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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별한 불교 이야기〉- 자현 스님
제목과 달리 조금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싶은데, 소제목을 봐도 그렇다. 5개로 나눈 소제목이 1. 불교 출현의 배경 2. 붓다의 생애와 사상 3. 인도 불교의 전개 4. 중국으로 넘어간 불교 5. 중국불교의 변화와 발전 등이 그것인데, 제목에서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이 화명도서관에서 빌렸기 때문에 빨리 읽어야 한다는 강박도 생기고, 어려운 이야기는 질색이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책을 읽고 남길 것이 있다면 독후감으로 남겨둘 마음을 가져본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 역시 문화나 예술처럼 인간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동양 종교는 유신론적인 신앙의 종교와는 다른, 나를 세우는 앎의 종교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 종교는 긍정적이다. 개인에게 자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대 인간 문제의 해법을 응축하고 있고 철학이기도 하다.”서문에 있는 말이다.
제1장 ‘불교의 출현’에는 이런 말도 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멸이다.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다양한 노력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가장 큰 행복은 소멸의 극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그 길을 나름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보았듯이 유대교는 생존을 위해 생긴 종교라면 불교는 상업의 산물이다. 동양에서 발생한 세 종교, 즉 불교, 유교, 도교는 신이 아닌 진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불교에서 法, 유교에서 仁, 도교에서 道라고 지칭하는데 이들의 가치가 개별성이 아닌 보편적 원리라는 점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두루 편재한다는 것은 분명 개별성과는 비교될 수 있는 우월적 가치다. 그러나 완전한 보편은 그것의 존재 이유를 사라지게 한다. 인간 생존에서 공기나 햇빛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희소성의 가치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명품이 명품일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에 있듯이 종교에서 특수와 보편, 그리고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만나게 되는 이유다.
인류가 채집과 수렵의 원시사회에서 농경과 유목의 문화로 변모할 때 땅은 생산조건에 충족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지게 되고, 자연환경에 순응하게 되면서 수용적 인간관이 만들어졌다. 이런 구조에서는 다신(多神)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데 자연에 종속된 농경민에게 기원의 대상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농경사회에서의 신은 인간보다 우월하지만 동시에 선택적으로 존재한 대상이었다. 농경은 정주(定住), 유목은 이동의 문화로 그들의 전통은 자연환경과 관련이 깊다. 사막이나 초원 같은 곳, 하늘이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구조와 환경에서는 유일신 사고를 전개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유목민의 종교가 강한 배타성과 보수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농업 후에 발달한 상업은 합리성과 유연성을 가진다. 상업에는 신이 없다. 합리성만 있을 뿐이다. 윤리 의식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이익 추구는 윤리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업은 윤리보다 이익을 통한 행복과 어울린다. 세계 종교 중 유일하게 상업을 기반으로 일어난 종교가 불교로서 특유의 합리성과 유연성을 내포한다.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 힌두교와 유목을 배경으로 하는 기독교, 이슬람교와는 다른 바탕이다. 그래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상업과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뇌 구조는 딱딱한 두개골로 감싸여 있고 머리카락이 나 있다. 이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뇌가 충격과 온도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추운 지역 사람들 머리카락은 직모이고, 흑인들은 곱슬머리다. 이것은 추위와 더위로부터 뇌를 보호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다. 더운 기후 환경에서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것, 열이 차는 것을 막기 위해 낮게 내쉬는 숨이 강조되는 것, 이런 것들이 인도의 수행문화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보면 남성은 분명 여성을 원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무더위라는 환경은 사우나에서 이성을 껴안고 있는 상황을 연상케 되고 인도에서는 여성이 환락의 대상만은 아니다. 술도 마찬가지다. 더운 지방보다 추운 지방에서 술이 발달한 이유다.
