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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로마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함 (1)
2021. 9. 10. 이현래 목사
오늘은 로마서 12장의 교회생활에 관한 문제이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문제, 세우는 문제이다.
누구나 다 집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는 말 때문에 하나님은 집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집이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데 왜 하나님의 집이 필요한가? 사람 때문에 필요하다. 만일 어느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그 우주 공간에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그래서 집이 필요하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막을 짓게 했겠는가?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어서이겠는가?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시니까 계실 곳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인간을 위해서 성막이 필요하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돌아왔을 때 엘벧엘이라고 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고, 엘벧엘은 집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우주공간에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집에 거하는 분을 만났다는 말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꾼 다음에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여기에 있어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무소부재하시는 것은 철학적인 얘기고 막연한 얘기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셨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느 공간에 제한된 분은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제한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성막 안이 캄캄한데 궤짝 안에 계시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람 때문이다. 어디 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꼭 알 필요가 있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경험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다 안다. 주일학교 학생도 다 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내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 만난 자리가 집이다.
아담은 위치를 버리고 숨어있는 존재이다. 원래 자기 집이 있는데, 그것을 떠났으니까 이제 집이 없다. 집이 없으니까 일생동안 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만든 모든 것은 집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 거처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누구라고 내세울 것인가? 이것을 만들고 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집이다. 나는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든다. 그것이 지위도 되고 지식도 되고 종교도 되고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위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위치를 만들고 있다. 이것이 피곤한 일이다.
불가에서는 생로병사가 어떠니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위치가 없는 것이 문제다. 아주 차원이 다르다. 불교는 인생이 살아가는데 불편한 것, 고통스러운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나온 것이다.
성경 말씀은 그 말이 아니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려고 있는 말이므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숨겨져 있는 분이다. 숨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형상이 없으니까 숨겨져 있는 분이다. 아무리 내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더라도 내 몸이 없으면 어쩔 수없이 숨겨져 있다. 남이 모른다.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갑자기 괴물이 된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이 괴물이 되었다. 아무리 자기를 표현하려고 해도 말도 안 된다. 가족이 와서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기도 자기를 표현할 수 없는 이 답답한 사정을 <변신>이라는 소설에 표현한 유명한 작품이다.
자기 앞에서 처음에는 울고불고 하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의논하는 것이다. 자기가 다 듣고 있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구고,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안 된다. 꿈에서 달리고 싶은데 달려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님도 숨겨져 있는 것이 굉장히 답답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향해서 그렇다. 사람을 만나려면 아주 답답하다. 그래서 형상을 만들었다. 만물을 창조한 것은 모두 그분 형상의 일부다. 그것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계속 또 만들고 또 만들고 개선해서 만든 것이 마지막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잃어버렸다. 도망가 버렸다.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돼버렸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 자신의 형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자신의 형상을 찾고 있다. 아담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기가 숨을 곳을 만들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다.
인간의 모든 문제와 고통은 전부 숨을 곳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형상을 찾고 있는 것이 하나님 구원의 섭리다. 이 섭리 때문에 우리는 부름 받아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4)가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고통해서 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요청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요청과는 관계가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문제였는데, 그 안에서 그 하나님의 어떠함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된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니까 우리 사정이 모두 달라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라졌다. 해방이 되니까 또 모든 사정이 다 달라졌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사정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감옥에 잡혀가야 될 사람들이 잡혀가지 않았고, 잡혀가지 않을 사람이 잡혀갔다. 별일이 다 생겼다.
하나님의 섭리가 중요하다. 섭리는 무엇인가? 결국 그 섭리를 아는 것이 내 인생을 아는 것이 된다. 인생을 찾으려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 찾아보아야 아무것도 없는데 찾는다고 애를 쓴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왔길래 말도 통하지 않고, 자기를 까뒤집어 보면 뭐가 있느냐 똥창밖에 더 있느냐고 했더니 두 말 하지 않았다. 자기도 툭 털어놓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부터는 신성한 몸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권고하고 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그때 당시 상활에 따라서 했던 말이니까 근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초대교회처럼 머리에 수건을 꼭 써야 된다고 한다. 지금 안*홍 계통 사람들은 유월절을 영원히 지키라고 했는데, 왜 지키지 않느냐고 한다. 유월절을 왜 지키지 않느냐가 선교방법이다. 주일을 언제 지키라고 했느냐? 주일은 지키면서 왜 유월절은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잘못 들으면 그렇구나, 우리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들을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허망한 일인데 그렇게 사람을 유혹한다.
