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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바로알기
- 한중일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 난설헌
- 지역문화와 여류1)인물, 난설헌 허초희 바로 알기
1. 글 머리에
지난 9월 첫날, 강릉문화재단의 정수진님으로부터 한통의 멜을 받았습니다.
멜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안녕하세요.
강릉문화재단 정수진입니다.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나 강의 기간이 촉박하여
유선으로 먼저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재단은 2018 동계 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이끌기 위한
전문적인 문화해설 크리에이터양성을 위하여 첨부 파일과 같은 교육 과정을
운영중입니다.
[요청사항]
강의일 : 9월 29일( 오전 9시-오후 1시 -4시간)
강좌명 : 한중일 최초의 베스트셀러, 난설헌
장 소 : 초당 생가
교육일정과 시간 장소를 보시고 의견이 있으시면 전화주세요.
일정을 내부적으로 논의하여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에 필요한 자료나 기타 사항도 말씀해 주세요.
강의 자료는 주시면 교육에 적극 활용하고
수업이 끝나면 교재로 만들어 교육생들에게 활동 자료로도 활용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멜을 읽고 참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강릉여성단체협의회에서 부탁을 받은바 있는 강의와 같고, 또 한편으로는......... 대개의 경우, 난설헌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아쉽다고 느끼지던 차에 강의 부탁을 받게 되어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용한 새벽 시간을 내어 난설헌님에 대한 원고를 정리한 후 강릉여성단체협의회에서 부탁을 받았던 강의는 그런대로 마쳤습니다.
이제, 강릉문화재단에 보낼 원고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리고 팔이 뿌러지지 않았으면........ 글 머리부분을 대폭 수정하여 마치 새로운 글처럼 꾸미고도 싶었지만 그대로를......... 그대로 쓰려고 합니다. 너른 이해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원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개울길을 선재길이라고 합니다.
선재라는 말은 한문을 많이 쓰는 불가에서 흔히 쓰나 봅니다.
우리말에........ “어허 선재라, 때는 춘삼월 시흥이 절로 나는구나!”하지요.
들어 보셨나요?
이 선재라는 말은 한문투의 글에서, 매우 좋구나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베리 굿(very good)에 해당되겠지요.
지난 목요일로 생각됩니다.
이런 뜻으로 붙여진 선재길을 오르던 중에 강릉시여성단체협의회 최돈수 회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지역문화와 여류인물 바로알기가 있는데.......... 난설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 선재길을 걸으면서 어떤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를 내내 생각하면서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재길에서 “참 좋구나“ ”베리 굿(very good)“에 온전히 푹 빠질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어떤 일이든 너무 잘 하려고 생각을 하면......... 결국에는 만족할 만큼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너무 잘 하려는 생각을 내려 놓기로 했습니다. 그런 줄 아시고 아는대로, 생각 나는 대로 난설헌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은 저가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이니 만큼 “꿈 보다 해몽”이라고....... 제가 드리는 말씀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잘 새기시어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한 시간으로,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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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류: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여자를 이르는 말
2. 해적이2)를 통한 난설헌 허초희의 이해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널리 알려진 대로 난설헌님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우선 난설헌의 삶을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1세(1563년, 명종 18년) 사천 외가집에서 나고
난설헌 허초희는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중 셋째딸로 태어났읍니다. 그의 어머니는 호조참판과 사간원 사간, 예조참판 등을 지낸, 사천 애일당3)에 터를 잡았던 김광철의 큰 딸입니다.
난설헌은 죽지사에서 "내 집은 강릉땅 돌쌓인 갯가에 있어 / 문앞의 강물에 비단옷 빨았어요"라고 했습니다. 경포호수 부근의 냇가 풍경이 떠 오릅니다. 어릴 때의 기억을 살린 이 시로 보아 외갓집인 강릉 사천 애일당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자란 것으로 여겨집니다.
2~7세(1564~1569년, 명종19년~선조 2년) 초당에서 자라고
난설헌은 어린시절을 강릉 초당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집니다.
난설헌이 7살 되던 해에 동생 교산 허균이 강릉 사천 외가인 애일당에서 태어났는데 그 교산 허균이 지은 시인 “억감호(고향 경포호를 그리며)”에 "내 고향집은 경포의 서쪽에 있으니 / 산 골짜기들이 회계의 명승같아라"라고 노래하였으며 또한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내가 쓴 소책자)4)에 "나의 집은 건천동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게 잡아도 7~8살까지는 강릉 초당에서 자랐으며 그 후 서울 건천동으로 옮긴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인 초당 허엽이 1568년(선조1년)에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중국에 보내던 임시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는 왕성한 관료생활을 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8세(1570년, 선조 3년) 광한전 백옥루 상향문 지음
여덟살의 난설헌을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나이에 지었다고 믿기 힘든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님은 신동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고, 오늘에 이르러 천재 여류시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님의 글짓는 실력은 어린 동생 교산 허균의 시를 자주 고쳐 주기도 할 정도 였으니까요.
