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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그 속에 담긴 가치
민속학과 20100575
손 지선
목차
Ⅰ. 들어가며
Ⅱ-1. 최부의 「금남표해록」
Ⅱ-2. 장한철의 「표해록」
Ⅱ-3. 풍계 현정의 「일본표해록」
Ⅲ. 맺는말
Ⅳ.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표해록‘은 말 그대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표류를 하게 되어 이를 기록한 일기나 수필 형식의 글이다. 우리에겐 하멜의 「하멜 표류기」가 익숙한데 이의 조선 버전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같은 표해 문학의 표해록이지만 작가에 따라 서술한 방식이나 중점을 둔 주제 등이 다른 점이 흥미로운 부분으로 느껴져 ‘표해록’을 공부해보기로 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최부의 표해록으로 수많은 논문이나 문헌으로 다뤄졌고 이외에도 장한철, 김기손, 문순득, 풍계 현정 등이 각자의 표류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본 글쓴이는 많은 표해록들 중에 최부와 장한철, 그리고 풍계 현정의 세 표해록을 선택하여 독서하고 그를 통해 느낀 부분이나 알게 된 점들을 비교 형식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한 후 공통점이나 각 작품의 차이점을 논하며 본 글쓴이가 느낀 점을 함께 논하려 한다. 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이를 다룬 논문들도 함께 검토하여 참고자료로 사용하였음을 알린다.
‘표해록’은 문학 작품 장르 중에 표해 문학에 속한다고 본다. 주로 표류한 후에 타국에 잠시 정착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당시의 외국 문화나 외국과의 관계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로 해석된다. 우리나라는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에서도 표해록과 같은 표류기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져온 표해록보다 훨씬 많은 표류기나 표류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보며 이를 통해 외국 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오게 된 것도 우연한 표류에 의한 것임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실제로 제주나 부산 앞의 남해는 해류에 의해 표류되는 배들이 많았으며 유구에 표류하여 그 곳에서 죽거나 본국으로 송환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1)
표해록의 서술 방식은 주로 수필이나 일기 형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날짜와 날씨를 적은 후 그 날 있었던 사건, 감정 등을 기록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기도 하고 바다에서 표류한 내용보다는 타국에 정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관찰한 여러 문물들에 대해 기록하기도 하는 등 표해록에 따라 우리가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는 점들은 조금씩 다르다. 그 중 최부의 표해록은 3권으로 이뤄져 매우 자세한 서술이 이뤄져 있어 ‘조선의 하멜 표류기’라는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Ⅱ-1. 최부의 「금남표해록」
최부는 1454년 나주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탐진이며 자는 연연이었고 그의 호는 錦南이다. 최부가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나주로 향하다가 표류하게 되고 136일 만에 귀국을 하여 성종이 이 표류기를 견문록으로 엮어 바치라고 명하여 나오게 된 것이 최부의 「표해록」이다. 그의 호를 따서 「금남표해록」2)이라 불린다. 이 「금남표해록」은 이후 일본과 중국, 미국에서도 번역 출간되며 사료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로 ‘표해록’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사진1. 최부의 여정지도3) >
최부는 부친의 부고를 들은 후 이를 위해 고향 나주로 항해를 떠나게 되는데, 성종 19년(1488년) 제주 앞바다에서 42인과 함께 표류되게 된다. 영파부에서는 해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다시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고, 우두에 운 좋게 닿아 육지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강남지방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로로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 수 많은 위기와 고난을 겪게 된다. 중국 절강성에서 왜구로 의심받아 심문을 받고 풀려난 뒤에 항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여정을 떠나 결국 평안도 의주에 도착을 하게 되며 표류기는 끝을 맺는다.4)
