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한국 축구를 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국 축구가 위기가 아니라 대표팀이 위기 아닐까. 당장 대표팀이 흔들리더라도 이를 받치는 뿌리가 튼튼하다면 걱정이 없다. 국가대표팀의 한 경기 한 경기에 일희일비하는 것보다는 그 밑바탕이 되는 유소년 축구에 관심을 갖고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한다면 한국 축구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누구보다도 유소년 육성에 큰 뜻을 품었던 전설적인 축구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오토바이’ 채금석 선생이다.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축구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한 번씩 이 대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유럽에 진출해 뛰고 있는 박지성과 박주영도 학창 시절에는 이 대회에 나서며 축구선수로의 성공을 꿈꿨을 정도로 학원 축구 무대에서는 무척 큰 대회다. 바로 이 대회를 만든 이가 채금석 선생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아름답고도 위대한 축구대회를 만든 채금석 선생의 일화를 살펴보자. 채금석 선생은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오늘 이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사진=연합뉴스)
전국적인 스타된 ‘오토바이’ 채금석
채금석은 1904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시골에서 딱히 시간을 보낼 취미가 없었던 채금석과 친구들은 공터에 모여 공을 차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채금석은 그러다가 지금은 군산제일고등학교가 된 군산영명학교에 입학했다. “저 축구부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당시 군산영명학교는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무척 호의적이었다. 또래들보다 발이 무척 빨랐던 채금석은 고민할 것도 없이 축구부에 가입했고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치고 달리면 잡을 수비수들이 없었다. 주력 하나 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훗날 별명이 된 ‘오토바이’는 이렇게 유래됐다.
채금석은 이때 축구부 활동 외에도 연고지를 기반으로 한 클럽 스포츠 문화에 일찍 눈떴다. 17세가 되던 1920년 군산 최초의 조선인 체육 단체인 평화축구단을 창단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축구단을 꾸려보자.” 채금석은 군산에서 같은 뜻을 품은 동료들과 함께 평화축구단을 만들어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청년단과 소년단으로 나눠 지금의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했고 채금석은 소년단의 운영을 맡았다. 채금석은 매년 군산에서 열리는 동 대항 축구대회에서도 구암동 팀을 이끌고 매번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소년 축구와 지역 연고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했다.
군산에서 공 좀 차던 채금석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1923년이었다. 전 조선축구대회에 나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2년 뒤 ‘축구 명문’ 경신중학에 입학했다. 채금석은 김용식과 함께 경신중학을 이끌고 조선축구대회 중학부에서 2년 연속 우승하며 이때부터 전국에서도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이때 만난 김용식과는 “술과 담배, 여자, 도박을 멀리하고 40세 때까지 축구선수로 뛰자”고 약속하는 등 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우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선수로 처음 위기를 맞은 것도 이때였다. 경신중학 4학년이던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그를 최고의 축구스타에서 졸지에 쫓기는 신세로 내몰았다. (일부에서는 1934년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조사해 본 결과 1929년이라는 주장에 더 신빙성이 있다.)
1960년 효창구장 개장 기념식의 채금석 선생 모습. (사진=군산근대역사박물관)
광주학생운동과 베를린 올림픽
1929년 11월, 일본 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 사건이 발단으로 전국적인 항일 운동이 시작됐다. 정의감에 불타는 채금석과 김용식도 이 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일본 경찰은 채금석과 김용식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한 달 만에 이들과 마주했다. “자네들을 폭동을 일으킨 혐의로 체포하겠네.” 일본 경찰의 명령에 채금석은 순간적으로 외쳤다. “야, 튀어.” 채금석은 자신의 팔을 잡아 끈 일본 경찰의 가슴을 내리치고 순식간에 내달렸다. 기습을 당한 일본 경찰은 길 옆 개울로 나가 떨어졌고 나머지 경찰들이 채금석 일행을 뒤쫓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주력을 자랑하는 축구선수 ‘오토바이’ 채금석을 체포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놈들 잡히면 가만 안 두겠어.” 일본 경찰은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채금석에게 얻어 맞은 일본 경찰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까지 입었으니 오죽했을까. 채금석과 김용식은 쾌재를 불렀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을 붙잡으려는 일본 경찰을 피해 피신 생활을 시작해야 했고 채금석은 자신의 고향 군산으로 김용식을 데리고 내려가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다 결국 졸업을 1년 앞둔 상황에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가장 촉망받던 축구선수는 이렇게 졸지에 백수 신세로 전락했다. 채금석과 김용식, 김영근 등을 퇴학으로 잃은 경신중학 축구부는 이때부터 서서히 침체기에 빠져 들었다.