로마서 12장 이후의 말씀은 구절구절 문자대로 알 일이 아니다. 이 말은 상황에 따라서 한 말이니까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해 내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누구를 향해서 하는 것인가? 구속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사람들이다. 이 사람이라야 집이 되지 이 사람이 아니면 집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쫓아내었다. 왜? 같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생명나무 열매(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그래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이라야 건축 재료가 되지 그냥 사람 모아놓았다고 하나님 집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역사 안에 있는 교회의 중대한 문제가 있다. 사람만 모이면 교회인가? 아니다. 어떤 교리를 신봉하면 교회인가? 그것도 아니다. 어떤 제도 하에 있으면 교회인가? 그것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구속된 사람들, 원위치로 돌아간 사람들, 이 사람들이 비로소 교회 건축이 된다. 교회 안에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순서가 있겠지만 부름 받았으니까 될 것이다. 법으로 말하면 목사가 꼭 있어야 당회가 되고, 목사와 장로 집사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법도 있다. 목사와 장로가 없으면 무슨 교회라고 하고, 목사가 없으면 무슨 교회라고 하지 않는 것이 장로교 법에 있다. 그렇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 제도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아무나 교회를 하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무교회자들을 만나면 한방에 박살난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그런 것이 없다. 그렇다고 교회가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것은 그냥 편의상 그렇게 해놓은 것이니까 꼭 본받아야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는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로 구속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다. 물건이 있다고 모두 집을 건축할 수 없다. 벽돌, 철근, 나무 등의 건축에 필요한 재료가 건축에 필요하다. 건축 재료상에 있는데, 그곳에 가면 건축에 가는 모든 물품들을 팔고 있다. 다른 것을 만들려고 하면 또 다른 재료가 필요하다.
이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치를 회복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의인들이다. 위치가 회복되면 의인이다. 의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다는 뜻이다.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말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들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이 없으면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말이 되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으로 돌아왔으면 의인이다. 의로운 사람이다.
이것 때문에 굉장히 헷갈려한다.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뭣 하느냐? 그 다음에 생활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야고보서가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믿는다고만 하면 되는가?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곳에는 행위 이전에 의롭다고 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무슨 행함이 있어서 의롭다 했는가? 행함이 있기 전에 의롭다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냥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의롭다 한다면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받고 난 후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렇다면 말짱 헛일이다. 이 때문에도 성화파가 나오게 되었다.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성결해져야 된다. 거룩해져야 된다. 이 문제가 몇 백 년 후에 그런 사람들이 뒤따라 나왔다.
요한웨슬레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거듭남의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된다. 웨슬레는 뜨거운 체험을 했다고 한다. 감리교는 요한웨슬레가 회심했던, 뜨거워졌던 경험을 기념하는 기념일이 있고, 그것을 강조한다. 성결교도 중생성결, 신유복음, 사중교리가 있다.
의롭다고 여겨주면 된다는 생각만 가지면 안 된다. 왜 의롭다고 하는지의 원인이 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그냥 의롭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다. 이것이 전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고 한다. 무조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를 빼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았다가 된다. 그러면 그 안에서 많은 문제가 생긴다. 여러 분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뭐가 달라졌는가? 법적인 용어이고 언어이다. 법적인 방식을 말한 것뿐이지 실제적인 말이 못 된다.
위치를 회복한 사람은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이 당연하다. 의로워졌는데, 의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왜 그 모양이냐? 이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할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보라.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겠는가? 아니다. 세상에서 불의하다는 사람을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하시겠는가? 아니다.
의인은 위치가 회복된 사람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쉽게 예를 들면 의인은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된다.
무엇이 의로운 것인가? 조선사람 입장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사람이지만 일본사람 입장에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오히려 그때 총 맞고 죽은 이토히로부미가 일본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다. 지금도 화폐에 그려져 있다. 아주 유명한 총리였다.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의롭다고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치가 회복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라는 말이다. 다른 데서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할 수가 없다. 왜 그것 밖에 안 되냐 되냐 할 수가 없다. 우리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으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모르는데 무조건 여겨준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안다. 자기 위치가 옛날에 비해서 바꾸어졌다. 행동이 바꾸어지기 전에 위치가 바꾸어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이 지금으로서는 교회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불의한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아담이 왜 동산에 있지 못했는가? 불의하기 때문이다.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동산에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쫓아내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 아담이 도둑질을 했는가? 살인을 했는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다만 사람의 위치를 떠나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데 속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과는 같이 있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선할 수도 있고, 정직할 수도 있고, 옳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는 같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그 사람의 선이냐 악이냐 보다 위치가 더 중요하다.
회사에 가도 그 사람이 일을 잘하냐 못하냐 보다 먼저 그 사람의 위치가 중요하다. 위치가 없으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같이 일하지 못한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회사에서는 서울대 출신을 잘 받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화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너무 잘나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지를 못한다고 한다. 같이 일을 해야 하는데 협업이 되지 않으니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구소 같은 곳은 괜찮지만 같이 협업을 하는 곳에서는 서로가 불편하다고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잘하고 못하고는 우리 문제다. 하나님에게는 위치가 있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위치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같이 살 수가 없다. 동거가 안 되니까 함께 살 수가 없다. 선한 사람이라고 같이 살고, 악한 사람이라고 못 사는 것이 아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잘 산다. 선한 사람이 거기서 살기 힘들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위치가 회복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다. 하나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세상에 나가서 나는 의인이라고 할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한다고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인가? 아버지 앞에서는 자기 아들이 제일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그렇지 않다. 같은 문제다.
