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통해 복음의 풍성함을 깨닫게 하소서.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구원의 잔에 들어있는 복, 그리스도와 함께 온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줄기 감자처럼...
11장 2장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 안에는 믿음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속적 은혜를 동반한다. 구원의 면면을 살펴보고 고찰하며 신앙이 깊어지고, 묵상이 새로워지며, 찬양에 중심이 담기는 것
시편 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요한복음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는 내가 해야 할 보답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1) 그는 가장 열성적이고 장엄한 자세로써 그의 찬양과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드리기로 결심한다(13, 17절).
[1] "내가 구원의 잔을 들겠나이다. 즉 내가 하나님께 대한 나의 감사의 징표로써 율법에 명시된 전제를 드리겠나이다. 그리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나이다." 이것은 구원을 기억하면서 마셨기 때문에 "구원의 잔"이라고 불리워졌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때때로 저희의 사식(私食)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두신 잔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을 "내가 기꺼이 들겠나이다."
첫째, "고난의 잔을." 많은 유명한 주석가들은 그것이 성도들에게 성별된 쓴 잔이라고 이해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저희에게 구원의 잔이 된다고 이해한다(빌 1:19). "이것이 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건강의 매개이다. 다윗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형이었으며, 우리가 그와 연합하면 그의 잔이 실로 구원의 잔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은택을 주셨기 때문에, 내 손에 주시는 어떤 잔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주의 거룩한 뜻을 영접하겠나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말을 한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나이까?"(요 18:11)
둘째, "위로의 잔을."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부터 내게 주신 은혜를 기꺼이 받고, 그 안에서 그의 사랑을 맛보겠나이다. 그것은 저 세상에서 나의 유업의 몫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의 잔이 몫이 되기도 한다."
[2] "내가 감사의 희생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제물을 드리겠나이다(레 7:11, 12 등). 마음이 진실로 감사한 자들은 감사제로 저희의 감사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야 할 것이다(롬 12:1; 고후 8:5).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하여 경건과 자비로 행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과 성전에 참예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이다(히 13:15, 16).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을 수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하게 대하셨다면, 우리는 그 보답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은 것일지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해야 할 것이다(16:2, 3). 왜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는 이미 이것을 약속하였고(2절), 여기서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13절). 그리고 또 다시 되풀이한다(17절).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서 친절을 받는다면, 다시는 그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기도를 그에 대한 영광으로 받아주시며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이전의 자비에 대한 감사로써 우리는 그에게서 더 큰 자비를 찾아야 하며, 끊임없이 그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16절).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지키게 되어야 한다. 또한 그가 우리 안에 거하되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 하인으로가 아니라 자기 지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명령하며 지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주인으로 그가 거하셔야 한다. 우리는 집 주인으로서의 말씀으로부터 훈육과 지시를 받아야 하며 그리고 때를 따라 은혜와 위안과 힘과 식량의 우리의 몫을 공급받아야 한다. 말씀은 우리안에 거해야 한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어 적절한 때를 따라 그것의 감화를 받고 또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친숙히 알아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욥 5:27). 이 말씀은 또한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해햐 한다. 즉 그것이 우리 마음을 지켜 줄 뿐만 아니라 좋은 집으로 유지시키도록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안에 모시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그들안에 다만 빈약하게 거할 뿐일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에게 강력한 함에 영향을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가 그것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가질 때 그리고 성경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그때 영혼이 부요하게 된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로 지혜롭게 한다. 지혜란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가 자신의 훈육을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지식과 사변에 있어서 박사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혜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지혜의 자녀들답게 행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4.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 모든 은혜에 진보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작성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 대해 서로 지식 교환함으로 자신의 지식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시와 찬미로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복음이 정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falmoi/j ka.i u[mnoij kai. w/|dai/j"란 말은 다윗의 시편과 영적인 찬미와 송시(頌時)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들은 성경에서 모아져서 특별한 경우에 알맞게 선별된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의 음탕하고 속된 노래들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신앙적 시들도 이런 표현 형태를 통하여 불리워진 것 같으며 좋은 감화력을 미치었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노래할 때 만일 우리가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노래하는 내용에 적절하게 감동되지 않고 그 안에 참된 헌신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흥겹게 노래할 수 없게 된다. 시편에 대한 노래는 찬양의 의식에는 물론 가르치는 의식에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로써 자신들을 활기있게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가르치고 권고하며" 서로의 관심을 자극시키며 교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했는가?
1. 그의 위로의 원천을 향하여.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그리고 주의 선하심과 주의 약속을 인하여, 주께 감추인 자비와 주로 말미암아 계시된 자비를 인하여,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로 대하신다.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주의 약속, 즉 진리)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그의 말씀에 의해서 가장 확실하게 알려 주셨다. 그의 입의 심판은 그의 의 심판보다 높게 하셨으며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보다 더 큰 것들이다. 은총의 기적들이 자연의 기적들보다 우월하다.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이성에 의해서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그의 말씀에 대한 진실하심이 그의 다른 어떤 속성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그의 영광을 더욱 높이 만들었다. 어떤 훌륭한 주석가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의 복음은 주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발견보다 더욱 높은 것이다. 율법을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만드신 자는 복음을 더욱 더 높이 평가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이트푸트는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현시적(現時的) 영적 임재(靈的臨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문맥으로 보아서 이 둘째 해석이 합당하다.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 신자들 사이에 사랑이 풍성하여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의 말씀도 풍성히 내주한다. 그 이유는, 합심된 신자들의 단체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까닭이다(마 18:19-20). 이와 같이 사도는 사랑을 권면한 후(14절)에 그것(사랑)의 첫 열매로서 교회의 화평을 희망하고(15절), 또 그것의 둘째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을 희망한다. 신자가 서로 사랑 안에 연합하여야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여 얻는 지혜의 부요에 이른다.
모든 지혜를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르 부르며 - 여기 말한 "가르침", "권면"."찬미"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가 없으면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찬양이 참되이 나타나지 못한다. "가르침"은 영적 지식을 전달함이고, "권면"은 도덕 실행의 동기와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이 둘은 "모든 지혜"를 방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