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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철종 12년) 정면수(鄭勉洙) 영문록(榮問錄)
2025.6.26. 여천 정철중
□ 영문록을 살펴보고
영문록이란 문과 급제자와 축하객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집안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이 영문록은 「고문서집성광주정씨편(古文書集成光州鄭氏篇), 200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수록되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보관 중이다. 영문록으로서 광주정씨에 알려진 유일본이다.
정면수(鄭勉洙, 1821~1896) 공은 1821년 생으로 41세인 1861년에 식년문과 병과 25위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봉상시정,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형조·이조판서를 지낸 9세 화곡(禾谷) 정사호(鄭賜湖, 1553~1654) 공의 9대손이고, 후대에 여경(餘慶)은 이어졌다. 부친은 석민(錫民, 1798~1821), 생부는 석조(錫祚, 1793~1869)이고, 장형(長兄) 인수(麟洙, 1817~1902)는 수증(壽贈) 호조판서이다. 조부는 희중(喜重, 1767~1812), 증조부는 문과 병조참의 관휘(觀輝, 1744~1803), 고조부는 문과 사간원헌납 문주(文柱, 1717~1772), 5대 조부는 생원 봉사(奉事) 후기(垕基, 1674~1702) 공이다.
영문록과 대비되는 기록물로는 조문록(弔問錄)과 제문(祭文) 등이 있다. 이들 기록은 친인척과 문중의 위상(位相)이 반영되는 것이지만, 교우 인사와 집안의 결속과 유대감을 살펴볼 수 있다. 형제간 조세(早世) 시, 혈연가족의 양육 사례와 구난 시 상부상조의 전통 또한 자주 엿볼 수 있다.
영문록의 명단과 그들의 후일 이력을 일별하면, 급제 순위가 상위권(갑과, 을과)일수록 고위직이나 고관으로 승진할 기회가 커졌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자질과 문벌의 영향력이 미치는 점은 당연하다.
말미에 정면수공의 이력을 승정원일기, 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정리해 봤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평가기록은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고관과 임금도 때로는 두렵고 골칫거리였던 것은 언관(言官)인 사간원, 사헌부 관리들의 공론과 탄핵이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였겠지만, 정면수 공이 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을 제소한 화성비석사건(華城碑石事件)은 천파만파 파문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에 연관된 언관들이 죄받아 유배 등의 처분을 받았다. 특히 전 승지 이승택(李承澤) 등의 용기 있는 탄핵은 통렬하였으나, 대관은 탄핵의 대상이 아니라는 수구(守舊)적 태도로 일관한 고종(高宗) 임금의 편향으로 먼 섬인 원악도(遠惡島)로 귀양보내거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도 하였는데 후일 대부분 풀려나게 되었다.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 대역죄(大逆罪)나 천리(天理)를 거슬린 반인륜죄(反人倫罪)가 아닌 불의(不義)한 고관에 대한 탄핵으로서, 언관이면 당연한 임무이고 공정하고 의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가 방대한 기록물이면서 좋은 사료인 것은, 한순간 죄인 취급 당하고 임금으로부터 외면받은 사건이었으나, 의로운 제소였기에 이들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것이다. 힘없는 하급 관리에 대하여 탄핵과 처벌이 지엄하고, 고관과 문벌과 임금의 불공정에는 관대하거나 무시하는 형태는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일여(一如)한 상황이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공은 1875년 유배 4년 후 방면되어 다시 복귀되었고 1884년 봉상시정(奉常寺正)을 거쳐 1994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으나 2년 후 76세로 졸하였다.
공은 집안일에도 관심을 두어, 당시 존재하였던 1592년 전랑공(殿郞公) 정대휴(鄭大休) 공의 임진왜란 출전 시 유서를 필사하여 보관해 온 것이 오늘날에 계승되어 잊혀질 뻔한 충절을 빛나게 하였다.
Ⅰ. 정면수 영문록 소개
■ 영문록(榮問錄)이란
영문록(榮問錄)이란 ‘영문(榮問)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으로 과거 시험관의 명단과 급제자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뒷부분에는 축하한 영문객의 명단이 붙어있다. 급제자의 출신배경에 따라 영문객의 규모와 격에 차이가 있다.
정면수 공의 영문록에는 타 영문록에서 보이지 않는 ‘방방제구(放榜諸具)’라는 급제자의 준비물 목록을 기록하였는데, 방방증서 즉 과거급제증(백패 또는 홍패)을 받는 날 갖추어야 할 의관과 기타 소품들을 말한다. 이들 물품을 구입할 때 소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문객의 명단을 보면, 시관(試官) 이외에, 직계 및 생계(生界)의 혈족들이 많이 보이는데, 친가, 외가, 처가 및 광주정씨 일족에 이르기까지 대과 급제가 얼마나 가문의 영광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과거급제 축하 연회를 직접 방문하거나, 인편과 서간을 통하여 축하를 전하기도 하였다. 대과 급제자들은 후일 사간원, 사헌부의 청요직이나 승지, 고관 등을 거치기 때문에, 인간관계 상 무시할 수 없는 미래의 인맥인 것이다.
■ 문과방목
방목명 : 신유12년식년문과인정전명관전시방(辛酉十二年式年文科仁政殿命官殿試榜)
표제명 : 國朝榜目(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귀(奎貴) 11655
시험일 : 철종(哲宗) 12년, 1861년 04월 25일
발표일 : 1861년 04월 25일(동일자)
시험장소 :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정면수 급제기록 : 철종 12년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5위(35/56)
■ 정면수(鄭勉洙), 1821(순조 21)~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병해(丙海)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정후기(鄭垕基)의 후손이며, 고조부는 정문주(鄭文柱)이고, 증조부는 정관휘(鄭觀輝)이며, 조부는 정희중(鄭喜重)이다. 부친은 정석민(鄭錫民)이고, 모친은 강순(姜橓)의 딸이다. 생부 정석조(鄭錫祚)와 생모 이중저(李仲著)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오치현(吳致賢)의 딸이다.
