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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송자대전 > 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連山成先生遺墟碑 宋時烈
연산(連山) 성 선생(成先生) 유허비(遺墟碑) / 송시열
先生諱三問 선생휘삼문。선생의 휘는 삼문(三問)이요
字謹甫 자근보。자(字)는 근보(謹甫)로,
昌寧人 창녕인。창녕인(昌寧人)이다.
皇明永樂戊戌 황명영락무술。황조(皇朝) 영락(永樂) 무술년에
生于洪州魯恩洞外家 생우홍주노은동외가。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將降 장강。태어날 때에
自空中有問曰生乎 자공중유문왈생호。공중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을 물었기
如是者三 여시자삼。故以爲名 고이위명。 때문에 삼문이라 이름하였다.
正統乙卯生員 정통을묘생원。정통(正統) 을묘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戊午及第 무오급제。무오년에 급제하고
丁卯重試壯元 정묘중시장원。정묘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歷事我 世宗,文宗,魯山三朝 역사아 세종,문종,노산삼조。
우리 세종ㆍ문종(文宗)ㆍ노산(魯山) 삼조(三朝)를 역사(歷事)하였는데,
世宗眷遇絶異 세종권우절이。 은총(恩寵)이 아주 특이하였다.
文宗與之爲布衣交 문종여지위포의교。
문종은 그와 더불어 포의(布衣)의 교우(交友)가 되었고,
官至承旨 관지승지。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景泰六年乙亥 경태6년을해。경태(景泰) 6년(1455, 단종3) 을해에
世祖受禪 세조수선。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았는데
魯山遜于別宮 노산손우별궁。노산이 별궁(別宮)에서 손위(遜位)하자,
先生與父摠管公勝及朴公彭年,李公塏,柳公誠源,河公緯地,兪公應孚六先生者皆死之
선생여부총관공승급박공팽년,이공개,류공성원,하공위지,유공응부6선생자개사지。
선생이 아버지 총관공(摠管公) 승(勝) 및 박팽년(朴彭年)과 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 여섯 선생과 함께 죽었다.
旣而 世祖曰 기이 세조왈。이윽고 세조가 말하기를,
彭年,三問等 팽년,삼문등。“박팽년ㆍ성삼문 등은
當世之亂臣 당세지난신。당세의 난신(亂臣)이요,
後世之忠臣 후세지충신。후세의 충신(忠臣)이다.”하였으니,
聖訓蓋將明天理以樹民彝於無窮也 성훈개장명천리이수민이어무궁야。
성훈(聖訓)은 대체로 장차 천리(天理)를 밝혀서 민이(民彝)를 무궁한 데에 세우려는 것이었다.
漢江南邊有四塚 한강남변유사총。한강(漢江) 남쪽 변두리에 네 무덤이 있는데,
各有小石 각유소석。각각 작은 돌에
只書姓氏 지서성씨。성씨만이 쓰여 있다.
世傳是六先生而無其二 세전시육선생이무기이。세속에 전하기는,
바로 여섯 선생이라 하나 그 두 분(성승, 성삼문)은 없고,
其謂成氏 기위성씨。그 성씨(成氏)라 한 것이
卽先生也 즉선생야。바로 선생이다.
又恩津地有一墓 우은진지유일묘。또 은진(恩津) 땅에 한 무덤이 있고
而長松生其傍 이장송생기방。 장송(長松)이 그 곁에 있는데,
居民指謂先生一肢 거민지위선생일지。거민(居民)들이 그 장송을 가리켜 말하기를
‘선생의 일지(一肢 사지(四肢) 중의 하나)가
徇示至縣庭 순시지현정。 순시(循示)차 현정(縣庭)에 이르렀으므로
因瘞于此 인예우차。인하여 여기에 묻었으나
而纔令流水云 이재령유수운。봉분이 겨우 물이나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한다.
