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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백제왕 창 제2편 - 왕의 꿈, 왕의 눈물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223 14.04.27 21: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傳]


577년 2월. 왕은 사리함을 묻고 목탑을 세웠다. 또 다시 아들마저 앞세운 가혹한 운명. 왕은 그 비통한 심정을 사리함에 담아 29자의 명문으로 남겨 두었다. 백제왕 창. 마침내 그의 꿈과 눈물이 1400년 만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부작 미스터리 추적!

백제왕 창 제2편 왕의 꿈, 왕의 눈물


백제 창 왕이 아버지 성왕의 무덤가에 올렸던 금동대향로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정교해서 비장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데요. 어쩌면 관산성 전투 참패로 아버지 성왕을 잃고 충격과 좌절에 빠졌던 창 왕의 고뇌의 숨결이 이 향로에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창 왕이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 왕흥사 사리함을 보관합니다. 그렇다면 왕흥사 사리함에도 창 왕의 또 다른 고뇌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서기 577년 백제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창 왕이 사리를 봉안하고 애도한 왕자는 누구일까요. 또 무슨 일로 죽은 걸까요. 왕흥사 사리함 명문을 단서로 1400년 전 창 왕이 겪었던 비운의 가족사 그 씨줄과 날줄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왕흥사 사리함이 발굴된 지 4개월 만에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풀어야할 미스터리가 많은 만큼 사리함에 명문은 열띤 논쟁을 불러왔다. 29자의 명문 가운데 이도학 교수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글자는 망자였다.


이도학 교수

“이 글자에 대해서는 획이 내려오지 않고 떠 있다는 거죠. 대개 정자체로는 삼획입니다. ‘ㄴ’자로 이어집니다. (‘망’자를) 제대로 쓴다면 ‘ㄴ’자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상하다 생각을 갖게 되고요.”


하지만 서체 전문가는 삼자로 볼 수 없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손환일 박사 경기대학교

“‘삼’자라고 보셨던 이도학 교수가 ‘망’자입니다. 이것이 三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여기가 허획이 돼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실획입니다.”


그렇다면 이도학 교수는 왜 三로 보는 것일까. 왕흥사 사리함의 같은 시기의 유물에 새겨진 명문을 근거로 제시했다.


 

 

 

사비시대 출토품인 금동서가여래입상 뒷면은 불상을 만든 내력이 적혀 있다. 여기에 ‘亡’자가 나온다. 사리함의 글자와는 달리 아래 획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아래 획이 떨어져 있는 사리함의 글자는 석삼자에 가깝다고 보았다. 중국 제나라 방주타 묘지에 三자와 안압지 출토 목간의 삼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환일 박사의 분석은 반대였다. 도자라는 칼로 썼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힘들어 아래 획을 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부기에서 제작된 ‘망’자 역시 사리함의 글자와 유사한 형태다. 특히 손박사가 주목하는 것은 사리함에 나오는 석삼자.


청동사리함에는 ‘망’자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행 끝에 석삼자가 나오는데 확연히 다르다. ‘망’자에 대한 분석은 엇갈렸지만 창 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서 사리를 묻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다.1) 그렇다면 창 왕의 죽은 아들은 누구일까. 일본서기에서 우리 문헌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창 왕의 아들에 관한 기록을 찾았다. 지금까지 문헌으로 확인된 창 왕의 유일한 아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 아좌태자였다.

 

 

아좌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쇼토쿠 태자 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좌태자의 행적이 남아 있는 곳도 백제의 수도 사비가 아닌 일본의 후쿠오카였다. 먼저 찾아간 곳은 사가 현립 도서관.

 

 

담당관이 고문서 보관실에서 한 권의 역사서를 꺼내 왔다. 사가현의 역사를 기록한 비전국지였다. 그런데 비전국지의 이나사신사 편에 창 왕의 이름이 등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었다. 창 왕의 아버지인 성왕은 물론 阿佐의 이름까지 나와 있다.