1861년(철종 12)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2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1874년(고종 11)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사직을 청원하자,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서 대대로 은혜 입은 세신(世臣)으로서 사직을 청원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라는 내용으로 탄핵 하였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대신(大臣)을 모함한다는 질책을 받고 유배 처분이 내려졌다. 이후에도 여러 신하들로부터 그의 상소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유배지가 원악도(遠惡島)로 옮겨지는 등 처벌이 가중되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 세계도
Ⅱ 영문록(營門錄)
辛酉 四月 十四日 신유 사월 십사일
辛酉 四月 二十五日 式年文科 殿試榜 신유 사월 이십오일 식년문과 전시방
■ 급제자 명단
■ 방방제구(放榜諸具) : 급제자 준비 물품
■ 영문객(榮問客)
주1) 팽(伻) : 인편을 보내 축하함
주2) 석사(碩士) : 벼슬이 없는 선비를 높여 이르던 말
주3) 서문(書問) : 편지를 보내 축하함
주4) 친형제의 장서(長序)는 정인수, 정면수(出), 정익수, 정겸수 순이다.
주5) 정운현(鄭雲鉉, 1796~?) : 응교공파, 부친은 증좌승지 전(㙉)이다. 1843년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1845년 수문장(守門將), 1849년 선전관을 거쳐, 1860.7 전라도병마우후(全羅兵馬虞候), 1860.12 함경도 남병우후(南兵虞候), 1862년 정삼품에 오른 후 1863년 겸사복장(兼司僕將)을 지냈다. 우후는 병마절도사의 부장(副將)이다.
주6) 정석린(鄭錫麟) : 양촌공파, 1835년 58세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친은 성균진사 재원(載遠)이다. 1837년 사헌부 지평, 1838 병조좌랑, 1839 사헌장령, 1843, 사간원헌납을 지냈으며, 1855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1857년 나이 80을 맞아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제수받고 정삼품을 가자(加資) 받았다.
주7) 이경(진사), 이정(진사), 이민(문과)은 막내 고모부 이돈(李墩, 문과)의 아우들이다. 부친은 판서 이광정(李光正)
주8) 척족(戚族) : 성(姓)이 다른 일가(一家). 즉, 외가(外家), 처가(妻家) 등
주9) 판서 김병익은 처음 서문을 보냈다가 후일 직접 축하하였다. 이중 명기
주10) 박진보민동(朴眞寶民東) : 승정원일기에서 진보현감 박민동을 확인한 결과, 이름자는 民東이 아닌 敏東이다.
주11) 백낙신(후일 병사), 백낙삼(후일 대흥중군)은 조모(祖母) 수원백씨(부 대사간, 증참판 백사한 白師謹)의 일족이다.
주12) 홍재룡(洪在龍) : 광주정씨 초간보인 을사보의 서문을 지었다. 9세 화곡(禾谷) 정사호(鄭賜湖)공의 사위가 감사(監司) 남양 홍처후(洪處厚)인데, 이 따님이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7대 조비(祖妣)가 된다고 한다.
Ⅲ. 영문록 세고(細考)
■ 급제자 주요 이력(승정원일기 등)
이상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이력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았는데, 증직(贈職), 수직(壽職) 등이나 기타 주요 이력이 빠져있음을 감안하여야 한다. 대개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상위권에 속할수록 고관 진출이 용이함을 알 수 있다. 기타 집안의 영향력과 관료 사회의 적응력과 자질이 미치는 영향도 있다.
이심재(李心宰) 돈녕도정, 병조참지
윤종선(尹宗善) 이조참판
김수현(金壽鉉) 우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좌찬성
한치규(韓緻奎) 돈녕도정, 병조참의
한응국(韓應國) 병조참판, 우승지
심상한(沈相漢) 좌부승지, 순천부사, 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 정2품
조성하(趙成夏) 직제학, 도승지, 이조참판
이면광(李冕光) 사성, 검교전한(檢校典翰)
이우회(李友會) 우통례, 동부승지
오준영(吳俊泳)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허직(許禝) 대사간
곽기락(郭基洛) 사헌장령
조영하(趙榮夏) 병조참판
정재진(鄭在晉) 교리, 부안현감
채동술(蔡東述) 우승지, 형조참의
목승석(睦承錫) 종성부사, 좌부승지
정겸식(鄭謙植) 동부승지, 안주목사
정학묵(鄭學默) 이조참의
백의행(白義行) 사헌집의, 겸춘추
김정섭(金鼎燮) 사헌집의
김장한(金章漢) 사헌지평
임태오(任泰五) 사헌지평, 수찬
장진원(張晉遠) 가주서
유도창(柳道昌) 사간정언, 부교리
유명근(柳明根) 사헌장령, 성균관전적
정직조(鄭稷朝) 우승지, 호조참판
윤정수(尹正洙) 성균전적, 사헌감찰
김홍식(金鴻植) 성균관직강
남종두(南宗斗) 성균전적, 사헌집의
유기현(柳基賢) 사헌지평, 이조정랑
김진모(金鎭模) 가주서
유장호(柳章鎬) 가주서
강탁(姜鐸) 사간, 사성
전재봉(全在鳳) 성균관직강
정면수(鄭勉洙) 사간정언, 봉상시정, 사헌집의
한용규(韓龍珪) 사헌지평, 예조좌랑
서경순(徐璟淳) 공조판서
이준찬(李浚贊) 가주서
남헌진(南憲珍) 사헌장령
이익(李{宀/翼})
김두흡(金斗洽) 사헌지평
박창수(朴昌壽) 돈녕도정, 동부승지
안익풍(安翊豊) 사간
노진섭(盧鎭爕) 겸춘추
조경창(趙景昌) 사헌장령
이재황(李在晃) 성균전적
장석묵(張錫默) 사헌장령
김태환(金泰煥) 사헌지평
선우승(鮮于昇) 겸춘추
장호근(張晧根) 사헌집의, 사간