제2장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는 인도 문명은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내력을 살피고 있는데, 인도 서쪽의 인더스문명은 흑인 문명으로 이곳을 점령한 백인 아리안족에 의해 아리안 문화가 적용되지만 동쪽 갠지스강 쪽은 새롭게 대두된 신천지로 개방적이고, 신분제에서도 조금은 느슨했다. 능력제가 힘을 발휘했다는 말인데 그것은 무한경쟁의 사회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현재 네팔에 속한 이곳 카필라국에 샤카족이 살았다. 지금도 논쟁인 것은 붓다가 황인이냐, 백인이냐이다. 현재 네팔 쪽에는 황인만 살기 때문에 그는 황인이라는 주장이지만, 붓다의 선조가 이주해 왔다는 기록,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인도를 유력할 때 왕이나 귀족들과 갈등이 없었다는 점 등으로 아리안족과 같은 백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붓다가 신분제를 부정하고 평등을 주장했지만, 신분배경 때문에 인종적인 갈등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백인설의 타당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붓다의 성은 ‘고타마’, ‘석가(샤카)’는 종족명, 대륙국가인 인도에서는 성씨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종족명을 앞에 사용하는 것으로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이다. 정신의 자유는 육체라는 감옥을 무너뜨림으로써 얻을 수 있다. 플라톤도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붓다와 인도는 이런 이원론적 문화 배경을 지녔다. 붓다가 80세에 열반한 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완전한 완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 불기(佛紀)로 정한 문화로 남아 있다. 인간은 ‘정신적인 인간’‘물질적인 인간’그리고 ‘정신과 물질에 함께 집착하는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 세상은 나와 충돌할 대상이 아니며, 나 또한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게 될 때, 일체의 번뇌는 스스로 소멸해 대자유를 얻게 된다고 한 것이 붓다와 불교의 가르침이다.
연기(緣起)는 관계성의 변화로 이 세계의 ‘나’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과 같다. ‘개새끼’라고 할 때, 강아지를 의미할 수도, 욕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관계에 의해서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설사 욕이라고 할지라도 개와 새와 끼를 각각 분절해서 본다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 가지 발음을 동시에는 하지 못한다. 끼를 발음할 때 개나 새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관계성을 통해서는 전체를 보는 방식과 분절이라는 분석을 통하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관계적인 관점이 ‘연기’고, 분석적 관점을 통해 관계마저도 풀어 버리는 것이 ‘공’이다. 불교는 점차 관계성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공이 점차 더 큰 무게중심을 갖게 되었다.
불교 하면 윤회론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론을 바탕으로 성립한 종교가 아니다. 윤회론은 인도 문화 배경 중의 하나이기는 하나 마치 중국 문화권에 효孝라는 인식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과 유사하다. 윤회론은 영생론에서 파생한 것은 분명하고 이것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이의 극복이라는 문제에서 시작되었음의 의미다. 윤회와 해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윤회가 변화의 순환을 통해 영생을 말한다면, 해탈은 존재의 항상성을 통해서 영생의 가치를 말한다. 붓다는 이런 층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해탈과 다른 열반의 개념을 제시했다. 열반은 해탈과 같은 영속의 논리가 아닌 해체라는 체계다. ‘열반은 마치 불을 끈 것과 같아서 어디로 가거나 하는 것이 아님’(아함경)이다. 그러나 둘은 혼재되어 사용되곤 한다.
윤회는 변화라는 의미다. 이것을 인생이란 큰 범주에서는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 같은 개념으로 파생한 것이다.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변화의 시점이 언제인가이다. 현재는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삼세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붓다의 사촌 동생이자 석가족 왕이었던 마하남이 자신은 죽어서 어디로 가겠느냐고 묻자, “나무를 벰에 있어서 나무는 기운 곳으로 쓰러진다”라고 대답했다. 윤회를 통한 내세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일을 만드는 오늘이라고 붓다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보는 시각도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도 붓다는 대성공을 거둔 인물로 보인다. 왕자로서의 출가, 긴긴 고행과 수행으로 세상 물정을 다 겪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대성공을 거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붓다 당시 인도 사회는 능력 위주였고 유목민은 나이 많아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를 더 좋아했다. 기성세대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사용면에서 젊은이를 따라 가기가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보다 나이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어른을 경시할지 몰라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도는 다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서구화되면서 젊은이들을 좋아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인도의 능력제 문화는 깨달음을 얻은 35세의 붓다가 활동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인도에서는 한번 스승이었더라도 능력이 역전되면, 제자를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는데 이는 깨달은 붓다가 당대에 거대한 교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제로 붓다는 더 배울 것이 없으면 스승의 곁을 떠났고, 깨닫고 난 후에는 스승을 교화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스승도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학원 선생을 생각하면 된다. 능력 없다고 생각하면 학원생은 떠나고 만다. 인도는 더위 때문에 놀이보다 논쟁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스승끼리도 논쟁하지만, 제자에게 논쟁을 붙이기도 한다. 제자들은 논쟁에서 이긴 스승에게 간다. 실제 이런 사례는 붓다 전기에 많이 나온다.