하나님 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이다.
요한복음 14장1절 이하의 말이 그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고 하니까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라고 묻는다.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하니까 답이 안 되므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고 했더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셨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 집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물으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오해가 된다. 예수는 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 집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한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 집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말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이 말은 우리 집은 그리스도다.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이 말은 우리 생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다. 집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려면 그리스도를 찾아야지 다른 데 가서 찾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집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전통이나 의식이나 교리를 만들었다. 이것을 해서 교회를 보호하려고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만들었다. 그것들로 영역을 지키고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으로서의 교회가 이것으로 지켜지겠는가? 세상에서 만든 교회는 이것으로 지켜지겠지만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가 지켜지겠는가? 전혀 번지수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집은 그냥 물질적인 건축이 아니다. 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집이다. 이 몸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니까 유기적인 생명체다. 어떤 사람의 집단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유기적인 생명체다. 이런 유기적인 생명체가 전통이나 의식이나 교리로 보존이 되겠는가?
교리도 무섭지만 의식도 참 무서운 것이다. 전통도 참 무섭다. 내가 경험을 했다. 천주교는 전통이 참 중요하다. 천주교인과 말해보면 아무것도 모르는데, 천주교라는 전통이 그 사람들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다. 다른 데를 못 간다. 교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리에 익숙해지게 되면 교리 때문에 다른 곳에 못 간다.
의식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의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장모님이 4대째 기독교인이다. 대구에 와서 사위 교회가 있는데 다른 교회를 갈 수가 없다. 우리 교회가 말씀은 좋은데 예배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을 동네 교회에 가서 1부 예배를 보고, 마지못해 우리 교회에 2부 예배를 오셨다. 의식이라는 것도 참 중요하다.
어떤 자매가 그리스도 교회라는 곳에서 왔는데, 우리 교회 집사와 결혼했다. 그 자매도 그리스도 교회의 4대째 되는 집안이다. 결혼할 때 우리 교회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신랑이니까 1년만 우리 교회에 와보고 그래도 아니면 안 나와도 된다는 정치적인 협상을 했다. 자매가 아무 문제없이 잘 나왔다. 우리 교회 또래 자매들과도 잘 지냈다.
한 1년 그렇게 지냈으니까 우리는 당연히 우리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하루는 그 집사가 혼자 오길래 왜 혼자 오느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약속한 날이라는 것이다. 1년을 아무 내색 없이 다니다가 약속한 날짜가 오니까 가버렸다. 거기는 천주교처럼 초대교회를 따른다고 주일에 성찬 떡을 먹는다. 성찬 떡을 먹지 않으면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1년 만에 가버렸다.
그것을 보면서 참 무서운 것이구나. 이런 일이 보통일이 아니구나. 북한사람들이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군인들에게 모두 유니폼을 입힌다. 군인정신, 같은 부대라는 일체감을 가지기 위해서 입히는 것인데 전투할 때는 그것을 보고 총을 쏜다. 우리가 입는 옷과 상대방이 입는 옷이 다르니까 생사가 걸린 것이다.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이 자기를 지키려고 만든 것인데, 참 무서운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무들이다. 아담을 이런 나무들로 집을 짓고 숨어있다. 이런 것 속에 숨어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아담은 있을 곳이 없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하니까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한다. 나무 뒤에 숨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자신을 가리려고 한다.
예수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십자가 위에 벗겨진 채로 매달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무 위에 못 박혔다. 원래는 기둥에 매달은 것인데, 로마에 와서 형틀이 십자가로 바꾸어졌기 때문에 십자가로 한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그것을 꼬투리를 잡고 들어온다. 십자가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 나무라고 했지 십자가가 어디 있느냐고 한다. 자꾸 들으면 내가 성경을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나무기둥이냐 십자가냐에 따라서 당신들이 가르치는 다 틀렸다는 것이다. 팔을 벌렸으니까 수평적으로는 어떻고 수직적으로는 어떻고 이런 것을 갖고는 통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증인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정말 갑갑하다. 일부러 교회 사택으로 찾아다닌다. 처음에 두 사람이 찾아왔다. 일부러 초신자를 데리고 교회 사택으로 찾아다닌다. 초신자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다. 목사와 토론을 하면 목사가 제대로 답을 못하거나 소리 지르면서 나가라고 쫓아버린다. 그것을 보면 초신자는 확신이 생긴다. 저것이 틀렸구나. 여호와의 증인이 맞구나.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데리고 다닌다.
그 사람들의 주 무기가 십자가와 삼위일체를 놓고 공격하러 다닌다. 여기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이 되지 않으니까 자기들이 맞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잘 들어왔다가 된다. 나는 처음에 왜 하필이면 목사관을 찾아다니는지를 몰랐다.