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함께 표류한 사람들의 동요, 불안감 등에 지지 않고 스스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잘 다독이며 한 명의 사상자나 낙오자 없이 모두 조선으로 돌아온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사고를 당해 표류되게 되면 함께 여정을 떠난 무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동요되어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 많은 데, 최부는 지혜와 기지를 발휘하여 그러한 움직임이 일어나려 할 때 42인을 안심시키고 모두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 점이 신기했다. 이후에 논하게 될 장한철의 「표해록」에서는 장한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 본국으로 살아 돌아온 이가 거의 없었기에 최부의 능력은 더욱 대단해 보였다. 물론 장한철은 바다에서 표류하며 천재지변에 의한 고난의 과정이 더 많았지만 기록 방식에서 나온 차이점으로 인식해볼 때, 최부가 버텨낸 고난들도 이에 못지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것은 당시 중국에서 왜구에 대해 반감이 매우 심했음을 느낀 것이다. 이는 다른 연구들에서도 발견된 점5)이라서 그에 대한 이유와 공부를 추가적으로 할 수 있었다. 왜적으로 오해를 받아 절강성의 도저소에서 어떤 이가 최부 일행에게 왜적으로 오인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일러준 구절에서부터 일종의 복선으로 흥미진진한 부분이 시작되어 독서 중에 집중하여 읽어보았다. 실제로 그날 저녁 관원 7~8명이 정보와 최부 등을 차례로 부르며 계속 왜구인으로 오인하여 그들을 몰아세웠다. 공초를 마치고 난 뒤 최부는 기록에 이러한 억울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야 할 대책과 정책을 제시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 통해 최부 일행이 처형의 위기에서 가가스로 벗어났으며 당시 중국에서 왜적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6) 왜적이 빈번히 그들의 변경을 침탈하여 나라에서 비왜도지7)와 비왜파총관8)을 두어 이를 대비했으며 왜적을 잡게 되면 이유 불문하고 우선 목을 베고 추후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렇게 처형당할 위기를 최부 일행은 어떤 이의 도움으로 벗어난 것임으로 그들의 운이 심상치 않았음을 느꼈다. 그들이 지역을 방문하게 될 때마다 중국 관리들이 최부 일행에게 항상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많이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강남지방은 요즘도 해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방인데 그 곳에 살던 옛 사람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하니 왠지 뿌듯한 느낌도 들었고 박학다식한 최부가 이를 잘 대변해준 것 같아 다행이었다.9)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중국 황제를 만나 상을 받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예보다 부에 대한 효를 더 강조하며 복장에 대한 예를 거부했던 부분이다.10) 물론 끈질긴 요구에 의해 잠시 상복에서 길복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만약 내가 최부의 상황이었다면 목숨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효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자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을 지 상상해보았는데 새삼 그의 굳은 지조가 대단했다. 3월 28일 북경의 옥하관에 도착한 뒤에 떠날 때까지 최부는 계속 하루빨리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중국 관리들에게 요청했다.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에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할 생각으로 내내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마음이 착잡했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표류 과정을 일행들과 함께 잘 견디고 이겨낸 모습에 책을 덮으며 은은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최부에 대해 공부하던 중 「표해록」을 저술한 직후 많은 대신들에게 시기를 사고 탄핵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에는 사화에 의해 유배되어 처형을 당한 그의 인생사를 알게 되어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11) 중국의 한 관리는 최부에게 “당신은 참으로 독서를 많이 한 선비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할 만큼 최부는 당시 조선 선비의 학식의 깊이를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해박한 지식 뿐 아니라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을 보여준 최부의 「표해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Ⅱ-2. 장한철의 「표해록」
장한철의 「표해록」은 그의 심리 묘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읽는 내내 다양한 감정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중 표류하게 된다. 총 일행 29명에서 시작된 표류의 과정에서 마지막에 본국으로 돌아온 자는 8명에 불과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 과정이 매우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육지에 다다를 무렵 표류되었다 보니 멀리 보이는 육지들 때문에 일행들이 희망고문을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행들이 동요하게 되는데 장한철은 기지와 지혜를 발휘하여 리더십과 함께 그들을 안심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후 유구 지역과 일본을 거쳐 완도 청산도에 도착하며 표류를 마치게 된다. 본국에 돌아온 뒤 함께 돌아오지 못한 많은 일행들에 대한 제사도 지내고 과거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고향에 돌아오는 과정까지 기록되어 있어 다른 표류기와 달리 표류를 마친 그 뒷이야기까지 알 수 있어 궁금증을 많이 풀 수 있었다.