삼대에 걸친 백제 창 왕의 가족 이름이 이나사신사 기록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곧장 이나사 신사로 향했다. 이나사 신사는 깊은 산골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작은 규모의 신사로 남아 있지만 이나사 신사는 일본 삼대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신사다. 이나사 신사의 궁사는 신전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목판 한 장을 꺼내왔다. 신사의 역사를 기록한 목판이었다. 창 왕의 아버지 성왕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성왕신과 황후신과 아좌신이라 불렀습니다.”


아좌 역시 신으로 모셔져 있었다.


“그(이나사에서 모시는) 세 신은 백제국의 성왕과 그 왕후와 왕자 아좌의 신이며 오래 전에 신사에 모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목판에 연이어 적혀져 있는 기록, 아버지 성왕과 어머니 영혼을 소중하게 섬기는 아좌의 효심에 감복해 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이다. 阿佐가 창 왕의 아들이 아닌 성왕의 아들이라고 못 박고 있다. 신사 기록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가사하라 미츠히로 궁사

“아좌태자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이 이처럼 부모에게 효를 다한 사람은 이곳에 모셔야 한다고 해서 그의 영혼을 성왕과 그 황후의 영혼과 함께 모시게 된 것입니다.”


아좌가 이 마을에 머문 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매립되어 공터로 바뀌었지만 바다를 건너온 아좌가 닻을 내린 곳이라 해서 하스포가사끼2) 항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아좌와 관련된 또 다른 지명은 기탄고세. 높은 분이 살았다는 뜻이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 도착한 阿佐는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좌의 이후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쇼토쿠 태자 상이 유일하다. 과연 이 마을 주민들의 믿음데로 아좌는 창왕의 아들이 아닌 형제였을까.


분명한 것은 阿佐가 왜로 건너온 시기는 일본의 추고천왕(592~628) 때인 597년으로 창왕이 사리를 봉안하고 20년이 지난 후다. 그렇다면 창왕에겐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왕자가 있었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사리함 명문 속에 죽은 왕자에 대한 실마리는 위덕왕 8년 신라와의 전투 기록이다. 昌 왕에게 신라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아버지 성왕의 참혹한 죽음을 불러온 관산성 전투의 참패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 재기하기 위해선 신라와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백제와 왜를 이어주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던 대가야마저 신라가 차지해 버려 백제는 고립된 상태였다. 561년 7월. 창왕은 마침내 신라 공격을 실시한다. 공격지역은 대가야로 통하는 신라의 변경지대. 창왕의 아들은 태자시절 창이 그랬던 것처럼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전투도 일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체, 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사라함 명문 속이 왕자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닐까.


이도학 교수

“사리탑을 조성한 데에는 그럴만한 정당한 근거, 당당한 어떠한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떠한 원인을 찾는다고 한다면 위덕왕 때에 국정과제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신라에 대한 응징이죠. 실제로 위덕왕 때에 신라와의 전쟁이 여러 차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전쟁과정 속에서 위덕왕의 왕자들이 전몰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볼 수가 있고 그 사리기 명문에 적혀 있는 왕자들의 죽임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와의 전쟁터에서 사망한 위덕왕의 왕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와의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고 또 다시 자식까지 빼앗긴 비극적인 운명 분노와 절망 사이를 오가던 昌왕은 아들의 죽음마저 헛되이 할 수 없다는 다짐을 담아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昌왕의 일생 일대 과제는 신라와의 결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패전으로 이러한 뜻을 일사천리로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昌왕은 이 신라와의 일전을 다시 준비하는 일환으로 순국한 왕자를 기리는 사리 공양대회를 열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단서는 사리함 명문에 마지막 두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舍利二葬時神化爲三’ 그러니까 처음에는 사리 두 알을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기적이 실제로 가능했을까요.