아담은 숨기 위해서 나무로 집을 짓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나무 위에 매달렸다.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어느 것도 생명의 집이 될 수 없다. 자기를 보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될 수는 없다. 내가 거기서 산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집은 생명으로 건축되지, 생명의 집이 어떻게 사람이 만든 것으로 건축이 되겠는가? 사람이 다 할 수 있지만 생명을 만들 수는 없다. 사탄도 마찬가지다. 다 할 수 있는데 생명은 만들 수가 없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이 나와서 욥이 저렇게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체 잘해주기 때문이라고 송사를 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2:6)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고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결국 마지막에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취하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는 말이 욥기에 나오는 말이다.
생명은 천사가 아무리 모든 것을 다 방해할지라도 생명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가만히 보니까 이 문명이 인간이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간다. 지금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하고, 아바타가 대신하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18세기에 인간소외 문제가 나왔는데,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말하는 사람도 없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다. 그 외 사람은 모두 자기를 대신할 것을 만든다. 사람은 없어지고 사람이 만든 것만 남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없어지지 않을 것은 생명이다. 한 가지 남는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끝이 없을 것이다. 심고 거두는 일이 끝이 없을 것이다.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끝이 없는 일이다.
남자가 결혼할 생각이 없어져 버리고, 여자가 결혼할 생각이 없어져 버리면, 지구에는 사람이 다 없어져 버린다. 원자폭탄이 아니고 코로나가 아니고 간단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지 않으면 다 없어져 버린다. 그것은 막을 수가 없다. 이 코로나 시대에도 그렇게 단속을 해도 젊은 사람들은 돌아다니느라고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뭣 하러 돌아다니겠는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려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늙은 사람들은 부럽기도 하지만 못 말린다. 위에서 아무리 방역을 해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니까 안 된다. 이것은 못 말린다. 짐승들도 교배할 때 보면 결사적이다.
사탄이 세상을 조정해서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내더라도 이것만 할 수 없다. 다행이다.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 당연하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 살아남은 것은 바퀴벌레뿐이라고 한다. 인간이 멸종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문화만으로는 멸종되지 않을 것이다. 폭탄이 터지면 모를 일이다.
이런 생명체 안에 다른 것은 들어오면 안 된다. 어떤 것은 생명의 집은 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교리라도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아무리 좋은 의식이라도 생명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집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와 아버지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님 기도 내용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이것이 몸이다.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다. 요한복음 기도하는 곳에 가면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한 것을 요한이 엿듣고 써 놓았겠는가? 요한의 세계에서 체험된 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는 이것이 몸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현실적인 몸이고 유기적인 생명체이다. 다른 어떤 것도 몸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해가 되는 것이다.
생명 안에는 생명 아닌 것이 들어오면 병이 된다. 유기물이 들어오지 않고 무기물이 들어오면, 우리 몸속의 무기물은 조금 있는데 아주 미미한 정도인데 그것 외에는 들어오면 다 병이 된다. 생명에 무엇을 첨가해도 생명에 도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뱀은 자기가 살기 위해 독을 만든다. 자신이 살기 위한 그 이빨로 아담에게 독을 주입한 것이다. 뱀의 이빨은 딱딱한 것이 아니고 부들부들한데 꼽으면 독이 들어간다.
로마서 12장 이하에 있는 모든 말은 몸 안에 이런 독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이다. 몸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다 이 독이 들어와서 발생한다. 뱀이 주입한 독이 들어와서 그렇다. 생명체 안에는 독이 들어오면 죽는데, 교회 안에 이런 독이 들어오면 죽는다는 것이다. 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생명 아닌 것이 독이다. 생명에는 생명 아닌 것이 독이다.
교회생활은 독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이다. 놋 뱀의 생활 놋 뱀을 쳐다보고 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고 한다. 너희 몸은 어떤 것인가? 다시 산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다시 산 사람을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제사가 되지 못한다. 아무것도 제사가 될 것은 없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제사가 되겠는가? 예배가 되겠는가? 새 생명! 새 생명은 무엇인가? 유기적인 생명을 말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는 이 생명, 이 생명의 영의 삶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예배가 된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이다. 이치에 맞는 딱 적합한 예배라는 뜻이다.
이것이 빠지고 나니까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되느냐고 예배 연구를 한다. 딱하다. 예배 연구를 어떻게 하겠는가? 제사 드릴 제물은 없는데, 제사 방법만 바꿔서 이 사람은 이렇게 드리고, 저 사람은 저렇게 드린다. 우리 조상들이 드린 제사도 집안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자기 집안에서 그 전통을 고집한다.
나도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우리 교회 한 형제의 집안에서는 제물을 드릴 때, 생선을 요리하지 않고 그냥 드린다고 한다. 생선 그대로 드리는데 이해가 안 되었다. 아마 조상 때부터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하니까 조상 때부터 그렇다고 한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앞에 사람이 그렇게 했으니 그렇게 안 하면 안 될 것처럼 그렇게 한다. 생선을 찌지도 않고 굽지도 않고 그냥 생선 그대로 놓는다.