모험담과 함께 연애 담이 말미에 살며시 담겨있는 부분에서 독특한 모습을 보였고 꿈과 설화 등을 함께 다룬 것에서 긴 여정을 읽는 동안 지치지 않게 도와주었다.12) 장한철의 표해록에서는 특히 극한의 상황에 몰린 때에 그가 심리적으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가 잘 서술되어 있어 여타 표류기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평가받기를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까지 알 수 있게 한 해양 지리서였으며 백록담, 설문대할망의 전설, 류쿠태자 전설 등이 다양하게 기록된 하나의 설화집으로써의 기록 문화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었다.13)
<사진2. 장한철 표해록 기적비, 제주시 애월읍 한담공원에 위치14)>
최부와 현정의 표해록과 다르게 좀 더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담겨있는 장한철의 표해록은 문학적인 요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연인과 하룻밤을 보낸 후 긴 세월을 기약하는 장면에서는 짧게 담겨있었지만 애틋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당시 제주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를 했을 것이라는 당연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태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품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겉으로는 일행들에게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모범이 되고 추앙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그 또한 불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그의 상세한 기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비 장한철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Ⅱ-3. 풍계 현정의 「일본 표해록」
이 책은 풍계 현정이라는 승려가 경주 불석산에 천불을 조성하고자 이를 배로 운반하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 두 표해록과 달리 선비가 아닌 승려가 경험했다는 점에서 관심이 생겨 독서하게 되었다. 현정의 표해록은 표류기라기 보단 일본 견문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표류 과정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그 이후에 일본에 상륙하게 되어 7개월 간 머무르는 과정에서 관찰한 사실들에 집중되어 있다. 읽는 내내 현정의 생각이나 느낌보다 일본 풍습, 전통, 각종 문화 등 사실에 대한 내용만을 접할 수 있었기에 색달랐다. 비교적 최근인 1821년에 저술된 만큼 좀 더 많은 내용이 담겨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국불교전서』 제 10권에 수록된 것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용이 축약된 것인지 의심했으나 직접 원본을 보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추후에 기회가 되면 소장되어 있는 송광사 도서관이나 영남대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해보려 한다.
1817년 11월 25일 천불상을 실은 두 대의 배 중 현정이 타고 있던 배가 태풍에 이기지 못하고 표류하게 된다. 28일에 일본의 대도포에 표착을 하게 되어 현지 관리들에게 세세한 심문과 조사를 받고 구호물품을 지급받아 생활하게 되었는데, 독특하게도 뭍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계속 배 안에 갇혀 살았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법 때문이었는데 표류한 타국의 배는 나가사키(장기도)로 이송되어 그 곳을 거친 후에 뭍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15) 장기도로 이송이 된 후에 귀국이 허가되었고 이후 그들은 대마도에 표류하였다. 7월 14일에는 긴 표류 생활 끝에 해남 앞바다에 도착하여 현정 일행의 표류기는 끝나게 된다.
풍계 현정의 「일본표해록」은 읽는 내내 서술의 느낌이 강했으며 주로 일본인들의 복식, 머리 모양, 전통 풍습, 그들과 나눈 대화 등을 기록한 것이었다. 일본 풍습 기록지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고 세세한 설명이 인상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날짜 기록이 많이 생략되어있고 바다 위에서 표류한 부분은 간단하게만 기록되어 있었다. 여정의 마지막에 현정 역시 무사하고 안전하게 본국으로 돌아온 것을 천운이라 여기며 부처님의 힘이라며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많은 일본의 특징들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대마도에 표류하면서 그가 남긴 내용들 중 대마도 사람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대마도 사람들은 일본을 본국이라 부르지 않았고 조선어를 매우 잘 구사하는 등 독특한 행동을 보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대마도가 일본보다는 조선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고 실제로 현정도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며 기술하였다.16) 순간 일본의 독도에 대한 억지 주장들이 떠오르며 화가 나기도 했다.
관련 논문을 공부하던 중 추가적으로 생긴 궁금증은 표류와 표착 시점에 대한 기록이 현정의 기록과 일본의 대마도주가 기록하여 조선 예조 참의에게 보낸 서계에 다르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한국의 시차는 없는 데 어디서 비롯된 차이인지 알 수 없어 궁금증이 풀리지 못했다. 논문의 저자도 통역의 미숙함이었거나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왜곡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뿐 정확한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17)
Ⅲ. 맺는말
각기 다른 주제의식이나 다른 나라에 표류하며 작성한 표류기지만 세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여러 고비를 거치며 본국으로 돌아온 데에 대해 천운으로 여기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18) 이는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으로 작용하고 사회적으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가능해진 점이 가치로써 작용한다.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표류하는 동안의 기록 뿐 아니라 이후 중국 강남지방을 견문하며 알게 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며 사료로써 호평을 받고 왕과 해외 학자들에게 이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금남표해록」이 학계에서 구분될 때 해양 문학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중국 견문기로 구분되기도 한다고 한다.19) 장한철의 「표해록」은 표류 과정에서 인간이 보이는 심리적인 변화가 세세하게 드러나 있고 이러한 문학적 특징과 함께 기후 변화, 해류 변화 등을 자세히 기록한 해양 지리서로써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가치로 인해 다성성의 연구20)가 이뤄지고 해양 기후의 연구에 활용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좋은 자료로 사용되었다. 풍계 현정의 「일본표해록」은 일본의 당시 사회 모습과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민속지적인 자료로써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민속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많은 내용을 새로 배울 수 있었고 수업시간에 짧게 배웠던 일본의 민속과 함께 공부해보니 큰 도움이 된 책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에서 중국과 일본의 모습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조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표해록’은 책이 두껍더라도 수필이나 일기형식으로 가볍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독서할 수 있으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의 곧은 정신과 지혜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외국 모습도 알 수 있어 「하멜표류기」만 필독도서로 읽었던 많은 학생들과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과거를 통해 배우는 공부와 지혜로움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음을 깨달았고 조선시대 저서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난 만큼 관련 서적을 찾아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볼 것이다.