仁宗朝 인종조。인종조(仁宗朝)에
筵臣有以六臣事陳達 연신유이육신사진달。연신(筵臣)이 육신(六臣)의 일을 진달함으로써
自是連有請褒其節者 자시연유청포기절자。
이때부터 연달아 그 절의를 포상하자고 청하는 이가 있었다.
宣廟朝朴先生閔腹之裔 선묘조박선생민복지예。
선조(宣祖) 때에 박 선생(박팽년朴彭年)의 민복(閔腹 유복遺腹) 손자가
遂蒙錄用之命 수몽록용지명。마침내 녹용(錄用)의 명을 입었고,
孝考朝 효고조。효종조(孝宗朝)에서는
左參贊宋公浚吉,右議政李公厚源有祠享之請 좌참찬송공준길,우의정이공후원유사향지청。
참찬 송준길(宋浚吉)과 우의정(右議政) 이후원(李厚源)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자는 주청이 있었다.
今 上壬子 금 상임자。그리고 금상 임자년(1672, 현종13)에
京中士人南宅夏等 경중사인남택하등。경중 사인(京中士人) 남택하(南宅夏) 등이
因人得先生神主於仁王山崩崖間 인인득선생신주어인왕산붕애간。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선생의 신주(神主)를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언덕에서 얻었는데,
謂是先生夫人所自題而奉祀者 위시선생부인소자제이봉사자。
이것은 선생의 부인(夫人)이 스스로 써서 선생의 제사를 받들던 것이라 한다.
先生舊宅在洪州者 선생구택재홍주자。홍주(洪州)에 있는 선생의 구택(舊宅)은
歲久圮腐 세구비부。해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기둥이 썩어 있는 것을
閔公維重爲監司 민공유중위감사。민유중(閔維重)이 감사(監司)가 되어
修葺於 崇禎戊申 수즙어 숭정무신。숭정(崇禎) 무신년(1668, 현종9)에 수리하였고,
至是遂以奉安於其中 지시수이봉안어기중。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구택에 봉안하였다.
而洪之章甫 이홍지장보。그런데 홍주의 장보(章甫)들이,
籲於觀察使南公二星,洪州牧李公暹,沔川守閔侯匀,前掌令趙公世煥。
유어관찰사남공이성,홍주목이공섬,면천수민후균,전장령조공세환
관찰사 남이성(南二星)ㆍ홍주 목사 이섬(李暹)ㆍ면천군수 민균(閔勻)ㆍ전장령(前掌令) 조세환(趙世煥)에게 호소하여
相與立祠於其洞 상여입사어기동。서로 그 고을에 사당을 세우고
且樹碑以傳其事 차수비이전기사。 또 비(碑)를 세워 그 일을 전하여,
公私崇報之義 공사숭보지의。공사간에 숭보(崇報)하는 의가
次第無憾矣 차제무감의。차례대로 유감없이 되었다.
維此連山之漢陽村者 유차연산지한양촌자。오직 이 연산(連山)의 한양촌(漢陽村)은
先生別業之遺址也 선생별업지유지야。선생 별장의 유지(遺址)이다.
其東數里許有古塚 기동수리허유고총。그리고 그 동쪽 수리쯤에 고총(古塚)이 있는데,
自昔縣人相指以爲先生祖先所藏 자석현인상지이위선생조선소장。
예부터 고을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선생의 조상의 소장(所藏)이었는데
而土田臧獲 이토전장획。 토지(土地)와 노비(臧獲장획)가 다
皆沒于勳府 개몰우훈부。충훈부(忠勳府)에 적몰(籍沒)되어
爲一時狐鼠輩所利 위일시호서배소리。한때 간신배들의 이용하는바 되었으나,
而其臧獲等不忘舊恩 이기장획등불망구은。그 노비 등이 옛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每歲秋成 매세추성。해마다 가을이 되면
享先生以俚俗焉 향선생이리속언。선생을 제향(祭享)하는 것이 풍속으로 되었다.” 한다.