예배가 되려면 합리적이어야 된다. 하나님이 받으실 것으로 드려야 이것이 합리적인 예배가 되지, 내 생각으로 드려서 합리적인 예배가 되겠는가?
로마서 12장을 보면 그런 항목들이 나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한다. 12장 이하에는 전부 다 이런 말이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는 말들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 세대는 무슨 세대인가? 아담의 세대, 가인의 세대, 네피림의 세대, 바벨로 가는 세대, 이것이 세대이다. 시대와 세대는 다르다. 시대는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이런 것이고, 세대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담의 세대는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해서 선악과를 먹은 그 세대이다. 결국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세대다. 왜 그것을 먹었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하는 이 세대이다. 이런 세대이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이런 세대이다. 짐작이 다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세대이다. 나한테도 있고 너한테도 있고 다 있을 수 있는 세대이다. 이 세대를 본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인의 세대는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고 해서 동생을 죽인 세대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세대이다. 큰 종교는 작은 종교를 핍박한다. 대부분 다 그렇다. 가인의 세대는 결국 동생을 죽이는 것이 약한 자를 죽이는 것이 된다.
아벨은 죽어서 피가 땅에 흘려 졌는데, 계시록에는 제단 밑에서 지금까지 신원하고 있다고 한다. 억울하다 이것이다. 왜 내가 이렇게 당해야 되는가? 세상이 지금 그렇다. 약자는 항상 왜 우리는 당해야 되느냐 하고, 강한 자는 왜 너희가 우리를 못살게 구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가인의 세대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세대이다.
네피림의 세대는 장부요 용사요 유명한 자였더라.(창6:4참고) 다 사람 속에 이것이 있다. 다 장부가 되고 싶고, 용사가 되고 싶고, 유명한 자가 되고 싶고, 다 있다. 이런 세대다. 종교도 유명해지려고 하면 곧 네피림 세대이다. 뭐든지 마찬가지이다. 세대는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바벨론으로 가는 세대는 인간문화로 성을 쌓고, 인간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세대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라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를 받아서 세대를 이끌어 갈 사람들이다. 사람에 의해서 세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사람이 변화되면 세대도 변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세대, 이삭의 세대라고 하면 다른 세대가 되는 것이다. 분위기가 확 바꿔지고 내용이 확 바꿔진다.
사람이 자기 위치를 떠나서 스스로 만들어낸 그 세대들을 본받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위치를 떠나서 만든 것을 본받으면 안 된다. 그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데,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필요치 않은 것일 수도 있는데, 하여간 사람이 자기 위치를 떠나서 만든 것은 본받지 말라는 말이다.
회복된 사람은 이런 세대를 본받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된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런 세대를 본받으면 안 된다. 구속을 받아서도 이런 것을 기웃거리면 같이 돌아가니까 안 된다는 말이다.
귀순병은 옛날 군복을 그냥 입고 있으면 안 된다.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새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건축에 참여해야 한다. 자기 방어를 위한 건축에서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건축으로 건축이 바꿔져야 한다. 결국 일이 바꿔져야 하는 것이다.
회복된 사람은 이런 세대를 따라가면 안 되고, 이런 세대에 비위를 맞추려고 해도 안 되고, 이런 세대와 같이 살려고 안 되고, 이런 세대 속에서 이런 세대를 오히려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있으나 마나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기독교는 있으나 마나다.
위치를 떠나서 스스로 만들어 낸 세대를 위해 살려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헛일이다.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서 그렇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중에 좋은 것은 본받고, 좋지 않은 것은 본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끌려 들어간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사람은 이런데 가담이 안 된다. 가담이 될 만해야 가담이 되는 것이지 가담이 안 된다. 괜히 기웃거려 봐야 천대만 받고 만다.
내가 늘 하는 말이 써준다는데 가지 않고, 왜 써주지 않는다는데 가서 사정하느냐고 한다. 이력서를 써서 가려면 나를 쓸 만한 데 가지고 가야지 나를 안 쓸 데 가서 내면 써주겠는가? 내가 세상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말이 그 말인데, 우리 분수대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것에 구애받을 일이 아니니까 회복된 사람은 이런 세대를 본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귀순병은 당연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총알에 죽는다. 인민군 복장 그대로 있다가는 누구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 6.25때 백마고지 같은데서 전투하던 사람들이 와서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한밤중에 육박전이 벌어지면 무섭다고 한다. 총도 소용이 없고, 칼밖에 소용이 없는데, 깜깜한데 누구인지 피아가 구별이 되겠는가? 머리를 만져보고 머리털 없는 놈은 인민군이고, 머리털이 있는 놈은 아군이라고 한다. 그래서 머리털 없는 놈은 찌르고, 머리털 있는 놈은 아군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아슬아슬했다.