어쩌면 그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는 사리함의 명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보다 정밀한 분석을 위해 불교사학을 전공한 김상현 교수를 찾아갔다. 먼저 사리함 봉안 날짜에 주목했다. 2월 15일은 불교 역사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김상현 교수 역사학과

“부처님의 열반 일에 해당합니다. 돌아가신 날짜죠. 부처님의 돌아가신 열반 일에 특별히 사리를 모셨다라고 강조 되었는데 아마도 부처님의 일대 생애 중에서 탄생과 열반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가 고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2월 15일은 부처의 열반 일로 고려 전기까지는 연등회를 개최하는 국가 기념일이었다. 그렇다면 昌왕이 사리함 명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뭘까. 김상현 교수는 사리함 명문의 마지막 구절 ‘神化爲三’에 주목했다.


“굉장히 종교적으로 신이함을 강조해서 그 신성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는 뜻이 있겠죠.”


그런데 발굴 당시 왕흥사 사리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이 차 있었다. 황금 사리병에도 사리는 없었다. 사리대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 사리는 어디로 간 걸까. 물에 녹은 것일까. 사리함에서 채취한 물을 분석하기로 했다. 지난 1월 24일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성분 분석에 들어갔다. 채취한 물에 사리가 녹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분석이 진행됐다. 양이온 검사에서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칼슘 함유량이 많은 것으로 나온 것이다.


칼슘은 사리에 방사선 동이원소에 하나인데 과연 사리의 성분일까. 아직은 단정하기에 이르다. 칼슘은 토양에도 들어있기 때문에 사리함 주변의 토양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종분석 결과 사리병에서 검출된 칼슘은 주변 토양에서 유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리의 성분 중 유일하게 토양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프로토악티륨이다. 그러나 사리병에서 채취한 시료에선 프로토악티륨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규식 연구실장 보존과학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액체는 사리가 녹은 액체가 아니고 연구를 통해 사리의 행방은 밝힐 수가 없는 상태”


현대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사리의 정체.

昌왕이 봉안한 사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사리는 없었던 것일까. 사리함의 명문에 엄연한 사실로 기록돼 있는 ‘神化爲三’의 기적. 두 알의 사리가 세 알로 늘어났다는 기적은 대체 어찌된 것일까.

 

 

중국의 돈황석굴에서 의문을 풀어줄 첫 단추를 찾을 수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 돈황석굴에는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를 모두 전시하면 그 길이가 22km에 이를 정도다. 그 중에는 사리 기적을 보여주는 벽화도 있다. 돈황 323굴의 초당대벽화다. 사리를 공양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인데 ‘오색에 찬란한 광채가 병위로 뻗쳐 나온다’고 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리 기적담이다.


주경미 박사 부경대학교

“사리라든지 아니면 불상의 신이한 기적을 보여주므로 일반인들을 포섭하는 그런 행위들을 많이 한다. 그러한 신이한 기적들을 행했을 경우에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昌왕이 567년에 아버지 성왕의 무덤가에 능산리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사실이 두 번째 단서다. 능산리 사리탑 조성은 昌왕의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알리는 정치적 전환점이자 신호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한 577년 10월(위덕왕 24년) 백제가 신라를 기습 공격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것도 변경이 아닌 신라의 주군 깊숙이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주군의 위치는 신라의 서부지역이다. 지금의 경북의 선산 구미 일대로 신라의 수도 경주로 통하는 관문이다. 더구나 선산과 구미지역을 장악하면 상주를 거쳐 곧장 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한 昌왕이 공격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말리는 원로대신들을 설득하고 백제군의 실추된 사기를 고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急先務였다.


그렇다면 577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그해 2월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한 것은 아닐까.


