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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회복 스크랩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 제2부 서동! 선화공주를 버렸는가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78 14.04.27 21: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추적]

 

6C말 백제 금마저엔 마를 캐는 청년 서동이 있었다. 과부였던 어머니와 연못 속 용 사이에서 태어난 서동은 비범했다. 신라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 그녀는 미염무쌍!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서라벌로 간 서동은 서동요를 지어 퍼뜨렸다. 해괴망측한 노래가 장안에 퍼지자 신라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유배 보냈다. 유배길에 서동을 만난 선화공주, 한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이후 서동은 백제의 왕이 되고 미륵삼존의 출현을 본 선화의 발언으로 미륵사를 짓는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백제 30대왕 무왕과 신라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그러나 1400년간 이어온 이들의 사랑은 최근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2부작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제2부 서동! 선화공주를 버렸는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 통해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래’

이 노래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우리역사에서 나오는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서동요입니다. 헌데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위치에 처했습니다. 지난 1월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의 발굴결과 서동 즉 무왕의 여인으로 사택왕후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이 사택왕후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선화공주는 갑자기 역사 속의 미아가 될 상황입니다. 지난 주 1부에서 우린 미륵사 사리장엄구에 아름다움과 그 역사적 가치를 집중분석해봤습니다. 방송 후 시청자들의 관심은 온통 서동과 선화공주에 사랑 그 결말로 쏠리고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저희 역사추적의 기획의도입니다만 오늘만큼은 그 아름다운 사랑이 깨어질까 조금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가 1338만제곱미터에 이르는 미륵사는 3탑 3금당 즉 세 개의 탑과 세 곳의 불당 구조를 가진 한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서탑은 일제강점기 콘크리트로 보수할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지난 2002년부터 미륵사지 발굴과 더불어서 석탑 역시 해체복원작업을 진행해왔다. 1400년의 역사를 이어 주듯 석탑엔 4개의 통로가 있다. 통로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가면 탑의 중앙에 위치한 돌기둥을 만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이 기둥 안에 1400년 전 백제가 살아있을 줄 예상치 못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워진 최고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 당제 백제의 석조기술이 총동원된 건축물이었다. 2m가 넘는 돌 하나의 무게만도 3톤이 넘어 1층 기단부까지 해체하는데 7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탑의 기둥으로만 여겼던 돌을 들어 올리는 순간 가로, 세로 25㎝의 아담한 공간에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백제의 역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1400년 전 유물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보존상태. 최고의 발굴 전문가들도 긴장했다.

 

 

높이 13㎝의 금으로 만든 사리호. 연꽃무늬와 당초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개방적이고 화려했던 백제의 아름다움이 완연히 녹아있는 걸작이다. 그리고 사리호 뒤편에 놓여있던 가로 15㎝, 세로 10㎝의 황금판이 수습됐다. 바로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뒤집어 놓은 유물이다. 이 금판은 사리호를 모시게 된 내력을 담은 사리봉안기였다. 유물에 쓰인 글씨는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최고의 자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글자가 나왔다.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녀’의 딸. 백제왕후인 사택왕후가 깨끗한 재물로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193자 중 모두를 긴장시킨 것은 이 두 글자였다. ‘沙宅’. 과연 사택왕후는 누구인가?

 

미륵사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 그 완성이자 상징이다. 그러나 돌 속에서 나온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상황은 돌변했다. 이전까지 미륵사 창건의 주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화공주였다.1) 그러나 선화공주가 아닌 뜻밖의 이름 사택왕후가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김상현 교수(동국대학교 사학과)

