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좀 들어 다오”
야 야, 나 느그 아버지 하고 더는 못 살겠다. 아~ 글쌔,
“ 엄마 , 엄마 잠깐만 누가 왔나봐요, 좀 있다가 내가 할깨요.
작은 딸은 내 하소연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누가 왔다는 것은 핑계 일태고 어미의 넋두리가 듣기 싫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의 나이는 74세이고 영감나이는 84입니다.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57년째 입니다. 나는 18살 때 강원도 산골, 홀어머니 둘째 딸로 태여나 입 하나 줄이겠다는 이유로 10년이나 나이 많은 영감에게 시집을 온 것입니다. 그래도 시댁은 서울 변두리 지만 서울 사람으로 7남매의 셋째 아들 입니다. 남편은 직업이 없었고 시댁에서 아이 셋 낳을 때 까지 지냈는데. 시댁에서 부엌에 방하나 딸린 셋방을 얻어 주어 분가를 하게 되였고 그 후에도 남편은 놀고 먹었고 간간히 노름을 하고 사고를 치면서 살았지만 , 나이 어려 시집왔던 나는 남자는 그런가 보다 하며 잔소리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식구만 늘어 갔습니다. 쌀은 시댁에서 보내 주었지만 아이들 다섯하고 살다 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 였습니다. 나는 30살도 되기전에 아이 다섯의 어미가되여, 시집 오기전에 잠시 배웠던 미싱기술로 집에서 바지를 만들어 전국 5일장을 찾아 다니며 팔았습니다. 5일장 좌판 장사는 겨울 보다 차라리 여름이 더 힘들었습니다. 햇빛 한 점 가릴 곳 없는 좌판에서 물만 드리키다가 기절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밥을 사 먹으려면 바지를 두어개 팔아야 했기에 거의 굶다시피 했지만, 그 지경에서도 남편은 꾸준히 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나쁜 사람은 아니 였지만 홀 시어머니가 혼자서 많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셨기에 그것이 당연한 삶 인줄로만 알았던 것 같습니다. 몇 년 동안은 내가 만들은 바지가 잘 팔렸었는데 대량으로 만드는 공장이 생겨나 예쁘고 싸게 팔기 때문에 더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은행 직원 밥을 해주게 되였습니다. 장터를 떠돌지 않아도 되였고 집안일과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은행에서 남은 밥과 반찬으로 모처럼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런 것이 내 복이 없었는지 은행이 합병하고 직원 수가 적어지더니 자채 식당은 없어 졌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공장 식당 아줌마로 취업했는데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일도 많았고 말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 시키려면 어쩔 수 없어 새벽에 일어나 시장보고 공장 점심 저녁을 십 여 년 하다가 공장이 성남으로 이전 하면서 그만 두게 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편은 꾸준히 놀고 사고 쳤지만 고마운 것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 주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큰 아들만 대학 공부를 했고 다른 아이들은 고등학교만 시켰습니다. 그 후에도 놀고 있는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할 시간 없이 파출부에, 식당경영까지 하면서 5남매를 짝을 지워 주고 아껴서 살면 될만한 월세가 나오는 집도 소유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60대 초반까지는 식당 일을 했지만 허리 수술 하고 나서는 힘든 일을 하지 못해서 편안 하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밖에 일을 할 때는 남편하고 함께할 시간이 없어서 싸울일도 없었는데 하루 종일 얼굴 보게되니 뭐든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내 허리가 이렇게 된 것도 고생한 결과였기에 놀고 먹었던 남편이 뒤늦게 원망 스러웠습니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서, 더 나빠지면 자식들에게 짐이 될 까봐 아침 일찍 일어나 구청에서 마련해준 에어러빅도 하러 가고 저녁 먹고는 한 두 시간 걷기 운동 두 하는데 남편은 씻는 것도 이 삼 일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밥 먹으라고 하면 잠 자느라고 밥도 먹지 않아 분통을 터트리게 합니다. 