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5일(토)
월광수변공원(달서구 상인동)에서 출발, 임휴사(상인동, 달비골)에 들려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셨다.
송현동에 있는 보성선원에 들려 보물인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을 보려고 하였지만 예불 중이라 포기,
안일사(남구 대명동, 안지랑골)로 향했다. 안일사까지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통제를 한다. 20여분 걸어야 한다.
안일사를 들머리로 앞산(658.7m) 산행을 하였고 하산 후 차량으로 은적사(남구 봉덕동, 큰골), 고산골 입구에 주차하고
법장사(봉덕동, 고산골)까지 걸었다.
임휴사, 안일사, 법장사 등 3곳은 앞산에 있다. 앞산은 '비슬산'이란 산군에 포함된다.
임휴사(臨休寺) /전통사찰
-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통일신라 921년(경명왕 5)에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행, 귀국한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가 창건.
조선시대 1811년(순조 11)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하였다.
2004년 7월 괴한의 계획한 방화로 요사채 외 모든 전가과 문화재가 불에 탔고, 현재까지 방화범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후 불사를 진행,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임휴사(臨休寺)는 공산동수대전(公山棟藪大戰)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패하여 도망 중 이곳에 들려 잠시 쉬었던 곳에서 유래.
('다음'에서 정보를 얻음)
'달서구청소년수련관' 주위에 공용 주차장이 있다. 여기에 주차하고 걸어 가도 그리 먼 곳이 아닌데 몰라서 차로 갔다.
2004년 방화로 문화재와 전각이 모두 타버려서 건물에서 풍기는 고풍은 느낄 수 없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선 '타종교 광신도'가 저지른 짓으로 추정하여 분개한 글을 올렸지만 범인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라면
타종교라고 추정한 글을 올리면 안 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추정할 수 있겠지만.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개신교인이 단군상을 파괴하거나 절에 불 지른 사건들을. 나는 한때 개신교인으로 이런 행위에 대해 분노하였다.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것에 대하여 인정할 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절까지 200m, 산보삼아 걸었다.
성벽 같다. 이 성벽 아래가 주차장이다.
절 마당은 시원하다. 담장이 조금 높은 감이 있다. 산 아래 경치를 보기엔...... .
대웅전, 예불 중이라 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웅전 옆 가건물은 종무소이다. 언젠가 이 가건물을 철거하고 멋진 한옥이 들어 서겠지?
반야당, 요사채인 모양이다.
16나한전
삼성각
삼성각 앞에서 본 경치, 보이는 산이 대덕산 같다.(앞산 지도 참조)
보성선원 /전통사찰이 아님
-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대웅전 외벽의 그림. 설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겠다. 척판(원효대사, 왼편)은 알겠다.
안일사(安逸寺) /전통사찰
- 대구시 남구 대명동
927년(신라 경순왕 1) 영조대사(靈照大師)가 창건.
사명은 공산동수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이곳에서 3개월 간 안일하게 쉬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절에서 500m 위 왕굴이 있다. 견훤군을 피해 왕건이 이 굴에서 숨었다고 한다.
견훤군이 찾을 수 없도록 굴 입구엔 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운무가 심하게 끼였다고 한다.
1915년 음력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로 서약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을 결성.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신 백용성 스님께서 중창하였다.
안일사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로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안일사 안내문 내용 정리)
사적이 허술하다.
927년은 왕건이 견훤에게 공산전투에서 패한 연도이다.
왕건이 도망 왔을 때 어느 승려가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겠다. 그 승려가 영조대사일 수도 있었겠다.
대웅전, 목조 석가여래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가 있지만 예불 중이라 법당에 들어 가서 볼 수 없었다.
법당 밖에서 투명하지 않는 비닐 넘어로 희미한 불상을 봤다. 1694년(숙종 20)에 제작한 것이라 한다.
산신각
안일사 삼문, 사천왕상이 없고, 금강역사가대문에 그려져 있다. 현편은 종각, 또 다른 한편은 종무소로 쓰고 있다.
왕굴
은적사(隱跡寺) /전통사찰
- 대구시 남구 봉덕동
신라 55대 경애왕 3년(927), 고려 태조 10년(927)에 영조대사가 창건.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이곳으로 와 '왕건굴'에서 견훤군을 피했다고 한다.
(은적사 안내문에서 내용을 가지고 옴)
927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 경애왕을 압박하여 자결하도록 만들었다. 신라 마지막인 경순왕을 옹립시켰다.
927년은 경순왕 1년이다.
은적사 이름도 왕건이 숨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안일사와 창건 시기와 왕건과 관련한 내용이 동일하다.
왕건이 안일사 또는 은적사에서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 안일사 주위에 굴이 있고 은적사 경내에도 굴이 있다.
왕건은 이 굴에서 숨어 지낸 후 대업(삼국통일)을 이룬 후 안일사 또는 은적사를 건립하였을 것이다.
은적사 역시 사적이 허술하다.
일주문이나 보제루 등은 없다. 금강역사가 절을 지키고 있다.
은적사 목조 석가여래좌상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2호
조선후기 조각승 하천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
왕건굴(은적굴), 경내에 있다.
안일사 왕굴은 10명 정도 앉을 수 있을만큼 넓다. 이곳은 한 사람 정도 간신히 눕겠다.
삼성각
경내에 있는 석조물, 설명이 없다.
법장사(法藏寺) /전통사찰
- 대구시 남구 봉덕동
지도를 보니 법장사 뒷산은 산성산, 안일사 앞산은 앞산이며 은적사 뒷산은 산성산이며 앞산은 앞산이다.
임휴사 뒷산이 대덕산이다. 대덕산이든 앞산이든 산성산이든 이 모두 아우른 산이름이 대덕산이며 앞산인 것 같다.
더 크게 보면 비슬산이다.
창건 시기는 신라말로 추정하고 있다.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이 신라말 또는 고려초 건립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절은 한뼘 크기이다. 삼층석탑이 앉은 공간이 절 마당의 전부이다. 법당도 허름하다.
삼층석탑이 있었다면 제대로 가람이 갖추어졌을 것인데 긴 세월 동안 쇠퇴한 모양이다.
법장사까지 차를 이용할 수 없다. 고산골 공룡공원 주변에 주차하고 1km 가량 편한 길을 걸어야 한다.
법장사 삼층석탑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1961년 이곳에 법장사를 건립하면서 이 탑을 복원하였다.(안내문)
자세히 보면 석재가 깨끗한 게 있다. 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말이나 고려초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삼성각
삼성각 안 탱화. 산신과 용왕이 좌우에 있다.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
인터넷 검색을 하여도 안 나오는 인물이다.
동사열전이나 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 승려이다. 해동고승전에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인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