“좌평도 사택도 다 백제 쪽 이야기입니다. 좌평은 백제 관등이고 사택씨는 당시 백제의 가장 유명한 귀족의 성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화공주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1400년간 이어온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랑에 홀연히 끼어든 사택왕후는 누구일까. 무왕의 부인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서기에 딱 한번 등장한다. 642년 국주모가 죽자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교기왕자와 국주모 여동생 딸 4명 등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한다. 국주모, 국주모는 의자왕의 어머니 격이자 무왕의 부인이다. 그렇다면 국주모는 선화공주나 사택왕후 두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어머니격인 국주모가 죽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국주모의 측근을 숙청하는 의자왕. 국주모는 누구일까. 다시 일본서기의 국주모 관련기사를 보자. 국주모 여동생의 딸 4명의 해답이 있다. 선화공주는 국주모가 될 수가 없다. 신라공주인 선화의 여동생이 백제에 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도학 교수(국립전통문화학교)

“미륵사지 봉안기에 보면 이제 사택씨 왕후의 존재가 언급이 돼 있습니다. 그것도 639년 시점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할 때 국주모라고 하는 사람은 다르게 비정할 대상이 없고 오로지 사택씨 왕후가 국주모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이 해답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의자왕에게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국주모 사택황후. 사택지적비는 사택왕후의 집안에 대해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비문에 사택지적은 무왕의 장인인 사택덕적처럼 의자왕대 최고위직인 대좌평을 역임했다. 개인적인 절을 지을 만큼 경제력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2) 사택씨는 성왕 때부터 백제 정치의 중심에 등장한다. 금강유역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사비백제 최고 가문이다. 딸은 왕후요, 아버지는 최고위직인 대좌평 그리고 동시대에 사택지적 등 660년 백제가 망할 때까지 사택가는 백제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다.

 

노중국 교수(계명대학교 사학과)

“이제 결정적으로 백제 지배층 내에서 사씨 세력이 일급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비 천도일 것 같아요. 성왕이 사비로 538년에 천도를 단행합니다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왕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 의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지지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걸 사씨 쪽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거죠.”

 

전설의 한 장면처럼 돌탑 속에 있다 1400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난 백제 여인 사택왕후의 등장과 함께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인가. 백제 30대 왕이 된 무왕. 그는 가난한 시절에 조강지처 선화공주를 버린 것일까.

 

 

1400년 동안 돌탑 속에 잠들어 있던 사택왕후의 등장. 그것은 600년대 초반 백제 왕실에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대 혼란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나와 있는 이곳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조성된 서동공원입니다. 이곳 말고도 익산에는 그들의 사랑을 기리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요.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곳 익산에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능이 있다. 그곳은 전설이 아니었다. 지난 1917년 이미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서 판석으로 짜여진 석실과 목관의 잔해 그리고 금제 유물 등이 발견됐다. 당시 발굴보고서는 이 능을 7C 백제의 왕릉인 부여능산리 고분과 일치한다고 결론 내렸다.3) 국립전주박물관엔 목관을 장식했던 유물이 전시중인데 백제의 전형적인 문양을 하고 있다. 잔해를 바탕으로 복원된 관이다. 그런데 이 능에 목관을 만든 나무에 재질이 특이하다.

 

일본 와카야마 현 고야산은 아주 단단한 금송이 생산되는 곳이다. 당시 백제와 일본의 활발한 교류의 영향으로 백제왕들은 이곳의 금송을 가져다 관을 짰다. 그런데 익산 쌍릉에 목관 역시 일본산 소나무로 밝혀졌다. 백제왕의 무덤에서 일본산 금송 목관이 발견된 경우는 무령왕릉의 목관이 있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관도 역시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최완규 소장(원광대 마한 백제연구소)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가 무왕릉이라고 일치합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무왕과 그의 왕비 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왕과 함께 쌍릉에 묻힌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였을까? 삼국유사는 선화공주를 신라진평왕의 셋째 딸로 기록하고 있다. 선화공주의 아버지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큰 딸인 승만공주가 그 뒤를 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선덕여왕이었다. 그리고 진평왕의 또 다른 딸은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다. 선화공주는 김춘추의 이모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왜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삼국사기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왕의 부모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딸이라는 것도 진평왕의 기록이 아니라 선덕여왕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4) 천명부인 역시 태종무열왕의 부모를 기록했기 때문에 진평왕의 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5)

 

이도학 교수

“반면에 선화공주의 경우는 선화공주의 자식이 왕이 된다든지 본인이 왕이 오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기록에 남겨질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식으로 우리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인물의 관한 기록 이런 것을 파악을 하고 받아들여야만 될 것 같습니다.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또는 틀린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택왕후의 등장은 사뭇 충격적이다. 명확한 역사적 진실 앞에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과연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였을까?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와 있는 서동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로 총25자의 짧은 노래다.