김문교(金文敎) 사간정언
장태수(張泰秀) 고산현감,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박기종(朴淇鍾) 사헌지평, 병조좌랑
신재관(愼在寬) 사헌집의, 사간
윤두혁(尹斗爀) 사헌장령
이창환(李昌煥) 사헌감찰
■ 정면수공 이력과 화성비석사(華城碑石事) (승정원일기, 왕조실록, 족보)
1961. 4.25 철종12년(1861)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문과 병과(丙科) 25위(35/56)
1861.11. 9 가주서(假注書)
1864.12. 2 원릉별검(元陵別檢)
1865. 1.13 전적(典籍)
1865. 1.18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65. 1.20 出擧條 斗淳曰, ~~ 出擧條 斗淳曰, 侍從臣(주13)父年七十, 則法當推恩, 而正言鄭勉洙所後家, 則無可施處(주14), 依近例移施其本生父, 何如? 大王大妃殿答曰, 依爲之 영의정 조두순이 관련 조문을 거론하며 아뢰기를, 시종신은 그 부모 나이가 70이 이르면 법상 마땅히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전 정언 정면수는 양자로 들어가 베풀 수가 없기에 최근 사례에 따라 그 생부에게 시행코자 하는데 어떠하십니까? 대왕대비께서 웃으시며, “규정에 따라 행하라.” 하였다.
1865. 1.22 幼學鄭錫祚, 年七十三, 今超通政, 侍從臣, 前正言鄭勉洙生父推恩移施事 유학 정석조는 72세인데,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함. 시종신 전 사간원 정언 정면수의 생부로서 은전을 추진하는 것임.
1866.10.13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867. 8.11 이조좌랑(吏曹佐郞), 8.25 신병개차(身病改差)
1868. 2.26 사간원정언
1869. 9. 9 생부 휘 석조(錫祚) 공 상(喪)
1874.12.24 정언 정면수가 영의정의 사직하는 태도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다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2월 24일 계사 1874년 조선 개국(開國) 483년>
前正言鄭勉洙疏略: "領議政李裕元, 喬木世臣, 昭代元輔, 際會倚毗, 如彼其盛。 而向者孫永老之疏, 出位詆斥, 恣意凌踏。 自古相臣之被駁者何限, 而未有若此之罔有紀極者也。 所以天怒震疊, 鞫問之, 刑訊之, 投之絶島。 而前領相則敦諭頻繁, 寵遇加隆, 乍罷旋拜, 必致乃已。 聖上此擧, 寔出於禮大臣而重國體, 孰不欽誦萬萬? 而臣有所一事慨惋者, 玆敢冒死陳之。 惟殿下垂察焉。 昔我正宗之作新邑于隋城也, 埋置一片他山於寢園之底, 聖意蓋有所在。 噫! 彼領相, 向在己未年間, 妄生朶頤之計, 私自掘取, 伐木爲車, 無難駄運, 穹然竪立於自已先墓。 此則遠近耳目之所共聞覩, 亦本鄕士林之文諭聲討者也。 斲珉有待, 培楸必敬, 先王手澤, 視若弁髦,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執其事而原其心, 則雖請武庫設隧道, 將何所憚而不爲乎? 臣則以爲百罪可贖, 此罪不可贖也云云.“
전 정언(正言) 정면수(鄭勉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세신(世臣)이며, 훌륭한 시대의 영의정으로서 현명한 임금을 만나 이처럼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손영로(孫永老)가 상소를 올려 자리에서 물러남을 헐뜯고 방자하게 멸시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상신(相臣)으로서 공격을 받은 사람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법도가 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몹시 노하시어 국문(鞫問)하고 형신(刑訊)하고서 외진 섬에 귀양을 보냈습니다. 전 영의정에 대해서는 여러 번 돈유(敦諭)하고 융숭한 대우를 베푸시어, 잠깐 파면시켰다가는 곧바로 임명하여 반드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전하의 이 조치는 대신을 예의로 대하고 나라의 체통을 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온 것이니 누군들 만만 번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에게는 한 가지 개탄스러운 일이 있어, 이렇게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이오니, 전하께서는 깊이 살펴주시옵소서!
지난날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수성(隋城)에 새 고을을 만들면서 능침(陵寢) 아래에 있는 다른 산에 한 조각의 돌을 묻어둔 것은 임금의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 저 영의정은 지난 기미년(1859)에 망령되게도 탐욕을 부려 사적으로 돌을 파내고, 나무를 찍어 수레를 만들어 거리낌 없이 운반하여 자기 조상의 묘 앞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원근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두 듣고 보았습니다. 본 고을의 선비들도 글을 지어 알리고 성토한 일입니다.
옥을 깎을 때 정성을 들이고 선영을 보살핌에 공경을 다하는데, 선대 임금의 손때 묻은 것을 이처럼 소용없는 물건으로 보고 있으니, 이것을 참을 수 있습니까? 누구라도 견딜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보고 그 심보를 헤아려보면, 설사 병기를 만들고 무덤길을 만드는 것도 장차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백 가지 죄를 용서할 수 있어도 이 죄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하였다.