낮에는 옷이 바꿔져야지 그 옷 그대로 있다가는 귀순을 해도 누가 쏠 지 모른다. 새 옷을 갈아입고 또 마음도 새롭게 해야 한다. 인민군에 있던 마음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6.25때 참 묘한 사람도 다 있다. 양쪽에 다 포로 되었던 사람이 있다. 포로 되어서 어떻게 어떻게 풀려나왔는데, 또 이쪽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다. 우리 교회도 그런 분이 있는데, 어떻게 살아났다.
새 옷을 입고 새 마음으로 새로운 삶에 임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생활이다. 하나님의 집은 유기적 생명의 새로운 건축, 생명의 새로운 건축이다. 교리적인 건축도 아니고, 전통의 건축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구속 받은 생명의 유기체적인 유기적 생명으로 건축된 것이다. 떠날 수 없는 관계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고,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다.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가? 많이 있을 것이다. 이것도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헷갈리게 하는 문제이다. 뭐가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인지를 모르니까 그냥 자기 생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사람이 바꿔지지 않으면 자기 취향이 있으니까 아무리 뜻을 구별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주부가 먹는 것을 좋아하면 식구들이 다 잘 먹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니까 남도 좋아할 줄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준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저 소고기를 사다가 무엇을 해준다. 그런데 소고기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생선만 사준다. 생선도 싫어하는 사람은 채소만 해준다. 노*경 형제도 어머니가 비린내 나는 것을 안 드시니까 어려서 그저 채소만 먹였을 것이다. 그래서 키가 저렇게 안 컸다. 잘 먹었더라면 키가 컸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또 간식을 절대로 안 하시는 분이다. 밥 세끼 먹으면 그만이시기 때문에 나는 어려서 간식을 해 본 적이 없다. 여자가 잘 먹어야 집안 식구들이 잘 먹는다. 그리고 주부가 건강해야 집안 식구들이 다 건강하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자기 먹고 싶을 때 남들도 다 먹고 싶은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 배가 고프지 않으면 남이 배고픈 줄 모른다.
옛날에 어떤 자매를 보면 너무 잘 먹는다. 먹는데 보면 겁날 정도로 먹는다. 뷔페식당에 가면 혼자 먹기 그러니까 잔뜩 갖다 놓고 옆 사람에게 잔뜩 주면서 먹으라고 한다. 자기가 잘 먹으니까 남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을 보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남에게 주는구나. 아무리 가정을 위해서 어떻게 한다고 노력을 해도 그것이 안 된다. 자기가 먹고 싶어야 된다.
부인들이 입맛이 좋아서 아무것이나 다 잘 먹는 집은 반찬이 시원찮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무것이나 잘 먹기 때문이다. 입이 까다로운 사람의 집에 가면 음식이 먹을 것이 많다. 왜? 자기가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남이 좋아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남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남이 죽는 것이 되면 곤란하다. 남을 생각할 때도 내 입맛대로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한테도 그런데 하물며 어쩌겠는가? 목사가 무엇을 좋아하느냐가 문제다. 그리스도만 좋아하면 맨날 내놓은 것이 그리스도만 내놓으니까 그리스도밖에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다른 것을 좋아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을 먹어야 한다. 자기 혼자 안 먹으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교인들이 목사 닮는다고 한다.
내가 참 좋아할 것을 좋아하면 서로가 복이 된다. 나도 좋고, 신자도 좋고, 다 좋다. 내가 시원찮은 음식을 좋아하면 신자들도 다 배고픈 것이다. 내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있는 것을 먹고 살아야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나도 좋고 남도 좋다. 일부러 내가 남을 좋게 하려고 해서 하기는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주게 되기 때문에 사람이 별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도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내가 대표적으로 몇 가지 골라 놓았다.
첫째,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꼭 우리가 지켜야 한다.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무엇인가? 흙인데 산 혼이다. 이것을 꼭 지켜야 한다. 사람 속에 영이 있다느니 이렇게 하면 다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 영이 있고, 신성이 있고, 이것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필요치 않다.
나는 그것을 알고 나서 너무 편해졌다. 나도 신성이 좀 있으면 좋겠다. 병이라도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남이 안보는 것 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때문에 젊은 날 굉장히 시달렸다.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다. 근래 얘기를 들으니까 산플라티나 치아를 금 치아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한번 해보고 싶다. 나는 팔자에 안 되니까 못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다 있다니 신기하다. 지금도 그런데 젊은 날은 어떠했겠는가.
내가 목회를 한다고 나오니 허허벌판이었다. 옆 교회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인데 우리는 냉랭하게 있으니 뭐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흥회고 기도원이고 쫓아다녔다. 팔자에 없는 일은 안 되었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못했는데 평생 그것이 나에게 부러움이 될 뻔했다. 만일 하나님이 진짜 사람만 원한다는 것을 몰랐으면, 순수하게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몰랐으면, 평생 짐이 될 뻔 했다. 내가 하지는 못 하고, 남이 하는 것은 보이니까 얼마나 부러운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형상이다. 이것을 꼭 붙잡아야 된다. 교리가 어떻든 신학이 어떻든 상관이 없다. 나는 흙이고, 나는 산 혼이고, 나는 형상이다. 그 이상 절대로 될 수 없고, 그 이하도 될 수 없다. 이것을 꼭 붙잡아야 될 것 같다.