주경미 박사

“신앙적인 차원에서 神異(신이)를 보여준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왕에 의해서 이러한 신이들이 보여지는 경우에는 대부분 민심을 수습하거나 안정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도학 교수

“죽은 왕자를 위한 그 사리탑 조성이라고 하는 것은 왕자가 전쟁터에서 전모를 했었다. 그 일을 위해서 사리탑을 조성한다. 그럴 때는 이제 백제의 주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결집이 되는 것이죠. 우리도 언제 전쟁터에서 순국한 왕자처럼 신라를 응징해야겠다는 각오라고 할까 결의 이런 것이 가시적인 목탑 조성을 통해서 확립이 된 것이죠.”


그로부터 8개월 뒤, 신라를 침략한 백제군은 비봉산을 넘어 선산일대까지 진출한다. 지금도 비봉산 정상에 올라서면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요새 중에 요새다. 잃어버린 창을 되찾아야 하는 昌왕의 백제군도 지켜야 하는 신라군도 한 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는 혈전일 수밖에 없었다.


김병남 학예연구사 국가기록원

“전투규모로 보면 위덕왕 9년에 신라 서쪽 변경을 약탈하였다는 기사와 달리 이번 기사는 신라 주군을 침략하였다고 나오고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일선군 북쪽에서 보면 사상자가 3700이 나오는 것으로 보면 위덕왕 9년에 있었던 전부보다도 더 큰 규모였고 아마 동원된 군사력도 양쪽에서 굉장했던 걸로 생각됩니다.”


昌왕이 신라와의 결전을 8개월 앞두고 전사한 아들을 기리는 왕흥사 사리탑을 세운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신라와의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연이어 잃은 昌왕은 사리탑을 세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온 나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왕흥사 사리공양대회.

昌왕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신화위삼’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전투에서 승리를 좌우하는 것은 성능 좋은 무기와 병사들의 자신감입니다. 태자 때부터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昌왕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오랜 세월 切齒腐心 준비해온 신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진행된 사리봉안식 당연히 온 나라 백성의 눈과 귀가 이 사리 봉안식에 쏠렸겠죠. 昌왕은 바로 이 자리에서 사리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립니다. 부처 신통력이 백제를 돕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이죠. 아버지 성왕의 오랜 꿈이자 昌왕이 일생을 걸었던 불교적 理想國家建設. 그 꿈을 이루기 위한 昌왕의 노력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창왕의 시호는 威德王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엔 왜 위덕왕이란 시호를 올렸는지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불교에선 위덕명왕은 중생의 번뇌를 없애주는 5대명왕 중의 한명이다. 창왕의 시호가 그 위덕명왕이다. 일본서기에는 우리 문헌에는 없는 창왕의 그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한 577년 창왕은 불상을 만드는 장인인 조불공, 절을 만드는 장인 조사공 등을 오사카에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3)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오사카. 지금도 도심 곳곳에는 백제 창왕이 파견한 사절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오층 목탑이 우뚝 솟아 있고 금당과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전형적인 백제 가람 양식이다. 오층 목탑도 백제탑 양식이다. 사천왕사 <어수선연기>에는 그 내력이 자세히 실려 있다. 사천왕사는 창왕이 파견한 백제불교 전문가들이 세우고 머물렀던 사찰이었다.4) 사천왕사 옆에 자리한 금강조(金剛組, 곤구구미)5)는 당시 창왕이 파견한 백제 기술자의 후손이 운영하는 불교건축 전문 기업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예불을 드리는 곤고 도시미츠씨(백제에서 건너온 조사공의 39대손)는 당시 창왕이 파견한 조불공의 39대손이다. 그의 선조는 쇼토쿠 태자의 요청으로 백제에서 건너왔다. 이후 그의 가문은 1400여 년 동안 사천왕사를 보수하고 관리하며 금강조를 운영해왔다.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금강조의 족보 5미터가 넘는다. 족보에는 당시 창왕이 파견한 백제의 사찰 건축가들 이름도 적혀 있었다.


