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공항에서
대체로 느긋하게 즐겼던 대만, 홍콩을 거쳐 중공(우리 나라와 수교 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들어설 때부터는 불안한 맘 떨칠 수 없었다. 홍콩 공항을 벗어난 뒤로는 일행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러한 사이 비행기는 이미 북경공항 위에서 선회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시뻘건 광폭의 깃발(오성기五星旗)이 온 하늘을 가린 채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킬듯 확 덮쳐왔다.
펄럭이는 붉은 깃발, 그것만으로도 숨이 콱 막혔다. 집사람과 애들, 부모님, 동기간, 고향 산천과 친구들이 하나하나 그려졌다. 되돌릴 수 없는 발길, 안달해야 무슨 소용 있으랴만, 막다른 처지에 놓이거든 이렇게, 이렇게 해라라고 한, 행동 지침이 낱낱 떠올랐다.
북경공항, 막상 청사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스산하다 할까, 을씨년스럽다 할까, 아니면, 해거름녘 시골 5일장 같은 분위기 였다고나 할까. 그러한데도 일행 모두는 조여드는 심신을 풀지 못한 채 한 자리에서 맴돌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청사 밖에 홀로 서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쪼그려 앉고 보니 화장지가 없었다. 앉은 채로 문을 밀쳐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 푸르스름한 제복을 입은 관리자가 뛰어왔다. 벽에 매달아놓은 빈 화장지 걸이를 가리키니, 알았다는 표정으로 바삐 갔다가 한참 뒤에 헐레벌떡이며 왔다.
거무칙칙한 두루마리를 걸어놓고는 오른 손바닥으로 왼손바닥 반을 가려 내보이며 사정사정(事情)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아래 위로 끄득여 줬다. 그러자 웃으며 문을 닫아 주고 갔다. 훅 불면 먼지처럼 낱낱 날려버릴 것 같은 화장지, 그것도 손바닥 반만큼만 잘라 쓰기를 애절하게 요청하던 그 노동자의 모습이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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