이것을 분별해야지 이것을 분별 못하면 젊은 날 나 같이 된다. 우리 신학교는 그것을 배운 적이 없는 신학교이다.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신학교인데, 목회하러 나가니까 당장 현장에 부딪혔다. 꿩 잡는 것이 매지 설교 잘하면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한참 몇 년간 헤맸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다. 우상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생명 없는 것이라고 한다. 모양은 있는데 생명이 없는 것을 보고 우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형상이라는 말과 우상이라는 말이 같은 말이다. 우리는 우상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안 쓰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한테 신성이 있고 어쩌고 하면 하나님이 안 써도 된다. 나도 한가락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해보니까 아무리 해도 없었다. 들여다봐도 없고, 아무리 봐도 나한테는 신성이 없다. 혹시 여러분에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없다. 혹시 있을지라도 없다고 생각해야지 있으면 큰일 난다.
첫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그런 사람을 만들어 놓고 심히 좋다고 했으니까 나도 그 사람을 심히 좋게 생각해야 된다. 왜 이렇게 모자란가? 왜 내가 벽 뒤에 있는 것을 모를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지금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는데 불쌍한 조카가 있는데 지금 죽게 되었다. 너무 안타깝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엄마를 잃고, 그리고 나한테 와서 살았다. 내가 신학교를 가면서 열 살쯤 되었을 때 친정으로 보냈다. 고생을 많이 했다. 어떻게 해서 서울로 다시 찾아와서 여기서 결혼해서 살았는데, 췌장암에 걸려서 며칠을 살 지 모르겠다. 이것을 어떻게 좀 하면 좋겠는데, 산플라티나로 금 치아를 만들 능력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할 능력을 가졌으면 죽을 사람을 못 살리겠는가. 할 수 없어 불쌍히 여겨서 기도를 했다. 너무 불쌍해서 한 번만 봐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나는 형상이니까 어쩌겠는가? 하나님이 하신 대로밖에 안 된다.
형상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많이 오해가 된다. 아주 상당히 오해가 많다. 그래서 안 된다. 예수님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우리와 상관이 없다. 특별히 안 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혀 종자가 다르다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개와 호랑이가 만나면 호랑이는 호랑이고 개는 개인데 무슨 훈련을 한다고 개가 호랑이하고 같이 살겠는가? 어떻게 그 안에 살겠는가? 내가 어떻게 그 안에 거하겠는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했는데, 어떻게 내가 그 안에 있겠는가? 신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같이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있을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안식을 얻었다. 그렇구나. 나는 형상이구나. 쓰기에 달렸구나. 하나님이 나를 쓰기에 달렸구나. 콩을 심으면 콩밭 되고, 옥수수 심으면 옥수수 밭이 되는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한테는 생명이 없구나. 이러니까 쫓아다닐 필요도 없고 말 것도 없고 산플라티나를 금이빨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내가 젊었을 때, 놀라운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얼마나 충만한지 가서 보면 알겠다. 만나보니 성령이 얼마나 충만한지 알겠다. 한 겨울인 데도 양말도 신지 않고 다닌다. 요즘같이 좋은 시대가 아니니까 까만 장화를 잘라서 반장화를 만들어 신고 다닌다. 그분이 한 말이 다른 것이 없다. 설탕이 왜 달아? 다니까 달지. 사흘 동안 내내 자기는 충만해서 그 말만 하는 것이다. 소금이 왜 짜? 짜니까 짜지. 왜 짜냐? 짜니까 짜다고 한다. 놀랬다.
내가 사흘 동안 모셔봤는데 그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밑에 제자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못 견디고 나온다. 기도하고 앉았으면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모르니까 선생님이 안 먹는데 제자들이 먹고 있겠는가? 못 견뎌서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충만한 사람을 보았다.
최*선 목사님이라고 여러 분 중 아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김포공항 근처에 토지가 많았는데 다 나눠주고 자기는 조그마한 공항당 교회라고 교회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교회가 되겠는가? 교회도 안 된다. 놀라운 사람이기는 한데 도저히 다른 것은 안 된다. 시간만 나면 돈만 생기면 엽서를 사 가지고 자기 아는 사람들에게 전도용으로 써서 보낸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써가지고 계속 그것만 보낸다.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90세는 넘었고 100살도 넘었다는 것 같다.