10세(1572년, 선조 5년) 즐거움이 가득했던 행복한 나날들
난설헌 허초희에게는 기쁨의 나날들이었습니다.
둘째 오빠인 하곡 허봉(12살 위)이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 4살이 된 동생 교산 허균(6살 아래)이 있었으니까요. 하곡 허성 오빠의 급제로 공부하는 즐거움도 더욱 컸을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부터 15살 시집을 가기 전까지 오빠 하곡 허봉은 물론 허봉과 친하게 지내던 손곡 이달에게 자연스레 시를 배울 수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15세(1577년, 선조 10년) 김성립에게 시집을 감
난설헌은 14~5살 쯤에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을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난설헌의 시 강남곡 4연을 보면 “어찌 알았으리 나이 열다섰살에 조롱받는 사내에게 시집갈 줄이야”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김성립은 안동 출신의 훌륭한 집안의 사내였지만 동생인 교산 허균은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세(1579년. 선조 12년)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 허엽이 그해 5월, 경상감사로 좌천되었습니다.
18세(1580년, 선조 13년) 아버지, 초당 허엽 돌아가심
이해 2월 4일, 아버지 허엽이 병이 들어 서울로 올라 오던 중에 상주 객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20세(1582년, 선조 15년) 신선세계로 빠지게 했던 시집살이
난설헌 허초희는 시집 생활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처가살이 결혼제도는 신랑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거기서 살아야 하는 시집살이(친영) 결혼제도로 새롭게 바뀌던 시절이었습다. 따라서 자유분방하고, 이미 자존의 세계를 형성해 왔던 난설헌 허초희에게는 받아 드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따라서 점점 더 공부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며 신선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시집을 오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던 세계와 커다란 괴리와 마찰,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그랬으며 아버지인 초당 허엽, 작은 오빠인 하곡 허봉, 동생인 교산 허균과 작은 오빠와 막연한 사이인 당대의 제일 가는 천재 시인인 손곡 이달에게서 받았던 영향은 님을 점점 더 신선의 세계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12살 아래인 동생 난설헌 허초희를 끔찍찍히도 아꼈던 하곡 허봉과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곡 허봉은 글을 잘하는 난설헌을 매우 아껴서 자주 시(詩)를 지어 보냈으며 붓도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중국의 유명한 시인인 두보(杜甫)의 시집을 보내면서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杜甫)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1583.선조 16년) 작은 오빠, 하곡 허봉 갑산으로 귀양
경기도 순무 어사로 나갔던 둘째 오빠인 하곡 허봉이 병조판서 이율곡을 탄핵하다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고, 다시 갑산으로 유배되었읍니다. 난설헌은 이때 “송하곡적갑산”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에 뒤늦게 큰 오빠인 악록 허성이 별시 무과에 급제 하였읍니다.
난설헌 허초희의 송하곡적갑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난설헌 허초희가 작은 오빠인 하곡 허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送荷谷謫甲山(송하곡적갑산)
갑산으로 귀양가는 하곡 오빠를 보내며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함경도길 가시는 걸음 바쁘시어라
쫒겨나는 신하는 가태부 같다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이리오
강물은 가을 언덕으로 잔잔히 흐르고
변방의 구름은 석양에 물드는데
서릿바람 불어 기러기떼 날으나
중간이 끊어져 행렬을 못 이루네
이 시의 이해를 위하여 조금 덧붙이면 가태부는 중국 전한시대에 억울하게 장사(長沙)로 귀양갔던 고사가 있는데 작은 오빠인 하곡 허봉을 가태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의 회왕이 바른말 잘하는 삼려대부 굴원을 미워했던 사실을 들어 우리 임금이야 어찌 초나라 회왕과 같겠냐고 한 발 물러서는 듯하지만 사실은 초나라의 회왕을 근하게 빗대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세(1585년, 선조 17년) 몽유광상산시에 자신의 죽음을 그려
이해 봄, 상을 당하여 외삼촌 댁에 머물으며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라는 제목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는 꿈속에서 신선이 시는 곳으로 알려진 광상산(廣桑山)을 거닐고 깨어난 후 쓴 시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긴 글의 뒷 부분에 해당하는 시를 이제 한번 감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푸른 바다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세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일굽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 차갑기만 하여라
26세(1588년, 선조 20년) 작은 오빠, 하곡 허봉 돌아가심
난설헌의 둘째 오빠인 하곡 허봉이 금강산 금화현 생창역에서 황달과 한담으로 38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읍니다. 이때 동생인 교산 허균의 나이는 20살이었습니다. 난설헌을 특히 아껴 주었던 둘째 오빠의 귀양과 죽음은 난설헌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겨 주었습니다. 더욱이 모진 시집살이와 함께 두 남매를 잃은 슬픔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을 가져다 주었겠지요.
