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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캐는 황색광부 첸바오(Yellow Digger Chan Bao) / 호주 서범석
멜본으로 가는 길
“저쪽에 짐승 떼들이 무엇을 먹고 있다” 앞서 가던 옝옝이 소리쳤다.
허기로 탈진상태에 있던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는 물체를 응시했다.
분명 짐승 떼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이지만 거리가 멀어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자세를 낮추고 숨죽여 가까이 가 보니 십여 마리가 넘는 사납게 생긴 짐승 떼가 피범벅이 된 시뻘건 입으로 으르렁거리며 게걸스럽게 사냥감을 뜯어먹고 있었으며, 뜯어 먹히고 있는 송아지만한 짐승은 마지막 단말마를 지르며 숨을 거두고 있었다.
저것들만 쫓으면 포식을 하리라는 기대로 모두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저것들이 먹고 있는 것을 뺏자. 모두 몸을 낮추고 몽둥이를 단단히 쥐어라”
첸바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어제저녁 아껴먹던 미숫가루와 말린 육포를 마지막으로 물로 허기를 달래던 그들에게 풍겨오는 피 냄새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기대로 온 몸을 떨었다.
이들이 개떼로 알고 있던 것은 호주에서 제일 사나운 짐승 딩고(Dingo)로 원주민들조차 만나면 도망쳤던 맹수인줄을 모르고 무기도 없이 몽둥이로 잡겠다고 나선 무모함이 곧 들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몽둥이를 들고 고함을 치며 돌진해 갔다.
일행의 숫자도 열두 명으로 이들이 달려들면 딩고 떼가 도망치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주춤하더니 오히려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첸바오는 다급했다.
“원을 그려 등을 맞대고 삥 둘러서라”
일행은 얼떨결에 등을 기댄 체 둥글게 서서 달려드는 딩고 떼와 맞섰다.
“흩어지면 죽는다. 저것들이 달려들면 머리를 겨냥해서 힘껏 때려라”
첸바오는 만주 벌판에서 만났던 늑대들의 습격을 떠 올리며 소리쳤다.
할루빈 금광에서 일하다 귀향길에 탄 마차가 외딴 만주벌판에서 수많은 늑대들을 만났었다. 그 당시 늑대로 인한 인명 피해가 극에 달했던 때로 이들을 만나면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모두를 사색이 되어 늑대 떼를 따돌리기 위해 말 엉덩이가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했고 쫓아오는 것을 포기시키려고 두 필의 말 중 한 필을 풀어 늑대들에게 먹이로 주고 시간을 벌었지만 순식간에 말을 먹어 친 후 또다시 쫓아왔다. 발 빠른 한 놈이 말 등에 타더니 말목덜미를 물자 힘없이 쓸어 졌고 타고 있던 십여 명의 승객들을 내 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때 마부가 소리쳤다. “모두들 몽둥이 하나씩 들고 등을 기댄 채 둘러서서 대항을 해라”고 지시하며 한 자루 밖에 없는 총을 쏘면서 고함을 쳤고, 열심히 몽둥이를 휘둘러 대항 하던 중 제일 덩치 큰 늑대를 총을 쏴 죽여 목숨을 건졌던 일을 떠 올려 급히 대오를 갖추게 하고 맞선 것이다.
“아이쿠”
“깨갱”
아비규환이 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넘어지고 다치는 피바람이 이어졌다.
첸바오도 있는 힘을 다해 달려드는 딩고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치면서 덩치 큰 놈을 찾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챙이 비명을 지르며 쓸어 졌지만 눈 길 조차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유난히 큰 놈이 앞에 나타났다. 이놈이 우두머리라는 직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내려쳤다.
“깽 캑”
등치 큰 놈이 정통을 맞아 고꾸라지니 달려들던 다른 놈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흩어지지 말고 계속 몽둥이를 휘둘러라”
동료들에게 외치면서 앞을 보니 꽁무니를 빼는 놈들이 보였다. 첸바오에게 맞아 쓸어 진 놈이 딩고 떼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우두머리의 죽음으로 전의를 잃고 물러선 것이다.
그때서야 쓰러 진 챙을 보니 목덜미는 피가 낭자 했고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챙 정신 차려라.”
첸바오는 챙의 상처가 너무 깊어 손쓸 수 없음을 알고 가만히 눕혀 논 채 마지막을 기다리며 두 딸을 잡혀 뱃삯을 만들어 온 챙 가족의 앞날을 생각했고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젖먹이 딸 옌칭과 아내 뚜이띠엔을 떠 올렸다.
다행히 챙 외에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딩고가 사냥한 것은 어미 캥거루로 내장은 거의 파먹었지만 싱싱한 고깃덩어리를 얻게 되어 안도하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기 덩어리만 챙겨라. 또다시 딩고 떼들이 몰려올지 모르니 서둘러야 한다.”
챙의 주검을 슬퍼할 틈도 없이 모두들 허겁지겁 달려들어 살덩어리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저놈의 살코기도 뜨자.”
