷째 날, 찬란한 햇살과 함께 볼로냐의 아침이 밝았다. 첫 순례 일정으로 카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 오전 11시에 미사가 있다. 볼로냐에서 2시간을 넘게 달려 성녀 카타리나의 고향인 시에나로 갔다.
카타리나 성녀는 1347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6살의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의 현신을 보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자 16세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3회 회원이 되었다. 카타리나는 ‘아비뇽 유폐’ 사건 때 그레고리오 11세를 설득하여 교황청을 로마로 귀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그레고리오 11세의 죽음 후 대립교황이 난립하여 가톨릭교회가 분열하려 하자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하여 교회의 화합을 추구했다. 1380년 33살에 세상을 떠난 카타리나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시에나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시에나의 성벽을 따라 성 도미니코 성당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동네에 꽃을 파는 장날인지 예쁜 꽃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14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성 도미니코 성당은 외부뿐 아니라 내부 또한 유럽의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화려함이나 장식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박하고 심플한 모습이 조용한 느낌의 신비한 매력을 풍겼다.
성 도미니코 성당
성 도미니코 성당 내부
우리는 먼저 카타리나 성녀의 두개골이 모셔져 있는 ‘성녀 카타리나 경당’ 뒤편에 마련된 작은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신부님 강론
카타리나 성녀가 어렸을 때 예수님의 현시를 보고 어린 나이에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로 살 것을 결심한다. 교회가 갈등과 대립으로 분열의 위기에 놓여 있던 시기에 성녀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서신을 주고받는 등 영향을 미쳐 교황좌의 아비뇽 유수가 종식되었다. 카타리나 성녀가 교회를 구하고 일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개인의 힘과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해 주신 만남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모습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녀께서는 기도하면서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하느님의 이끄심 대로 살아가셨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을 만나 내가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탈리아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성경에서 이웃은 지금부터 언제 어디서 누구든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이웃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제 기도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제대 앞에서 하는 기도만이 기도가 아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이야기는 내 삶 안에서 만나는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내어 주는 모든 것들이 기도임을 의미한다.
내가 앞으로 만나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야 되는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삶에 불림을 받았고, 그 삶에 함께하고 있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자세가 은총이고 축복이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서 살고 있는지,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감사를 하자. 이 시간 우리는 아버지의 큰 사랑 안에 함께하고 있는 은총과 축복의 시간임을 새삼 더 느낀다. 초대받고 함께하는 모든 만남들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런 은총의 삶에 우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 주어지는 삶의 모든 순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도 카타리나 성녀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안에서 감사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또한 우리의 삶이 그분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잠시 기도하자.
미사 후 도미니코 성당을 순례했다. 여느 성당처럼 성전의 벽면에는 성녀 카타리나와 관련된 제단화와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성녀 카타리나 경당’ 중심에 있는 제대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두개골이 모셔져 있다. 성녀는 로마에서 선종을 했는데, 그녀의 시신을 둘러싸고 로마와의 분쟁으로 성녀의 머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만 시에나에 보내어 이곳 도미니코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녀의 몸은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모셔져 있다. 성인들은 죽어서도 또 죽음을 당하는 듯 하다.
성녀 카타리나 경당
‘성녀 카타리나 경당’ 바로 오른쪽 벽감에는 로마에서 성녀의 머리를 모시고 올 때 부착했던 금박을 입힌 청동 흉상, 성녀의 오른쪽 엄지손가락, 성녀가 속죄한다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채찍질할 때 사용하던 ‘편태’ 등 성녀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성녀가 매일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환시를 체험했던 장소인 경당에는 그 내용들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카타리나 성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의미는 성녀는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든 모르든 늘 만나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카타리나 성녀는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신 당신의 말씀을 늘 실천한 성녀를 칭찬하셨다는 것이다.
카타리나 성녀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환시를 체험했던 장소(경당)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 보이는 시에나 대성당
도미니코 성당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카타리나 성녀의 생가가 있다. 성녀의 집은 마침 결혼식이 있어서 순례 일정을 바꿔 점심 식사 이후에 하기로 했다.
카타리나 성녀의 생가
카타리나 성녀의 생가에서 다시 골목길을 걸어 점심식사가 예약된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시에나는 언덕 위에 세워진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작은 도시로 골목길이 미로처럼 많았다. 중국집 역시 골목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국 음식은 우리 입맛과는 다르지만 마파두부, 계란요리, 닭고기, 야채요리 등 여러 접시가 회전판 원탁 테이블 위에 차례차례 올려졌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어보는 중국음식은 그런 대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카타리나 성녀의 집 방문 전에 시에나의 중심이 되는 캄포 광장에 먼저 들렀다. 캄포광장에 진입하자 가장 먼저 고딕양식의 푸블리코 궁전과 102m의 만자탑이 눈에 띄었다. 푸블리코 궁전은 현재 시청과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청의 정면에는 라틴어 ‘IHS’가 새겨진 둥그런 로고가 붙어있다. 예수회에서 사용하는 로고인데,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구세주다’라는 뜻이다. 시에나가 신앙심이 굉장히 깊었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캄포광장
넓은 캄포광장 바닥은 붉은 벽돌 바닥을 하얀 돌로 9개의 선을 그어 조개 모양의 9개 공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는 중세 시에나를 통치한 9인의 위원회를 상징한다.