27세(1589. 선조 21년) 돌아감
난설헌 허초희는 음력 3월 19일, 만물이 왕성하게 생명력을 자랑하던 때인 어느 봄날에 한많은 삶을 조용히 마감하였습니다. 아들과 딸 그리고 뱃속의 자식마져 먼저 보내야 했던 난설헌은 특별히 병을 앓은 것도 없었는데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고운 옷을 갈아 입고 자신도 작은 오빠의 뒤를 따라 27세의 짧은 나이로 먼저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시를 모두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지요. 호는 난설헌(蘭雪軒)이요, 자는 경번(景樊)인 허초희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 그리도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은 채 고요히 잠들어 계십니다.
여기서 잠시 먼저 누이를 떠나 보내야 했던 그러니까 누이를 그리는 교산 허균의 마음이 오롯이 배어있는 당시, 교산의 시를 함께 읽으며 그 마음을 느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았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여라.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였구나.
사후 1년(1590년, 선조 23년) 난설헌집 초본 엮음
교산 허균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 해 11월, 집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찾아내고, 기억을 살려 자신이 외우고 있던 것들을 모아 210여 편의 시를 묶어 유성룡의 서문을 받아 난설헌집 초본을 엮었읍니다.
이럴 즈음에 큰 오빠인 악록 허성은 일본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는데 일본의 정세를 바르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였습니다.
사후 3년(1592년, 선조 25년) 남편, 서당 김성립 전사
난설헌의 남편인 서당 김성립은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전쟁 중에 싸우다가 다리를 잃고 죽었습니다. 한편 교산 허균은 가족을 이끌고 북쪽 단천을 거쳐 피난을 했으며 가을에 강릉의 외가인 사천 애일당으로 내려와 집을 수리하고 한동안 그곳에서 지냈으며 이때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엮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후 9년(1598년, 선조 31년) 오명제에게 난설허의 시 소개
이해 봄에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습니다.
사후 17년(1606년, 선조 39년) 주지번에게 시 소개, 중국에서 난설헌집 엮음
중국 황제의 손자 탄생을 알리기 위하여 중국 한림원 수찬인 주지번이 조선에 왔습니다. 교산 허균은 집에서 주지번을 접대히게 되었는데 이 때에 난설헌 사후에 바로 엮었던 난설헌집을 보여 준 것으로 여겨지며 그 후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습니다. 또한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야(文台屋次郎)가 간행하여 널리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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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해적이:지나온 일을 햇수의 차례에 따라 적어 놓은 것
3)애일당:허엽의 처가인 강릉 김씨가 살던 곳으로 장인 김광철의 호로도 쓰이는 강릉 사천진리까지 이어진 나즈막하고, 길다란 산자락 끝부분의 양지바른 골의 이름입니다.
4)성옹지소록: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은 야사집으로 옛 이야기 등을 기록한 내용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 22∼24 설부(說部)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교산 허균은 1610년(광해군 2) 과거시험 부정사건과 관계되어 순군옥(巡軍獄)에 42일간 갇혀 있다가 함산(咸山)으로 귀양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옥 중에서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두었던 것을 이듬해 유배지에서 다시 정리하여 완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3. 핏줄을 통한 난설헌 허초희의 이해
1)아버지 허엽
난설헌 허초희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한 명문 양천허씨 가문(陽川許氏 家門) 출신으로 첫째 부인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와 사별하고,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江陵 金氏)와 결혼하였는데 한씨에게서 박순원의 부인인 큰 딸과 우성전의 부인인 둘째 딸과 허성을 얻었으며 김씨에게서 허봉, 허초희, 허균을 얻었습니다.
허엽(許曄, 1517년 12월 29일~1580년 2월 4일)은 강릉 출신으로 성리학자이며 자5)는 태휘(太輝), 호6)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입니다. 나식, 이여,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이언적에 사숙7)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때 관직에 올랐으며 동서 분당 때는 동인에 가담하여 동인을 이끌었읍니다.
강릉 초당의 맑은 물과 간수 대신으로 바닷물을 써 초당 두부의 처음을 연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2)어머니 김씨
강릉 김씨(1537~1594)는 아버지 김광철8), 어머니 이씨(이석진의 딸)의 둘째 딸로 당시, 20살이나 많은 초당 허엽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3)큰 오빠 악록 허성
악록9) 허성(1548~1612)은 교산 난설헌의 큰 오빠입니다.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입니다. 유희춘(柳希春)10)에게 배웠으며 남명학파로 1568년(선조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590년에는 통신사(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후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학문으로는 유성룡(柳成龍)․김명원(金命元)․우성전(禹性傳)11) 등과 함께 이황(李滉)의 학통에 가까운 남인(南人)에 속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4)작은 오빠 하곡 허봉
하곡 허봉(1551~1588)은 교산 난설헌의 작은 오빠입니다.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입니다. 형 악록 허성과 같이 유희춘(柳希春)에게 공부했으며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였읍니다.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읍니다. 다음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을해당론(乙亥黨論)이 일어나자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심의겸(沈義謙)등 서인(西人)과 대립하여 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583년 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율곡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종성, 갑산에 유배되었습니다. 그후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선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 출입금지를 당하여 백운산․인천․춘천 등지를 떠돌며 금강산에서 머물기도 하는 등 기나긴 방랑생활을 하였던 중 황달과 한담으로 금강산이 가까운 금화현 생창역에서 38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동생인 교산 허균이 엮은〈하곡집〉이 있습니다.