蓋本縣自沙溪老先生三世以來 개본현자사계노선생삼세이래。
대개 이 고을은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으로부터 삼세(三世)를 내려오면서
鄕里蔚然鄒魯之俗矣 향리울연추노지속의。
향리(鄕里)가 추로(鄒魯 추(鄒) 나라는 맹자를, 노(魯) 나라는 공자를 가리켜 말함)의 풍속이 성하였다.
慕先生風義益深 모선생풍의익심。
그리하여 선생의 풍도(風度)와 의절(義節)을 더욱 깊이 사모하고
逐建石于其地 축건석우기지。드디어 그 땅에 비석을 세웠으니,
蓋懼愈久而堙沒無徵也 개구유구이인몰무징야。
대개 더욱 오래됨에 따라 인몰(湮沒)되어 증거가 없어질까 두려워서였다.
嗚呼 오호。아,
成仁取義 성인취의。인(仁)을 이루고 의를 취(取)하는 것은
孔孟大訓也 공맹대훈야。공자와 맹자의 큰 교훈이며,
沙溪老先生所以爲敎者在是焉 사계노선생소이위교자재시언。
사계 노선생이 교육으로 삼았던 것도 여기에 있었으니,
今連士之爲是役 금연사지위시역。지금 연산(連山) 선비들이 이 역사(役事)를 하는 것은
蓋亦有所受而亦所以對揚 聖祖明訓也 개역유소수이역소이대양 성조명훈야。
대개 전수받은 바가 있어서이고, 또한 성조(聖祖)의 밝은 훈계를 대양(對揚)하는 것이다.
李議政,宋參贊 이의정,송참찬。우의정 이후원과 참찬 송준길은
皆老先生門人 개노선생문인。다 노선생(김장생)의 문인이고,
而今董石事者 이금동석사자。지금 비석의 일을 감독하는 이는
洪友周,金光老,金萬埈也 홍우주,김광로,김만준야。홍우주(洪友周)ㆍ김광로(金光老)ㆍ김만준(金萬埈)이다.
若夫先生事實顚末 약부선생사실전말。그리고 선생의 사실(事實)에 관한 전말(顚末)은
則童土尹公舜擧詳具于魯陵志 즉동토윤공순거상구우노릉지。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가 이미 노릉지(魯陵志)에 상세히 갖추었으므로,
此不復贅云 차불부췌운。여기서는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時 崇禎癸丑四月日。숭정 계축년(1673, 선조14) 4월 일에 쓴다.
**은진 송시열(恩津 宋時烈) :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송병선(宋秉璿)·송병기(宋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宋子大全)』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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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山成先生遺墟碑
고전번역서 > 송자대전 > 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先生諱三問。字謹甫。昌寧人。 皇明永樂戊戌。生于洪州魯恩洞外家。將降。自空中有問曰生乎。如是者三。故以爲名。 正統乙卯生員。戊午及第。丁卯重試壯元。歷事我 世宗,文宗,魯山三朝。 世宗眷遇絶異。 文宗與之爲布衣交。官至承旨。 景泰六年乙亥。 世祖受禪。 魯山遜于別宮。先生與父摠管公勝及朴公彭年,李公塏,柳公誠源,河公緯地,兪公應孚六先生者皆死之。旣而 世祖曰。彭年,三問等。當世之亂臣。後世之忠臣。 聖訓蓋將明天理以樹民彝於無窮也。漢江南邊有四塚。各有小石。只書姓氏。世傳是六先生而無其二。其謂成氏。卽先生也。又恩津地有一墓。而長松生其傍。居民指謂先生一肢。徇示至縣庭。因瘞于此。而纔令流水云。 仁宗朝。筵臣有以六臣事陳達。自是連有請褒其節者。 宣廟朝朴先生閔腹之裔。遂蒙錄用之命。 孝考朝。左參贊宋公浚吉,右議政李公厚源有祠享之請。今 上壬子。京中士人南宅夏等。因人得先生神主於仁王山崩崖間。謂是先生夫人所自題而奉祀者。先生舊宅在洪州者。歲久圮腐。閔公維重爲監司。修葺於 崇禎戊申。至是遂以奉安於其中。而洪之章甫。籲於觀察使南公二星,洪州牧李公暹,沔川守閔侯匀,前掌令趙公世煥。相與立祠於其洞。且樹碑以傳其事。公私崇報之義。次第無憾矣。維此連山之漢陽村者。先生別業之遺址也。其東數里許有古塚。自昔縣人相指以爲先生祖先所藏。而土田臧獲。皆沒于勳府。爲一時狐鼠輩所利。而其臧獲等不忘舊恩。每歲秋成。享先生以俚俗焉。