“백제에서 세 명의 목수를 불러왔습니다. 곤고, 하야미즈, 나가미치 이렇게 세 명의 목수가 도와서 사천왕사를 건립했습니다. 그 후에 초대 곤고 시게미츠(유중광)를 남긴 것이 일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천왕사를 보수하고 개축할 때마다 만들어온 금강조의 설계도에는 창왕 시대 백제 사찰 건축술이 그대로 남아 있다. 1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창왕시대 백제 사찰 건축 양식을 지켜내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몇 차례 부도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창왕 시대의 전통 기술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금강조의 철칙6)이었다. 본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축소모형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것도 1400년 동안 전해온 방식이다. 기계와 금속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창왕이 백제 사찰 건축가들을 파견 했을 때에 그 기술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법륭사에도 창왕의 자취가 남아 있다. 법륭사의 각종 건축물 뿐 만 아니라 그 안에 모셔진 불상들도 대부분 일본의 국보급 유물이다. 불상들이 즐비한 법륭사 금당은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그 중에는 백제관음상도 있다.

 

 

2.8미터에 이르는 큰 키에 가냘픈 몸매 나무로 만든 이 불상은 세계인들이 극찬하는 예술품이다. 동양의 비너스로 불리는 백제관음상은 백제에서 만들어 법륭사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백제관음상이다. 창왕이 고뇌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은 일 년에 두 차례만 개방되는 법륭사 몽전이다. 봄과 가을에 각각 한 달씩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몽전에는 특별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바로 이 불상 구세관음상7)이다. 나무를 깎아서 조각한 뒤 금박을 입혀서 만든 구세관음상의 키는 180cm 사람의 신체와 같은 크기로 만든 등신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처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려한 보관 아래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조각되어 있다. 얼굴도 표정도 사람의 형상을 한 구세관음상. 그렇다면 구세관음상은 누구를 모델로 삼은 것일까?


이노쿠마 가네카츠교수 경도귤대학

“구세관음상은 100년 전에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텐신에 의해서 문이 열렸을 때 큰 감동을 불러 일으겼습니다. 지금 일본 호류사(법륭사)하면 쇼토쿠태자와 관계가 깊은데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C 일본 정부 외탁으로 법륭사의 문화재를 조사한 페놀로사의 기록엔 전혀 다른 사실이 실려 있었다. 구세관음상은 추고천황 때 조선 즉 백제에서 수입해왔다는 것이다.


김상현 교수

“호류지의 몽전에 가보니까 열쇠가 채워졌는데 녹이 슬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페놀로사가 이거 열어보자고 말하니까 호류지 스님들이 뭐라고 말했냐면 여기에는 옛날 조선에서 건너온 불상을 모셔놓고 있는데 몇 백 년 동안 우리는 열어보지 않았다. 이거 잘못 열면 우리는 지진이 일어나서 우리 절 다 불타버린다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페놀로사는 정부로부터 청탁을 받았기 때문에 강제로 열었죠. 여니까 그 주자 속에서 솜으로 싼 182Cm가 하는 아주 아름다운 목조관음보살이 나왔지요. 그때 페놀로사가 말하기를 호류지에 전해지는 옥충추자와 이 몽전관음은 조선에서 건너온 위대한 두 걸작품이라고 했다.”

 

 

김상현 교수가 보여준 또 다른 기록에는 보다 구체적인 증언이 실려 있었다. 15C 법륭사 스님이었던 성예가 남긴 기록이었다. 법륭사 스님이었던 성예의 기록은 구세관음상이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연모하여 만든 불상이라고 전한다. 사람의 모습을 띠었던 구세관음상의 얼굴. 그것은 관산성 전투에서 창을 격려하러 나섰다가 참혹하게 숨진 성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성왕은 불법을 백제 중흥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태자시절부터 창에게 아버지의 길은 곧 자신의 길이었다. 그 길은 바다 건너 왜에도 닿아 있었다. 日本書紀엔 성왕이 처음으로 왜의 불교 문명을 전하며 만고의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이라고 소개했다고 실려 있다. 관산성 전투의 참패로 못다 이룬 아버지의 꿈은 창왕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이었다. 창왕은 왕흥사 사리함을 봉안한 이후 본격적으로 대일본 외교에 나섰다.8)


“그대들은 왜로 건너가 불법을 전하는데 전념하라.” 