5)동생 교산 허균
교산 허균(1569~1618)은 난설헌 허초희의 여섯 살 아래 동생입니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수(惺叟)입니다. 21살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26살에 정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삼척부사․공주목사 등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후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때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면서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인 참수형을 당하여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가 쓴 많은 책들은 거의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성소부부고(惺所覆藁)12) 등 일부만이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교산 허균은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을 통해 당시 권력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문인으로서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처음이라는 최초의 수식어를 내리 붙여야 하는 천재적이고도 역동적인 삶을 살아 냈습니다.
그 놀라운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책 게12장(偈十二章)을 소개한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음식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펴낸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 성수시화((惺搜詩話)를 펴낸 사람.
우리나라 최초의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펴낸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사립도서관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세운 사람
우리나라 최초로 스스로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을 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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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자(字):자는 중국과 한국 등에서 성인식과 같은 관례 때 성인이 되었다는 징표로 새로 지어 주는 별명입니다. 윗사람에게는 자신을 실명으로 부르지만 자신의 나이 보다 아래 사람에게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읍니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같은 또래나 아랫사람에게는 자를 불렀고, 임금·스승·부모가 신하·제자·자녀를 부를 때는 실명을 사용하였읍니다.
6)호(號):본명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아호(雅號)·별호(別號)라고도 합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이나 자신이 나가고자 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7)사숙: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았읍니다.
8)김광철(1478~1550):강릉시 사천면 애일당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특히 어버이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과 더불어 강릉시 사천면에 살면서 학문 힘썼다고 합니다.
9)악록 허성은 일본 통신사(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 왔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동인의 길성일과 같은 동인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본의 침략을 주장을 한 것으로 보아 올곧고, 강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정세를 바르게 분석하고, 파악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10)유희춘(1513~1577):본관은 선산.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아버지는 계린(桂麟)이며, 부인은 여류시인인 송덕봉(宋德奉)입니다. 처음에 최산두(崔山斗)에게 배우고, 뒤에 김안국(金安國)에게 사사(師事)했읍니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수찬·정언 등을 지냈으며 1546년(명종 1)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알력이 원인이 되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귀향했읍니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종성으로 이배(移配)되었읍니다. 이곳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황(李滉)과의 서신교환을 통하여 주자학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으며, 이 지방 유생(儒生)들을 교육에 전념했읍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석방되어 지제교·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예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류(士類)들과 같이 문장에 뜻을 두지 않고 경학에 몰두하여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 강론에 주력했읍니다. 또한 〈주자대전〉을 교정하고, 선조의 명을 받아 〈국조유선록 國朝儒先錄〉을 편찬했으며 이이(李珥)와 함께 경서의 구결(口訣)과 언해(諺解)를 상정(祥定)하는 등 유교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읍니다. 저서에 〈미암집〉·〈속몽구 續蒙求〉·〈속휘변 續諱辨〉·〈역대요록 歷代要錄〉·〈천해록 川海錄〉·〈헌근록 獻芹錄〉·〈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강목고이 綱目考異〉·〈시서석의 詩書釋義〉·〈완심도 玩心圖〉 등이 있읍니다.
11)우성전(1542~1594):호는 추연(秋淵)으로 이황의 문인이며 동서분당 때 김효원, 유성룡 등과 동인을 대표하였고 그뒤 이발과 사이가 벌어져 그는 남산에 살아 남인이 되었으며 1591년 정철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강화도에서 김천일과 합세하였으며 행주에서 권율을 지원하기도 했던 의기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허엽의 둘째 딸을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12)성소부부고: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1569~1618)의 시문집으로 8권 1책의 필사본이다. 지은이가 가장 불우했던 시기에 칩거하면서 쓴 시와 산문들을 모아 손수 엮은 문집으로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졌다. 지은이가 역적으로 몰려 죽어 공간(公刊)될 수 없었으며, 몰래 필사하여 전해져 틀린 글자와 빠진 장이 많습니다.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성들여 쓴 필사본이며, 책의 첫 장마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의 장서인(藏書印)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御印)이 찍혀 있다. 부부와 문부의 내용은 일반 문집의 체재와 거의 비슷하나 시부는 〈정유조천록 丁酉朝天錄〉·〈남궁고 南宮藁〉·〈궁사 宮詞〉 등과 같이 시기나 주제별로 묶여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체재는 그뒤 많은 문집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설부는 보통 잡저라 하여 문부에 넣거나 패설류(稗說類)를 섞어 실었으나 이 책에서는 '지소록'(識小錄)·'시화'(詩話)·'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나누어 실었다. 시부에서는 대(大)시인인 이달(李達)과 권필(權韠)의 평어(評語)를 세주(細註)로 달아놓아 그의 시가 당대에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읍니다. 설부에 있는 〈성수시화 惺叟詩話〉는 따로 전하는 그의 저작 〈학산초담 鶴山樵談〉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시화 가운데 뛰어난 작품입니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했으며, 그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여 출간했읍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읍니다.
