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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십자가의 길
십자가형에 대하여 로마의 치체로(Cicero)는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형벌이라고 언급하였다.
십자가형은 고대 동방(신 아시리아, 페니키아,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형벌이었으나,
로마제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식민 통치의 방법으로 광범위한 규모로 십자가형을 적용하였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고통을 주는 체벌이었지만
기원 후 1세기부터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폭동이나 반란을 선동한 자들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바뀌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예들과 피지배자들에게만 이 처형 법을 사용하였다.
유대 독립전쟁 동안에 수천 명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2차 유다 독립 항쟁당시인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때에는 하루에 500여명이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더 이상 십자가를 세울만한 공간과 나무 십자가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십자가형은 사형수를 발가벗겨 인간적인 수치심과 조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한편, 육체적인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가하면서 죽어가게 하는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은 죄인에 대한 극도의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일 뿐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형벌이었다. 또한 사형수는 사형을 언도 받은 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나무(십자가의 가로부분)를 짊어지고 형장까지 십자가의 행렬을 하였는데 이것은 제국에 대항하는 도전에 대한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세로 부분은 형장에 미리 세워져 있었다.
십자가형은 신체의 중요 부분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사형수를 발가벗겨 십자가 형태로 세운 기둥에 양손과 양쪽 발이나 뒤꿈치에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달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수치심과 함께 가장 오랜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는 형벌이었고, 사형수는 몸이 처지면서 근육경련과 호흡곤란으로 질식사 하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피로와 근육경련, 기아 및 갈증으로 여러 날에 걸쳐 서서히 죽어가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오후 세시에 숨을 거두셨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빨리 숨을 거두신 것은 혹독한 채찍질에 의하여 이미 기력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쇠와 뼛조각으로 만들어진 채찍(그림)에 맞아 죽는 죄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형이 성서고고학을 통해 설명된 것은 1968년 이후이다. 1968년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마을(Giv'at haMivtar)에서 발견된 26살가량의 남자 유골을 발견 하면서이다. 유대인들의 장례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바위를 파서 만든 바위무덤에 시신을 안치했다가, 탈골되면 유골함에 모시는 방법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유골함에서 유골의 발뒤꿈치 뼈에 철제 못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람의 유골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유골의 손목뼈에는 날카로운 흠집(그림)이 있어서, 십자가형이 사형수의 손과 발이 아닌, 손목과 발뒤꿈치에 못을 박는 방법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무릎 아래의 두 개의 정강이뼈가 부러져(그림) 있음을 발견한 학자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한 자들이 해가 지기 전에 시신을 거둬 매장하기 위해서 사형수의 다리를 부러뜨린 증거로 추정한다. 실제로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강도들도 안식일이 되기 전 시체를 거두기 위해 다리를 부러뜨렸다(요한 19,31-33).
십자가의 형벌은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당한 뒤 부활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 또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겪어야 하는 고난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대한 공경은 4세기 초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뒤부터 시작되었는데, 성녀 헬레나(Helena)가 십자가를 발견하고, 이를 안치할 십자가성당과 부활성당이 예루살렘에 건축되었다. 335년 9월 14일이 양 성당의 헌당식 축일로 제정되자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공경 대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고,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엔 로마교회에도 전해졌다. 그 뒤 692년 트룰라눔(Trullanum) 교회회의를 통해 십자가 공경은 강화되었고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래 그림은 1968년에 발굴된 십자가형에 처해진 유골을 토대로 그려진 십자가형이다.
아래 사진은 십자가형에 처해진 26살 가량의 남자 발 뒷꿈치이다.
아래 부러진 다리뼈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시체를 거두기 위해 죄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뼈를 부러트린 것
(그림 1과 2. 그림B 부분에 해당)으로 추정한다. 그림 A는 못을 박은 위치
그림 1과 A 그리고 팔목에 붉게 칠해져 있는 곳이 바로 위쪽 그림의 A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못이 관통한 부분이다.