식구라고는 달랑 둘인데 제 시간에 밥을 먹으면 좋을 텐데 나중에 일어나 식어빠진 반찬으로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안스러우면서도 밉살 머리 스럽습니다. 티비를 볼 때도 싸우는 것이나 축구만 보고 내가 드라마좀 보자고 하면 울고 짜는 것을 뭣하러 보냐며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둘이 오손도손 이야기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이제라도 얼마 남지 않을 시간이라도 남에 집 부부처럼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미운 놈은 미운짖만 한다더니 몇 년 전 부터는 남이 버린 물건들을 주어다 옥상에 싸 놓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씩 아이들과 옥상에서 고기도 구어먹으며 놀았었는데 지금은 상 하나 필 틈도 없이 고물상이 되였습니다. 말려도 보고 화도 냈지만 펄펄 뛰어서 옥상에를 가급적 올라가지 않다가 된장 담궈 놓은 것이 어떤가 해서 올라갔다가 더 많이 쌓여진 것에 화를 참지 못해 , 사람을 불러 대형 거울 3개 불고기판 대 여섯개 의자 서너개 운동화 열 켤레와 구두, 그리고 물통, 등등을 버렸는데 병원 갔다온 남편이 알고는 난리를 쳤던 것 입니다. 옷 까지 벗고 날뛰는 영감이 무서워 복덕방하는 친구 가개로 피해 나왔습니다. 딸에게 하소연 이라도 하려 했는데 딸들도 자주 듣는 넋두리라 귀찮았던가 봅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에게 말 할 수 없으니 만만 한 것이 딸들이라 눈치가 보여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작은 딸은 가끔씩은 박자를 맞춰 주는데 큰딸은 내 말이 시작되면 단 칼에 자름니다 . 지난 번 어버이 날 이라고 밥 먹자기에 나갔다가. 별 뜻없이 남편 흉을 봤었는데 그 말을 듣던 큰딸은” 엄마 그렇게 싫으면 집 팔아서 아버지랑 반씩 나눠 갖고 시설로 가서 살아요. 엄마가 하기 싫어하는 밥도 해 주고 아버지 한테 신경쓰지 않아도 될 탠데 안 그래?”
이런 것이 오 남매 중 장녀라는 것이 내 놓은 방법 이였습니다. 큰 딸은 벌써 30년 가까이 시 부모를 모시고 살며 맘 고생 몸고생을 하고 있고 어려서 일하는 엄마 때문에 동생들 돌보느라고 마음의 여유를 잃어서 인지 포근 하지가 않습니다. 밉다가도 고생만 시켜 시집 보낸 것이 미얀 하기도 하고 시아버지 소 대변 받아내고 깐깐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가 어디 쉬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픔니다. 지금은 시 아버지는 돌아 가셨고 사위가 재미는 없어도 무던한 사람이라 조금은 편안해 졌다고 합니다. 자식들 5남매는 사는 형편은 괜찮고 아들들이나 사위가 우리 영감을 닮지 않아서 딸이나 며느리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 형편이니 우리 두 늙은이만 건강히 오손도손 살아가면 자식들이 편하고 걱정도 없으련만 오늘도 속상해서 글을 적습니다. 컴프터는 하지 못하기에 부동산 친구에게 부탁해서 적었는데 이제는 속이 시원 합니다. 친구에게 뼈다귀 해장국 먹으러 가자고 해야 겠습니다. 먹고 집에가는 길에 영감님것도 1인분 포장해 달라고 해야 겠습니다. 남편은 뒤끗이 길지 않아서 순간만 피하면 되니까 그 때 쯤에는 풀려 있을 겁니다. 막무가내인 남편이 제일 어려워 하는 사람은 큰 아들이니까 옥상 물건 버리자고 말 하라고 시켜야 겠습니다.
첫댓글 그래도 자식보다는 남편을 더 위해야 되지요~
부부니까.... 남은 여생 행복 하십시요
사실 우리 고모님 이야기 에요, 난 아직 한갑나이입니다. 나역시 고모에게 그렇게 말 해줍니다. 속썩히는 남편이지만
집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싸울 상대가 있다는 것 또한 없는 것 보다는 낫다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