 

 

한자의 글자가 서동요의 핵심이다.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표기한 것으로 주어나 목적어 등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부분들은 뜻을 사용하고 조사와 같은 문법적인 요소는 음을 빌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다시 뜻을 해석해 보면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방을 밤에 무엇(卵)을 안고 간다네.” 대단히 개방적이고 과감한 사랑노래다. 어떻게 국경도 신분도 뛰어 넘는 파격적인 노래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신라사회의 성 풍속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있다. 적나라한 성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신라인들의 성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것은 신라사회가 남녀 간의 사랑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대단히 파격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유로운 성 풍속을 가진 신라 사회에서 진평왕은 딸의 연애를 문제 삼았던 것일까.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딸을 내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바로 이 한 글자에 있었다. 이 글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선화공주가 쫓겨났던 것일까. 삼국유사에서 같은 글자의 쓰임을 살펴봤다. 문맥상 이글은 황금란 6개 ‘卵生’이었다. 결국 이 글자는 卵자었다. 그렇다면 왜 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다시 한 번 노래를 들어보자.

 

“선화공주님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정을 통해) 두고 맛동방을(에게×2) 밤에 알을 안고 간다네(×2). 선화공주님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정을 통해) 두고 맛동방을(에게×2) 밤에 알을 안고 간다네(×2).”

 

밤에 알을 안고 가다. 대체 무슨 뜻일까.

 

정우영 교수(동국대 국문과)

“서동에 어떤 그 남성을 품고서 간다 품고 간다는 게 ‘포란’이라고 이렇게 되는데 포란이라는게 암탉이 알을 까는 것을 포란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선화공주를 암탉에 비유를 하고 그리고 그때의 알은 서동의 남성으로 생각을 하고 그러해서 그런 여성이 이제 성을 주도하는 입장에서의 그런 성행위를 한 다음에 궁궐로 간다고 해석을 한다고 보면…….”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일지라도 적국의 총각과 공주의 음탕한 소문은 진평왕을 곤욕스럽게 했을 것이다. 과연 서동요가 6C 후반에 지어진 것은 사실일까?

 

“이런 노래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악풀의 특성이라는 것이 어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이렇게 폄하하거나 또는 아주 어려운 궁지로 몰아넣거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인데 이것을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하고의 친연성이 없는 것이죠. 관계가 없는데 그렇게 지어질리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창작은 아마 그때 진평왕대로 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고의 미녀를 얻으려는 서동의 계략은 성공했다. 미륵사 창건의 주체로 사택왕후가 명확하다면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 또한 역사속의 인물일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택왕후와 선화공주는 역사 속에 공존하고 있다.

 

사리장엄구의 발견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미륵사 창건의 주체가 바로 사택왕비라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는 선화공주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조금 당혹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선화공주를 허구의 인물로 단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현재로서는 아직까지 선화공주를 부정할 그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 설화는 어떨까요.

 

 

삼국유사는 설화적인 요소가 많아서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다. 미륵사 창건설화도 그 중에 하나다. 미륵사가 있는 익산 그리고 인접한 김제 지역엔 유난히 금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실제로 이 지역 산자락에는 아직도 폐금광의 흔적이 수십 곳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개발된 금광이다. 해방후까지도 이곳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금광촌이었다.

 

송봉엽 김제시 금구면

“금이 많이 나왔다 이거야 많이 나왔어 여기서 나온 금이 소한마리 덩치는 된다고 그러지. 이 하천을 따라가면서 다 채굴을 해서 그렇지 금이 없는 데가 없어.”

