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이성복과 황지우 해체주의, 악몽의 세계에서
이성복과 황지우는 1980년대가 낳은 최고의 시적 전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1980년대 시의 깊이를 견인한 두 주역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성복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보여준 도저한 우상 파괴의 상상력과, 황지우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나는 너다』에서 보여준 형태 파괴의 시학은 1980년대 해체 시법의 태동에 대한 예시였다. 해체시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어떠했나. 우리는 그것을 1980년대 전반기 해체시의 흐름을 주도한 두 시인,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해체 정신에서 만나고, 해체 방법에서 갈라진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풍차,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고통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엽총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 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뒤집어 신고 날아 보시지 ―당대의 몸값은 신발 값과 같으니 당대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 이성복, 「사랑 일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1980년대의 해체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준 첫 번째 시집이다. 1980년대 벽두에 이성복의 시는 기상천외한 이미지들의 돌출과 당돌한 결합, 언어의 파격성, 세계의 산문적 개진, 끝없는 요설, 가차없는 우상 파괴 등으로 새로운 해체 시법의 한 전범으로 떠오른다. 이성복의 시는 그 자체로 일종의 경이였다. 지금―여기에서의 악몽 같은 현재 진행형의 삶을 탐색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저공비행은 과거의 어떤 시인도 보여주지 못한 정신적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그의 시는 한편으로 “나날의 횡설 수설의 기록”이라거나 “당대 폐품들의 무의미한 나열”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절망과 환멸의, 1980년대의 삶과 현실에 대한 탄력적 대응으로 평가된다.
1980년대의 주요 시적 징후로서 이성복의 우상 파괴 상상력이 포착해낸 타락한 현실―유곽, 능욕당한 누이, 아버지―개새끼의 이미지들은 1980년대가 품어 안고 있는 죄악 · 불륜 · 파탄 · 치욕의 삶을 일거에,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시의 사변성(思辨性)은 크고 넓은 그릇처럼 타락한 현실 체계의 전모를 담아내는 유용한 시적 장치였고, 그의 시의 해사적(解事的) 구조는 1980년대의 훼손된 삶의 개별적 체험들을 개인의 국지적 체험으로 고립 · 매몰 · 파편화시키지 않고, 보편적 양상으로 펼쳐 보인다.
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시집 전체가, 날카로운 눈과 섬세한 손을 가진 장인에 의한, 병든 세계의 세목과 고통에 대한 꼼꼼한 조형물이다. 이 시집의 핵심을 이루는 충격적인 고통의 이미지들은, 곧 고통에 대한 민감한 각성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유일한 징후이며,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주체적 발현의 시작이라는, 시인의 생각의 반영이다. 보편적 삶의 근저에 가득 차 있는 심화된 고통의 양상에 대한 성찰은, 시인을 치유할 길 없는 비관주의의 극단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의 「사랑 일기」에 나오는 “몸은 벌집, 고통이 들쑤신 벌집”, “그래, 온몸으로 번지는 매독의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수의요”,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내 사지는 못 박혀 고름 흘려요”와 같은 시구들은 삶에 대한 깊고 깊은 비관주의를 보여준다. 가볍고 속도감 넘치는 상상력은, 그의 비관주의가 현실과의 객관적 긴장 관계를 상실하고 폐쇄적 자아 속에 파묻혀 절대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방어벽이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 걸어가는 시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구토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공장이 되었으면 날아가는 맷돌이 되었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도 짓궂은 배가 고프고 끌려다니며 잠드는 그림자, 이맘 때 먼 먼 저 별에 술 한잔 따르고 싶더라 내 그리움으로 별아, 네 미끄럼틀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 이성복, 「구화(口話)」,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1980년대 벽두에 화농된 환부가 터지며 피고름이 낭자하게 튀어오르는 그 살기 등등한 세월 속에서, 이성복의 초현실주의적 자유 연상의 시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앵두를 먹고 낳는 무서운 애, 걸어가는 시, 물구나무 서는 오리, 구토하는 발가락, 발톱 있는 감자, 상냥한 공장, 날아가는 맷돌 등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주체인,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천진한 마음은, 굳어 상투화된 세계와 그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있어서는 안 될 추문으로 만든다. 「다시, 정든 유곽에서」 같은 작품이 머금고 있는 시적 진정성은, 이성복의 시가 당대의 폐품들에 대한 점묘법적 묘사, 위악적 요설, 방향성 없는 우상 파괴를 넘어서 있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하품하는 입은 세상보다 넓고 우리의 저주는 십자가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찌른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뱃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되지만 우리의 절망은 지하도 입구에 앉아 동전 떨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것이니 밤마다 손은 죄를 더듬고 가랑이는 병약한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후회는 난잡한 술집, 손님들처럼 붐비고 밤마다 우리의 꿈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높은 송전탑처럼 떨고 있으니 날들이여, 정처 없는 날들이여 쏟아부어라 농담과 환멸의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폐차의 유리창 같은 우리의 입에 말하게 하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 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수긍할 만한 살아냄의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 타락한 세계에서의 이 본원적 물음들은, 그것 자체로 드높은 양심의 고양에서 발현된 현실 변혁의 행동은 아니지만 현실―삶을 끌어안고 거기서 살아냄의 논리를 이끌어 내려는, 삶에 대한 치열성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물신화해버리고, 그 뒤에 비겁하게 숨어 절망, 자학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삶의 정당성과 의의를 길어내려는, 현실에 대한 주체적 대응이다.