ㅇ 교목세신(喬木世臣) : 여러 대(代)에 걸쳐 중요한 벼슬을 지낸 집안 출신이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ㅇ 소대(昭代) :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하고 밝은 세상
ㅇ 원보(元輔) : 영의정, 의정부(議政府)의 으뜸 벼슬. 정일품(正一品)의 품계(品階)로 서정(庶政)을 총괄하는 최고의 지위
ㅇ 제회(際會) : 좋은 때를 당(當)하여 만남.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잘 맞음
ㅇ 의비(倚毗) : 의지하고 믿음
ㅇ 저척(詆斥) : 남을 헐뜯어 욕하며 배척함
ㅇ 능답(凌踏) : 업신여겨 짓밟음
ㅇ 진첩(震疊) : 존귀(尊貴)한 사람이 몹시 성을 내어 그치지 아니함
ㅇ 형신(刑訊) : 죄인(罪人)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
ㅇ 돈유(敦諭) : (임금이) 의정(議政)과 유현(儒賢)에게 면려(勉勵)를 권(勸)하는 말
ㅇ 총우(寵遇) : 특별(特別)한 귀여움으로 받는 대우
ㅇ 개완(慨惋) : 매우 분하고 원통하게 여김
ㅇ 수성(隋城) : 경기도 수원(水原)의 다른 이름
ㅇ 타이(朶頤) : 턱을 움직인다는 뜻으로 어떤 음식물을 보고 먹고자 하는 모양
ㅇ 착민(斲珉) : 옥을 쪼개고 깎다.
ㅇ 수택(手澤) : 손이 자주 닿았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潤氣). 물건에 남아있는 옛사람의 흔적
ㅇ 변모(弁髦) : 쓸데없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변(弁)은 관례(冠禮) 때에 한 번만 쓰는 치포관(緇布冠), 모(髦)는 동자(童子)의 더펄머리로,
관례(冠禮)가 끝나면 모두 소용이 없게 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ㅇ 무고(武庫) : 병기(兵器), 기치(旗幟), 융장(戎裝), 집물(什物) 따위의 제조(製造)를 맡아보던 관아(官衙). 몇 차례(次例) 군기감(軍器監)으로 이름을
고치다가 고종(高宗) 21년(1884)에 폐(廢)하고 그 일은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겼다.
1874.11.29 전 장령 손영로가 이휘림의 상소와 관련하여 무례한 상소를 올리다.
< 전 장령 손영노의 소 개략 :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1월 29일 첫번째 기사>
二十九日。 前掌令孫永老疏略: "李彙林之疏, 言涉不審, 已被重罪。 而其時傳敎若曰: ‘大院君郊舍行次, 專爲取適頤養, 而行將非久還次矣。’ 于今數朔, 未聞還次之報。 顧今冱寒, 窮山陋室, 恐有妨於取適頤養。 伏願不日動駕, 以爲還次焉。 見今任元輔之責者, 果何如人也? 賦性狠愎, 行己奸狡。 蛇虺之毒, 逢人輒齧, 蠅狗之營, 惟勢是趨。 昨年之重入中書, 亶出於試可之聖心。 而憑託先訓, 課年乞退之餘, 謂此時可乘, 冒沒承當。 然則其云先訓, 不過是欺世鈞名之計。 不遵父訓, 而能忠於君者, 臣未之聞也。 恣行威福, 全無顧忌。 賓對奏事, 一變十年之美典。 政府題辦, 皆由四知之暗。 賂圖科第於稚子, 而不顧惡瘡之近侍。 忘讎怨於洋賊, 而反榷綿布之互市。 許多罪犯, 指不勝屈。 臣若不爲殿下一陳之, 殿下其將何以聞之乎? 由臣之言, 屛去巨慝, 朝著淸明, 臣死亦猶榮。 而若賜親鞫, 則謹當條條仰達, 以暴未盡之憂憤焉。“
전 장령(掌令) 손영로(孫永老)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휘림(李彙林)의 상소문에 말이 지나치고 살핌이 없어 이미 중죄를 받았습니다. 그때 ‘대원군이 교외의 집으로 가서 머문 것은 전적으로 적당한 곳을 찾아가서 몸조리를 위함이니 머지않아 돌아오실 것이다.’라고 전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매우 추운 겨울철이니 궁벽한 산간마을의 누추한 집에서는 적당한 곳을 찾아 몸조리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것이니, 빠른 시일 안에 동가(動駕)하여 돌아오시게 하옵소서!
지금 영의정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품성은 사납고 괴팍하며 행동은 간교합니다. 살무사의 독기를 품어 만나는 사람마다 해치고, 파리나 개처럼 행동하면서 형세를 따져 이에 따릅니다. 지난해에 다시 정승으로 들어온 것은 사실 전하의 마음을 떠보려는 심사에서 나왔는데, 조상의 유훈을 빙자하여 해마다 물러갈 것을 청하던 끝에, 이때를 이용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염치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운운한 조상의 유훈이란 것이 세상을 속이고 명예나 낚자는 계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따르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신은 듣지 못하였는데, 위세를 자행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빈대(賓對)에서 아뢴 일은 십 년 가는 좋은 법으로 바뀌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처리하는 일은 세상 몰래하고, 어린 아들을 과거에 합격시키기 위해 뇌물주고자 악창(惡瘡)이 있는 근시(近侍)에게 접근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서양의 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면포를 거래하여 이익을 보았으니, 수많은 죄와 범행을 손꼽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만약 전하께 진정하지 않으면, 전하는 장차 어떻게 이런 사실은 듣겠습니까? 신이 말한 것으로 인하여 악한 거물이 제거되고 조정이 깨끗해진다면 신은 죽어도 영광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친국(親鞫)하신다면 삼가 조목조목 아뢰어 다 말하지 못한 근심과 울분을 털어놓겠습니다." 하였다.
