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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본래의 상황을 이해하라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를 보면, 1980년대의 한 십대 소년이 타임 머신을 타게 되고, 그 차는 불을 뿜으며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1950년대로 간다. 똑같은 마을이지만 모든 것이 다르다. 여자 아이들은 머리를 뒤로 묶어 땋았으며 당시 유행하는 양말을 신고, “저 애야 말로 내가 차지하고 싶은 남자야.” 라는 식으로 말한다. 남자들은 기름을 발라 뒤로 말끔하게 벗어내린 머리에 글자가 새겨진 스웨터, 헐렁한 바지 차림을 하고 있다. 타이어 옆면이 하얀 자동차가 주유소에 들어오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나와 기름을 채우며 앞 유리를 닦아 주고 기름 양을 확인한다. 가스는 4리터에 19센트고 콜라는 5센트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그 당시 생활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이며,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많은 부분이 똑같은가를 실감한다. 십대는 지금도 그때처럼 사춘기를 겪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학교, 숙제, 파티, 우정, 첫사랑이 있다. 십대들은 여전히 좋아하 는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닌다. 조그만 남자 아이들은 항상 누이들을 괴롭히고, 비록 그때처럼 콜라가 5센트는 아니지만, 그들은 여전히 콜라를 좋아한다. 무엇이 다른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한다. 많은 부분이 이상하거나 낯설어 보인다.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낙타를 타고 다니며, 천막에서 산다. 동물의 희생제를 드리며 돼지고기를 ‘부정하다’ 고 생각한다. 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 일을 한다. 여인에게 아이가 없을 경우 그 여인은 남편이 여종과 결혼하도록 허락한다. 얼마나 다른 세계인가!
그리고 많은 부분들이 아주 똑같은 것 같다. 성경의 인물들도 유혹과 싸우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사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고통을 우리도 공감할 수 있다.
여전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기자들이 격려와 위로와 소망을 주면서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것을 너무도 자주 경험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혹은 50년대의 영화를 보면서) 낯설지만 친근한 느낌을 갖는 것은 역사적 간격이 이루어놓은 결과이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이천년에서 사천 년의 간격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문화에서 살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성경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원한다면 이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간격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1. 시대를 뛰어넘는 여행가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일은 타임 머신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성경 속의 인물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직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이해하려면 시대, 언어, 문화, 지리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어떻게 그 여행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알아냈다면, 다시 타임 머신을 타고 20세기로 돌아와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시대와 문화,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에 어떻게 적응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타는 타임 머신에는 성경을 배우는 현대 학생들에게 유용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이 도구들을 이용해서 우리는, 성경의 세계와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벽들을 넘어설 수 있다.
(1) 시대 장벽 넘기
성경에서 일어난 사전은 수천 년 전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 하는 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곧 우리가 그 곳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들이 일어난 역사적 상황에 관한 중요한 정보는 부족하기 일쑤이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서신서는 특정한 문제나 일련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쓰인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다. 고린도인들은 결혼, 영적 은사, 우상에서 바쳐진 고기 등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원했다. 디모데는 교회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런 문제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서신들은 마치 일방적으로 떠드는 전화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경우나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을 듣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편과 예언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내용의 반만 알게 될 따름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본문은 귀신 들린 사람을 시험하는 내용이라고 잘못 해석되곤 했다. 또 그 결과로 잘못 적용되어 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귀신 들린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습니까?” 라고 물어서 ‘영을 시험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있다면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불행히도 이는 본문을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해석한 것이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요한은 귀신 들린 문제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기 위한 시금석을 말하고 있음이 드러난다(1절).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인간이 되셨음을 부인하며, 그래서 ‘육’ 과 물질이 악하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는가? 이 본문 혹은 다른 본문에서 역사적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그 성경안에서 혹은 본문 자체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장 19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가 교인중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한은 그들을 ‘적그리스도’ 라 부른다. (2:18). 이 서신서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독자들로 하여금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26). 요한 서신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많은 설명이 있는데, 어떤 것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반면, 어떤 것은 암시적이기도 하다. 그런 설명들을 보면, 서신서의 독자들(수신자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상황에 대한 추가 설명과 요한이 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나와있다.
일단 성경이나 보문 자체를 살펴본 후에는 성경 사전이나 핸드북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새 성경 사전](New Bible Dictionary)의 ‘요한서신’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쓰여 있다.