蓋本縣自沙溪老先生三世以來。鄕里蔚然鄒魯之俗矣。慕先生風義益深。逐建石于其地。蓋懼愈久而堙沒無徵也。嗚呼。成仁取義。孔孟大訓也。沙溪老先生所以爲敎者在是焉。今連士之爲是役。蓋亦有所受而亦所以對揚 聖祖明訓也。李議政,宋參贊。皆老先生門人。而今董石事者。洪友周,金光老,金萬埈也。若夫先生事實顚末。則童土尹公舜擧詳具于魯陵志。此不復贅云。時 崇禎癸丑四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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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송자대전 > 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연산(連山) 성 선생(成先生) 유허비(遺墟碑)
선생의 휘는 삼문(三問)이요 자(字)는 근보(謹甫)로, 창녕인(昌寧人)이다.
황조(皇朝) 영락(永樂) 무술년에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에 공중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을 물었기 때문에 삼문이라 이름하였다.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을묘년에 생원에 합격하여 무오년에 급제하고,
정묘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우리 세종ㆍ문종(文宗)ㆍ노산(魯山) 삼조(三朝)를 역사(歷事)하였는데, 은총(恩寵)이 아주 특이하였다. 문종은 그와 더불어 포의(布衣)의 교우(交友)가 되었고,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경태(景泰) 6년(1455, 단종3) 을해에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았는데 노산이 별궁(別宮)에서 손위(遜位)하자, 선생이 아버지 총관공(摠管公) 승(勝) 및 박팽년(朴彭年)과 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公應孚) 여섯 선생과 함께 죽었다.
이윽고 세조가 말하기를,
“박팽년ㆍ성삼문 등은 당세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忠臣)이다.” 하였으니,
성훈(聖訓)은 대체로 장차 천리(天理)를 밝혀서 민이(民彝)를 무궁한 데에 세우려는 것이었다.
한강(漢江) 남쪽 변두리에 네 무덤이 있는데, 각각 작은 돌에 성씨만이 쓰여져 있다.
세속에 전하기는, 바로 여섯 선생이라 하나 그 두 분은 없고, 그 성씨(成氏)라 한 것이 바로 선생이다.
또 은진(恩津) 땅에 한 무덤이 있고 장송(長松)이 그 곁에 있는데, 거민(居民)들이 그 장송을 가리켜 말하기를 ‘선생의 일지(一肢 사지(四肢) 중의 하나)가 순시(循示)차 현정(縣庭)에 이르렀으므로 인하여 여기에 묻었으나 봉분이 겨우 물이나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한다.
인종조(仁宗朝)에 연신(筵臣)이 육신(六臣)의 일을 진달함으로써 이때부터 연달아 그 절의를 포상하자고 청하는 이가 있었다.
선조(宣祖) 때에 박 선생(박팽년朴彭年)의 민복(閔腹 유복(遺腹)과 같음) 손자가 마침내 녹용(錄用)의 명을 입었고,
효종조(孝宗朝)에서는 참찬 송준길(宋浚吉)과 우의정(右議政) 이후원(李厚源)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자는 주청이 있었다.
그리고 금상 임자년(1672, 현종13)에 경중 사인(京中士人) 남택하(南宅夏) 등이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선생의 신주(神主)를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언덕에서 얻었는데, 이것은 선생의 부인(夫人)이 스스로 써서 선생의 제사를 받들던 것이라 한다.