십자가의 위에는 죄인의 죄목이 기록되었다. 로마인들의 채찍...보통 2-3개의 끈으로, 끈에는 쇳조각이나 뼈조각을 붙여 맞으면 살갗이 찢겨나가게 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14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를 말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시대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순례자들이 실제로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까지 걸으면서 기도드렸던 데서 유래한다. 이 기도는 특히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는데 1688년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B. Innocentius) 11세는 이 수도회의 모든 성당에 십자가의 길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했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이 기도를 바치는 자에게 전대사(全大赦)를 허락하였다. 1694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이 특전을 확증했으며, 1762년 교황 베네딕토(Benedictus) 13세는 모든 신자들이 이 특전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1731년 교황 글레멘스(Clemens) 12세는 모든 교회에 십자가의 길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14처로 고정시켰다. 19세기에 이르러 이 신심은 전세계에 퍼져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가장 좋은 기도로 특별히 사순절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성당이나 그 밖의 공적(公的)인 기도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사제와 함께 단체로 행해진다. 각 처를 순례하듯 옮겨가는 것이 원칙이나 단체로 할 때는 대표만 움직이고 다른 분들은 움직이지 않고 해도 무방하다. 각 처마다 정해진 기도문과 함께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외며 묵상한다. 십자가의 길은 5-7세기엔 겟세마니에서 키드론 계곡을 지나 대사제 가야파의 집을 거쳐 골고타로 이르는 길을, 이후 이슬람이 통치하는 8-12세기에는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제약을 받게 되자 시온산에서 골고타의 길을 그리고 오늘날 순례자들이 행하고 있는 십자가의 길은 1294년 그 위치가 대충 설정되었다. 그 후 1540년경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 의해 오늘날 십자가의 길이 확정되었다. 안토니아 성(제 1,2처)에서부터 골고타(제10처-14처)까지 그 사이에 일곱 개의 장소(제3처-9처)를 적절하게 만들어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게 했다. 십자가의 길 중에서 복음서에 근거를 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처(마태 27,22-26), 제2처(요한 19,16-17), 제5처(마태 27,32), 제8처(루가 23,28-31), 제10처(요한 19,23-24), 제11처(요한 19,18), 제12처(마태 27,50), 제14처(마태 27,58-60) 십자가의 길을 알리는 벽의 안내판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신 성당(Flagellation, 현재 작은형제회 성서대학)이 있는 담벽에 붙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마태 16,24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신 성당(Flagellation, 성당 왼쪽은 작은형제회 성서대학)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신 성당 맞은편에서(현재는 아랍 학교)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한다. 제 1처 :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 제 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 십자가의 길을 하고 있는 순례객들...2처를 지나고... 오른쪽이 리토스트로토스...석판으로 깔린 포장도로...가 있는 수녀원...저 멀리 사진 중간부분에 교회 탑이 보이는데... 이것이 작은형제회 성지관구 관구본부 수도원 종탑임... 성지관구 종탑이 보이고...십자가의 길은 왼쪽으로...꺽이는 부분이 3처가 있음... 제 3처 :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 3처는 아르메니안 가톨릭 소유...작은 경당이 있음...이곳에서 매일 성체조배와 강복이 있음... 3처 경당 내부... 3처에서 4처로 가는 길...바로 왼쪽에 4처가 있음... 제 4처 :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 제 5처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 왼쪽 길로 곧장 가면 통곡의 벽이 나오고...십자가의 길은 오른쪽길로... 5처에도 작은 경당이 있음...작은형제회에서 관리... 5처 제대... 5처에서 6처로 향하는 길...언덕길... 제 6처 :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림 6처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서 관리...베로니카의 수건에 찍혀진 예수님의 얼굴이 최초의 이콘이라고 하는데... 여기 수녀님들은 이콘을 만들고 판매하고 있음... 6처... 6처의 담벽.... 6처 경당 내부,... 교황 바오로 6세의 방문 기념... 제 7처 :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번째 넘어지심 6처에서 쭉 올라가면 바로 T자 형의 도로가 나오는데...올라가면서 바로 맞은편이 7처... 7처...작은형제회에서 관리하는 작은 경당이 있음.. 7처 내부의 제대... 7처 제대... 7처 경당 제 8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 7처에서 왼쪽길로 향해서 바로 오른쪽 언덕길로 올라가면 8처가 나옴... 8처에서 쭉 올라가면 작은형제회 성지관구 관구본부가 나옴...9처는 올라온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7처에서 왼쪽 방향의 길로 조금 더 가면 9처로 가는 길이 나옴... 9처로 들어 가는 길...앞의 십자가가 있는 지붕은 무덤성당 ... 제 9처 :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9처는 콥틱 정교회 앞에 있다. 콥틱 정교회 성당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이디오피아 정교회 마당이 나온다. 콥틱 정교회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 콥틱 정교회 현판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소박함이 물씬 풍겨오는 에디오피아 정교회의 수도원 마당이 나온다. 이 마당에서 오른쪽에 무덤성당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나오는데... 가난하고 소박한 에디오피아 정교회의 성당을 볼 수 있다... 무덤성당 광장으로 나오는 출구...에디오피아 정교회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무덤성당 현관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다...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길을 할때 사용하는 십자가... 제 10처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10처부터 13처 까지는 골고타 언덕에서.... 제 11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제 1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제 13처 :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심 이곳은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염한곳... 제 14처 :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제 15처 :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혹자는 "인간 존재는 버림받고 내던져진 존재"라고 한다. 짖눌려 오는 삶의 무게 속에서 좌절하고 있는 인간 실존을 표현한 말일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지고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은 남의 길 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인간 존재가 버림받고 내던져진 존재일지라도 그 외롭고 고독한 인생길에서 우리는 어머니 품같이 따뜻한 성모님과 같은 이웃들을 만나고, 짐을 대신 짊어져주는 시몬을 만나며, 내 가련한 처지를 동정하는 예루살렘의 부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외롭지만은 않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미 부활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래 그림은 1968년에 발굴된 십자가형에 처해진 유골을 토대로 십자가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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