요한일서는 교회를 이탈하여 신실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기록되었다(2:18-19,26).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 월등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2:20, 27;참고. 요이 1:9),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4:20), 비밀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후에 ‘영지주의’ (이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 (gnosis)에서 파생되었다)로 알려진 이단의 선구가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과 신학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말하는 교리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2:22) 인간을 구원하기위해(4:9-10,14) 육체로 오셨으며(4:2; 요이 1:7), 태초부터 계신 (1:1) 하나님의 아들(4:15; 5:5, 10)이심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적 상황을 알아내려고 할 때, 관련된 다른 성경 구절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쓴 것이고, 사무엘하 11-12장에서도 다윗과 밧세바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시51편의 표제는 이 글이 쓰인 이유를 말해 준다. 그런 정보가 없을 경우에는 성경 사전이나 주석이 관련 구절을 알려 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빌립보서를 공부할 때는 사도행전을 참고할 수 있으며, 우리는, 거기서 빌립보 교회의 기반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행16장).
본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많이 알수록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더 잘 갖추게 된다. 그런 정보는 마치 전체 퍼즐 그림에서 빠져 있는 몇 개의 퍼즐 조각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것들을 제 자리에 넣어 맞추면 그림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2) 언어 장벽 넘기
성경이 우리말이 아니라,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벽이 된다. 또 이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히 습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경 언어의 전문가들이 그것을 현대어로 번역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이 장벽의 대부분을 뛰어넘었다. 사실 선택 가능한 성경 번역판들이 많이 나와 있다.
영역 성경으로는 NASB(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같은 문자적 번역이 있으며,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Good News Bible처럼 역동적 대응 번역판도 있다. Living Bible이나 New Testament in Modern English(J. B. Phillips)처럼 의역된 것도 있다(우리말 성경으로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는 원칙에 따라 개역 성경, 표준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등에서 선택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번역은 각 유형마다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문자적 번역은 가능한 한 히브리어나 헬라어 어법을 자세히 따르려고 하는데, 이런 표현법은 때때로 어색하게 들린다.
의역은 정확한 어법보다는 의미의 명료성에 비중을 둔다. 이 번역본들은 읽기 쉽지만 성경이 20세기에 쓰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Living Bible의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내 발의 ‘등’ (lamp)이 ‘회중전등’ (flashlight)으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도 최선의 선택은 역동적 대응 번역일 것이다. 이 번역은 역사나 문화의 산물을 최신의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등은 등이지 손전등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단어와 구절들을 분명하고도 현대적인 어휘로 번역하였다. 그 결과 읽기 쉬우면서도 본래 내용에 충실하다.
현명한 연구자라면 이 세 가지 유형의 번역을 다 이용할 것이다. 각 번역은 저자가 원래 자신의 언어로 말했던 내용에 대하여 독특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NIV, RSV, NASB와 같은, 문자적 번역이나 역동적 대응 번역을 기본서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이 번역판들은 우리 스스로 본문을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본문의 기본 의미를 파악한 다음에는, 의역을 사용함으로써 저자가 본래 독자에게 말하는 내용을 훨씬 더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3) 문화 장벽 넘기
성경의 사건들은 다른 많은 문화, 즉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집트, 가나안, 바벨론, 유대, 헬라, 로마 문화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20세기 문화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소하게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가족 수호신(드라빔) 은 무엇이며 라헬은 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토막글)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에” 라고 말할 수 있는 짧은 기회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 사랑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가?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애씀과 노력들은 가능한 한 이 귀향을 지연시키려는 데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서신을 쓰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의 깊은 멸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하는 것이고, 그 바람이 그에 죽음을 "더 유익한 소득"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다.
우리가 이 눈물 골짜기에 머무르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삼에 보내셨듯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함이다.- 헨리 누엔
드라빔을 훔쳤을까? (창 31:19) 요나는 왜 그렇게 니느웨로 가기를 꺼려했는가? 사마리아인들은 누구이며, 그들과 유대인은 왜 그렇게 서로를 미워했는가? (요4:9)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으며,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특별히 어떤 유혹을 받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담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특별한 행동, 두려움, 갈등, 유혹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아모스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그 단의 뿔들을 겪어 땅에 떨어뜨리고” (암 3:14). 이 말씀은 20세기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성경 사전이나 백과 사전을 이용하면 아모스가 말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단이나 뿔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성전에 있는 제단의 네 귀퉁이가 뿔 모양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 희생 제물의 피를 발랐으며, 구약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은 제단을 피난처로 삼았다. 도피처를 찾던 사람들은 성전으로 도망가 단의 뿔을 잡곤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으로 도망가 뿔(즉, 보호책)을 찾는 일은 끝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공부하고 있는 성경의 각 책이나 어느 한 구절에서도 문화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는 1세기 팔레스틴의 삶에 관해 참고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거기서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눅 3:1),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적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눅 1:71)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주의와 외식주의에 관해서,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얼마나 방해했는지에 관해서도 알게 된다(마23장). 성경시대의 일상 생활 곧 거래 관행(눅 16:1-18), 결혼(요 2장), 장례(요 11장), 임금(마 20:1-16) 세금(마 22:15-22)등에 대한 이해도 얻게 된다. 고대 중동 문화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문화와 친근할수록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는 장벽을 더 잘 뛰어넘을 수 있다.