홍주(洪州)에 있는 선생의 구택(舊宅)은 해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기둥이 썩어 있는 것을 민유중(閔維重)이 감사(監司)가 되어 숭정(崇禎) 무신년(1668, 현종9)에 수리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구택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홍주의 장보(章甫)들이, 관찰사(觀察使) 남이성(南二星)ㆍ홍주 목사(洪州牧使) 이섬(李暹)ㆍ면천 군수(沔川郡守) 민균(閔勻)ㆍ전장령(前掌令) 조세환(趙世煥)에게 호소하여 서로 그 고을에 사당을 세우고 또 비(碑)를 세워 그 일을 전하여, 공사간에 숭보(崇報)하는 의가 차례대로 유감없이 되었다.
오직 이 연산(連山)의 한양촌(漢陽村)은 선생 별장의 유지(遺址)이다.
그리고 그 동쪽 수리쯤에 고총(古塚)이 있는데, 예부터 고을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선생의 조상의 소장(所藏)이었는데 토지(土地)와 노비(奴婢)가 다 충훈부(忠勳府)에 적몰(籍沒)되어 한때 간신배들의 이용하는바 되었으나, 그 노비 등이 옛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선생을 제향(祭享)하는 것이 풍속으로 되었다.” 한다.
대개 이 고을은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으로부터 삼세(三世)를 내려오면서 향리(鄕里)가 추로(鄒魯 추(鄒) 나라는 맹자를, 노(魯) 나라는 공자를 가리켜 말함)의 풍속이 성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풍도(風度)와 의절(義節)을 더욱 깊이 사모하고 드디어 그 땅에 비석을 세웠으니, 대개 더욱 오래됨에 따라 인몰(湮沒)되어 증거가 없어질까 두려워서였다.
아,
인(仁)을 이루고 의를 취(取)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큰 교훈이며,
사계 노선생이 교육으로 삼았던 것도 여기에 있었으니,
지금 연산(連山) 선비들이 이 역사(役事)를 하는 것은 대개 전수받은 바가 있어서이고,
또한 성조(聖祖)의 밝은 훈계를 대양(對揚)하는 것이다.
우의정 이후원과 참찬 송준길은 다 노선생의 문인이고,
지금 비석의 일을 감독하는 이는 홍우주(洪友周)ㆍ김광로(金光老)ㆍ김만준(金萬埈)이다.
그리고 선생의 사실(事實)에 관한 전말(顚末)은 동토(童土) 윤공 순거(尹公舜擧)가 이미 노릉지(魯陵志)에 상세히 갖추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숭정 계축년(1673, 선조14) 4월 일에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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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각주 설명]
영락(永樂) : 중국 명(明)나라 성조 때의 연호(年號). 서기(西紀) 1403년부터 서기(西紀) 1425년까지
정통(正統)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포의(布衣)의 교우(交友) : 布衣(포의)는 벼슬이 없는 선비, 여기서는 직위·관직을 초월한 친구사이라는 뜻이다.
승지(承旨) :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승정원(承政院)에 딸려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던 정3품(正三品)의 당상관(堂上官). 정원(定員)은 6명으로, 도승지(都承旨)는 이방(吏房), 좌승지는 호방(戶房), 우승지(右承旨)는 예방(禮房), 좌부승지(左副承旨)는 병방(兵房), 우부승지(右副承旨)는 형방(刑房), 동부승지(同副承旨)는 공방(工房)을 맡아보았음
경태(景泰) : 중국(中國) 명(明)나라 대종(代宗) 때의 연호(年號). 경태제(景泰帝, 1428년 9월 21일 ~ 1457년 3월 14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7대 황제(재위 1449년 ~ 1457년)이다. 휘는 기옥(祁鈺)이다.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선덕제의 아들이며 정통제의 이복아우이다.