4. 특별한 성정을 통한 난설헌 허초희의 이해
1)8살에 광한전13) 백옥루14) 상량문15)을 지은 그 천재성
난설헌 허초희는 5살 쯤에 글을 깨우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8살 때지었다고 본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글을 접하고, 어깨너머로 배워 진도를 빨리 나갔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제 8살 때 지은 상량문을 한글로 풀어 감상해 보며 님의 천재성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벽에 봉황을 타고 요궁(瑤宮)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부상(扶桑)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에 던지노니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요희(瑤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에 던지노니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옥자(玉字)를 수놓은 비단옷 입고 서왕모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에 던지노니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새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어영차 떡을 들보 위에 던지노니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단 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 소리를 누워서 듣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에 던지노니
팔방에 구름이 어두어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이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사소서. 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세계를 내려다 보시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며 바라보소서. 손으로 세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으로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2)시에 담은 그 치열함과 잔잔함 그리고 인간애
난설헌 허초희의 난설헌집은 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 1590년 11월에 친정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찾아내고, 기억을 살려 자신이 외우고 있던 것들을 모아 210여 편의 시를 묶어 유성룡의 서문을 받아 난설헌집이라는 제목으로 동생인 교산 허균이 엮어 냈습니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난설헌 허초희는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자신이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방안에 온통 가득찬 시들은 자신의 자존을 허락하지 않았던 당시 사회와 주변 환경에서 치열하게 싸워 이긴 것들의 값진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좌절하여 쓰기를 포기하기 보다는 자존을 지킨 시들입니다. 그 속에는 치열함이 들어 있으며 한편으로 잔잔함도 함께 깊이 배어 있습니다.
난설헌이 남긴 시에는 신선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이미 상당한 부분,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이미 구축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님의 시에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휴머니즘이 살아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힘든 삶을 시로 끌어 올렸듯이 인간적인 따뜻함이 짙게 배어 있지요. 그래서 그 시들은 지금,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설헌은 그 시들을 왜 불태우라고 했을까요?
거기에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즈음, 난설헌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것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3)끝까지 자존심을 지켰던 그 중심 자리
오늘날, 우리가 난설헌 허초희를 훌륭하게 평가하며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그것은 난설헌의 천재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보다 뛰어난 머리를 지녔다는 것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잠시 감탄의 순간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오래도록 진한 감동을 느끼며 흠모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짧은 삶을 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방금 말씀을 드린 대로 잠시의 감탄이야 있올 수 있겠지만 진정, 감동을 느끼고 존경의 마음으로 꽉 채울 수는 없을 겁니다. 또한 아무리 치열하게 살았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끝없는 잔잔함을 간직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그래서 다시금 여러 님들께 묻습니다.
무엇이 난설헌 허초희의 훌륭한 점입니까?
난설헌의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으로 사로잡을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끝까지 자존을 지켜냈던 그러니까 끝까지 중심이 잃지 않았던 난설헌의 마음자리 때문입니다. 그 마음자리는 자유혼으로 그리고 자유정신으로 그리고 휴머니즘으로 그리고 우주의 중심으로 우뚝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여러 님들은 몇 년 전에 열반하신 법정 스님16)을 알고 계시지요?
법정 스님과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17)도 그냥 흘러 보낼 수가 없습나다.
돌아가시면서 자신이 지은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걸 남겨 이웃을 구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모든 시들을 불태우라는 난설헌의 유언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목욕재계한 후 조용하고,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한 난설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삶과 죽음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어진 것입니다. 이 지경은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빛에서 어둠을 보듯이, 육체에서 정신을 본 것입니다.
영육이 하나인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터득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입니다.
“몸 나”에서 “정신 나”를 그러니까 “참 나”를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서 또다른 나를 본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난설헌이 지니고 있었던 그 중심은 천재성도, 치열함도, 잔잔함도, 휴머니즘도 다 살린 것입니다.
중심을 잃으면 천재성도, 치열함도, 잔잔함도, 휴머니즘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심을 찾고, 중심을 잡는 일이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빛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요 동시에 우주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중심 자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난설헌 허초희의 시세계를, 그 중심자리를 “느낌”으로 이해했으면 싶어 드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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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광한전:달 속에 있다는 상상 속의 궁전으로 선녀인 항아(姮娥)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14)백옥루:문인(文人)이나 묵객(墨客)이 죽은 뒤에 간다는 하늘의 누각을 말하며 이는 곧 문인이나 묵객의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15)상량문:집을 거의 지을 즈음 끝으로 대들보를 올리는데 이를 축복하는 글로 상량식을 할 때 읽습니다.
