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집을 나섰다. 말복더위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지 싶다. 예년처럼 속초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이전과 다른 것은 버티는 아이들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제9호 태풍 레끼마는 상해 북서쪽에서 중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지만 한반도에는 큰 피해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경춘고속도로를 경유해서 미시령 터널을 지나는 밋밋한 코스 대신에 대관령을 넘기로 했다.
피서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횡성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들며 피곤해 하는 몸을 달랬다. 영동고속도로 진부IC를 지나치고 대관령IC에서 내렸다.
대관령 하행선 방향 휴게소는 캠핑 차량들이 연립주택처럼 줄지어 서있다. 태백산맥을 넘으려던 안개와 비는 800미터가 넘는 능선에 가로막혀 산과 도로를 뒤덮어 몇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길을 건너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을 각각 모신 성황사와 산신각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국가무형문화제 13호인 강릉 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는 제를 올리는 곳이라고 한다.
한 두 평 남짓한 아담한 산신각에서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차림의 두 여성이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치성을 올리고 있다. 바로 아래 성황사에서는 안개비 장막을 뚫고 명징하게 울리는 징소리에 맟춰 성황신께 두 손을 부비는 여인의 기원이 간절해 보인다.
선자령 쪽에서 내려오는 산객이 간간이 눈에 띈다. 하나같이 바지가랭이가 젖은 그들은 발길이 무거워 보이고 얼굴엔 표정이 없다. 겹겹 물결처럼 넘실대는 백두대간의 산군, 신기루처럼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동해,... 필시 이런 장관을 기대하며 산행에 나섰을 터이니 그럴만도 하지 싶다.
다시 휴게소로 내려와서 산 허리와 능선을 타고 도는 구곡양장 대관령 옛 국도를 따라 내려간다. 멀지 않은 곳 도로변에 신사임당의 사친시비(思親詩碑)가 서있다. 사임당처럼 전망대에서 강릉 쪽을 한 번 바라보지만 비와 안개의 망망대해에 잠겨 있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村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青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踰大關嶺望親庭, 신사임당>
대관령박물관은 굽이길이 끝나는 해발 150미터 쯤에 뒤쪽으로 성산계곡을 끼고 자리하고 있다. 앞마당 좌우 편에 석탑, 석물, 그리고 쉬지 않고 도는 물레방아가 있고, 정원에는 붉은 꽃이 만발한 배롱나무 아래 이 지역에서 발견된 옛 문관석들이 도열해 있고, 화단에는 각종 꽃들이 원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장대한 어른 키 높이의 미륵불이 맞이하는 전시실에는 선사시대의 돌도끼, 돌화살, 청동기 등을 비롯해서 고려와 조선시대 선조들의 갖가지 유물들 가지런히 전시되고 있다. 그들이 들려주는 장구한 시간의 속삭임이 큰 울림을 준다.
"전시물 가운데 제일 귀중한 건 뭔가요?"
"천상열차분열지도이지 싶네요."
내 질문에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웅변하듯 문화해설사는 주저 없이 대답하며, 만 원 짜리 지폐 속에 들어 있는 지도 그림을 보여주며 긴 설명을 곁들인다. 흩뿌리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대관령 쪽 오르막으로 페달을 밟는 남녀 라이더 한 쌍이 힘겨워 보인다.
점심 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라 배가 허기를 채워달라고 보채며 아우성이다. 성산 위촌리의 한적한 산기슭에 자리한 식당으로 가서 갈비탕을 주문했다. 구수한 국물에 갈비와 양지편육이 푸짐하게 든 탕이 일품이다.
대관령을 넘어서면서부터 살포시 내리던 비는 그치지 않고 여전히 오락가락한다. 네 시경 경포호 부근 초당마을의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 생가 터를 찾았다. 규모가 있고 단아하면서 기품이 깃든 지방 반가의 전형을 둘러보는 기쁨이 적지 않다.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때마침 빗줄기가 굵어진다. 기왓장의 골을 타고 커튼처럼 나란히 떨어지는 빗물 줄기가 운치있어 보인다.
경포호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경포대로 향했다. 성곽 보루처럼 얕은 언덕배기 위에 자리한 경포대는 경포호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28개의 팔작지붕 누각 안에는 관동제1경의 명성을 자랑하듯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경포호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불어오는 바람에 땀과 비에 젖은 몸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부른다.
해변 좁은 도로를 따라 속초로 차를 몰았다. 사천 연곡 영진을 연이어 지나고 주문진에서 6번 국도를 탔다. 남애항과 죽도해변을 지나서 '38선휴게소'에 들렀다. 육이오 이전 남북을 가르는 경계였던 북위 38도선, 동해변 그 위도에 자리한 휴게소다.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며 산, 강, 도로, 철로 등을 단절시키고 이념의 담장을 높게 쌓은 그 경계는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남북을 갈라놓고 있다.
잦아들었다 굵어졌다 심술을 부리는 비에도 아랑곳않고 피서객들은 해변을 떠날줄 모른다. 높아진 파도에 갈매기들은 잠시 날개를 접고 모래사장에 내려앉았다. 속초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설악은 안개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젊음 낭만 꿈이 뒤섞인 항구에는 차츰 어둠이 내리고 있다.
To be 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