 

 

그래서일까, 삼국유사 무왕전에 유난히 금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미륵사지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금관 관련된 특이한 유물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하나씩 들어 올린 황금빛 유물 그것은 금판이었다. 길이 8cm, 폭 1.5cm의 금판 18개. 그것은 시주품이었다. 삼국유사 무왕전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특이한 대화가 나온다.6) 서동이 말한 흙더미처럼 쌓였다는 금도 단순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논농사를 짓는 이곳엔 겨울이 되면 특별한 광경이 펼쳐진다. 바로 사금 캐는 현장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수십 년 체 사금을 채취해오고 있었다.

 

온운하(80, 김제시 금구면)

“금 안 나오는 지역이 없어요. 금구에서는 어디고 다 파면 금 나와요. 금구 금산... 두말할 것도 없어요.”

 

금구라는 지명 역시 금이 나는 도랑이란 뜻이다. 예전에 명성에 비하면 지금은 끝물이지만 여전히 논바닥엔 금가루가 있다. 며 차례 걸러내자 정말 모래 속에서 금이 나타났다.

 

“여기 노랗게 보이는 게 다 금이야!”

 

 

‘흙더미 쌓여 있었다’는 금, 그것은 금궤가 아니라 사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경은선(44, 김제시 금구면)

“뭐, 한 70년대, 80년대 그때는 굉장히 불야성을 이루듯이 많은 곳에서 이 근방은 거의 다 이렇게 사금을 채취했습니다.”

 

삼국유사 무왕전에 금이야기는 설화가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 교수(계명대학교 사학과)

“불교 사상적인 면 외에도 현실적인 재정확보를 한 측면을 상당히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금광개발인 것이죠. 금광개발을 통해서 이제 익산 경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한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를 찾아가는 길에 연못에서 올라온 미륵삼존을 만난 것으로 돼있다.7) 실제로 미륵사지 뒷산 벼랑위에는 사자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런데 ‘師’자가 스승사자가 아닌 동물인 사자를 의미하는 ‘獅’자를 쓰고 있었다. 삼국유사가 허구일까. 그런데 전주박물관엔 지난 1994년 사자사지 발굴조사 중 수습한 기와가 보관돼 있었다. 도공의 실수로 글씨가 거꾸로 찍었지만 지치 2년 즉 1322년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다. 스승사자가 쓰여져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자사는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절이었다.

 

 

그렇다면 연못을 메워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기록도 사실일까.8) 미륵사지 발굴조사가 시작된 1970년 미륵사터는 논과 밭이었다.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시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김선기(원광대 박물관)

“2·2.5미터 판 걸로 기억하는데 성토가 되어 있는 층이 있고 사찰을 짓기 위해 성토를 했죠. 그 아래에 뻘흙층이 나왔어요. 뻘흙층에는 갈대 잎 이런 것들이 섞여 있었어요. 그래서 연못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리고 또 이 땅속에서 나오는 물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결국 연못을 메워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가진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설화는 사실로 밝혀졌다. 삼국유사는 내세우는 선화공주와 사리기를 앞세운 사택왕후의 팽팽한 사랑 쟁탈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었던 겁니다.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사나이 서동 즉 백제 30대 무왕. 우리가 이 두 사람의 사랑의 진실을 알려면 무왕의 정체를 먼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법왕의 아들이다(法王之子)’라고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는 ‘용의 아들(池龍之子)’이라고 돼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연못가에 살던 어머니가 연못 속에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고 마를 캐며 살다가 서동요를 지어서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에 왕이 됐다.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요.