첸바오는 옆에 있는 옝옝의 도움을 받으며 몽둥이에 맞아 기절한 딩고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가죽을 버끼고 살점을 베어냈다.
“자 이젠 그만 하고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자.”
숨을 거둔 챙의 돌무덤을 남긴 채 일행은 재빨리 바닷가 길로 Melbourne을 향해 달려갔다.
NSW주에 있는 Blue Mountain은 유칼립터스(컴츄리)에서 뿜어 나오는 가스로 인해 멀리서 보면 산이 하늘색으로 푸르게 보여 1788년 Philip총독 때 붙여진 이름인데, 당시 이민자들과 죄인들은 그 산을 넘으면 어떤 세계가 있을까 궁금히 여겼으며 꼭 기름지고 강물이 흐르는 평야가 있을 거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1802년 군인 Francis Balladier이 길을 잃고 Blue Mountaiun 동쪽 기슭을 헤매다 Jenolan동굴을 발견되자 그 곳에는 미지의 낙원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더욱 더 탐험하려는 욕구가 생겼다.
그 때 시드니 서부 Windsor 와 Richmond에서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인구가 점점 늘게 되자 더 많은 농토의 필요성을 느껴 모두들 산 반대쪽을 탐험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해발 1000고지가 넘는 거대한 산을 넘을 수 가 없어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Blue Mountain은 높은 고지뿐 아니라 남북으로 수백 킬로 퍼져 있으며 숲이 우거지고 거대한 암벽으로 가로 막혀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1813년 심한 가믐으로 농사뿐 아니라 가축까지 잃어버린 Gregory Blaxland와 William Wentworth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육군 중위 Lawson과 원주민 등 4명이 개 5마리와 말을 가지고 도전, 3주 만에 산정상 정복에 성공했으며, 산을 넘고 보니 넓은 평야가 펼쳐있고 푸른 강물이 흐르는 낙원, Bathurst 평야가 눈앞에 펼쳐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Katoomba를 통과해서 Bathurst까지 가는 Gteat Western Highway를 만들기 위해 blue Mountain기슭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일하던 죄인이 금덩어리를 발견하였으나, 오히려 쓸데없이 꾀만 피었다고 매질을 하고 보고조차 하지 않았는데, 미국의 광산기술자가 이곳에 들려 매장량이 많은 것을 발견하고 식민정부에 개발을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금광 발굴에 박차를 가했고, 이어 Victoria주에도 여러 군데 큰 금광이 발견되자, 이 소식이 세계 각국으로 퍼졌으며 일확천금을 노린 광부들이 유럽 전역과 중국 등지에서 모여 들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광부들은 더럽고 게으른데다 난폭하기까지 하여 이들이 있는 곳은 미국서부영화에 나오는 무법천지와 같았으며 금광을 하다가도 금이 안 나오면 쉽게 포기했고, 금이 나오면 주색잡기로 모두 써 버려 빈털터리로 그 날 그 날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중국인들은 유럽광부들이 포기한 폐광을 아주 싼 값에 사서 끈기와 꾸준한 노력으로 열심히 일을 해 결국은 금을 캐어 돈을 벌어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했다. 이런 꼴이 보기 싫고 질투심이 생긴 유럽인광부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정부에 항의를 하자 중국인들을 속박하는 법이 속속 통과되고 그래도 계속 들어오고 있는 그들의 입국을 막으려고 10만 파운드의 거액을 입국세로 부과시켰던 것이다.
첸바오 일행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처자식을 담보로 빚을 내어 뱃삯만 준비해서 홍콩을 출발 Melbourne에 도착하니 입국을 하려면 10만 파운드를 내라는 것이며 “10만 파운드는 집 한 채 값이다.”라는 선장의 말을 듣고 모두가 사색이 되어 몸부림 쳤다. 한 달 동안의 항해를 미숫가루와 육포로 연명했으며 그나마 남은 식량이 일주일도 견디기 어려운 실정인 이들에게 10만 파운드를 내라는 것은 바로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이제 다 죽었구나.”
첸바오는 넋을 잃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난간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어린 딸과 아내를 생각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역경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했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죽음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므로 옝옝을 불러 의논했다.
“옝옝,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옝옝은 입술을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선장에게 매달리는 길 밖에 없는데, 순순히 들어 줄 것 같지 않고....”
기운 없이 말하는 첸바오를 바라보던 옝옝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 길 밖에 없는데, 목숨을 걸고 떼를 써보자.”
“그렇다! 모두 모이게 해서 선장에게 간청해 보자.”
첸바오는 초주검이 되어 고개를 숙인 일행을 모아놓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니 선장에게 가서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고 애원하되 들어 주지 않을 경우 모두 자살을 하자. 그러기 위해 목맬 든든한 끈을 하나씩 준비하고 다시 이 자리에 모여라.”
중국 각지에서 모여 든 그들이지만 한 달 넘게 항해하는 동안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앞장 서 해결하던 첸바오를 모두들 믿고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실을 노크하자 월리암선장이 그늘진 얼굴로 문을 열다가 놀라며
“그 끈은 무엇이냐?”