선위(禪位) : 왕의 자리를 남에게 물려 줌
손위(遜位) : 임금의 자리를 사양(辭讓)하여 내놓음
민이(民彝) : 사람으로서 늘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道理)
송준길(宋浚吉) :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본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 1633년 동몽교관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송준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 참여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의 기년제(朞年祭. 1년)를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기년제를 관철.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곧 사퇴.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 1674년 효종의 왕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다시 자의대비 복상 문제가 발생.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
이에 1675년(숙종 1)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 관작 복구.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 시호는 문정(文正).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이후원(李厚源) : 1598년~1660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晋)·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김집(金集)·조속(趙涑)·송준길(宋浚吉) 등과 교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태인현감이 되고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이의 수습에 앞장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로 변란에 임했으며, 이듬해 포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다. 이어 단양군수·태안군수를 역임한 뒤 중앙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이 되었다.
1635년 익산군수로 나갔으며, 이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김상헌(金尙憲) 등 제신의 천거로 지평이 되었으며, 문학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김류(金瑬) 등이 왕을 강화로 모시려 하자 남한산성의 고수를 적극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펴자 죽기를 각오해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39년 승지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그를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변경시켰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고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 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壯士)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등과 모의,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 난의 수습에 적극 가담해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며,
1646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하였다.
1650년(효종 1년) 효종의 북벌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계획에 앞장섰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 강화를 방비했고, 또한 장악원에 소장된 『악학궤범』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고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 때 송시열(宋時烈)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지경연사·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개(淸介. 청렴하면서 절개가 곧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다. 선(善)을 좋아해 능변으로 악(惡)을 질시했으며, 바쁜 관직생활 중에도 경사(經史)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경중 사인(京中士人) : 한양에 살고 있는 선비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因人得) : 호조(戶曹) 서리(書吏) 엄의룡(嚴義龍)을 지칭한다.<洪州魯恩洞遷奉成先生神主記 홍주노은동천봉성선생신주기>
민유중(閔維重) : 1630년(인조 8)~1687년(숙종 13)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민여준(閔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기(閔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봉교·세자시강원설서·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교리, 사간원헌납·경상우도염찰사·이조정랑·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홍문관교리·응교·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사도시정(司䆃寺正)·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내직으로 들고, 이어 장례원판결사·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내다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리고 1671년부터 형조판서·대사헌·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 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
숭정(崇禎) : 명 의종(毅宗)의 연호
장보(章甫) : 유생(儒生)의 딴 이름
연산(連山)의 한양촌(漢陽村)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한양말). 충곡서원(忠谷書院)
고총(古塚) : 실전(失傳)하였거나 절손(絶孫)하여 사초(莎草)를 하지 못하고 묵은 무덤. 오래된 무덤.
소장(所藏) : 간직하여 둔 물건(物件). 재물.
장획(臧獲) : 장(臧)은 노(奴), 획(獲)은 비(婢)를 말함. 노비(奴婢).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1631년(인조 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주요경력 창릉참봉, 정산현감, 호조정랑, 안성군수, 형조참판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연산으로 낙향.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사계 노선생(沙溪老先生) :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1631년(인조 9).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 윤순거(尹舜擧) : 1596년(선조 29)~1668년(현종 9).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죽산부사를 지낸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직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가 척화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시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祠)를 건립하였다.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윤순거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李珥)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과 주희의 『가례』에 의거해 매년 한 차례씩 모든 종인(宗人)이 함께 모여 조상을 받들고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약을 제정해 실천하였다.
강항을 위해 「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이 포로생활 중에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인 『간양록(看羊錄)』 등을 편찬해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해 『노릉지』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 질서인 군신 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동토집』·『노릉지』가 있다. 철원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의 글씨가 전한다.
찬선(贊善)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금구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제향되었다.
노릉지(魯陵志) : 단종릉(端宗陵)의 지석문(誌石文)을 말함
[참고`인용`발췌 문헌]
송자대전 제171권 비(碑),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자사전, 어학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고전번역원, 洪州魯恩洞遷奉成先生神主記 홍주노은동천봉성선생신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