ㅇ 언섭불심(言涉不審) : 말이 지나치고 살피지 않음
ㅇ 한퍅(狠愎) : 성질이 고약하고 사나움
ㅇ 선훈(先訓) : 선대 이항복 가문의 유훈
ㅇ 모몰(冒沒) : 무릅쓰고 * 모몰염치(冒沒廉恥) : 염치 없는 줄을 알면서 이를 무릅쓰고 함
ㅇ 승당(承當) : 받아들여 감당(堪當)함
ㅇ 위복(威福) : 위압(威壓)과 복덕(福德). 때로 위압(威壓)을, 때로 복덕(福德)을 베풀어 사람을 복종시킴
ㅇ 빈대(賓對) : 매달 여섯 차례(次例)씩 의정(議政), 대간(臺諫), 옥당(玉堂) 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정무(政務)를 보고하던 일
ㅇ 미전(美典) : 아름다운 전례(典禮), 아름다운 법
ㅇ 뇌도(賂圖) : 뇌물을 꾀하고
ㅇ 근시(近侍)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臣下)
ㅇ 호시(互市) : 외국(外國)과의 물물(物物) 교역(交易)
1874.12.24. 영의정 이유원이 정면수의 상소와 관련하여 자신을 처벌할 것을 청하다.
<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2월 24일 계사 >
領議政李裕元疏略: "伏聞前正言鄭勉洙到院疏語, 則指斥臣, 詬罵臣, 至曰‘隋城碑石, 私自掘取, 竪立先墓。’ 臣於是, 滿心驚懍, 無地自容。 臣雖俟勘之中, 請一陳之。 粤在乙卯, 欲營先山之役, 買一碑石於故將臣趙心泰家。 試問來歷, 則謂之以恩賜之物, 而家貧斥賣云。 心甚難安, 置而不用。 後乙丑, 臣待罪是府也。 考見文蹟, 則有石懸在記簿。 故毋論此石彼石之爲何居, 屬之本營爲可, 招致將吏, 懸註以給矣。 今其疏語之謂‘私自掘取, 穹然竪立’未知指何? 而前後之事實如此, 仍置之年條分明, 則今使該府一番査實, 的然可知。 臣焉敢誣也, 亦安得不一暴於聽卑之天也? 臣行已無狀, 人言疊出於慮外, 非但臣僇辱身名, 仰累我殿下淸明之朝。 臣罪到此, 合置何辟。 忙陳文字, 徑尋鄕路。 伏乞聖上, 亟降威罰, 以警具僚焉。" 批曰: "予於前批, 已罄不可捨之意。 而今此巽章, 何爲而復至也? 以予寡昧, 尙賴卿宿德重望。 左右匡弼, 可幸無事于民國, 是誰之力? 卿雖日封十章, 萬無奉副之理。 至於鄭勉洙之悖疏, 構誣駭妄, 莫此爲甚。 故已有處分矣。 以卿體重, 以卿弘量, 固當明辨懲勵, 以肅朝綱。 而又此乖當之擧, 是豈君臣間情志交孚之義乎? 卿須亟斷來章, 安心還第, 以幸國事。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 정언(正言) 정면수(鄭勉洙)가 승정원에 와서 올린 상소에서 한 말을 들어보면, 신을 공격하고 신을 욕하면서 심지어 수성(隋城)의 비석을 사사로이 파다가 조상의 무덤 앞에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온통 마음이 놀라고 떨려서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신은 문초를 기다리는 중이지만 한번 진술 올립니다.
지난 을묘년(1855)에 조상의 무덤을 손질하려고 고(故) 장신(將臣) 조심태(趙心泰)의 집안에서 비석을 하나 샀는데 그 내력을 물어보니 임금이 하사한 것이라고 하면서 집이 가난하여 판다고 하였으므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 안치해 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을축년(1865)에 신이 이 부에서 대죄하면서 문서를 살펴보니, 돌이 있다고 장부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돌이나 저 돌이나 어디에 있었든지 논하지 않고 본영(本營)에다가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장리(將吏)를 불러 주(註)를 달아서 주었습니다.
지금 그 상소문의 끝에서는 사적으로 파다가 우뚝 세워 놓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후의 사실이 이러하고 그대로 둔 연조(年條)도 분명하니 이제 해부(該府)를 시켜서 한번 조사하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거짓말을 하며, 또 어찌 비석 문제를 들으신 전하에게 모두 털어놓지 않겠습니까?
신이 함부로 행동하여 뜻밖에도 사람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으니, 비단 신의 명예가 더럽혀졌을 뿐 아니라 우리 전하의 밝은 조정에 허물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의 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다. 서둘러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시골에 내려가겠습니다. 성상(聖上)께서는 속히 엄중한 처벌을 내려 모든 관료에게 경계를 보이시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전번 비답에서 이미 사임할 수 없다는 뜻을 다 말하였는데, 이번 사임을 청하는 글이 어떻게 되어 다시 오게 되었는가? 나는 덕이 부족하여 아직도 높은 덕과 명망을 지닌 경에 기대려 생각하였다. 옆에서 도와주어 다행스럽게도 나라와 백성이 무사하였는데 이것이 누구의 힘이겠는가? 경이 매일 열 번 상소를 올린다 해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정면수의 패악스런 상소문에서 죄를 날조하여 모함하는 놀랍고 망측한 행위는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그래서 이미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경은 중한 체모를 지니고 넓은 도량을 지녔으니 응당 징벌과 격려를 명백히 하고, 조정의 기율을 엄숙하게 세워야 할 것인데도, 또 이렇게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니 이것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서로 통하는 일인가? 경은 당장 사임을 청하는 행동을 중단하고 안심하여 돌아와서 나랏일을 돌보라!" 하였다.
ㅇ 무상(無狀) : 아무렇게나 함부로 행동하여 버릇이 없음
ㅇ 첩출(疊出) : 같은 사물(事物)이 거듭 나옴.