또 시에나는 마리아 신심이 굉장해서 매년 7월과 8월 두 차례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전통 경마대회인 팔리오 축제가 캄포광장에서 열린다. 시에나의 9개 지역을 대표하는 기수들이 중세복장을 한 채로 안장없이 말을 타고 광장을 질주하는 독특한 축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팔리오 축제로 그때가 되면 인근 호텔은 축제 3~4개월 전에 모두 매진된다고 한다. 캄포 광장에는 사람도 많고 광장 둘레에 카페와 음식점 등 노점상도 많았다. 많은 여행자들이 따스한 햇살을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캄포광장을 떠나 성녀 카타리나의 생가로 갔다. 성녀의 집은 카타리나 성녀가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후 이 자리에 있던 안토니오 성당을 허물고 성녀의 집 입구를 확대하여 1947년에 다시 건축하였다.
성녀의 집터에 지은 성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닫아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성당 맞은편에 있는 기도실은 문이 열려있어서 다행히 들어갈 수 있었다. 예전에 카타리나 성녀 가족의 주방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성녀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실이다. 성녀의 식구가 많아서인지 주방이 컸다. 당시의 주방 바닥 대리석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곳 주방은 성녀가 여섯 살 때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한 장소라고 한다.
카타리나 성녀의 집 주방
제대가 차려진 제단화 속에는 성녀 카타리나가 돌아가시기 5년 전 피사 성당에서 미사 중에 예수님의 거룩한 오상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녀의 오상은 특이한 것이 생전에는 그녀 자신 외에 아무도 볼 수 없었으며 임종이 다가오자 오상이 확연히 드러났다.
제대 아래 철창으로 되어 있는 곳은 화덕이었던 곳인데, 성녀와 관련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적 사건이 있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쾌활하고 밝은 성녀가 장난을 치다 이 화덕에 떨어졌는데 불구덩이 속에서도 상처 하나 나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자리에 제대를 만들어 놓았다.
주방 양쪽 벽면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신비체험에 대한 장면들과 교회 분열의 위기를 해결하는 활동 장면이 작품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의 영혼 약혼식,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관을 선택, 성모님이 안고 계신 아기 예수님을 성녀에게 내어주는 장면 등이 있다. 또 그레고리오 11세의 죽음 후 대립교황이 난립하여 교회 분열의 위기에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하여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황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내용의 작품이 있다.
성녀 카타리나의 집 순례를 마치고 성당을 둘러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목적지인 몬테 올리베따노 베네딕토 대수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리베따노 수도원으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푸른 언덕과 포도밭, 올리브나무가 펼쳐진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역의 그림 같은 풍광이 마음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였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은 야트막한 언덕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순례했던 시에나도 언덕에 세워진 도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을 잘 활용해서 해가 잘 받는 경사진 면에 심은 포도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토스카나 지역이 세계적으로 품질 좋은 적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하다. 와인에 대한 지식이 미천한 나도 그 색과 향이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낮은 구릉에는 키가 위로 죽죽 뻗은 녹음 짙은 사이프러스와 소나무가 군데군데 숲을 이루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아 묘지에 장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또 언덕 위에 근위병들처럼 줄지어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행렬은 집이나 마을에 방풍림 역할을 한다고 한다. 토스카나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다워 영화나 광고 배경 촬영지로 많이 이용한다고 하는데 달리는 버스라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우리가 순례할 몬테 올리베따노 대수원도 산중에 위치해 있어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올리베따노 대수도원은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이어받은 또 하나의 수도원이다.
성채처럼 보이는 수도원의 출입문 위에는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고 있다.
수도원 출입문
출입문을 지나 반대편 쪽 위에는 수도회 규칙서를 들고 축복해 주는 베네딕토 성인의 모습이 있다.
출입문에서 경사진 벽돌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물을 모아둔 양어장이 나온다. 16세기에 만든 양어장으로 수도자들에게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넣어 길러 양식으로 먹였다고 한다.
양어장
성당에 거의 이르러서는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도회 창립자인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가 은수생활을 했던 동굴이 있다. 그 동굴 위에 소성당을 지었다.
