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명 : 기화(己和)
속명 : 유수이(劉守伊)
호 : 득통(得通), 당호:함허당(涵虛堂)
*함허(涵虛·1376~1433) 화상의 이름은 기화(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다. 옛 이름이 수이(守伊)요, 호는 무준(無準)이며 계시던 방은 함허당이라 하였다. 속성은 유(劉)씨이며 남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청(聽)이며 벼슬은 전객시사(典客侍事)를 지냈고, 어머니는 방(方)씨였다.
고려 우왕 2년(1376. 11. 7)에 태어났는데 어려서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글을 배웠는데 기억력이 뛰어나 하루에 수천 개의 말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12세 때 동문수학하던 벗이 요사하는 것을 보고 슬피 울다가 세상살이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할 뜻을 세웠다.
1396년 봄, 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이때 어느 노승을 만나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노승이 “불교에는 십중대계(十重大戒)가 있는데 그 첫째가 ‘살상하지 말라’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석연히 ‘어진 사람의 행(行)이다’고 심복해 마지 않았다. 또 인도(仁道)의 말을 깊이 새겨서 이로부터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출가할 뜻을 내어 의상암(義相庵)에서 같은 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듬해(1397, 22세) 봄에 회암사(檜岩寺)로 가서 처음으로 왕사 무학(無學) 대사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수행하다가 1404년(29세) 봄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왔다.
1406년(31세) 여름에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 돌아와 그해부터 1409년까지 4년 동안 『반야경』 강석을 세 번 베풀었고, 1410년(35세)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서 지냈다. 1411년 가을에는 불희사(佛禧寺)로 가서 3년 동안 결제하면서 절을 수리하고 여러 신도들을 모아 조풍(組風)을 널리 드날렸다.
1414년(39세) 3월에는 자모산 연봉사(烟峰寺)로 가서 조그만 방을 정하고 당호를 함허당(涵虛堂)이라 하고, 3년 동안 부지런히 수행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 뒤로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에 맡겨 자유로웠으며 산천의 언덕에서 소요하고 인간 세상에서 자재하였다.
1420년(45세) 늦가을에 오대산에 들어가 향기로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오대산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에서 나옹 화상의 진영을 뵙고 제사한 후 이틀밤을 그 암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날 꿈에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조용히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을 기화(己和)라 하고 호를 득통(得通)이라 하라”하였다. 스님은 절을 하고 공경히 받은 후에 갑자기 꿈을 깨니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마치 하늘에 오른 것 같았다.
다음날 월정사에 내려와 지팡이를 놓고 한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차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이에 주머니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어 그 도덕(道德)이 세상에 알려졌다.
1421년(46세) 가을에는 세종대왕이 불러 어찰인 대자사(大慈寺)에 머물게 하면서 선비(先妃)인 대비(大妃)의 명복을 빌게 하고 왕과 여러 군신들을 위하여 설법하게 하였다. 이렇게 4년 정도를 지내다가 1424년 가을에 사퇴하고 강화도 길상산(吉祥山)으로 떠났다.
오늘날 길상산은 전등사가 위치한 정록산 남쪽에 솟은 높이 336미터의 산으로, 절은 없고 남쪽에 지난해(98) 개교한 가천의과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길상산 서쪽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469m) 동쪽 신라 선덕왕 8년(639)에 창건된 정수사가 있다. 1426년 함허가 중건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남을 보고 ‘정수사(精修寺)’를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 이 절 북쪽 등성이에 함허 득통 부도가 있다. 그리고 등성이 너머 계곡을 ‘함허동천’이라 부르며 바위에 글자가 석각되어 있다.
이후 함허는 공덕산(孔德山 大乘寺), 운악산(雲岳山 縣燈寺) 등의 여러 산을 편력한 뒤 1431년(56세) 가을, 영남의 희양산 봉암사(鳳岩寺)에 돌아가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다가 세종 15년(1338) 4월 1일에,
떠남에 다다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시방세계가 푸른 허공이다.
그 가운데는 아무런 길도 없고
바로 서방의 극락세계로다.
라는 임종송(頌)을 마치고 곧 떠나시니 세수는 58세요, 법랍은 38세였다.
열반 소식을 들은 효령(孝寧)대군이 세종께 알려 강화 정수사·현등사·봉암사·연봉사(烟峯寺)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우고, 사리(舍利)를 모시게 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원각경소(圓覺經疏)』, 『반야경오가해설의(般若經五家解說誼)』, 『현정론(顯正論)』, 『반야참문(般若懺文)』, 『윤관(貫)』 등과 제자들이 시문을 거두어 만든 『함허당어록』이 있다.