(4) 지리적 장벽 넘기
어떤 사람들은 운좋게도 성지순례를 할 기회가 있다. 돌아와서 그들은 성경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성지를 방문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좀더 제한된 방법으로나마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성경의 지리를 알게 되면 많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아모스 1장 3절-2장 16절을 보자. 선지자는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을 정죄한다. 얼핏 보기에는 아모스가 되는 대로 도시와 나라들을 언급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처음 셋은 이스라엘과 무관한 이방나라의 수도이다. 그 다음 셋은 이스라엘과 혈연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유다는 이스라엘의 형제 국가이다. 끝으로 이스라엘 자신의 이름이 나온다.
이러한 아모스의 선포는 청중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아모스의 말이 시작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에 임하는 심판에 대해 환호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모스의 말이 점점 자기 나라에 대한 내용으로 접근해 오자,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라는 말과 함께 그들은 아모스의 정죄고리에 걸려 들었다.
성경 지리에 친숙해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지도가 부착된 성경도 많이 있으며, 좋은 성경 지도나 성경 사전은 생소한 지역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자료들은 출애굽의 경로를 찾거나 여호수아가 정복한 도시를 찾는 것과 이스라엘의 주변 적국을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예수님의 행적과 바울의 선교여행을 따라가 볼 수도 있다. 또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들의 위치와 그 교회의 설립이 그들의 생활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성경에서 낮선 지역을 발견할 때마다 이런 자료들을 참고하면 더 쉽게 지리적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2. 읽는 법 배우기
만일 당신이 타임 머신에 들어가 시간, 언어, 문화, 지리의 장벽을 완전히 뛰어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지금 1세기 고린도에 와있다. 헬라 의상을 입고, 헬라어를 유창하게 말하며, 주변 문화와 지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당신은 고린도 교회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왔기 때문에 그 교회의 교인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의 문제점들까지 자세히 알고 있다.
이웃의 어떤 가정에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을 때였다. 한 전령이, 요즈음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부르는,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문으로 들어선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펴서 그편지(물론 헬라어로 쓰여 있디)를 읽기 시작한다. 시간, 언어, 문화, 그리고 지리의 장벽을 성공적으로 넘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말하는 바를 저절로 이해한다는 의미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도 베드로는 바울과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바울의 편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벧후 3:16). 물론 베드로의 어려움은 바울의 입장이 불명확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하게 썼을지라도 그(혹은 다른 어떤 저자)가 쓴 내용을 성공적으로 이해하느냐의 여부는 우리의 독서 기술이 얼마나 능숙한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독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는 성, 소설, 잡지, 신문 등 무엇을 읽든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이다.
몇 년 전 [뉴욕 타임즈] 지에 모티머 애들러(Mortimer Adler)가 쓴 [독서의 기술](How to Read a Book, 범우사)의 광고가 실렸다. 편지 한 통을 받고 좋아서 어찌할 바 모르는 청년의 모습을 표현한 광고 그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3. 연애 편지를 읽는 법
이 젊은이는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미 그 편지를 서너 차례 읽었지만 지금 또 읽으려는 참입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편지를 읽으려면 여러 가지 사전을 들추어 보든지 아니면 어원학․언어학 전문가들이 쓴 상당분량의 연구서를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도움이 없어도 혼자 잘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 쉼표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 정확히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편지의 서두에 '000에게' 라고 적혀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뭘까? 수줍어서 '사랑하는 00에게' 라고 쓰지 못했을까? 아니면 '00씨에게' 라는 말이 너무 형식적으로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야, 그녀는 누구에게나 으레 '00에게' 라고 쓰는지 몰라! 이제 청년의 얼굴에는 걱정스럽고 찌푸린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편지의 첫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면서부터는 그런 표정이 사라집니다. 분명히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 말을 쓰지 않았을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편지를 읽는다면, 한 순간 행복의 절정에 있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고통의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머리속으로 수백 가지의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아예 편지를 외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앞으로 수 주일 동안 이런 일을 홀로 계속할 것입니다.