* 여기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앞서 "해적이를 통한 난설헌 허초희의 이해"에서 밝힌 대로 님의 나이 8살 때 지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난설헌 허초희 후기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는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가 깜짝 놀랄 정도로 글을 빨리 깨우치는 어린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를 미루어 난설헌 허초희의 천재성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16)법정(法頂)(1932~2010):속명(본명) 박재철(朴在喆)입니다.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로 사셨습니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하셨습니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읍니다. 2010년 3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하셨읍니다. 스님은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읍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그때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읍니다. 이어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습니다. 스님은 종교간의 화합에도 만은 힘을 기울였는데 1997년 12월 14일에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 품절 되기도 했읍니다.
17)길상사에 얽힌 이야기:길상사는 성북동에 있는 절입니다. 대지가 약 7,000여 평에 이르며 법정스님이 시주 받은 절로 더욱 유명하지요. 길상사는 원래 <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습니다. 길상사라는 이름은 대원각의 여주인인 법명이 길상화(김영한)라는 여인을 기리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김영한은 집안이 몰락하여 16세에 기생, 진향이 되었으나 춤과 노래 등에 재주가 뛰어나, 당시 흥사단과 조선어문학회에서 활동하던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신문학을 접한 신여성이었습니다. 신윤국이 함흥에서 투옥되자 그분을 면회갔던 영한은 그곳에서 당시 함흥 영생여고 영어 선생이었던 백석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서울로 도망와 살림을 차리고 사실상 부부로 살았는데 백석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백석은 강제로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으나 결국 만주로 도망을 치게 되얶고 이것이 자야(영한)와의 영원한 이별된 것입니다. 그후 김영한은 김숙으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백석은 김영한을 만났을 때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 주었고, 법정 스님은 그에게 길상화(吉祥花)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 때부터 김영한은 길상화가 된 것이지요 이런 김영한은 백석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온 종일 밥을 먹지 않고 굶었다고 합니다. 1997년에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였고, 드디어 법정스님에게 전 재산을 시주하게 됩니다. 당시 법정 스님은 너무나 부담이 되어 거절하였으나 받아 줄 것을 간청하여 길상사는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재산이 싯가로 1,000억 가량의 시주로 말입니다.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 물으니 "어찌 천억 재산이 백석의 시(詩) 한 줄보다 더 훌륭하단 말입니까"하면서 웃었다는 이야기는 진실한 사랑의 값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999년 11월.14일, 돌아가신 님은 유언대로 한 줌 재가 되어 눈 내리는 겨울날, 길상사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5. 문향, 예향인 강릉 그리고 시대정신과 난설헌
1)문향, 예향인 강릉
흔히들 강릉을 문향, 예향의 도시라고 합니다. 문화와 예술의 넘치는 도시라는 표현이지요.
그런데........ 정녕 강릉은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도시일까요?
“그렇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요?
많은 이들이 주저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그 말에 걸맞는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겁니다.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가지고 있는 강릉입니다.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은 껍질에 해당합니다.
온통 좋을려면 안도 좋아야 하겠지요.
영어로 하면......... 하드웨어는 좋은데......... 소프트웨어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강릉을 사랑하는 일은 강릉을 바로 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넘치는 것은 무엇인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강릉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지요.
부디 문향, 예향의 강릉에 속해 있는 우리인 것을 잊지는 말았으면 싶습니다.
2)시대정신이 깃든 삶이 곧 문화와 예술입니다.
난설헌 허초희는 우리에게 어떤 시대정신을 메시지로 남겨 주었을까요?
시대정신은 지금,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정신을 말합니다.
님들은 여성이기에 끝없이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를 경험하셨을 겁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현모양처를 요구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이 이 현모양처의 표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얼마쯤은 현모양처를 요구할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온통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일까요? 남녀를 떠나서 사람에게는 가족일 경우 더욱 이 자기희생의 정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여자의 경우, 현모양처가 더욱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여성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성이 넘치고, 능력이 있으며 매사에 있어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그러니까 자기중심이 분명하고, 자기의 세계를 확실하게 열어 가는 여성을 요구합니다.
어떤 분이 있을까요?
바로 난설헌 허초희입니다.
우리 강릉은 이 두 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복받은 강릉시민입니다. 사실, 이 두 분으로 표현되는 가치는 둘 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좋고,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은 사임당, 얼마쯤은 난설헌의 삶이 섞여 있을 수 밖어 없으니까요. 우리의 삶은 이처럼 종합예술입니다. 좀더 비약시키자면 삶이 곧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삶과 동떨어진 문화, 예술은 그야말로 껍질 뿐이지요, 빈 수레이며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문화와 예술에 맞닿아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 그 자체입니다.
그런 삶을 푹 삶읍시다!!!