ㅇ 여외(慮外) : 뜻밖, 의외
ㅇ 손장(巽章) : 공손한 문장, 이유원의 소장
ㅇ 과매(寡昧) : 덕이 적고 우매하다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ㅇ 봉부(奉副) : 받들어 맞이함
ㅇ 구무(構誣) : 터무니없는 일을 꾸미어 남을 모함함
1874.12.24. 政院啓曰, 승정원에서 계하기를
卽見前正言鄭勉洙陳疏到院者, 則前銜陳疏, 家僮直呈, 俱係禁令, 且多違格, 所當退却, 而係是言事, 雖不得不捧入, 不可無警, 從重推考, 何如? 傳曰, 允。
傳曰, 卽見前正言鄭勉洙疏, 則以不近理之說, 搆逼大官, 言念朝體, 極爲駭妄。 爲先施以島配之典
정원에서 계하기를, 전 정언 정면수의 소를 접수하여 살펴본바, 이전 직함으로 하여 가동이 직접 올렸는데, 모두 금지된 령과 관련되고 격식에 어긋나니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언사와 관련하여 비록 부득이 접수하지 않았더라도 경계가 없으면 안되겠기에 엄히 캐어물어서 밝힘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하께서 그리하라 하였다.
임금의 말씀이, “전 정언 정면수의 소를 보았는데, 이치에 맞지 않고, 대관을 얽어 핍박하고, 말과 생각이 조정의 위신과 체면을 깎고, 지극히 해괴하고 망령되므로 우선 섬으로 유배토록 하라!” 하였다.
ㅇ 전함(前銜) : 이전의 벼슬
ㅇ 봉입(捧入) : 물품 따위를 거두어들임
ㅇ 종중추고(從重推考) : 벼슬아치의 죄과(罪過)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엄중하게 캐물어서 밝힘
1875. 1.12 副護軍李承澤疏略曰, 부호군 이승택은 간략하게 소를 올려 말하기를
臣於目下事, 有不容泯默者, 玆敢出位冒陳, 惟殿下垂察焉。 昨冬前掌令孫永老, 疏斥領府事李裕元, 其所論列, 蔑有餘地, 集千古宵小, 極惡罪戾, 叢萃一身。 繼又前正言鄭勉洙, 以華城碑石事, 有所論彈。 臣取見其自明之疏, 則始言乙卯買得於趙心泰家恩賜之物, 又言乙丑考見文蹟, 則有石懸在記簿, 前後之言, 何若是乖刺? 果是趙家恩賜之物, 則何爲懸在記簿, 而十年之後, 始知爲公納乎? 此石之作爲墓碑, 兩邑之人, 丁寧目見, 焉敢誣也? 蓋此碑之移運也, 本土之士, 作詩譏斥, 遠近傳誦, 知其萬目之莫掩, 衆口之難防。 暗斲麤惡之他石, 冒稱移來之本碑, 埋置邱隴之下, 及其眞贓之綻露也, 急於粧撰, 乃敢曰不用, 而仍置屬之本營, 此所謂欺人之不足, 而至於欺天者也。 無嚴無憚, 胡至此極? 無論事之有無, 言之虛實, 雖微末庶官, 遭此彈駁, 固當悚恧縮伏, 自訟愆尤之不暇, 彼居具瞻之地, 其位望何如, 而憑托恩諭之頻繁, 揚揚復入, 晏然若無故者然, 苟有一分彝性, 寧容若是? 伏乞聖明, 淵然深思, 明示好惡, 以爲礪廉防而警具僚焉。 臣無任云云
신은 목하의 일에 있어서 묵인하여 용납할 수 없는 자가 있기에 감히 나서서 진정하오니 깊히 성찰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은 감히 출세하여 혜택을 받고 오직 전하만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전 장령 손영로가 소를 올려 영부사 이유원을 배척하였는데, 그 소론을 열거하면 멸시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천고의 소인배로 극악무도한 죄악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어서 정언 정면수는 화성비석사(華城碑石事)를 탄핵한 바 있습니다. 신이 그 (이유원의) 자명소를 보니, 처음에는 을묘년에 조심태가(趙心泰家)의 은사품(恩賜品)을 샀다고 하고, 을축년의 문적을 고증하면 돌이 (관공서의) 장부책에 기록되었는데, 전후의 말이 어찌 앞뒤가 맞지 않는가? 과연 조가(趙家)의 은사품이라면 무엇 때문에 (水原府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고 10년 후에야 비로소 공납된 것임을 알게 되었는 것입니까? 이 돌을 묘비로 삼는 것을 두 고을 사람이 정녕 목도하였는데 어찌 감히 무고라 하는가? 이 비를 덮어 옮긴 것을 본토(이 고을)의 선비들이 시를 지어 꾸짖어 질책하고 원근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것을 알고 많은 사람의 눈을 막지 못하여 중구난방이 되었습니다. 몰래 조잡한 다른 돌로 쪼개 만들어 놓고, 거짓으로 꾸며 옮겨온 본 비석은 구롱(언덕) 밑에 묻어 놓았는데, 급기야 진짜 장물로 탄로난 것입니다. 꾸며대는 데 급급하여 감히 쓰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 돌은) 본영(本營)에 속한 것입니다. 이른바 사람을 속이는 것도 부족하여 하늘을 속이는 자에 이른 것입니다. 무엄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사안의 유무와 관계없이 말의 허실은 비록 한미한 서관(庶官)이라도 이러한 죄상을 책망받으면 마땅히 송구하고 부끄러워 엎드려 물러나야 하는데, 스스로 더욱 고소하고 다툼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가 재상 자리에 있으니 그 지위와 명망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은혜에 기대어 빈번히 의기양양하게 다시 들어와 아무런 문제 없는 자처럼 태연한데, 진실로 티끌만큼이라도 떳떳한 도리가 있다면 어찌 이와같이 편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의 성명함을 복걸하오니 깊이 생각하시어 잘잘못을 분명히 하여 주시고, 부끄러움을 깨우치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이끌어주시어 관료들의 경계가 되도록 하여 주시면 신은 몸 둘 바 없겠습니다.