‘가섭’삼 형제는 1,000명의 제자를 거느린 마가다국 최대 교단이었다. 그런데 붓다가 우두머리인 우루빈라 가섭을 꺾음으로써 1,000명의 제자가 붓다의 제자로 귀속하는데, 이것은 불교가 마가다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또 ‘사리불’과 ‘목건련’의 귀의도 스승인 산자야의 반대에도 250명 제자와 함께 이루어진 사건인데, 회의론자이던 산자야는 붓다에게 자신은 어떠한 주장도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논파해 보라고 한다. 이에 붓다가 “그것 역시 주장이라면 당신의 말은 이미 논파된 것이고, 주장이 아니라면 논파할 대상도 없는 것”이라는 논리로 산자야를 꺾어 버린다. 산자야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불전(佛傳)은 기록했다. 산자야의 제자들은 스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붓다라는 더 유능한 스승에게 온 것인데, 인도의 사제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 최고의 스승으로 공자를 드는데 공자는 전국을 14년간이나 유랑한 뒤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공자가 기른 제자는 평생 72명이었다. 이에 비해 붓다는 비구가 886명, 비구니가 103명이라고 한다. 둘 다 기록이 그렇다. 앞서 말한 가섭 삼 형제가 데리고 온 제자의 경우 세 사람만 쳤는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붓다가 이끈 제자는 최소한 이보다 10배, 즉 1만 명쯤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수행자는 생산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따른 신도수는 10만 명 이상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많은 제자들을 가진 교단을 이끌자면 갈등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붓다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수행자였다. 붓다의 제도관은 인간을 목적에 두고 제도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므로 세속적 가치가 결부되는 통과의례(할레나 제례)와 같은 제도에 관하여는 관심이 적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점차 그의 가르침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보완하기도 했는데, 이는 붓다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불교 자체의 문제였다. 붓다 사후 교단을 효율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문화권에서 힌두교에 혹은 유교에 몰락을 가져왔다.
오늘날에는 사찰하면 으레 산사와 같은 인상을 떠올리곤 하지만, 인도 불교는 사원에서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탁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인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일상을 반복하는 농경민과 달리 도시인과 상인들은 훨씬 더 유연했다. 붓다의 가르침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붓다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코살라국 사위성 기원정사다. 제타 태자의 휴식공간이던 곳을 급고독장자가 사들여 7층 건물로 사원을 지어 승단에 기증한 것이다. 2,500년 전에 7층 건물이라면 요즘의 7성급 호텔급이다. 검소하지만 장식도 화려했다고 한다. 붓다는 이곳에 19∼25년간 머물렀고, 여기서 경전의 대부분을 설했다. 기원정사는 불교의 랜드마크였다.
붓다에게는 10대 제자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제자 중에서 압도적 권위를 지닌 분은 ‘사리불’로 교단에서 지지도 대단했지만, 다른 대제자 ‘목건련’과 친구이기도 한 그는 하나의 세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붓다보다 먼저 열반에 들면서 교단은 상당히 혼란에 빠졌다. 사리불 다음에 붓다를 계승할 분은 붓다보다 27세 연하 사촌 동생 ‘아난’이었다. 그는 25년간 붓다를 시봉했지만, 붓다가 열반 때까지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수다원에 불과했다. 대제자로서의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교단의 불안정을 우려하여 이것을 정리하고자 한 인물이 ‘마하가섭’이다.
마하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칭해지는데, 두타란 고행과 유사한 엄격한 보수적 수행을 의미한다. 붓다 당시 마하가섭은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붓다 사후에 규율과 가르침의 정비를 통해 제도화된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보수적 성향의 마하가섭과 가장 먼저 갈등을 빚은 사람은 아난이었다. 마하가섭과 아난으로 대비되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결국 마하가섭의 보수적 관점이 관철되었기 때문에 불교 교단은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게 된다. 결집과정에 갈등관계를 보였지만, 결집 이후에는 마하가섭과 ‘부라나’가 갈등하게 되는데, 멀리 제자들과 있던 부라나는 결집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3개월간의 결집이 끝나 있었다. 승원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대립하게 된 마하가섭과 부라나도 결별하고 만다. 탁발이라는 기본원칙조차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 부라나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붓다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다.
마하가섭과 부라나의 갈등 관계를 통해 아난과는 다른 관점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마하가섭은 교단의 전체적인 대표성이 아닌 부분적인 대표성에 의한 것이라는 점도 인식할 수 있다. 마하가섭은 비록 보수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붓다 대제자 중 한 분이라는 점, 비주류들의 불참과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격한 충돌은 없었다는 점에서 진보 속 보수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체계적인 틀을 만들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이해된다. 불교 교단은 마하가섭의 보수 반동 속에서 진보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 20년 후 마하가섭은 아난이 이끈 진보적 세력에 밀려나기도 한다.