*경북 문경시 봉암사 관련:"조선시대에 들어 함허 득통 대사가 1431년(세종 13) 절(봉암사)을 중수하였다. 득통 대사는 조선 초 배불론(排佛論)에 맞서 불교 교리의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데 힘을 기울인 분이다.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전통사찰총서17,봉암사편,195page)
*충북 괴산군 공림사 중창:"공림사는 창건 이후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 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고승이었던 득통 스님이 건문(建文) 연간(1399∼1402년)에 법당과 여러 요사 등을 건립하는 중창 불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공림사를 ‘함허의 도량’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림사와 자정국사 미수와의 관계를 인정한다면, 이 도량은 약 100여 년만에 새롭게 정비된 셈이다. 특히 이 시기는 본격적 불교 탄압이 막 시작되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대규모 중창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득통 스님은 조선 초기 불교를 수호한 대표적 호법승(護法僧)으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그의 공림사 중창은 단순한 사찰 중창의 범주를 벗어나는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전통사찰총서10,공림사편,240page)
*서울시 서대문구 백련사 중창:"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무학(無學. 1327∼1405)왕사의 뜻을 이어받은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 화상이 1399년(정종 원년)에 중창하여 (백련사)법당과 요사를 일신하였다."(전통사찰총서4,백련사편,237page)
*인천광역시 강화군 정수사 중창:"함허당 기화(涵虛堂己和) 스님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배불(背佛)의 풍조 속에서 정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 크게 노력한 분이다. 그의 부도가 이 곳 정수사에 있는가 하면, 이 절 앞의 계곡은 그의 당호를 빌려 함허동천 계곡이라 불리고 있으니 정수사에는 함허 스님의 얼이 곳곳에 스며있다고 하겠다. 함허 스님이 출세했던 시대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교체되는 격동기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국가의 지도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게 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함허 스님은 감정적, 대립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교단 존립의 정당성을 합리적 차원에서 천명하므로써 유학자의 그릇된 불교비판에 세찬 죽비를 가하였다. 함허 스님은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에 충청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었다. 출가후 법명을 기화, 호를 득통이라 하였으며 그가 주석했던 자모산에서는 당호를 함허당(涵虛堂)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주역》에 침잠하는 등 전통적 유학수업을 충실히 하였으나 함께 수학하던 성균관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과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고,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하였다. 이듬해에 회암사로 가서 왕사였던 무학자초(無學自超)를 친견하여 법요를 듣고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는 여러 지역에 주석하며 중생교화를 위해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사찰을 중수하는 등 수행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힘쓰며 조사의 가풍을 널리 떨쳤다. 그러나 1431년(세종 13) 겨울 노구를 이끌고 봉암사에 들어가 쇠락한 절을 수리하고 선풍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 4월 어느 봄날 허허롭게 고요함에 들었다. 다비 후 사리를 모아 그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이 정수사를 포함하여 인봉사·현등사·봉암사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워 그 덕화를 기리도록 하였다. 기화의 생애는 수행과 교화뿐만 아니라 많은 저술로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로는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설의》 3권,《선종영가집과주설의》 2권, 《현정론》 1권, 《유석질의론》 2권, 그리고 《함허득통화상어록》 1권이 있다. 《현정론》 당시 유학자의 그릇된 배불론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한 호불론서이며, 《유석질의론》또한 배불에 대한 반론서로서 일종의 불교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는 그의 치밀하고 깊은 선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밖에 불가(佛家)에서 반드시 읽히는 《원각경》·《법화경》·《선종영가집》등의 대승경전에 주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스님은 선과 교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쇠락한 불교계의 중흥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전통사찰총서5,정수사편,84~86page)
*경기도 가평군 현등사 중창:"스님(1376∼1433)의 성은 유씨이고 호가 득통(得通), 법명이 기화(己和), 함허는 당호(堂號)이다. 충주가 고향으로 부모가 미륵보살에게 기도한 인연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익히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썼으나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겪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에서 머리를 깎고 1397년 회암사(檜巖寺)의 자초(自超) 스님에게서 불법을 익혔다. 1404년(태종 4) 치열한 수행으로 크게 깨우치고, 이후 여러 곳을 다니면서《반야경》을 설법하였다. 1410년(태종 11)에는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고, 이듬해에는 절을 중수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현등사를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의 영감암(靈鑑庵)에 있을 때 꿈에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을 기화, 호를 득통으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1431년(세종 13) 문경의 봉암사에 머물며 절을 중수하였고, 1433년 4월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들어보니 시방의 벽락(碧落) 하나 없는데도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문경 봉암사에 비가 있고 이 곳 현등사를 비롯해 정수사·인봉사·봉암사에 부도가 남아 있다(그밖의 자세한 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정수사」편 참고)"(전통사찰총서5,현등사편,3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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