3)난설헌 허초의 삶이 곧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제 여러 님들은 난설헌 허초희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겁니다. 이해는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은 불교 용어로 말씀 드리면 안이비설신의 작용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이 많은데...... 그 중에는 느낌으로 아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이 느낌은 정신 그러니까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떤 경우 이 느낌이 정확할 때가 더 많지요. 다들 경험하셨을 겁니다. 이렇게 아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난설헌에 대한 이해를 다각적으로 하자는 것 때문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알자는 것입니다. 정말 알자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 이제, 난설헌의 삶을 이해하고, 따르고 싶은 마음(일찍 삶을 마감하는 것 빼 놓고)이 생겼다고 하자구요.
이것은 바로 난설헌이 나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신 것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의 탄생이 꼭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의 성적인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깊은 감동을 받고 그렇게 살고자 마음을 작정했다면 그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통하여 영원히 사시는 것이지요.
삶과 죽음, 탄생을 중심에서........ 그러니까 우주의 중심에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450여 년 전에 사셨던 난설헌의 삶이 바로 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6. 글을 마치며
이제 끝을 맺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말 그대로 “꿈보다 해몽”이 훨씬 좋고, 뛰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제가 남류(문학을 전공하는 남자)였다면 중간 중간에 난설헌 님의 시를 곁들여 문학의 향기를 여러님들께 선물할 수도 있을 텐데 남류가 아니라 그러질 못했습니다. 다만 한가지 꼭 여러님들께 당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잠시 더 꿈을 꾸겠습니다. 해몽을 잘 해 주세요.
난설헌의 세 가지 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지요?
그게 뭔지를 다시 끄집어 내 보기로 하자구요.
첫째, 여자로 태어난 것
둘째, 조선에 태어난 것
셋째,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흔히들 난설헌은 이 세가지 한을 가슴에 품고 삶을 살았다고들 합니다.
첫째로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이 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가 남녀 차별이 극심 심했던 때여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이 맺힐 겁니다. 그런데 난설헌의 경우 남녀의 평등을 온전히 누린 것은 아니겠지만 시집을 가기 전에는 상당한 부분 남녀의 차별을 겪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개혁적인 집안 분위기로 보아 그런 차별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것은 난설헌은 허초희라는 이름과 난설헌이라는 호와 경번이라는 자도 가지고 있었으며 즐겨 썼던 것으로 보아 그 어떤 차별도 없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시집을 가서는 워낙 다른 환경에서 겪은 고통은 컸겠지요. 처음엔 심적인 고통과 갈등이 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짧지만 제가 난설헌을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고통과 갈등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였겠지만 난설헌의 정신 세계는 그러한 것을 견디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정도로 깊이가 있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 조선에 태어난 것이 한이 된다고 한 것은 넓디 넓은 세계가 아니 좁은 조선에 태어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지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것으로 보여 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리적인 좁고 넓은 땅이 문제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쩐지 어색합니다. 난설헌의 정신세계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이들의 입방아라고 여겨집니다.
셋째로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 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조금은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난설헌의 견흥이라는 시의 세 번째 연을 소개하겠습니다.
견흥(흥에 이끌려)
내게 있는 아름다운 비단 한필,
털어내고 닦으니 색깔도 곱네.
한쌍의 봉황을 마주 보게 수 놓으니
그 무늬 얼마나 빛나는지
여러 해 장농 속에 넣었다가
오늘 아침 낭군님께 드린다네.
임의 바지 만드는 건 아깝지 않으나
부디 다른 여인 치마감으로는 쓰지 말아요.
이 시에서 우린 난설헌 허초희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듬뿍 담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나요?
“봉황을 마주 보게 수 놓았다”는 대목과 그것을 꺼내 “낭군님께 드린다”는 것,
“부디 다른 여인의 치마감으로 쓰지 말라”는 당부를 합니다.
여러 님들도 경험해 보셨겠지만..........
자신이 없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마음의 중심이 바로 잡혀 있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김성립의 아내 된 것을 원망하면서 이런 시를 쓸 수 있나 묻고 싶네요.
이어서 네 번째 연을 살펴 보겠습니다.
잘 다듬은 황금 보배에
예쁘게 만든 반달무늬 노리개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셨기에
여지껏 붉은 치마끈에 차고 있어요.
오늘, 떠나시는 님에게 드리니
님께서 사랑의 정표로 지녀 주세요.
길 위에 버리는 건 아깝지 않으나
다른 여인에게는 달아주지 말아요.
아! 참으로 사랑이 촉촉하게 배어 있는 시입니다.
이 시도 끝 줄에서 자신있게 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따위 바람은 피우지 말라고 말입니다.
또 일곱째 연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 날 찾아
님께서 잉어 한쌍 보냈다 하네요.
잉어 배를 갈라서 들여다 보니
비단에 쓴 편지가 들어 있네요.
처음은 생각나고 그립다는 말씀하시고
마지막엔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셨네요.
편지 읽고 님의 뜻을 알고 나니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네요.
아! 님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잉어 배를 갈라 편지를 본다는 것은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의 탄생설화로 무월랑과 연화의 사랑이야기18)에서 따온 것입니다.