동굴 소성당
창립자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성인은 1272년 시에나의 명문가인 톨로메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톨로메이 가문에 걸맞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성인은 법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눈병으로 장님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마리아 신심이 깊었던 성인은 성모님께 빛을 보게 해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을 한다. 눈병의 치유라는 기적을 체험하며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하게 된다. 성인은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고, 성인의 소문을 듣고 모여 들은 사람들과 함께 베네딕토회의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를 창설한다.
성당 앞에는 수도회 창립자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를 기념하여 만든 성인의 석상이 있다.
먼저 수도원 정원으로 갔다. 수도원에는 3개의 정원이 있는데 수도원 입구에서 가까운 가장 큰 정원으로 갔다. 정원의 회랑 모든 벽에는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프레스코화로 표현을 해놓았다. 화가 루카 시뇨렐리와 소도마가 그렸는데, 총 36 작품 중 소도마의 그림이 27 작품이다. 생활의 중심 공간인 정원에 베네딕토 성인의 중요한 이야기를 그려 넣은 것은 성인의 정신을 수도자들의 마음에 새겨 두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베네딕토 성인의 생애 그림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사진들은 퍼옴)
베네딕토 성인이 로마를 떠나 유모와 함께 수비아코로 가던 도중 유모가 빵을 만드는 그릇을 실수로 깨뜨리고 망연자실하였다. 성인이 깨진 그릇 앞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자비를 청하자 그릇이 기적적으로 붙어버렸다. 베네딕토 성인의 첫 번째 기적 이야기다.
깨어진 그릇이 하느님의 자비로 온전히 붙은 기적을 체험한 베네딕토가 수비아코로 간다. 수비아코 근처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있던 로마노 수사를 만나 자신이 입고 있던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수도복을 받았다.
베네딕토가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노 수사가 절벽 위에서 음식을 내려주었다. 로마노 수사가 음식이 내려간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줄에 종을 매달아 소리를 내주었는데, 사탄이 방해하기 위해 매달린 종에 돌을 던져 깨뜨리곤 하였다.
베네딕토가 자꾸만 머릿 속에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맨몸으로 가시덤불에 몸을 던진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사탄을 물리쳐 베네딕토는 더 이상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베네딕토 성인이 3년 동안 은수생활을 마치자 한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성인께 수도원장이 되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을 하여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수도자들이 성인의 규칙을 따르는데 버거움을 느끼자 성인을 독살할 음모를 꾸미고 독이 든 잔을 드린다. 성인이 식사 전 십자성호를 긋자 잔이 깨져버렸고, 베네딕토 성인은 그들을 떠나 다시 은수처로 향한다.
어느 날 베네딕토 성인이 막 입회한 수도자에게 낫을 주며 우거진 땅을 밭으로 만들라고 일을 시켰다. 수도자는 열심한 마음으로 낫질을 하던 중 낫이 자루에서 빠져 근처 호수에 빠져버렸다. 수도자가 성인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자 성인이 낫자루를 달라고 하여 기도하신 후 호수에 넣다 빼내자 기적적으로 낫이 붙어 밖으로 나왔다.
하루는 베네딕토의 애제자가 호수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발을 헛디뎌 호수에 빠져 물에 휩쓸려 끌려가게 되었다.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성인이 다른 제자를 보내며 구해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제자는 성인의 명령에 순명하여 깊은 호수로 뛰어들어 기적적으로 물 위를 걸어가 성인의 애제자를 잡고 물 위를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성인의 말씀의 힘과 제자의 순명을 통해 이루어진 기적이다.
베네딕토의 명성이 주변으로 퍼져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성인을 찾아오고 수도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본당 신부가 시기와 질투심에 빠져 성인을 독살하기 위해 몸종을 시켜 독이 묻은 빵을 보냈다. 성인은 빵에 독이 묻어 있는 것을 아시고 까마귀에게 물어다 아무도 없는 곳에 버리라고 명령을 했다.
성인을 죽이는데 실패한 근처 본당 신부가 이번에는 성덕이 약한 수도자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아름다운 일곱 명의 여인을 수도원으로 보냈다. 성인은 마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이런 유혹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또 신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이런 짓을 벌일것을 알고 자신이 세운 수도원을 위하여 수비아코를 떠난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알아보기 쉽게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을 보며 제자들이 성인께서 만든 수도회 규칙을 잘 지키고 충실하게 살아갈 때 하느님을 만나는 행복을 누렸다. 우리 또한 인간이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제시해주 최선의 길인 십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갈 때 하느님 안에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메시지를 얻었다.