퇴학을 당해 축구를 할 수 없게 됐지만 축구계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1년을 쉰 채금석이 복귀전을 치른 건 1930년 처음 열린 경평축구대회였다. 채금석은 이 대회에 경성팀 선수로 출전해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2년 동안 중단되다가 열린 1933년 2회 경평전에서는 골을 기록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한 채금석은 1년 뒤 조선축구단 소속으로 중국 텐진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서 소련과 중국 대표팀을 상대로 4승 1패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또한 1935년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는 조선축구단 선수로 참가해 김용식과 함께 준결승에서 나고야 팀을 6-0으로 꺾었고 결승전에서도 문리대학을 6-1로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채금석은 무조건 뽑아야합니다. 그가 있다면 올림픽에서의 선전도 문제 없습니다.” 그의 대활약을 지켜본 일본은 1년 뒤 열리는 베를린 올림픽읖 앞두고 채금석의 대표팀 발탁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일본은 채금석을 끝내 뽑지 않았다. 광주학생운동 당시 일본 경찰을 구타한 채금석은 일본 대표 선수가 될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찬반 양론이 팽팽했지만 일본축구협회는 결국 반대 의견을 택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채금석은 결국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렇게 짧다면 짧은 채금석의 현역 생활은 마감됐다. 하지만 그는 짧은 현역 선수 생활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겨 여전히 축구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채금석 선생은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는 축구인이었다. 손자 같은 선수가 경기 후 채금석 선생을 찾아 인사를 건네는 모습. (사진=군산시축구협회)
“어린 선수를 잘 키워야 한국 축구가 강해진다”
고향으로 돌아간 채금석은 여전히 축구에 대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고향출신으로 이뤄진 구암축구단을 만든 것도 이때였다. 그는 “군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모여 다시 한 번 공을 차보자”면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비록 전문적인 선수들은 아니었지만 채금석은 이들을 이끌고 전북 일반부 대표선수로 전국체전과 시도대항 축구대회에 나서 세 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여전히 뛰어난 축구실력을 자랑했다. 경신중학 시절 “마흔 살까지 선수로 뛰자”던 약속도 절반은 지켜냈다. 채금석은 53세가 되어서야 ‘진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축구를 위해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면서 지켜낸 약속이었다. 김용식 역시 이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음 한 켠에 남는 미련이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경신중학에서 퇴학을 당해 졸업장을 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러던 중 1985년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채금석 선생님이시죠? 경신고등학교입니다. 선생님께 명예 졸업장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려 57년 만에 받는 졸업장이었다. 채금석은 김용식과 함께 곧장 경신고등학교로 달려갔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는 결국 백발 노인이 되어서야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푸르렀던 청춘은 흘러갔지만 그는 늦게나마 손에 넣은 이 졸업장을 훈장처럼 여겼다. 그는 “이제서야 한이 풀렸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채금석은 고향인 군산에서 축구 유망주 육성에 집중했다. 그는 고 최재모와 정태훈, 김승철 등 국가대표를 길러냈고 과거 일화에서 뛰었던 김이주를 육성한 주인공이다. 또한 유동춘, 유동관, 유동우, 유동기, 유동욱 등 5형제를 차례로 지도했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한국 축구사에 5형제가 모두 축구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채금석은 선수 생활도 빛났지만 은퇴 후 고향에서 축구 꿈나무를 키워내면서 더욱 조명 받았다. 그는 항상 “어린 선수를 잘 키워야 한국 축구가 강해진다”고 역설했다. 가장 빛날 때 고향으로 내려와 이를 실천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채금석 선생이 1992년 열린 제1회 금석배 개막전에서 시축을 하기 위해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모습. (사진=군산시축구협회)
‘금석배’가 열리게 된 배경
1980년대에서 1990년대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다녔던 이들이나 이 학교 주변에 살았던 이들은 새벽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80대 중반의 노인이 새벽마다 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찼기 때문이다. “저 할아버지가 누군데 저렇게 매일 새벽마다 축구를 하고 계시는 거지?” 많은 이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바로 채금석이었다. 채금석은 쇠약해 진 후에도 아침 일찍 운동장을 찾아 어린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축구를 가르쳤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이렇게 한 번 차 보라”, “그렇지. 잘한다”면서 어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이가 바로 채금석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자상한 축구 선생님을 통해 축구를 새롭게 접했다.
“채금석 선생님의 정신을 받든 축구대회를 만들어 봅시다.” 1992년이었다. 당시 양희철 군산시 체육회 부회장은 강현욱 국회의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강현욱 의원 역시 흔쾌히 이에 동의했고 곧바로 이진삼 체육부장관에게 건의해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그렇게 채금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이 축구대회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바로 그 유명한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는 이렇게 역사의 첫 발을 내딛었다. 매년 군산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전국에서 매년 100여 팀 이상이 참가하는 학원 스포츠 최대 규모의 대회로 꼽히고 있다. 채금석 선생은 1회 대회 개막전에서 역사적인 시축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의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세류초등학교 학생이던 박지성은 1992년 첫 대회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고 1994년과 1995년에도 안용중학교 소속으로 대회에 나선 적이 있다. 청구고 박주영도 2002년 열린 11회 대회에 나섰었다. 이들 뿐 아니라 현재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대다수가 금석배는 직접 한 번씩 다 겪어본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금석배는 구제역으로 한 차례 연기됐지만 지난해까지 스무 번의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지난해에는 8개 경기장에서 초등부 50개팀, 고등부 61개팀 등 총 111개 팀이 출전해 자웅을 겨뤘다. 초등부는 매년 열리지만 중등부와 고등부는 격년제로 시행된다.
채금석 선생의 흉상에 한 어린이가 입을 맞추고 있다. (사진=군산시)
한 평생 축구만 생각해온 채금석 선생
채금석 선생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하기 전까지 항상 구암초등학교와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찾아 어린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것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무료로 아이들에게 축구에 대한 즐거움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채금석 선생은 1995년 91세의 나이로 작고했지만 여전히 한국 축구사에 훌륭한 일을 한 분으로 기억될 것이다. 군산시에서는 군산종합경기장 입구에 채금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흉상과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한 평생을 축구에 몸 바치고 특히 축구 꿈나무들을 육성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채금석 선생은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오토바이’ 채금석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축구 유망주를 육성하는 길이 한국 축구가 더 강해지는 길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무료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축구 지도에 나섰던 채금석 선생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진정한 영웅 아닐까. 선생의 정신이 깃든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축구대회 아닐까. 지금은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유럽 최정상 클럽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도 코흘리개 시절 채금석 선생이 깔아 놓은 멍석에서 뛰놀던 시절이 있었다.
첫댓글 굿 !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