다음은 죽지사 세 번째 연입니다.
죽지사
집은 강릉땅 돌쌓인 갯가에 있어
문앞의 강물에 비단옷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 부럽게 바라봤지요.
여기서도 사랑이 듬뿍 담긴 마음과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네요.
끝으로 채연곡을 옮겨 보겠습니다.
채연곡(연밥 따며 부르는 노래)
가을 호수 맑고 푸른 물 구슬같아
연꽃 핀 깊은 곳에 목란배 매었지
임을 만나 물 건너 연밥 따 던지고는
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 나절 부끄러워
이 시는 시경19)에 있는 상황을 빌려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과일이나 꽃을 던져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사랑의 모과20)라는 시가 생긴 것입니다.
여인의 적극성과 솔직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시입니다.
이상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난설헌의 시세계는 적극성과 솔직함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사랑이 담긴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때로 김성립에 대한 아쉬움이 컸었던 적도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시 세계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님의 정신세계를 감안할 때 김성립에 시집 온 것을 원망하는 삶으로만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접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왜, 난설헌 허초의를 그 세가지 원망에 가두려고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거기에 가두 킬 난설헌 허초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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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무월랑과 연화의 사랑이야기:신라 중엽 때의 이야기입니다. 강원도 명주(지금의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밑에 서출지라는 연못이 있고, 그 못가에 박연화라는 예쁜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연화는 날마다 못가에 나와 고기에게 밥을 던져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내자 고기떼들은 연화의 발걸음 소리만 나도 물 위로 떠올라 모여 들었지요. 어느 봄날 하루는 연화가 못가에 나와 있으려니까 웬 서생이 자기를 보면서 못가를 서성이고 있었읍니다. 얼마후 그 서생이 한 장의 편지를 떨어뜨리고 사라져 이상히 여겨 주워보니 그 편지는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 이었습니다. 그 서생의 이름은 무월랑이었지요. 다음날 연화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자로서는 아무렇게나 경거망동할 수 없다"며 “부디 저를 사랑하신다면 더욱 글공부에 힘써서 입신양명을 하시면 그때 부모의 승낙을 받아서 아내가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무월랑은 서울(경주)로 가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한편 연화의 집에서는 나이가 찬 연화의 혼처를 정하고, 머지 않아 날을 받아 혼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이를 안 연화는 그간의 사연을 적은 편지를 들고 못가에 나와 "오랫동안 내가 던진 밥을 먹고 자란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내 간절한 사정을 서울로 간 뒤 소식 조차없는 낭군에게 전해다오"라며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하면서 그 편지를 물 위에 던졌답니다. 그러자 그 중에 가장 큰 잉어가 편지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 가 버렸지요. 한편 서울에 온 무월랑은 어느날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큰 물고기를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와 배를 가르니 이상하게도 그 속에 편지가 들어 있어 펼쳐보니 그 편지는 분명 연화가 보낸 급한 사연이었습니다. 이를 본 무월랑은 부모님께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그 길로 명주로 말을 달려 마침 새신랑이 문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급히 가로막은 후 연화의 부모님께 자기들의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지극한 정성이야말로 진정, 하늘을 감동시킬 일이다"라고 하면서 기꺼이 무월랑을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19)시경(詩經):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공자(BC 551~479)가 편집했다고 전합니다. 주(周)나라 초기(BC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BC 6세기)까지의 시가 305편이 모아져 있습니다. 크게 풍(風)·아(雅)·송(頌)으로 분류되며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습니다. 풍은 민간에서 채집한 노래로 모두 160편이며 여러 나라의 노래가 고루 수집되어 있는데 국풍(國風)은 주남(周南)·소남(召南)·패(邶)·용(鄘)·위(衛)·왕(王)·정(鄭)·제(齊)·위(魏)·당(唐)·진(秦)·진(陳)·회(檜)·조(曹)·빈(豳)의 15개 나라의 노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서정시로서 남녀간의 사랑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지요. 아는 소아(小雅) 74편과 대아(大雅) 3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쓰이던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형식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지닌 서사적인 작품들도 들오 있습니다. 송은 주송(周頌) 31편, 노송(魯頌) 4편, 상송(商頌)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악곡을 모은 것입니다. 주송은 대체로 주나라 초기, 즉 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소왕(昭王) 때의 작품으로 보이며 노송은 노나라 희공(僖公) 때의 시입니다. 또한 상송은 〈시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로 여겨져 왔으나, 청대 위원(魏源)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증거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통치자의 전쟁·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일상생활 등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4언(四言)을 위주로 하며 부(賦)·비(比)·흥(興)의 표현 방법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20)사랑의 모과:그녀가 나에게 모과를 던졌네(投我以木瓜)/나는 그녀에게 옥돌을 주었네(報之以瓊琚)/보답을 하려는 게 아니라(匪報也)/그녀랑 친해지고 싶어서(永以爲好也)(『시경』, 「위풍・모과」 衛風・木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