제3장 ‘인도의 불교 전개’에서는 아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는 수려한 외모에다 붓다가 설한 대부분의 경전을 구전하고 집필하기도 했다고 한다. 붓다와 혈족이라는 이유로 후광 속에서 텃새를 부린 면도 없지 않았으며 실제로 붓다 십대 제자 중 다섯 명이 석가족이었다는 것을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마하가섭에게 밀렸지만,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 후에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교단의 새로운 개척지인 인도 서쪽지방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젊은데다 장수한 기록도 있으며 붓다 열반 20년 후에는 괄목할 성장을 이루고 주도권이 다시 아난에게로 옮겨 오게 되어 교단은 다시 진보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아난은 120살 혹은 150까지 장수했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경이에 가까운 장수였다.
인도 서쪽으로도 불교를 전파한 개척자는 ‘가연전’과 부루나였지만, 그것을 확대하고 완성한 것은 아난이었다. 붓다 열반 후 100년 무렵에는 본래의 동방교단과 전파된 서방교단이 충돌하게 되는데, 동방교단은 직접 발생한 지역에 기반을 두었고, 서방교단은 전파된 교단인데도 서방교단이 더 보수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가 중국보다도 우리나라가 더 전통을 고수하고 보수적인 것과 같다.
관행으로 생각하고 수용한 것들도 서방교단은 불가하다고 반대한데서 충돌의 문제가 표면화되자, 양교단 장로 여덟 명이 회의를 가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서방교단이 승리로 끝이 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동방교단에 속한 다수의 진보적인 승려들은 장로회의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며 집단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뉜 최초의 불교 교단 분열이었다. 붓다 열반 100년 뒤의 일로써 대중부는 다수라는 의미고, 상좌부는 종갓집 또는 장로부를 의미하는데, 이 결집 때 장로 여덟 명 중에 여섯 명이 아난의 제자였다. 이는 아난의 진보적인 관점이 다시 보수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항렬이나 서열, 혹은 나이보다도 출가 순서 하랍(夏臘)을 중심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
분열과 아집이 판치던 인도에서 불교를 통합한 걸출한 왕이 있었으니 그는 ‘아소카 왕’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아쇼카 왕의 석주가 후일 유럽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불교 유적이 발견되는 절대적 지표가 되었고 붓다의 활동 시기를 절대연대로 정할 수 있게 된 것도 아소카와 관련하여 역으로 산출한 것이라는 것만 봐도 아소카야말로 붓다가 예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알렉산더대왕이 유럽을 정벌한 뒤 인도까지 정벌하고자 했으나 질병과 전쟁에 대한 염증으로 뒤돌아간 뒤에 죽음으로써 제국은 여러 지역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서북 인도 쪽은 알렉산더군의 부장이던 ‘셀레우코스’에게로 돌아갔다. 셀레우코스와 찬드라굽타는 인도의 패권을 놓고 충돌했다.
고대 인도 전쟁은 코끼리 등위에 무기를 싣고 적진에 돌진시켜 대오를 무너뜨리는 전술이었는데 ‘찬드라굽타’는 당시 9,000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대왕의 5m가 넘는 긴창은 사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코끼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찬드라굽타 아들인 ‘빈두사라’는 아버지 후광을 업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으며 101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후계자를 두지 않은 채 죽었다. 101명의 아들들이 내전을 일으켰고, 아소카는 단 한 명의 동생만 남겨두고 나머지 99명을 모두 죽여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살려둔 이는 동복동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복동생이었다. 아소가는 대부분 영토를 물려받았지만 ‘칼랑가’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당시 사망자가 10만 명, 포로가 1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는데 「잡아함경」에 따르면 ‘아소카가 어린 시절에 소꿉장난을 하던 중, 쌀이라고 하면서 모레를 붓다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붓다는 이것을 명상하는 곳에 골고루 깔게 했으며, 이 공덕으로 200년 후 전 인도를 통일하는 대제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는 모레를 보시받은 공덕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추하고 성질이 좋지 않겠다는 것까지 기록해 두었다고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아소카왕이 인도를 통일한 후 이미 200년 전에 열반한 붓다의 사리탑에서 금판에 새겨진 아소카의 전생담이 발견되었다 고 한다. 오늘날에는 아소카왕이 불교유적을 참배하면서 건립한 바라나시 석주(石柱)의 주두(柱頭)는 인도의 국장이 되었으며, 마우리아 왕조를 나타내는 공작은 국조가 된 것을 봐도 아소카왕이 얼마나 불교를 신봉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융성하던 불교가 어떻게 힌두교에 밀렸는지? 불상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자비를 내세우는 대승불교는 붓다 당시에도 있었던 것인가? 