ㅇ 불용(不容) : 용서하거나 용납(容納)할 수 없음
ㅇ 민묵(泯默) :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음
ㅇ 소소배(宵小輩) : 간사(奸邪)스럽고 소갈머리가 좁은 못된 무리.
ㅇ 총췌(叢萃) : 떼지어 모임
ㅇ 자명소(自明疏) : 자기의 죄가 없음을 스스로 변명(辨明)하는 상소(上疏). 즉 정면수의 상소에 대한 이유원의 변명소를 말함
ㅇ 괴자(乖刺) : 끊어지고 어긋남. 앞뒤가 맞지 않음
ㅇ 기척(譏斥) : 허물이나 잘못을 꾸짖어 배척함
ㅇ 추악(麤惡) : 품질(品質)이 거칠고 언짢음
ㅇ 모칭(冒稱) : 성명(姓名)을 거짓으로 꾸며 냄
ㅇ 서관(庶官) : 모든 벼슬아치
ㅇ 탄박(彈駁) : 죄상(罪狀)을 들어서 책망함
ㅇ 구첨지지(具瞻之地) : 모든 사람이 쳐다보는 자리라는 뜻으로, 재상 자리를 이르는 말
ㅇ 염방(廉防) : 염치(廉恥)와 예방(禮防). 곧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과 예법으로 그릇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 일
ㅇ 성명(聖明) : 임금의 밝은 지혜(智慧ㆍ知慧)를 이르는 말. 덕(德)이 거룩하고 슬기로움
1875. 1.12 傳曰, 전하의 말씀을 전하길
卽見李承澤疏, 則遣辭之凶悖, 用意之陰險, 胡至此極? 此大臣之不用此石, 卽朝野所共知也。 向來鄭勉洙之疏, 已極無倫, 而渠敢復襲謊說, 搆逼大臣, 若是無嚴, 朝體之乖敗, 法綱之頹墮, 莫此爲甚。 爲先嚴刑三次後, 遠惡島安置.
“이승택의 소를 보니, 말을 문장으로 씀이 패악하고 그 의도가 음험하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 대신이 돌을 (비석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조야가 다 아는 바이다. 저번에 정면수가 올린 소가 지극히 윤리에 어긋났는데, 어찌 감히 다시 황설을 답습하여 대신을 핍박하니, 이는 마치 무엄함이 조정의 체통을 어그러뜨리고 법강을 떨어뜨림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우선 세 차례의 엄형에 처한 후에 원악도에 안치하라.” 하였다.
ㅇ 견사(遣辭) : 말을 문장으로 만들어 씀. 또는 그 말
ㅇ 흉패(凶悖) : 험상(險狀)궂고 패악(悖惡)함
ㅇ 괴패(乖敗) : 어그러지고 무너짐
1876윤5.16 傳曰, ~~ 島配罪人 ~~ ·鄭勉洙·~~ 竝放逐鄕里(주15)。임금 말씀이, “섬으로 정배 보낸 정면수는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으라.” 하였다.
1879.12.28 以義禁府赦單子, 傳于閔泳奎曰, 尹永求·趙愿祖·申弘均·李有臣·宋奎灝·趙光淳·鄭勉洙·張皓根·金亨哲·崔柄大·李敏德·
韓秉默·李承澤, 放。의금부 사면단자에 의거 임금의 말씀을 민영규가 전하길, ~~~ 정면수 ~~ 이승택을 방면하라.“ 하였다.
1883. 5.11 前正言鄭勉洙上疏。 大槪, 敢陳憤惋之忱, 乞降處分事。 省疏具悉。 言人所不言, 可見其發於忠憤矣. 정언 정면수가 상소하기를, 감히 원통하고 애석한 마음으로 처분을 호소하고자 진정하였다. 임금이 상소문을 읽고 알았다 하였 다. 언관이 말하지 않음은 충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ㅇ 충분(忠憤) : 충의(忠義)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憤)한 마음.
1884. 2.22 봉상시정(奉常寺正)(주16)
1886. 7.29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1891. 2.17 우통례(右通禮), 4.8 신병개차(身病改差)
1892. 2. 5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894. 2. 3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894. 6. 6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주13) 시종신(侍從臣) : 1 임금의 곁에서 문학(文學)으로 보필(輔弼)하던 벼슬아치. 2 조선 시대에, 홍문관(弘文館)의 옥당(玉堂),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대간(臺諫),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를 통틀어 이르던 말.
주14) 무가시처(無可施處) : 양자를 갔는데, 부 정석민(鄭錫民, 1798~1821)이 이미 작고하였으므로 증직을 받을 수 없음. 계후(繼后)를 승인한 예조입안(禮曹立案) 일자가 1831년 12월이다. 즉 계후일 이전에 졸하였다.
주15) 방축향리(放逐鄕里) : 벼슬을 삭탈(削奪)하고 제 고향(故鄕)으로 내쫓던 형벌(刑罰). 유배(流配)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刑罰)이다.
