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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보고, 승정원일기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은 기록문화의 나라다. 2015년 기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건수가 우리나라는 13건으로, 독일 16건에 이어 폴란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나라다. 이 가운데 1997년 처음으로 등재된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유명하지만, 2001년에 등재된 『승정원일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승정원일기』란 조선시대에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승정원’에서 날자 별로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은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인 주서가 담당했다. 주서는 임금이 궁궐 안에서 정무를 보던, 외출을 하건 사관과 함께 임금을 따라 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왕의 동정뿐만 아니라, 왕정 체제하에서 국정 운영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고, 정치의 주요 현안이 되는 자료나 각종 상소문의 원문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수록했다.
1400년 4월에 창설되어, 몇 차례 개편을 거쳐 세종15년(1433년)에 왕의 비서실 기관으로 정비된 승정원이었던 만큼, 1400년대 초반부터 매일 『승정원일기』를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란으로 인해 약 200년간 기록이 불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3년 인조 1년 3월12일부터 1910년 순종 4년 7월 25일 기록까지 기록이 남아있는데, 1달치 분량을 묶은 책이 3,243책, 약 2억 4,125만자의 거대 기록물로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 이 1,893권 4,768만자에 비해 무려 5배나 많다.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4』사가 약 4천만자, 『명실록』 1,600만자에 비해서도 월등한 분량이다. 남아 있는 분량만으로도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기록물인 셈이다.
단지 분량이 많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책은 아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편찬한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승정원일기』(국보303호)와 『조선왕조실록』(국보151호)을 비롯해,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한 비변사에서 작성한 『비변사등록』(국보152호), 2011년에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왕의 일기인 『일성록』(국보153호)이 있다.
1816년 8월 24일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도승지 박종훈이 아뢰기를 경연에서 논의한 비밀 사항도 반드시 주서가 입시해 직접 기록하고, 다음 달 20일이 되기 전에 책을 만들어 바치기 때문에, 그 자세함과 정확함에서 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승정원일기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한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사료적 가치는 다른 어떤 기록보다 뛰어나다.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기는 하지만, 왕이 죽은 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다. 또한 마니산 사고를 비롯한 4대 사고에 나누어서 보존하기 때문에, 여러 질이 보관되어 있지만 왕을 포함한 당대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볼 수가 없었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기록을 그대로 기록한 1차 자료이다. 또한 오직 1부만 남아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왕과 관리들은 이 기록을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활용도도 높았다.
조선은 각 관청별로 업무와 관련된 일지를 기록하였는데, 『비변사등록』을 비롯해 『동궁일기』, 『춘방일기』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 『승정원일기』인 셈이다. 조선시대 승정원은 요즘의 대통령비서실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기록물 관리가 대단히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기록을 잘 남기면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고, 기록에 남기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조선이 500년 역사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세계적인 기록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국보249호)에는 인정전 앞에 승정원이 그려 있다. 승정원에는 『승정원일기』를 보관하는 문서고가 있다. 그런데 1744년 10월 13일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1592년부터 1721년까지 130년간 1,796권의 『승정원일기』가 불타 버렸다. 그러자 1746년 5월에 소실된 『승정원일기』를 다시 쓰는 개수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선조와 광해군 시기는 사료가 부족해 제외되지만, 1623년 이후부터 약 100년간의 일기는 다시 개수된다. 단 1권뿐인 이 책은 어떻게 복원된 것일까? 그것은 승정원에서 만드는 문서가 또 있었기 때문이다. 승정원에는 정3품 도승지를 비롯한 6명의 승지(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가 있고, 정7품 주서가 2~3명이 있고, 그 아래에 서리 25명과 사령 35명이 있다. 서리들은 매일 『조보』를 작성했다. 『조보』는 그 날의 주요 사건과 중요 문건을 소개하는 요즘의 신문과 같은 것으로, 매일 발행을 해, 주요 관청은 물론, 일부 양반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래서 지방에서 사는 선비들은 『조보』를 읽고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서 상소문을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는 승정원에서 만든 『조보』로 그 역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조보』를 비롯한 각 관청의 기록물이 있었기에, 1747년 11월에 개수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물론 개수한 분량은 548권으로, 소실되기 전보다 크게 줄었지만, 100년전 기록도 개수할 만큼, 조선은 기록물이 많은 나라였다.
『승정원일기』에는 매일 입직한 승지와 주서를 꼬박 꼬박 적었다. 만약 병이나 사고를 출석하지 못할 경우도 그 상황을 기록해, 기록을 실명화했다. 또 288년의 날씨를 빠짐없이 매일 매일 맑음, 흐림, 비, 눈 등으로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오전에 비오고, 저녁에 갬 등 하루의 일기 변화까지 기록했고, 강우량까지도 기록했다. 일기 앞부분에 쓰인 이런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결혼 장면을 간략히 기록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왕비를 간택한 과정부터 길일을 정하는 내용까지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 1만 명이 되더라도, 그 실명을 모두 다 적어 놓았다. 왕과 신하들이 독대한 기록에서는 왕의 표정, 감정을 세세히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왕의 병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다. 따라서 한의학자들이 『승정원일기』를 통해 왕의 치료 과정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승정원일기』는 비록 1623년 인조대 이후의 기록만 남아 있는 아쉬움이 있지만, 288년간의 역사기록을 단절됨이 없이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돋보이게 하는 최고의 세계기록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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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완역이 되었지만, 분량이 훨씬 많은 『승정원일기』는 아직 전체의 20% 정도만 번역된 상태다. 전체 완역은 2060년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그 탓에 이 기록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앞으로 이 책이 완역된다면, 조선시대 연구는 몇 단계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 『승정원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http://sjw.history.go.kr/main.do)에서 원문과 현재까지 번역된 내용을 볼 수가 있다.
* 사진 - 1) 동궐도에 그려진 승정원의 위치
- 2) 승정원일기
첫댓글 오, 서산 문화원 소식지에 글을 연재하시는군요. 제 고향이라 더욱 반갑네요. 승정원일기 번역은 지금 AI를 동원해서 진행하기도 해서 완료 시점이 좀 더 당겨질 것이란 전망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