완전한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는가? 완전함이란 한계가 없어야 하는데,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시대와 문화적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 문화의 충돌이다. 붓다는 진리와 하나 된 완전한 존재라는 점에서 형상과 충돌한다. 형상적 측면에서 불상이 있고, 무형상적 측면에서 공(空)사상이 있다. 후대로 오면서 형상주의적인 관점에서 밀교가 생겼고, 무형상주의적인 전통에서 중국불교의 완성이랄 수 있는 선종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형상과 무형상이라는 이중 구조로, 이것은 인간의 심성 속에 양자 모두에 대한 욕구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생전에 아난이 “붓다께서 열반하시면 어디에 의지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4대 성지를 순례하면서 의지하라”고 했다고 한다. 4대 성지는 탄생·깨달음·첫 설법·열반 장소이기는 하나, 생전에 무형상주의와 자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라고 밝힌 것으로 볼 때, 이를 붓다의 말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이런 주장은 특정 목적과 관련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첨가된 것일 것이다. 4대 성지는 나중에 8대 성지로 확대되는데, 이런 성지 확대는 종교적인 의도성이 내포된 것이고 또 8대 성지와는 다른 개념으로 마가다국의 왕사성 영취산정과 코살라국 사위성 기원정사는 붓다의 주된 거주처였으므로 여래향실(如來香室)이라 하는데, 이곳들은 후일 대승불교 산실로 『금강경』설법의 배경이 된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철저한 무형상주의를 내세운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는데 초기에는 유목에 기반을 둔 사막의 종교답게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다른 이교도와 무역하지 않는다는 폐쇄성이 표출되었고 거대 문화권으로 성장하면서는 보편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역을 해 왔다. 대부분의 항구가 인도 서쪽에 몰려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슬람의 대두는 인도와 교역이 차단되면서, 인도 상업은 붕괴되기에 이른다. 브라만교가 정비된 힌두교는 농업과 목축에 의지했지만, 상업에 의지해 오던 불교는 달랐다. 상업자본의 몰락은 불교 교단 운영에 극심한 경제난을 가져왔다. 이후로 불교는 밀교가 되거나 대승불교로 변화되면서 힌두교의 주술성과 제의성(祭儀性)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힌두교는 불교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주술신앙을 집대성한 점에서 불교는 살아남기 위하여 주술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점차적으로 힌두교에 병합되어 갔다. 인도에서 불교가 몰락한 이유다.
과학은 유신론적인 종교와는 다른 진보의 학문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자기 극복과 함께 새로운 시도하고 답을 만들고 찾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과학과 종교가 다른 측면을 보이는 이유지만 불교는 이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붓다가 설한 진리는 변화이다. 그러나 진리의 속성은 변화해서는 안 된다. 이점이 곧 초기 불교에서 우월론자를 파생하는 근거가 되었다. 예로 자현 스님은 ‘라이트형제의 비행기 발명’을 예시하였는데, 라이트형제는 문명사에 획기적 발명으로 지금도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라이트형제가 발명한 비행기를 탈 수는 없다. 오늘날의 여객기, 전투기, 우주왕복선도 모두 라이트형제가 만든 비행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착각하기 쉽지만, 라이트형제의 위대성은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해 붓다의 위대성은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고 하는 그 자체로써 항존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나 밀교라는 이름으로 티베트로 망명하여 급상승한 뒤에 강력한 세력으로 중국 문화권을 휩쓸었으며 현대에는 중국에 의해 강제 복속되는 과정에 티베트 밀교는 세계 속으로 별처럼 흩어졌다. 이것은 생각지도 않은 불교의 세계화가 아닐 수 없다.
인도에서의 불교 소멸은 이슬람인 무골제국이 300년 동안 인도를 점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힌두교는 이슬람과 함께 건재했다. 이슬람 이전에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불교는 사라졌다. 이슬람은 몽골과 달리 문화적이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은 미국식 야만이자 왜곡된 시각이다. 이슬람 문화력은 불교가 이슬람으로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에 의한 무력적 외부 충격과 구심점을 잃게 된 불교가 독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교도들은 힌두교와 이슬람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마치 구한말 조선이 붕괴될 때 오랜 이웃인 청나라를 택할 것인지, 신흥 세력인 일본을 택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힌두교는 이슬람 300년, 영국의 200년 통치에도 건재하다는 것은 힌두교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원시적 종교성이 없었던 데 비해, 힌두교는 그것을 갖고 있었던 때문이다.