일본서기에는 창왕이 577년 이후 계속해서 불교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 외교 정책의 일대 전환이었다.


양기석 교수 충북대학교

“위덕왕 24년경 쯤 되면 상황이 달라진 거죠. 중국 정세가 우선 북주에 의해서 통일되어서 뭔가 또 변화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고 또 위덕왕으로서는 중국외교에 몰두하다보니까 또 나름대로의 반성할 점도 있었겠죠. 그래서 오히려 과거처럼 왜까지 아우르는 이러한 외교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 국가 이익과 자신의 집권 3기를 채울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사카에는 창왕이 파견한 첫 불교사절단이 도착해서 남긴 유적이 있다. 지금은 주추 돌만 남아 있는 대별왕사. 당시 백제의 불교 사절단이 세운 대별왕사는 창왕의 대일본 문화의 센터로 일본 고대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노쿠마 가네카츠 교수 경도귤 대학

“단순히 절이 하나 생긴 것이 아니라 일본에는 없었던 응축된 새로운 문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종교센터임과 동시에 이국문화센터였으며 일본인들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현은 일본이 고대국가로 도약하는 아스카 불교문명의 산실이다. 그 출발점에 백제 창왕이 보내온 사리봉안식이 있었다. 일본 최초의 국가 사찰이자 백제 사찰 기술로 만들어진 비조사에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비조사 사리탑 유적의 안내문은 백제 창왕이 593년에 사리를 보냈다고 전한다. 일본의 불교 역사서인 <부상략기>에는 비조사 사리봉안식 풍경이 자세히 실려 있다. 100여명의 대신이 백제 옷을 입고 창왕이 전한 사리를 맞이했다고 한다. 사리봉안 행렬이 출반한 곳은 당시 유력한 대신 소가노우마코 저택이다. 먼저 화려하게 장식한 4대의 수레가 앞섰다. 이어 백제 옷을 입은 100여명의 대신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뒤 따랐다. 비조사에는 스이코 천황과 쇼토코 태자가 사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호오준 비조사 주지

“소가노우마코(대신)를 선두로 이곳까지 와서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가 기다리고 있던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불사리를 봉안하는 축전을 벌였습니다. 일본 최초의 절의 시작입니다.”


일본이 고대국가로 성장한 분수령이 되었던 아스카 불교 문명은 그렇게 퍼져 나갔다. 백제는 물론 일본까지도 불국토로 만들고자 했던 성왕의 못다 이룬 꿈. 그 간절한 꿈을 창왕이 아스카 불교 문명으로 이끈 것이다.


한때 스님이 되려했을 만큼 비운을 겪었던 창왕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일본에선 문명의 전파사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재기의 노력이 만든 결과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창왕은 수도인 사비에도 그의 이상과 꿈을 남겨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비성 넘어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창왕의 역사를 간직해 온 왕흥사 터가 나온다. 겨울 동안 중단됐던 발굴이 재개됐다. 1400년 전 까마득한 시간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발굴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왕흥사 사리함도 이렇게 찾아냈다. 창왕이 세운 사리탑의 규모는 발굴된 목탑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사리함을 묻고 조성한 사리탑은 20m 높이의 거대한 목탑이었을 것이다. 추가 발굴이 진행되는 곳은 사리탑 주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다. 백제 가람양식을 기준으로 삼으면 창왕이 세운 왕흥사 역시 사리탑 뒤로 금당과 강당을 일직선상에 조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흥사 발굴이 진행되면서 그동안 국내 사찰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독특한 시설이 확인됐다. 사찰의 중심축으로 이어지는 너비 14m 규모의 도로 시설이었다. 창왕이 왕흥사에 행차할 때 지나다니는 곳으로 보이는 어도는 백마강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어도시설을 바탕으로 복원하면 왕흥사는 이런 모습이다. 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완공된 이후 백제왕들이 매번 배를 타고 와서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行香(행향)의식이다. 왕이 직접 향을 피워 올리는 왕흥사의 행향의식은 국가적인 행사였다. 이상한 점은 왕흥사의 위치다. 왜 하필이면 사비성 밖에 그것도 백마가 너머에 왕흥사를 세운 걸까?