가장 큰 정원에서 수도원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으로 가기 전에 수도원 식당이 있는데, 수사님 한 분이 우리에게 반갑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수도원 도서관에는 수도자들이 양피지에 필사한 책들이 도서관 벽 책장에 가득 들어 있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은 금욕과 계율을 바탕으로 생활했는데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독서와 필사였다. 베네딕토의 가르침을 받은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세울 때 성 베네딕토 규칙서라는 지침서를 갖고 있었다. 이 지침서에는 수도자들마다 최소 한 권의 책을 가져야 한다고 정했다. 그리고 자기 수양으로서 독서와 필사를 하게 했다. 자연히 수도원의 책을 모으고 베껴 적을 공간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도서관을 만들어서 온갖 책들을 보관하고 필사를 했다.
한편 수도원은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구해야 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모두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이 중에 쏠쏠했던 것이 바로 필 사본 판매였다. 따라서 귀족이나 세속 성직자들이 필요한 책을 구할 좋은 방법은 수도원이 되었다. 그리고 수도원은 이러한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서 책의 필사본을 만들어서 팔았다. 하지만 중세 서유럽 수도자들은 자기 수양의 수단으로 독서와 필사를 중요히 여겼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고대의 지식을 도서관에 보존하고 필사해서 전했다. 그리고 이들이 지켜온 지식이 근대 학문의 발전에 공헌했다. 근대 학문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시대에 보존된 지식들 덕분이다.
도서관에 이어서 수도원 대성당으로 갔다. 수도원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중앙 제단화에는 동정 마리아의 탄생이 그려져 있고, 중앙 제대 왼쪽에 탄생한 아기 마리아가 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게 하시고,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줄 성모님의 탄생이 우리들에게 축복임을 알려주고 있다. 창립자이신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의 깊은 성모 신심을 알 수 있다.
수도원 대성당
중앙제대 왼쪽에 아기 마리아
아기 마리아
중앙제대 왼쪽 편으로 제의실이 있다. 제의실 중앙에 기도서 받침대가 놓여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기 전에는 양가죽을 이용한 양피지에 한자 한자 필사로 이루어지던 책들이라 무척 귀하였기 때문에 개인이 기도서를 갖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도서를 크게 만들어 받침대 위에 놓고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제의실
제의실 반대편에는 십자가의 소성당이 있다. 이 소성당 제대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고상이 있다. 십자가의 작자는 알 수 없지만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성인이 이곳에 모신 십자고상이다. 십자가 아래에는 베르나르도 성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그림이 있다. 성인이 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여러 번 이야기 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십자가의 소성당
올리베따노 수도원 순례를 마치고 오늘 묵을 아씨시로 이동을 했다. 아씨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나고 묻히신 곳이다. 이곳에서 2박을 하며 이틀간 아씨시를 순례할 예정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12세기 대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시하여 청빈과 엄격한 규율을 앞세워 당시 타락한 중세교회의 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성인이 되었다.
올리베따노 수도원을 출발한 버스는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보이는 아씨시의 성문 밖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아씨시는 중세도시의 모습이 잘 보존된 건축물들과 골목길들로 이루어진 도시라 버스가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아씨시는 산 중턱 위에 세워진 마을로 우리가 묵을 숙소는 성문 안 언덕 골목길에 있었다.
아씨시의 숙소
내일 아침 첫 순례 일정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다. 내일은 예수 승천 대축일로 오전 9시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저녁식사 후 아씨시의 고풍스러운 매력에 이끌려 야경이 아름답다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산책을 갔다. 숙소에서 성당까지 걸어서 6분 정도 걸렸다.
오늘날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자리한 곳은 원래 아씨시의 외곽으로 사형수들을 처형하고 묻은 지옥의 언덕이라 불리던 곳이다. 성인은 생전에 이곳이 예수님이 처형된 골고다를 닮았다면서 자신을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제자들은 유해를 사형장 터에 묻었고, 무덤 위에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한때 가장 어둡고 절망적이었던 지옥의 언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아씨시 시민들은 이곳을 천국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절망의 언덕이 희망의 언덕이 되었다.
어둠이 깔린 아씨시의 외곽 언덕에 조명으로 홀로 환하게 빛나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멋있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둠을 밝히는 커다란 등불 같았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광장 회랑의 불빛들은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느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을 밝혀주는 듯 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지하 무덤 경당과 1층 성당, 2층 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지하 경당은 문이 열려있었다. 밤인데도 지하 경당에는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각 나라의 순례자들이 있었다. 경당 내부의 조명이 어두웠지만 순례자들의 진지함에 압도되어 저절로 조심스레 앉아 잠시 참회와 속죄를 했다.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에 밝음을 주는 신성한 공간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셋째 날 순례를 마감했다.
프란치스코 성인 무덤 경당
첫댓글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 생생한 사진과 아울러 세세한 설명에 비록 함께하진 못했지만 그 감동 그대로 전해집니다 바쁘신중에도 소중한 사진 올려주신 소공 회장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