이성복의 시가 내뱉은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 같은 구절을 보라. 아버지는 현실 위에 군림하는 지배 체계와 이념의 상징이고, 세계를 지배하는 권위와 우상의 상징이다. 그 아버지는 시인의 시 세계 속에서 권위가 땅에 떨어져 형편없이 짓밟히거나 아주 무력한 존재로 나타난다. 부권에 대한 모독적이고 불경스런 태도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질서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구절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 권위에 걸맞은 도덕성과 힘을 결핍하고 있는 아버지 탓이다. 그 나약하거나 타락한 아버지 때문에 현실의 불모성이 비롯되었고, 세계는 치욕스러운 삶의 자리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부권이란 역사―현실을 움직여나가는 주체의 상징이고, 1980년대는 그 부권이라는 우상이 파괴되는 와중에 있던 시대다. 그래서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는 구절이 튀어나온 것이다.
해체시는 이미 굳어진 시 형식의 해체를 넘어 궁극적으로 현실과 그것을 안으로 떠받치고 있는 이념과 가치관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 그것이 진정한 해체 정신이다. 이성복의 시적 자아는 지금―여기서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그 자아는, 어디로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치욕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음을 듣는다.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해체 정신은 시대의 병적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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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 오줌 싸려는 나의 포즈를 가로등이 등뒤에서 길게 내 이마 앞에 때려 눕혀 논다. 섬찟 놀라며 멈춘 나는 섬찟 놀란 체하는, 그런 몸짓을 하는 그 놈을 노려본다. 그 놈에게 질질 갈기면서, 좌우로 흔들면서, 부르르 떨다가 탈탈 털면서, 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한다. 못살아 못살아. 들어가면 아내에게 소리지를 거다. 여보, 우리 꺼지자. 남미로, 남극으로, 우리의 대척지(對蹠地)로. 어디든!
현실 : 꼼짝 못함. 체형 : 부동자세. 경제 : 빚더미. 교육 : 무지몽매. 예술 : 신선한 거품의 OB맥주. 아, 삶 : 입구멍 · 똥구멍 · 오줌구멍만 뚫려 있음. 여기저기에 핀포인팅. 종교 : 없음.
불쌍한 지구. 불쌍한 폴란드. 불쌍한 태양계. 불쌍한 20세기말. 그리고 끝으로 불쌍한 이 시공(時空) 어디서 눈이 오려는지 호남 산간 내륙으로 불연속 전선이 다가간다. - 황지우, 「그대의 표정 앞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의 형태 파괴의 극단화라는 방법적 선택은, 제도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조되는 현실적 삶을 해체해 그 삶의 하부 구조가 품어 안고 있는 허위의식과 환멸성을 뒤집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벽두의 비극적 역사 경험을 속수무책으로 수수(收受)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시인의 의식은 그 내면의 주체할 길 없는 환멸로 일그러지고 금이 간다. 그 균열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불륜의 역사 앞에서, 미처 대응의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그 죄악의 피동적 수납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자의식 속에 콜타르처럼 달라붙는, 스스로도 그 죄악의 세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로부터 비롯된다. 삶―세계에 대한 환멸의 과잉은 그 삶―세계를 깨뜨리고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일탈 욕구를 부른다. 그의 서정적 자아의 담화 체계에 대한 “파괴의 양식화”, 그 현실 해체 시법은 다름아니라 삶―세계에 대한 파괴 욕망의 반영이자 간접화된 드러냄의 방식이다.
시 「박쥐」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시는 내게 성적(性的)이다. 매혹과 수치심이 함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한 현실의 수태(受胎)이다.” 그의 시는 삶의 내면에 생긴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수태된 현실인 것이다.