이 광고는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만일 이와 같은 집중력을 갖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적인 거장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 편지이다. 그 의미를 알려면 우리도 광고의 젊은이처럼 열심히 그리고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다음의 일차적인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곧 저자는 본래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가? 아래의 다섯 가지 지침을 따르면 저자가 원래 의미했던 바를 찾아낼 수 있다.
(1) 본문의 문학 유형을 파악하라.
한 이단 연구 전문가가 어느 날 저녁 몰몬교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몇몇 몰몬교인들이 그 강의를 듣기로 결정하고는 참석했다. 강의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즈음에,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오른팔’, ‘손’, ‘눈’ 등을 언급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입증했다’. 그러 단 연구 전문가는 그 사람에게 시편 17편 8절을 크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그러나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지요” 라고 그 몰몬교인이 항의했다.
“바로 그거요!” 강사가 대답했다.
성경 저자들은 이야기, 편지, 시, 속담, 비유, 은유, 상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또 각 문학 유형은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문학 유형과 언어 유형을 확인해야 한다. 만약 저자가 은유적으로 사용한 말을 문자적인 것으로 가정하면(앞에서 말한 몰몬 교인의 실수처럼) 그야말로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성경 사전은 당신이 공부하는 본문의 문학 유형을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령 시편을 공부한다면, 히브리시가 현대시와 얼마나 다른가를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시에 대한 글을 읽는 편이 현명하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다면 묵시 문학에 관한 논문을 읽어 보라. 그러다보면 이런 문학 장르가 왜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게 보이는지 또 어떻게 하면 바르게 묵시 문학을 해석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2) 각 책의 개관을 살펴보라.
바람이 불어치는 페루의 거대한 평원에서 고고학자들은 59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에 걸쳐진 엄청난 길이의 연속선들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선을 고대의 도로라고 생각했다. 그 지역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그 선들은 벌레, 새, 물고기 모양의 거대한 장식 그리고 높은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개관은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데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준다. 첫째, 반복되는 견해를 관찰하면서 책의 중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성경의 구조 곧 성경의 각 부분이 전체 주제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책의 개관은 마치 줌 렌즈(초점 거리를 연속적으로 바꾸는 카메라렌즈)를 통해 대상을 살펴보는 것과 같다. 렌즈를 통해 여러 광경들을 보면서 성경 전체를 빨리 통독하되 그 책 전체를 연결하는 반복된 개념이나 단어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라. 책 전체를 읽기가 불가능할 때는 성경에 나와 있는 장이나 소단락의 표제어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내용을 훑어보라.
다음에는 주요한 단락이나 문단을 조망하기 위해 줌 렌즈를 더 가까이 조절하라. 각 단락은기본적으로 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주제를 발견했으면 그 단락에 간단한 제목을 붙이고 그 내용을 요약해보라. 이제 상세한 항목들, 이를테면 소단락, 문장, 단어들에 초점을 맞출 준비가 된 것이다.
(3) 연구 본문(passage)별로 공부하라.
일단 책의 주제와 구조를 개관하고 나면 그것을 연구 본문별로 공부하라. 연구 본문은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소단락이나 소단락군(群) 또는 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성경에는 장이나 소단락, 절. 심지어 구두점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것들은 성경을 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더해진 것이므로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4) 분위기에 민감하라.
성경은 단순히 여러 개념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의 저자와 인물들은 우리처럼 분노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경험에는 슬픔과 고뇌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갈라디아서에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분노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곤혹스러움이 짙게 깔려 있고, 시편 148편은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연구에서 다소 주관적인 관점이기는 하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을 통해 성경 저자나 인물들의 감정을 꿰뚫어보는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
(5) 당신의 해석을 좋은 주석서와 비교해보라.
일단 구절의 중심 주제와 저자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당신이 해석한 바를 한두 가지 좋은 주석과 비교해 보라. 주석은 당신이 놓쳐 버린 부분에 대해 통찰력을 더해줄 수 있다. 또한 저자의 말을 잘못 이해했을 경우 이를 교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주석을 참고하기 전에 스스로 그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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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난방비.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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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후원도 한달내내 두세분에 불과하니
카페도 생활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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