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1976년 3월 재판을 받느라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지 1년 2개월이 지난 1977년 4월 14일 멀리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3ㆍ1명동사건 관련자 20여 명 중 호남 출신인 김대중과 서남동 목사, 문정현 신부 세 사람만 유독 경상도에 위치한 진주교도소로 보냈다.
박 정권의 이런 지역차별 정책은 참기 힘들었다. 재판을 끝내고 속세와 떨어진 교도소까지 와서 그런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변호사와 면회가 되고서 맨처음으로 “나라를 망치는 이런 지역차별만은 분명히 해소되어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만약 정부측이 “전라도 출신 김대중을 경상도 벽지 교도소에 넣으면, 세상 사람들도 주목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커다란 오산이었다. 진주에서도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다 읽지 못할 만큼 편지도 보내주었다. 우리 가족이 면회라도 오면 교도소까지 마중와서 격려해 주려고 진주는 물론이고 부산ㆍ하동ㆍ김해 등 먼 곳에서도 와 주었다. 진주교도소에서는 “빨리 그런 괴물같은 인간들을 어디로 좀 옮겨 달라”고 위에다 청원했다고 한다. (주석 8)
진주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김대중은 혹독한 수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좌우 맞은 편 방은 모두 공실로 비워두고, 간수 몇 명이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심지어 변호사 면회조차 금지시키고, 가족과의 면회 시간에는 시사문제를 꺼내지 못하도록 막았다. 시간도 10분 이내로 제한하는 등 인권탄압이 자행되었다.
김대중은 이에 항의하여 5월 7일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단식은 쉽지 않은 ‘자기학대’의 수단이지만 감옥에서 하는 단식투쟁은 이중삼중의 고역에 속한다. 식사의 질량이 크게 모자라는 감옥식으로 몸이 여윌대로 여윈 상태에서 단식은 육체의 고통이 그만큼 심해진다.
단식 6일만에 교도소측은 가족과 변호사의 면회를 허용해 주었다. 모두 상급 기관에서 결정하는 처사였다. 단식으로 김대중이 감옥에서 옥사라도 하는 날이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정부는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가족ㆍ변호사 면회는 법으로 보장된 권리인데도 박 정권은 이런 불법을 밥먹듯이 자행해왔다.
이희호의 증언.
오후에 이택돈 변호사, 둘째 홍업이와 같이 진주로 내려갔다. 그때 진주교도소는 서울에서 가장 먼 교도소였다. 진주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나서 다음 날 첫 면회를 해야 했다. 남편은 기결수라 행형 규칙상 머리를 빡빡깎고 푸른 수의를 입고 있었다. 꼭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려야 하는 규칙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뽀얀 머리가 드러난 남편의 모습이 무척 슬펐다 게다가 전하는 말은 더 비감했다. 진주라 천리길, 먼 경상도 감옥에 독방도 모자라 좌우와 맞은편 방을 모두 비운 완전하 격리 수용이라 했다. 그즈음 나는 화급하게 법전을 독학했다. 남편이 법에 보장된 정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병상조회 의뢰 신청서’와 ‘교도소 처우개선 건의서’ 등을 법무부 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청원했다. 남편 또한 변호사와 직계 가족만으로 면회를 제한하는 처사에 항의해 단식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석 9)
김대중이 입감 초기부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교통사고로 생긴 고관절 신경통이었다. 심한 통증으로 맨바닥에 앉을 수도, 어떤 자세를 취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교도소측이 목재 책상과 의자를 만들어 주었다. 겨울에는 난방도 넣어 주어서 통증을 덜게 해주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간섭으로 이런 편의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김대중에게 진주교도소 생활은 천주교 신앙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젊어서 천주교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지만, 돈독한 신앙생활을 해오지는 못하다가 감옥에서 신심을 두터히 하는 계기를 찾은 것이다.
나는 진주교도소 생활에서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생활하기까지의 내 신앙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불충분한 것이었다. 아직도 내게 신앙이란 어렴풋한 것이었지만, 신에게 가는 길을 식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교도소 생활 덕분이었다. 교도소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신학자들의 책이나 외국 신학자들의 저작에도 손을 댈 수 있었다. (주석 10)
수감자들은 교도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그것도 규격의 봉함엽서만 사용하게 하였다. 김대중도 이 규정을 지켜야 했다. 그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사연을 압축하여 긴 사연을 짧게 쓰는 방법을 터득했다. 시사문제는 쓸 수 없었고 학문이나 종교문제가 중심이 되었다. 감옥에서 기도에 열중하고 종교문제에 천착한 관계로 전할 말이 많았다. 자신은 천주교, 부인은 기독교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됨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문제로 갈등 같은 것은 없었다.
다음은 어느날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자신의 십자가란 무엇일까? 그것은 신의 사랑을 통해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친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큰 실패자였다. 마지막 처형 때는 믿었던 제자조차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그의 교훈은 그의 생전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예수님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 그의 희생은 눈부신 공적이 되었다. 현세에 성공한 거장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이집트의 이그티온, 중국의 진시황 등은 지금 예수 앞에 서면 너무나도 초라해지고 빛을 잃는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패자의 운명속에서 생겨났다. 왜냐하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죽는 사람만이 그 진리를 통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완성한다. 진리는 우리의 양심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길일 것이다. 양심의 길이란 남을 사랑하는 길이며,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그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하느님의 길일 것이다. 그 하느님의 길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승자이며, 지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물론 그 길은 험난하고 고난의 길이지만 그것은 결코 불행한 길도, 불가능한 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석 11)
김대중은 정치 초년시절부터 학구열이 남달랐다.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정치활동을 하면서는 정책관련 자료를 챙겼다. 대통령선거와 해외망명, 납치 등 고난을 겪으면서 별로 독서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진주교도소에 입감된 뒤부터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그에게는 어느 측면에서 축복이었다.
주석 8) <김대중자서전 (2)>, 81쪽. 9) 이희호, <이희호자서전 동행>, 170~171쪽, 웅진지식하우스, 2008. 10) <김대중자서전(2)>, 82쪽. 11) 앞의 책과 같음.
첫댓글 너무나 존경하고 보고싶네요.. 김대중 대통령니!!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