제4장 ‘중국으로 넘어간 불교’에는 “중국문화 속에 성공한 두 가지 외래문화가 있다. 이는 불교와 공산주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현재 중국적인 방식에 의해서 변형이 많이 되었고 또 기간이 짧아서 중국문화 자체에 일대 변화를 주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지만 불교는 1,000여년 동안 중국 문화권을 장악하면서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문화권을 초월한 불교로 인해 중국은 좀 더 보편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만리장성 너머의 유목과 강남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오늘날 유럽보다 거대한 중국은 중국을 넘어선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불교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았다.
여기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정관정요〉를 펼쳤던 당태종 이세민은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玄奘)에게 『노자』를 인도말로 번역해서 인도로 문화수출을 감행했다 한다. 그러나 사건은 인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노자를 택한 것은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심오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인도 쪽에서는 『노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인도 문화가 중국문화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연한 문화매체가 있어야 했다. 중국의 유교나 도교는 문화의 폐쇄성 때문에 이런 수준에 미달했다. 만약에 인도 문화가 더 높았다면 로마로도 불교가 흘러 들어갔을 테지만, 불교의 서방진출은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불교의 동방진출과 관련해 현장은 「자은전」에서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현장이 귀국하려고 행장을 꾸리자 인도 승려들이 “인도에 비하면 중국은 변방의 일천한 국가일 뿐인데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현장은 “중국이 인도에 비해 하열하지만, 자신은 중국으로 돌아가 백성을 계몽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불교가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한다.
19세기까지도 유럽에서는 붓다를 태양신 정도로 여겼다. 그런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붓다의 실존을 증명할 어떤 고고학적 자료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5년 독일의 고고학자 ‘포이러’에 의해 룸비니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발견될 수 있게 한 것은 인도인이 아니라 현장이 남긴 「대당서역기」였다.
오늘날 붓다의 연대 기준이 아소카왕이 로마로 보낸 외교문서에 있는 것이듯이 아소카의 연대를 잡고 난 뒤에 그 기준이 다시 붓다의 연대로 소급한 것인 만큼 인도는 시간과 공간 중에서 공간만 생각한 것이었다. 현장의 기록은 하나의 유적이 발견되자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중국은 역사의 나라고 우리나라도 청출어람으로 가장 많은 세계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사기》〈열전〉에 보면 주인공과 상대방간 대화가 유독 많은데,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전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선종의 어록도 마찬가지다. 단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말했을까 하는 것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동물이다. 여기에 정치권력과 같은 세력이 개입하면 역사는 더욱 크게 출렁일 수밖에 없다.
‘인도의 역사 부재’와 ‘중국의 역사주의’는 〈해리포트〉를 책으로 읽는 것과 영화로 보는 것만큼 차이가 있다. 시간의 화살은 일회성이며 이것은 반복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다. 인도는 공간론적 시간 중심이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에 전후가 뚜렷하지 않았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시간론적 중심으로 순서로 정리하고 그 속에서 핵심 경전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불교는 역사주의로 수용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권의 차이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며, 답이 없는 학문이 있듯이 문화 상대주의 아닌 문화 과정주의도 중요하게 존경받는 이유다.
가만히 보면 여기에 쓰인 말들이 쉬운 말이 아니다. 철학적이고 현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자현 스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가 누구인지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현 스님은 동국대학교 철학과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고려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2년 현재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인문학부와 미술사학과에서도 강의를 맡고 있고, 월정사 교무국장, 울산 영평선원 원장, 월정사 부산포교원장 등도 맡고 있으며, 여러가지 논문과 저서를 집필했고 불교TV에서 ‘숨겨진 사찰의 미’를 제목으로 강의도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문화에서의 내세관 부재는 역사에 강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역사주의를 파생한다. 그래서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이며 이원론적인 다른 세계의 상정이 없다. 군주가 아니면 성인이 될 수 없다는 성인군주론이 존재한 것이다. 요순우탕, 문왕, 주공 같은 성인은 모두 군주를 겸한 성인이었다. 