주16) 봉상시(奉常寺) :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官廳). 정(正)은 으뜸 벼슬(정삼품)
■ 화성비석사건 관련 인물
ㅇ 이유원(李裕元, 1814~1888)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항복의 후손이다. 자는 경춘(景春, 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이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이태좌가 5대조이고 소론의 거두 이광좌는 5대 방조이며, 사도세자를 보호했던 좌의정 이종성은 그의 고조였다. 이조판서 이계조(李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 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 책봉 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 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이유원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橘山文稿)』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 이유원은 친아들 이수영(李壽榮)이 1880년에 사망하자, 1885년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을 양자로 삼았다. 이석영은 이유승(李裕承, 1835~1907)의 둘째 아들인데, 이유승의 아들 일곱 명은 각각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이석영,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이소영(李韶榮, 1875~1905), 이호영(李護榮, 1875~1933년)이다.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은 친형제였던 이회영, 이시영과 더불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석영에게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 고종, 사망한 이유원의 상에 예장 등의 절차는 규례에 따라 거행하라는 전교 < 비변사등록, 1888(고종 25년) 9월 6일 > 전교하기를,“이 대신(大臣)은 정밀하고 영민한 자질과 굳세고 강직한 절조를 가졌으므로 예전에 관직을 맡기고서 의탁하고 공세우기를 도모하여 성취되기를 바란 것이 어떠했던가. 나이가 많더라도 기력은 여전히 왕성하였기에 물러나 쉬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도록 허락했지만, 도움을 바라는 뜻은 더욱더 간절하였다. 나라를 향한 충심으로 책임을 지고 앞으로 곧바로 나가서 의혹스럽고 위험한 때에도 꺼리지 않고 일이 닥치면 일 처리를 메아리가 응답하듯이 하였으니, 그가 하는 일에서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갈고 닦은 재주와 계책을 갖고 온 정성을 다하여 보답하려 하였으므로 나는 ‘의주견권(倚注繾綣)’ 네 글자로써 포미(褒美)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끝났다. 어디에서 다시 그의 모습을 보겠는가. 말을 하자니 감회가 생기니 슬픈 마음을 어디에 비유한단 말인가. 졸(卒)한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의 초상에 동원(東園)의 부기(副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짓겠다.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恩典)은 행장(行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봉상시(奉常寺)에서 즉시 거행하게 하라. 녹봉은 3년간 보내 주고 예장(禮葬)하는 등의 일은 규례를 살펴 거행하라.” 하였다. |
ㅇ 손영노(孫永老, 1820~1891)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이석(而錫), 호는 목서(木西)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손필경(孫必慶)이고, 할아버지는 손진두(孫鎭斗)이다. 아버지는 손석련(孫石鍊)이고, 어머니는 성헌로(成獻老)의 딸 창녕 성씨(昌寧 成氏)이다. 부인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이다.
손영로는 1820년(순조 20) 상주에서 태어났다. 1841년(헌종 7)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50년(철종 1)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이후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858년 이조좌랑이 되었다. 1861년 청하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864년(고종 원년)에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손영로는 1874년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는데, 11월에 상소를 올려 실각한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 환궁을 청하고 재상 이유원(李裕元)을 탄핵하였다. 이 상소가 문제가 되어 손영로는 전라도 진도군의 금갑도(金甲島)[접도(接島)]에 위리안치되었다. 손영로는 1884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상주로 돌아왔고, 1891년에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ㅇ 이승택(李承澤, 181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형숙(亨叔)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포천(抱川)이다.
증조부는 이훈(李壎)이고, 조부는 이정주(李廷柱)이다. 부친은 이소(李熽)이며, 생부는 이흡(李熻)이다. 외조부는 유도환(兪道煥)이고, 처부는 홍익신(洪翼臣)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시에 병과 14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집의(執義),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875년(고종 12)에 부호군으로 재직 당시 영부사(領府事) 이유원(李裕元)을 규탄한 장령(掌令) 손영로(孫永老)와 화성의 비석 사건과 관련하여 규탄한 정언(正言) 정면수(鄭勉洙)의 상소를 근거로 삼아 조심태(趙心泰)에게 뇌물을 받은 영부사 이유원의 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을 경책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유원을 무함(誣陷)하고,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렸다는 죄목으로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璃安置)되었다. 1876년(고종 13)에 원악도에서 풀려나 향리(鄕里)로 쫓겨났다.
■ 죽음도 불사한 진소(감모사진 敢冒死陳)는 충분(忠憤)
영의정 이유원 탄핵 사건을 통하여 일견하면, 고종과 대원군간에는 사대파와 개화파간 갈등 이전인 고종집권 초기부터 매우 갈등의 골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편적인 부분이나마 이유원의 처세관은 칼처럼 강하게 부딪치지 않으면서 처세의 조정을 통해 순항하며 임금을 보필하였으므로, 고종은 이유원의 이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고, 다소의 결점이 있더라도 이를 탄핵하는 행위는 곧 임금을 비난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강하게 처벌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원군을 옹호하는 행위와 중용한 고관을 공격하는 상소는 금기시되는 편린(片鱗)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어기고 진소를 올린 언관들은 윤강(倫綱)을 지키고, 관료와 고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의롭고 청요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유교관념적 사고를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대부분 이들 사건 이후 엄한 처벌을 받고 관직에 복귀되지 않았다. 다만 화성비석사의 발단이 된 전 장령 정면수는 1874년 사건 후 1875년 원악도에 정배되었으나 1879년 말에 방면되었고, 1883년 5월에 임금에게 충분(忠憤)에 의한 탄핵이었음을 진소(陳疏)하여 이듬해인 1884년 2월에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복귀하였다.
임금의 혐연(嫌厭)을 거스르는 상소는 죽음을 무릅쓴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실행한 것은 영달(榮達)과 사익을 추구한 것이 아닐진대, 진정 의분(義憤)이요 충분(忠憤)으로서 언관의 본분이자 선비정신이라 할 것이다.
■ 영문록 원본(한국학중앙연구원 위탁보관)
24.2*23.5cm

첫댓글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