 

이곳 마룡지(전북 익산 금마면)는 용의 아들 서동이 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며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는 꽤 넓고 아늑한 평지가 있는데 집터로는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숙희(전북 익산 금마면)

“주로 저기에서 이쪽까지 있었어요. 띄엄띄엄... 크고 작은 돌들이 있고 주춧돌들이 큰 것은 이만하고 작은 건 좀 작고 깎지 않은 돌들도 많았고요. 그것을 우리 아버지가 옮겨서 건물밑돌로 쓴 상태라서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

 

아직도 건물의 흔적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인 법왕의 아들이 왜 사비 궁궐이 아닌 이곳에서 마를 캐며 살았을까. 또 가난한 과부의 아들인 서동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유사에는 법왕의 아들을 왜 용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노중국 교수

“서동이 즉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이건 서동의 출생에 뭔가가 다르다는 겁니다. 즉 법왕의 아들이 아닌 뭔가 또 다른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거죠.”

 

 

지난 2007년 10월 왕흥사에서 발굴된 창왕명 사리기. 우린 여기서 서동의 출생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서동의 큰 할아버지였다. 위덕왕은 먼저 죽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일본서기엔 위덕왕이 또 다른 아들인 왕좌 아좌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9)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좌태자. 그는 597년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태자를 그렸다는 왕자다. 그런데 그의 행보가 사뭇 불가사의하다. 그는 아버지 위덕왕이 73세의 고령인데도 일본으로 건너갔고 위덕왕이 사망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중국 교수

“위덕왕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자기 뒤를 태자가 잇는 게 당연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를 왜 보내고 보내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 이것은 자기 의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좌태자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위덕왕이 밀린 겁니다. ~~~ 실권 귀족들의 입장에서 봤을 땐 자기들 중심에 정치 운영을 하려고 하면 자기들 조정하기 쉬운 쪽이 낫겠다.”

 

위덕왕이 죽자 아좌태자 대신 고령의 삼촌 혜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하고 죽었다는 단 두 줄만 남긴 체, 일년 만에 사망한다.10) 그 뒤를 이어 혜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599년). 그가 바로 서동의 아버지 법왕이다. 그는 당시 귀족들의 눌린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왕자시절부터 대규모 호국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정책을 통한 강력한 왕권강화를 꽤했다. 그런데 법왕도 역시 재위 1년 만에 갑작스레 사망한다. 2년 사이 3명의 왕이 연달아 사망한 것이다.11)

 

“이거 뭔가 이제 법왕의 죽음을 에워싼 어떤 정치적인 변동이라 할까, 이런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법왕의 어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변고일 가능성을 재고해주는 이런 느낌을 진하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왕이 등극한다. 백제 30대 왕 무왕이다. 익산에서 마를 캐던 서동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서동 즉 무왕 그는 과연 법왕의 아들이었을까. 서동을 용의 아들로 기록한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도 의구심을 나타냈다. 다른 왕들은 누구의 아들임을 밝혔는데 유독 무왕만큼은 법왕의 아들이란 언급이 전혀 없다.12)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후대에 기록이라 정확성이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이곳 박물관엔 당대의 생생한 기록이 있다. 백제 말기에 왕실 가계를 알 수 있는 1차 자료, 바로 무왕의 손자인 부여 융의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당대에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왜곡이 있을 수 없다.13) 대개 망자의 내력과 증조할아버지까지의 가계를 써 놓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아버지 의자왕과 할아버지 무왕은 명확히 나와 있지만 증조인 법왕의 이름이 없다.14)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과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서동의 사연은 무엇일까. 복신과 도침을 모시고 있는 은산 별신당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을 이끌었던 백제의 영웅이었다. 무왕의 조카 복신장군. 백제 왕가의 성은 부여씨. 그러면 그의 이름은 당연히 부여 복신이다. 그런데 662년의 일본서기엔 그를 귀실복신이라 했다. 부여씨가 아니라 귀실씨였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었다. 흑치상지는 백제 출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의 묘지석에는 성씨 흑치에 대한 내력이 있다.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로 봉해지다. 결국 흑치는 부여씨에서 분화된 성씨라는 것이다.

 

노중국 교수

“한번 왕족이라 해서 다 위세를 누리는 것은 아닌 것이고 방계가 되거나 이러할 때에는 아무렇게도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소위 분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실에서 떨어져 나와서 별도로 성을 칭하는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왕은 백제 왕실에서 떨어져 나온 몰락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그를 법왕의 아들이라 했을까.