성인 중에 군주가 아니었던 공자, 관우도 후일 문선왕(文宣王)과 관제(關帝)로 군주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런 일원론에 입각한 제정일치 구조는 통치자 천자(天子)는 곧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따로 종교가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통치권자가 종교적인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군주권과 종교의 관계가 수직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5장 ‘중국 불교의 변화와 발전’에서는 중국 역사 속에서 불교의 발전과정을 살피고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은 공식적으로 후한 명제 때로 서기 67년, 이전에도 실크로드 교역을 통한 불교 전래가 있었지만, 이후 얼마 동안은 우리나라에 이슬람이 전래된 지 오래 되었음에도 우리국민 속으로는 파고들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상인들의 종교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 한족 역시 우리가 이슬람에 무관심한 것처럼 처음에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중국은 강남과 강북의 문화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데 강북에서 일어난 오호십육국과 강남의 육조 시대를 합쳐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조조의 위나라와 사마염의 진나라에서 시작돼 갈라진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둘의 문화차이는 크다. 강북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공자와 『시경』이 주축이었지만, 강남은 개인적이고 노자와 『초사』가 문화적이다. 강북이 집단주의에 정치적이라면 강남은 개인적이며 예술적이다. 이는 환경적 요소에 기인한 것이지만, 중국 역사에서 면면히 유전된 기류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불교도 강북은 정부 주도로 정권에 예속되지만, 강남은 개인적 자율성 전통을 유지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치열한 전쟁 양상이 벌어지자 이성적인 능력을 크게 요구받게 되는데, 신은 입지가 점점 좁아지게 되고 인성론이 중국 철학의 주류로 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다. 그러나 인성론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진의 통일을 넘어 한나라에까지 전해진다. 한나라의 인성론은 순자의 후예인 순열(順悅)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무제 때 동중서(董仲舒)는 여러 인성론을 제기하여서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유향(劉向)은 성정상응론(性情相應論)을, 후한 때에는 왕충(王充)이 용기위성설(用氣爲性論)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유교 쇠퇴와 더불어 관심이 낮아지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중국 최초 이민족이 지배하게 되고 외래사상이 만개하는 불교시대를 맞게 된다.
공자와 맹자를 병칭하여 흔히 ‘공맹’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맹자는 전국시대 말 순자에 눌려서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진 인물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 인성론 체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맹자가 재평가받기에 이른 것이다. 맹자를 깨워 성인으로 만든 것은 유교가 아니라 불교였다는 말이다. 북송 시대 유학자 정명도가 죽은 뒤에 동생 정이천은 ‘맹자 이래 끊어진 심법(心法)을 1,400년을 격해서 정명도가 계승했다’고 했는데, 100, 200도 아닌 1,4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하다. 다만 그사이 인성론의 공백을 채운 것은 유교가 아닌 불교였다고 봐야 한다.
중국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을 꼽는데, 그것은 북방 유목민의 남하를 막기 위해 축조된 것이지만, 중국역사에서 유목민이 남하할 때 만리장성이 역할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그랬고 이후 북송을 무너뜨리는 금나라 때도, 몽골과 청나라의 남하 때도 만리장성은 중국인을 보호하지 못했다. 노력에 비해 효율성이 가장 떨어지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산일뿐더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본래 기능을 다 하지 못했지만, 건축비는 입장료로 회수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당나라 개국 이후 최고의 불교 인물로 당태종의 왕권강화에 발맞춘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다. 그는 법상종을 통해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인도의 신분제 사회를 본딴 차별적 질서 원리로 이를 통해서 새 왕조의 권위를 수립하고 안정을 꾀할 수 있게 했다. 그의 『대당서역기』는 당태종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당의 세계 경략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돌궐과 중앙아시아 토번(티베트) 지역까지 경영하게 되는 당은 만리장성과 관중, 강남을 융합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면서 원융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화엄종을 일으켰다. 화엄종은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다른 차별 속에서도 완전함을 갖춘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하나로 균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인정하는 개별성의 평등이라는 것으로, 마치 가을 산의 단풍이 실은 나뭇잎들의 부조화일 뿐이지만, 부조화가 모여 거대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신라도 신라 중심으로 고구려·백제 통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이 유행하게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완전한 원융이 될 수 없었다. 신라통일이 고구려와 백제에게는 망국으로 이어지는 일로 결코 평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원융은 삼국통일 후 100여 년 뒤에 불국사 건립을 통해 드러난다. ‘붓다의 나라’인 佛國寺는 신라·백제·고구려가 각기 다른 차이 속에서 차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건립된 것이다.