나는 왜 적(敵)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적전(敵前)에서 자꾸 뒤돌아보는가. 80년대는 막장이냐, 최전선이냐. 너 살아 넘어갈래. 죽어 돌아올래. 그렇지만, 돌아보라. 가장 현실적인 색(色)은 탄색(炭色)이다. 그대 손은 묻어 있다. 내 마음 속의 동굴 속의 외로운 박쥐여. - 황지우, 「박쥐」,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민음사, 1985)
현실의 탄색은, 1980년대 현실의 도덕적 오염의 정도를 묶어내는 이미지다. 같은 시의 “나는 시궁창에 살고 있다. 이 편안한 더러움이여.”라는, ‘나’의 삶의 자리에 대한 현실―시궁창이라는 인식은, ‘나’의 현실 안주에 대해, 편안한 더러움이라는 야유를 낳는다. 더럽혀진 현실 위에 삶을 세울 수밖에 없는 막다른 인식의 배면에는, 더러운 삶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저질러진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수렴되는 개별자의 작고 무력한 삶에 대한 체념이 일렁거린다. 개별자의 체념은 시인의 표현대로 “체제에의 합승”, 모독당한 삶의 수락으로 나타난다. 이런 체제 합승과 모독의 수락을 참아내기 힘들 때, 그는 삶―세계를 향해 거침없는 야유와 냉소를 퍼붓는다. 그 야유와 냉소는, 더러움 · 모독과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려는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적 진정성은, 타락한 삶―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 바깥의 세계로 일탈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현실―당위 앞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양가 감정의, 모순의 긴장을, 온몸으로 받으며, “벗이여, 나의 근황은 위독하다. 위문 와다오, 붉고 흰 국화꽃을 들고”라고 노래할 때 획득된다. 그의 『나는 너다』는 “세계에 대한 확신 없는 공허한 인식의 태도”(이재현)를 넘어, 현실과 당위의, 찢긴 틈으로 보이는, 막막히 펼쳐진 사막에서의 고통과 불모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사막을 건너왔다, 누란이여. 아, 모래바람이 데리고 간 그 옛날의 강이여.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강가에서 울부짖는구나. 독수리 밥이 되기 위해 끌려가는 지아비, 지새끼들. 무엇을 지켰고, 이제 무엇이 남았는지. 흙으로 빚은 성곽, 다시 흙이 되어 내 손바닥에 서까래 한줌. 잃어버린 나라, 누란을 지나 나는 사막을 건너간다. 나는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낙타야, 어서 가자. 바람이, 비단 같다, 길을 모두 지워 놨구나. - 황지우, 「나는 너다 126」, 『나는 너다』(풀빛, 1987)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이성복이 선보인 서정시 양식의 해체를 더욱 과격한 형태 파괴로 밀고 나가면서 해체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다. 황지우의 해체시는 시의 극단적인 형태 파괴와 풍자를 그 형성 원리로 하는 세계다. 그의 좌충우돌하는 발랄한 풍자 정신에서는 시적인 것에 대한 관념 해체와 현실 해체를 가능케 하는 역동적 에너지가 솟아난다.
황지우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해체 정신 또한 다른 해체 시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그러진 현실 앞에서 맛보는 압도적인 절망과 좌절에서 비롯된 현실 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황지우의 시는, 비시적 요소들―이를테면 신문 기사, 일기 예보, 심인 광고, 만화, 도표, 예비군 통지서, 벽보―의 “방법적 인용”, 활자 조작, 그리고 현저한 비어와 속어의 범람, 산문적 진술 체계 등으로 서정시에 길들여져 있던 독자들의 의식에 경악과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기존 언어 양식에 대한 해체와 일탈은 그것을 지배 · 관리 · 조작하는 기존 현실 체제에 대한 강력한 부정을 머금고 있다.
황지우의 시적 자아가 “여보, 우리 꺼지자. 남미로, 남극으로, 우리의 대척지(對蹠地)로. 어디든!”이라고 외칠 때 그 외침 속에 들어 있는 전언은, 의미 있는 미래 전망이 차단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혐오와 부정이다. 그 혐오와 부정은, “아 그 무엇, 그 무엇, 더 말 못 하겠다, 더 하늘 못 보겠다, 더 땅 못 딛겠다, 꽃이 안 피었으면!”(「천사들의 계절」)처럼, 눈앞의 현실을 훌쩍 벗어나 어디로 사라져버리거나, 지금―여기가 아닌 그 어디로 가자는 식의 ‘병든 낭만주의’를 낳는다. 이런 것에서 우리는 현실 부정, 현실 포기, 현실 도피를 넘어서는 진정한 현실 변혁에 대한 열망, 유토피아적 전망에 대한 강렬한 희구를 읽는다. 황지우의 해체시는 세계―안에서 세계―밖을 꿈꾸는 해체시다. 그의 시는 세계―밖의 꿈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안을 구성하는 온갖 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 <글/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하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EBS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KBS 1TV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 장석주 | 시공사>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어난 각종 사건과 문단사, 주요 작품과 작가 이야기를 (사진과 곁들여) 읽기 쉽게 풀어냈다.
<재편집: 오솔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