 

정재윤 교수(공주대 사학과)

“여러 가지 이설이 많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왕이 법왕의 적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면 법왕의 아들로 표시가 된 것은 뭐냐 왕이 다음 왕을 잇는다는 것은 적자개념이라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자식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몰락한 왕족 서동은 권력을 좌지우지하고자 했던 백제의 귀족세력에게 알맞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대신 융이라는 상징조작이 필요했던 무왕의 운명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기록하지 못한 일연스님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습니다. 미륵사 황금사리장엄의 발견으로 삼국유사 무왕조에 실린 미륵사 창건 설화가 사실임이 입증됐습니다. 헌데 왜 무왕은 삼국을 통 털어서 가장 거대한 사찰인 미륵사를 수도인 사비성이 아닌 이곳 익산에 세웠던 걸까요. 그리고 왜 그는 이 거대한 사찰에 미륵불을 모셨던 걸까요.

 

 

미륵불은 과거의 부처인 석가모니불과는 달리 중생들을 고통해서 구해줄 미래불이다. 그래서 미륵불은 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이곳 도솔암 미륵불은 세 세상을 염원하는 이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미륵불 배꼽 속에 비결이 나오는 날 세상이 뒤집어 진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미륵불은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야였던 반면 새로운 통치세계를 꿈꾸었던 지배자는 중생들에게 자신이 미륵불로 비추어지기를 바랬다.

 

 

무왕이 구지 수도 사비가 아닌 익산에 웅장한 규모의 미륵사를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미륵이 출현했다고 하면 미륵이 출현한 그 시대의 자체는 곧바로 대단히 그 이상적이고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백제 왕실에서는 한쪽으로 그런 이상세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집권하고 있는 시절 자체가 그런 시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정치적인 의도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미륵 신앙을 창건 이념으로 담고 있는 미륵사.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엔 의외의 단어들이 나온다. 석가모니불을 지칭하는 법왕과 그의 사리를 모신다는 글이 주된 내용이다.

 

조경철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번에 나온 곳이 미륵사 서탑이기 때문에 미륵신앙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언급되지 않은 게 상당히 특징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에 이 사리봉안기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미륵불신앙과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고 석가불 신앙과 연관을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택왕후는 남편 무왕의 통치 이념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사택지적의 이름 지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화경 중 화성유품 편에는 16왕자 추가 구절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 16번째 왕자가 사바세계 오신 석가모니불이다. 그런데 이 석가모니불에 큰 형님 이름이 지적이다. 사택왕후에 집안 사택지적 그는 석가모니불의 형님인 智積 불을 지향하고 있다. 사택지적비에도 사택왕후 집안의 사상적 지향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금으로 세운 불당과 옥으로 세운 보탑 이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寶塔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곳 불국사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쌍탑이 유명하다. 동쪽에는 다보탑 서쪽에는 석가탑을 배치하는 것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화사상의 기본배치구도다. 백제 최고의 지배층이었던 사택씨 집안은 석가모니 신앙을 통해 지배구도를 유지하려 했던 세력이었다.

 

조경철 박사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가운데 탑은 미륵신앙에 의해 형성된 탑이고 동서 쌍탑은 법화신앙에 의해서 쌓여진 탑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미륵사는 왕권강화를 꿈꾸었던 무왕의 통치 이념의 결정체였고 미륵사 창건과정은 기존 귀족세력들을 끌어안은 구심점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렇게 미륵과 법화가 혼재되어 있는 것은 미륵불을 표방하여 정치적 이상을 삼고자 했던 백제무왕과 대표적 귀족가문인 사택씨의 법화신앙을 하나로 융화시켜서 무왕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상적 통합과 정치적 결속을 이루려고 한 거 같습니다.”