앞으로 기회 있으면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이 禪의 시조로 일컫어지는 ‘육조혜능’에 대해서인데, 광동인인 혜능이 기주 쌍봉산의 오조 홍인을 찾아갔을 때 일화다. 홍인이 “너는 영남인으로 오랑캐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감히 붓다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혜능은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있을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받고자 함에도 말대답을 하는 개인성을 보인다는 것은 오늘날도 용납되지 않는 것으로 이는 강남 문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선종이 홍인에 의해 번성했음에도 혜능을 기다려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은 강남의 개인문화가 선종과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사람은 천당에 가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믿는 것이 행복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명품이 명품일 수 있는 것은 희소성과 상대는 가지지 못했다는 우월감에 기초한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를 넘어서 초개인주의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밀교의 주술성은 이런 사회 변화에 잘 부합한다. 붓다는 열반의 가르침으로 ‘쥔 주먹이 없다’는 말로 지식의 개방성과 보편성을 천명했다. 밀교는 불교에서 파생되었지만, 힌두교에 더 가깝다. 민중은 합리성보다는 ‘비방(祕方)’과 같은 나만의 특수성을 가지기를 바란다. 만다라로 대변되는 밀교의 번잡함과 정반대로 단도직입의 존재가 선종이라는 점은, 인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차이를 극명히 대비해 보여준다. 단순명료하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굴복시키는 가치, 그것이 선종에 있다. 禪의 미학이다.
당나라 말 15대 황제인 무종은 기울어져 가는 국가부흥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토지와 세금은 한정되어 있지만, 토지 세습 등으로 환수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사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국가가 환수하고 승려들은 환속시켜 부역대상으로 확충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도 그렇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에 파괴된 큰 사찰이 4,600곳, 작은 곳은 40만 곳에 달했다고 하고, 환속한 승려가 26만 명이나 되었다 한다. 중세유럽이라면 국왕이 패배했겠지만, 중국은 황제권을 상대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다. 회창법란(會昌法亂)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875년 ‘황소의 난’을 겪게 되고, 실제 법란이 있은 후 불교가 다시 공인되기는 하지만, 경전이 없어져 고려에 경전을 구하는 지경에 이르러기도 했다고 한다. 설사 책이 있더라도 선생이 숙청되어 공부할 수도 없었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의 중국은 불교국가가 아니다. 신유교 국가로서, 500년에 걸친 불교에 압도된 유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관리임용 등에서 유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유교는 통과의례와 과거제의 안정 속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불교도 문제가 있었다. 불교는 독자적인 통과의례가 없는 종교로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원론적 영향으로 세속과 의도적으로 멀리하려는 경향도 있으며, 관리임용과 과거제를 유교가 잡고 있었다는 것은 귀족지분과 권리에 의해 벼슬이 주어지던 중세 종교보다는 학맥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도 막강한 영향을 준 주자학, 즉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와 경쟁한 육상산(陸九淵)이 “우주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우주이다”라고 한 것처럼 “유교 육경(六經)은 모두 내 마음의 각주”라고 한 것처럼 철저히 유심론적이고 주관주의였다. 이를 성리학에 빚댄 심리학이라고 불렀는데, 주자와 같이 당대에는 학문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원나라를 넘어 명대에 와서 왕양명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어, 이 둘을 ‘육왕학’이라 한다. 양명학은 ‘본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선종과 유사하다. 성리학자들은 이를 유교 옷을 입은 선종의 변형이라고 비판하지만, 性卽理인 성리학과 같이, 心卽理라는 구조는 인식주체가 天理이므로 이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로 선종의 돈오설과 같다.
그러나 이를 선종이 아닌 신유교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현실 긍정은 곧 입세적인 것이지, 출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선종은 출세간을 넘어 출출세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분명히 다른 변별점을 확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논리구조는 일치하며, 양자 논리는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인간만을 특수화시키지 않고 모든 존재의 깨달음을 주장하는데 비해, 신유교는 인간만을 좀 더 특수화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대승불교는 불살생을 넘어 불육식을 주장하지만, 유교는 살생은 어짊이 아니라고만 한다. ‘성리학’과‘심리학’이라는 신유교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지만 유교인 것이고, 중국철학의 영향을 입지만 뿌리는 불교였던 것이다.
두보가 〈곡강시(曲江詩)〉에서‘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여 70세를 예로부터 드문 나이라 했다. 선조는 〈동의보감〉의 찬술자 허준을 주치의로 두었지만 57세에 죽고, 허준은 77세까지 살았다. 『서경』「홍범」에는 오복을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이라고 했는데, 그 첫째가 장수다. 현재는 수가 꼭 복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대다. 이제 나는 얻음이 아닌 잃음에 대해 배워야 하고, 웰빙과 웰다잉을 넘어서 ‘잘 늙는 가치’인 웰에이징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세상은 변화 속도가 가속도가 붙고 있다. 변화의 가치를 따라가려는 것은 유한을 가지고 무한을 쫓는 것과 같은 허덕임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은 가장 큰 권력이다. 그러나 ‘자본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자본과 건강은 결국 ‘시간의 화살’속에서 유한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인간이 가진 종교 중 스스로를 비판하면서 타자화시킬 수 있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이는 인간행복의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는 의미다.”에필로그에서 저자 자현스님이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