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온 가족이 새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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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딸과 큰아들 첫영성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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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익진의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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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집 서재에서. |
“… 김익진 프란치스코에게 세례를 줍니다.”도쿄의 간다 거리에서 숙명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다. 감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어 중림동약현성당 사제관에서 우연히 경제에 대한 가톨릭의 관점을 접했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이 납득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념적 갈등이 해소되는 찰나였다. 거북 등처럼 갈라터진 땅에 단비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세례 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살아오던 이들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완고했다.
동도서기를 주장할 만큼 열려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쪽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서양에서 받아들일 건 기술이나 기기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달랐다. 하나밖에 없는 친아들이 이복형의 길을 갈까 늘 두려워하던 차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다. 사별한 순천 박씨가 큰형 우진, 둘째형 철진을 낳았다. 어머니는 내가 큰형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 역시 나를 끔찍이 아끼는 걸 보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런 큰형이 현해탄에 투신한 뒤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끈 떨어진 연처럼 방황하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큰형의 뒤를 따를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내가 마음잡은 걸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우리 모두 성당에 다니면 좋겠어요. 날 구해주신 천주님을 믿는 게 어떨지요?”
“성당이 어떤 덴진 모르지만, 우리 익진이를 꼭 붙들어준 걸 보면 틀림없이 좋은 곳일 게야.”
1936년 정월, 어머니 동복 오씨는 아녜스 성녀 축일에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우리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밝던 어머니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깊었다.
“저 장성 네거리에 골롬반 수도회라고 있대. 그 신부님들이 좀 근사한 성당을 짓고 싶은데, 땅이 없다지 뭐냐.”
장성은 일찍이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곳이었다. 선조들의 재실도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내 앞으로 많은 땅을 물려준 곳이기도 했다. 수도회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며 언젠가 들은 부자 청년과 낙타의 비유가 떠올랐다.
문득 재물은 소용할 데에 쓰라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문제였다.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어머니, 장성 제봉산 아래에 있는 우리 과수원 아시죠?”
“암, 알다마다.”
“그 위에 성당을 지으면 어떨까요? 장성 읍내와 들판은 물론이고 황룡강까지 한눈에 다 보이잖아요. 그럼 많은 사람들이 성당 건물을 보며 궁금해서라도 찾아올 거 같은데요.”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나 금세 시무룩해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과수원 위쪽은 우리 땅이 아니잖니?”
“걱정 마세요. 장성 읍내에 있는 우리 땅을 내준다고 하면 그쪽 땅은 아주 쉽게 내놓을 거예요.”
말대로 이루어졌다. 읍내의 금싸라기 땅과 제봉산의 황무지를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골롬반 수도회에 성당 지을 땅, 만 삼천 평을 봉헌했다. 백여 걸음 떨어진 바로 아래의 과수원에는 아담한 초가집을 지었다.
거기에 어머니와 막내 누이동생인 신득이 살도록 했다. 언덕을 넘어가면 바로 성당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길을 닦고 소나무를 심었다. 두 모녀가 평생 그곳에서 살 만큼 아름답고 평온하게 꾸몄다. 나중에는 내게도 마음의 고향이 됐지만 …….
아버지는 그 해에 선종했다. 비록 가톨릭에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세례받는 걸 신기해 하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분이었다. 그 뒤 나와 가족들도 교리 교육을 받고 1937년 9월 26일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아내 이신영 모니카, 맏딸 우영 골롬바, 맏아들 효신 아오스딩(아우구스티노), 작은아들 충신 토마스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1925년에 시복된 한국 79위 순교 복자 축일이었다.
“여러분은 천주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패트릭 모나한 신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여러분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버립니까?”
우리 식구들의 합창이 우렁찼다.
“끊어 버립니다!”
나 김익진은 그렇게 과거를 참회하며 구령(救靈)과 영생(永生)의 길에 들어섰다. 맨발의 성자 프란치스코로 다시 태어났다. 그간 내가 벌였던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불교를 넘나들며 방황했던 젊은 날을 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토록 기쁜 날이 언제 있었던가. 세례식 내내 여러 차례 안경을 벗고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갓난아기처럼 다시 태어난 감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적처럼 내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세례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장성으로 이사했다. 과수원에 있는 어머니의 집 바로 아래에 집을 지었다. 세 칸 한옥에 양철지붕을 얹었다. 마당에는 빨간 장미와 흰 백합을 심었다. 한 쪽 구석에는 닭장을 만들었고, 그 뒤 텃밭에는 채소를 심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이었다.
성당으로 가는 솔밭 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와 다름없었다. 주일마다 온 가족이 그 길에 올라섰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손을 맞잡고 걸었다. 우리 부부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며 흥겨워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길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소풍가는 날이 따로 없었다. 방랑길에서 누리지 못했던 행복에 흠뻑 젖었다. 성경 구절이 실감났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 행복은 그림책에서 만난 성모 마리아의 모성미로부터 비롯됐다. 그때부터 나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을 공경하고자 했다.
묵주기도는 내게 음악과도 같았다. 동정 마리아의 반주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연주될 수 없었다. 묵주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의 일생을 재현하는 뮤지컬이었다.
성모님의 반주가 있어 그리스도의 멜로디가 더욱 아름다웠다. 각 신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하면, 묵주기도는 인류 역사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서로 엇갈리는 웅대한 교향곡이었다. 묵주만 손에 쥐고 있어도 힘이 났다.
세례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동(지금의 서울 혜화동) 성당을 찾았다. 오기선 주임 신부에게 내 뜻을 전했다.
“영세 본명을 프란치스코로 했으니 저도 그분의 길,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분이 향유하시는 행복을 지상에서부터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세를 하던 날, 프란치스코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했다. 그에 발맞추어 오기선 신부와 이광재 신부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 입회했다. 나 역시 오 신부의 주선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 착복식을 했다.
세례받은 지 두 달쯤 지난 11월 19일이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이었으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었다. 흰 띠와 갈색 수도복이 그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마치 프란치스코 성인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청빈을 서약했다. 성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결심했다. 그러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공에 솟구쳐 오르는 봉황처럼 자유로워졌다. 순간 환희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주례하던 오기선 신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가톨릭을 알고 나서부터는 울보가 되고 말았다. 영락없는 눈물단지였다.“주님! 오늘이 제 생일 맞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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