 

 

백제가 사비로 수도를 옮긴 것은 538년. 사비성은 성왕이 설계하고 건설한 도시였다. 당시 16살이었던 창은 아버지 성왕이 사비성에 담고자 했던 백제 중흥의 꿈과 이상을 지켜보았다. 성왕은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수도건설에 담았다. 옛 부여의 행정단위인 5부 도시로 건설했다. 그것은 백제의 뿌리를 고구려가 아닌 옛 부여에서 찾겠다는 선언이었다. 성왕의 사비성 건설 프로젝트에는 정림사가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시 사비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이다. 그런데 정림사 탑이 바라보는 방향은 정확한 북쪽이다. 성왕이 전사한 뒤 사비성 건설 프로젝트의 완성은 창왕에게 주어졌다. 이후 창왕은 정림사를 중심으로 사비성 밖의 동북쪽에는 능산리 사찰에 그 서북쪽에는 왕흥사를 세운다.


이도학 교수

“백제 국민들의 어떤 사기를 진작시키고 왕실의 어떤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교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그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어떤 방향전환이라고 할까 어떤 길을 모색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명문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위덕왕이 호국 에너지를 결집시키고 그리고 이제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노중국 교수 계명대학교

“위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사찰하고 아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을 각각 동과 서에 성 밖에 배치해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왕이 백마강을 거슬러 오가는 왕흥사는 북방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창왕에게 왕흥사는 아버지 성왕이 시작한 사비성 불국토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거점이었다. 그것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아버지 성왕과 아들로 이어진 삼대의 꿈이었다. 창왕은 왕흥사 사리함에 반드시 그 꿈을 이루겠다는 눈물어린 다짐을 새겨 두었던 것이다.


좌절과 시련의 연속이었던 창왕의 일생.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창왕이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백제를 불국토를 중흥시키겠다는 꿈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그 꿈은 아버지 성왕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 드리지 못한 불효를 씻고 아들마저 빼앗기고 다짐한 반드시 이루어야할 자신과의 약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400년 전 백제 창왕이 남긴 왕흥사 사리함 우린 작은 유물의 발굴로 그간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창왕의 삶을 일부나마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왕흥사 사리함에 담긴 백제 창왕의 눈물은 잃어버린 고대사 미완의 역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작권은 KBS 한국사 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1) “장유년 577년 2월 14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 2알을 묻었다.”


2) “옛 항구 지명, 아좌태자가 8척의 배로 와 이곳에 닻을 내렸다는데서 유래”


3) “577년(백제 위덕왕 24년 11월) 백제국왕은 경론 약천권, 선사, 율사, 비구니, 주금사, 造佛工, 造寺工 6인을 난파(오오사카)에 보냈다.”  傳 : 日本書紀 민달천황조.


4) “민달천황시기 선사, 비구, 비구니, 주금사, 주불공, 조사공 등이 백제에서 왔다.”


5) 사찰 건축 전문기업.


6) 금속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을 조합해서 만드는 대대로 전해온 기술을 고수.


7) 한국사전 58회 성왕편을 참조하라.


8) “백제에서 승, .... 寺工(사공), 노반박사, 외박사, 화공을 보냈다.”  傳 : 일본서기 숭준천황 원년 5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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