어느 할머니가 희색이 만연해서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젊었을 때 평양에 교회가 있고 자기는 시골에서 올라가는데, 80리 길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가서 예배를 보고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오는 길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는데 자기 몸에는 하나도 비가 안 맞았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놀래서 이 우중에 어떻게 왔느냐고 했는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믿겠느냐고 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노망했다고 한다는데 노망이 아니었다. 말짱하셨다. 1904년인가 평양에 무슨 대부흥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 때 어른이다. 놀라운 사람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고 있다가는 내가 안식을 못 얻겠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러니까 안식이 된다. 그런데 가면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되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겠는가? 안 된다. 일찍 안 되기를 잘했지 만일 조금이라도 됐으면 평생 거기 묶여서 사람 노릇 못하고 살 것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아들을 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는 말씀을 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 살과 피를 먹고 그와 연합하는 것이 바로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살과 피를 어디서 먹겠는가? 생사람을 잡아먹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나와 같은 그 사람을 내가 먹는 것이다. 그것밖에는 먹을 길이 없다. 내 살을 먹으라고 했는데 먹을 길이 없다. 그분의 말을 지키고 이렇게 해서는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가장 쉬운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린양의 신부를 자랑한다. 마지막에 보면 어린양의 신부를 자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린양의 신부를 자랑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하나님 속에서 쏙 빠져나온 어린양 신부라는 말이다. 그런 교회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거기를 읽어보면 우리도 흥분 되지만 그 말을 쓴 요한은 얼마나 흥분되었겠는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을까. 그것이 영 안에서 본 일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그것이 아름다운 광경이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다. 교회가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된 것이 하나님이 최고로 기뻐하시는 일이다.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되어야지 다른 것은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화려하게 만들면 예쁜 교회가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다른 것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신부로서의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어린양의 신부, 이것이 교회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구나. 뭘 잘하고 잘못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린양의 신부다.(계21:2) 하나님 품에서 나왔다는 말이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우리 교회 어떤 형제가 매일 쓰는 말이 ‘와, 오늘도 새날이다.’이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오늘도 새날이다. 이런 형제가 있다. 오늘도 새 하늘 새날이다.
날마다 새날로 느껴지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알고 보면 모든 게 다 새로워진 것이다. 전에 있던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이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다 새로워졌다. “다 이루었다.”(요19:30),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나중)이요 시작과 마침(끝)이라.”(계22:13)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는 다 이루었다는 말이 끝났다는 이 말이다. 여기서는 끝났다는 말이 아니고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나중)이요.”(계22:13)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 시작하신 하나님, 시작하신 분이 마지막이 된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반드시 처음과 나중이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처음은 있는데 나중은 없다. 끝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처음과 나중이 분명하다. 똑같다.
내가 맨 처음에 알아진 하나님은 나는 모르지만 나는 피조물이구나, 그렇게 알았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구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냐? 하나님을 모른다. 단지 나는 피조물이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때가 내가 처음 시작한 때 같다. 지금도 똑같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피조물이다. 나는 형상이다. 신성이 있느니 없느니 이것은 나와 전혀 관계없는 문제다. 그때 만일 그것이 보였으면 지금도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모른다. 내일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가라앉아 버리고 편안해졌다. 지금 똑같다. 조금도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다 이루었다.”(요19:30)
“나는 처음과 마지막(나중)이요.”(계22:13),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고 말씀했다. 목마르다는 것은 지금 부족하다는 말이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했다. 읽어보면 너무 많아서 다 쓸 수가 없다.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이다. 우리가 이 잔치에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분별하는 것이다.(롬12:2)
이 세 가지만 확실히 지켜도 하나님과 함께 그 동산의 영역에서 거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만 알아도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된다.
형상으로서의 인간, 아들로서의 인간, 그것은 연합체이다. 형상하면 생명이 없는 것 같은데, 아들하면 생명이 있다. 그 아들을 먹고 연합하는 것이다. 아들과의 연합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구나. 그 아들과 어디서 연합하더라도 연합을 해야 하는데, 연합을 할 자리가 십자가밖에 없다. 그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어디서 하나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내 아들이라고 하는 그 아들과 내가 연합을 해야 되는데, 할 데가 아무 데도 없다. 그 자리밖에는 없다.
마지막으로는 어린양의 신부, 그 교회 어린양의 신부가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신부다. 그 자랑스러운 신부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아니면 우리가 바로 그 신부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자랑하고 싶겠는가! 최종적으로 그것이다. 우리 인생이 최종적으로 살면 뭔가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자랑할 것이 있으면 사람이 행복하고, 자랑할 것이 없으면 불행하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다. 다른 것도 많기는 많은데 좀 못해도 괜찮다. 그런데 이것은 꼭 있어야 될 일이다.
이 세 가지는 꼭 있어야 될 것이고, 없으면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이것 없이 다른 것은 아무리 많이 해봐도 소용이 없다. 다른 것은 많이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수없이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기본이다. 근본이고 기본이다.
나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 좋았다. 혼자 좋아하다가 오늘은 여러분과 같이 좋아하는 것이다. 나 혼자 좋아하는 것보다 같이 좋아하면 훨씬 좋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