Ⅳ. 참고문헌
저서
• 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장한철, 김지홍 옮김,「표해록」,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
• 최부, 박원호 옮김,「표해록」,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6
• 최부, 서인범, 주성지 옮김,「표해록」, 한길사, 2004
• 최부, 최기홍 옮김,「표해록」, 三和印刷, 1979
• 풍계 현정, 김상현 옮김,「일본표해록」,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논문
• 조건희,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중국관 - 금남표해록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청운대학교 정보산업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02)
• 김성준,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 조직과 항해술」, 한국항해항만학회지 제 30권 제 10호, pp 787~791, 2006
• 최내옥, 「漂海錄 硏究」, 비교민속학회 10 pp 221~255, 1993
• 정성일, 「해남 대둔사 승려의 일본 표착과 체험(1817~1818년)」, 한일관계사연구 32권 pp 133~182, 2009
• 진선희, 「장한철 『漂海錄』의 多聲性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02
주석
1) 최내옥, 「漂海錄 硏究」, 비교민속학회 10 pp 221~255, 1993 中 pp 223
2) 본 글에서는 「표해록」과 「금남표해록」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자 함을 알린다.
3) 제주도 앞바다에서부터 중국 각지를 거쳐 한양 청파역으로 돌아온 여정을 그린 지도 (출처. 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에서 사용된 사진 인용)
4) 최부의 표류 여정은 많은 저서나 논문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본 글에서는 저자의 임의대로 간략하게 요약함을 알린다. 또한 표해록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모든 서술적 사실과 내용들은 저자가 여러 옮긴이에 의해 옮겨진 「금남표해록」의 한글 번역본을 읽고 정리하였음을 알린다.
5) 조건희,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중국관 - 금남표해록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청운대학교 정보산업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02) pp 16
6) 최부, 「표해록」, 박원호 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6 pp 80
7) 진수장교(鎭戍將校)로 진수, 협수, 분수, 수비, 비왜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일이 발생할 때 설치했다. 지세가 험하고 중요한 곳을 선정하여 군사를 배치하고 지키게 했다.(『명사』권72, 직관지1) (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pp 106)
8) 파총은 총병관, 부총병, 참장, 수비 아래 있는 직급으로 품급과 정원이 없고 명 태조 홍무 초에 위소관 중에 비왜를 담당할 군관을 선발하여 배치했다.(『명사』권76, 직관지5) (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pp 106)
9) 참고문헌을 읽는 도중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비슷한 내용을 서술한 부분을 찾게 되었다.(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pp 61)
10) 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pp 415-417
11) 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pp 64-65
12) 진선희, 「장한철 『漂海錄』의 多聲性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02 pp 15에서도 언급됨
13) 진선희, 「장한철 『漂海錄』의 多聲性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02
14) 사진 출처. 연합뉴스
15) 풍계 현정, 「일본표해록」, 김상현 옮김,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pp 42
16) 풍계 현정, 「일본표해록」, 김상현 옮김,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0 pp 67-68
17) 정성일, 「해남 대둔사 승려의 일본 표착과 체험(1817~1818년)」, 한일관계사연구 32권 pp 133~182, 2009
18) 그 예로 최부의 생각을 옮겨보자면 “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이 그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다행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오”라고 말했다.(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pp 409)
19) 최부, 「표해록」, 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pp 33
20) 진선희, 「장한철 『漂海錄』의 多聲性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02 가 그 예다. 이 논문에서는 장한철의 「표해록」이 지닌 문학적 가치를 집중 조명하며 얼술 유형이나 주체의 행동 방식 등까지 해석한다.
첫댓글 잘 보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