 

미륵사를 통해서 안정적인 내부통치를 확립했다면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적대국 신라와의 화해 책이었다. 백제와 긴장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600년대 들어서 고구려의 침략까지 받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렸던 신라는 백제까지 가세한다면 협공을 받는 양상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무왕은 재위 40여 년간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런데 집권 초 10년간은 신라 공격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선화공주와 무왕의 결혼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도학 교수

“신라의 왕녀를 안으로 맞아 드리므로 일반 귀족세력들을 제압하고 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할 수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백제하고 원수 관계가 된 상황인데 백제하고 그런 휴전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죠. 결혼관계를 통해서 대신 그것으로 인해서 덜어지는 국력을 고구려하고의 전쟁이라든지 고구려와의 어떤 싸움으로 모든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화공주와 서동의 결혼의 진실은 신라와 백제의 화해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신라와 백제는 5C 후반에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동맹을 맺어 나제연합방위선을 구축했었고 493년에는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의 딸이 결혼하는 결혼동맹을 맺은 경험이 있었다.15) 신라와 백제 사이에 가장 긴장이 고조됐던 553년.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잃은 성왕은 바로 그 해에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 신라와 백제에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져 성왕은 신라군에 잡혀 참수 당했다.16)

 

노중국 교수

“무왕하고 선화공주 결혼은 이것은 국제결혼입니다. 왕실과 왕실간의 결혼이었거든요. 이것은 애정의 결혼이 아닙니다. 정략적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필요성은 언제 생기느냐, 대개는 평화 시보다는 서로가 굉장히 갈등과 긴장관계가 고조되어질 때 그것을 완화시키는 완충제의 방법으로써 결혼이 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선화공주와 서동, 적대국의 왕과 공주의 결혼, 그 아름다운 결합은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긴장완화책이었던 셈이다.

 

“우리 고대사 같은 경우는 워낙 자료가 적기 때문에 설화적인 애기들 전부 설화다. 이런 식으로 내팽개쳐서는 저는 상당히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 설화 속에는 뭔가 역사적 현실이 꼬투리가 되어 가지고 이제 그것이 약간 살이 붙어 나가는 그런 모습으로 봐야지 완전히 설화로 허구적인 것으로 이렇게 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무왕조의 얘기는 백제사 자체를 전체적으로 이해를 할 때 상당히 뭔가 좀 꿈을 심어준다고 할까 윤기를 내게 하는 그러한 면도 갖고 있는 것이죠.”

 

용의 아들 서동 그리고 당대 최대 미인 선화. 두 사람의 사랑이 1400년 넘게 이어진 것은 비극의 역사의 마침표를 찍고자 했던 신라와 백제인들의 소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견을 통해 1400년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사택왕후. 그녀는 선화공주의 사랑을 허구로 만든 논란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1400년 전 백제인들의 삶과 사랑 격동의 역사를 오늘의 되살려준 소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선화공주와 서동.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아름다운 사랑의 대서사시로 꽃피운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 서동요. 서동과 선화에 대한 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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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眞平王遣百工助之’ 진평왕이 공인들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 삼국유사.

2) ‘금을 뚫어 진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탑을 바치니...’

3) 조선고직도보 1917년.

4) ‘선덕왕의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큰딸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5) ‘태종무열왕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태종무열왕 원년기사.

6) ‘내가 마를 캐던 곳에 금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다.’

7) ‘… 欲幸師子寺 …’ … 사자사에 가려고 … 삼국유사 무왕전.

8) ‘하룻밤에 산을 깎아 연못을 메웠다’ 삼국유사 무왕전.

9) 일본서기 추고천황 5년.

10) ‘혜왕의 이름은 계이고 성왕의 둘째 아들로 창왕이 죽자 즉위. 즉위 2년에 죽으니 혜왕이라고 함.’ 삼국사기 백제본기.

11) 위덕왕 사망 598년.

혜왕 사망 599년.

법왕 사망 600년.

12) ‘무강왕 또는 헌병왕이라고도 하며 어렸을 때 이름은 일기사덕이다.’

13) ‘공의 이름은 융이고 호도 융이다. 백제의 귀인이다.’

14) ‘부여융의 할아버지 장은(무왕) 백제국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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