“이 끈으로 모두들 자살을 하려고 하니 우리들이 죽으면 깊은 바다에 던져 장사 지내 주세요.”
서투른 영어지만 첸바오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우리 실정을 선장님께서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해결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세요.”
선장은 말없이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첸바오를 선장실로 불러 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나 그 방법이 더 큰 고통이고 죽음길인지도 몰라 고심했는데 너희들이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다면 그 길을 택해 보거라”
그 방법이란 입국세가 없는 남부 호주, 지금의 Adelaide에 상륙해서 길도 없는 황무지를 걸어 Victoria주 Melbourne까지 가라는 것이다.
Adelaide와 Melbourne은 직선코스로 700km인데 길이 없으므로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 1000km가 넘는 거리이며 걸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해 보겠냐며 눈치를 살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Adelaide에 상륙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선장의 말을 전하니 모두들 찬성했다.
배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Adelaide근처 바닷가에 이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Melbourne인데, 한 달 이상 걸릴 각오를 해라.”
거센 파도소리와 함께 월리암선장의 마지막 말도 휩싸여 갔다.
죽음의 골짜기를 가다.
“지금 우리는 길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다. 물도 아껴 마시고 주위를 살펴 먹을 수 있는 것을 마련하면서 가되 두 발짝 이상 떨어지지 말고 이동하여라. 앞장은 내가 선다.”
첸바오는 비장한 각오로 일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변을 끼고 이동했으나 먹거리가 떨어져 나무 열매 등을 구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딩고 떼를 만난 것이다.
딩고로 부터 먹이를 뺏은 그들은 기운이 다할 때까지 달리고 달려 딩고들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후미진 바닷가 그늘진 곳에 자리잡고, 각자 가지고 온 살코기를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 바위에 말린 후 부싯돌로 불을 만들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오늘은 여기서 잔다. 땔 나무를 충분히 준비해라. 불이 꺼지면 딩고들의 습격을 받으니 교대로 자면서 불침번을 서야 한다.”
옝옝이 불침번 순서를 정해 주고 충분한 땔감을 쌓아 놓았다.
이제 남은 인원은 열한 명, 하루에 40킬로씩 이동한다고 해도 한 달을 가야 하는 Melbourne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Melbourne에 가면 돈 벌이를 한다는 보장도 없다. 먼저 가 있는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받아 줄지도 모른다. 믿는 구석은 1년 전 간 어릴 적 친구 타오 뿐인데 사는 곳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말자 지금은 살아서 Melbourne까지 가는 것뿐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지면서 첸바오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첸바오 큰 일 났다.”
옝옝의 다급한 소리에 잠을 깬 첸바오는 놀라고 말았다. 수많은 파란 불빛이 사방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것은? 딩고 떼다. 모두 일어나 불을 더 집혀 밝혀라.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불 주위를 둥글게 둘러서서 고함을 질러라.”
“덤벼라 놈들아.”
“저리 가라. 야앗 이놈들.”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새파란 눈빛들의 숫자는 점점 늘고 있었다.
“나무를 더 많이 넣고 불붙은 나무를 하나씩 쥐고 휘둘러라. 그리고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쳐라.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대항해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뚫어져라 어둠을 응시한 충혈 된 눈빛들은 살기가 넘쳤다. 이 때 짐승 떼 근처 마른 풀 더미를 본 첸바오는 재빨리 불붙은 나뭇가지를 던졌다. 첫 번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는 정확히 풀 더미에 떨어져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있는 주위의 숲을 태워라. 더 많은 불덩이를 던져라.”
모두들 불붙은 나무를 던지기 시작했고 숲은 타 들어갔다.
“옝옝 너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나무를 넣어라, 불이 꺼지면 우린 죽는다.”
숲이 타 들어 가니 그 많던 짐승 떼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먼동이 트고 아침햇살이 따가워 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그들은 모두 잠에 빠지고 말았다. 새소리에 놀라 잠을 깨니 갈매기 떼들이 바위에 말려 논 살코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야! 이놈들아!”
악을 쓰면서 달려가 흐트러진 살코기를 갈무리하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후 바닷길을 택해 걸었다. 해안 절벽을 만나면 언덕을 넘고, 내려 쪼이는 강렬한 햇볕의 시달렸고, 이름 모를 벌레 떼들의 습격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해안 길은 조개, 해조류 등 먹을 것이 많아 줍고 뜯어내어 등짐에 넣으면서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각종 씨앗 이외에 각자 가지고 있는 칼, 바늘과 실, 낚시 바늘. 불씨 만드는 기구, 수저, 수통, 밥그릇, 냄비와 약간의 소금과 조미료가 있어 먹을거리가 있으면 순식간에 요리를 만들고 낚시로 물고기를 잡을 경우 조개와 해조류를 넣고 맛있는 해물 찌게까지 해 먹을 수 있다.
호주원주민 아브라진을 만나다
“저기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
앞장섰던 츄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주춤했다.
살펴보니 분명 사람 같아 모두들 목소리를 죽이고 살펴보았다.
대 여섯 명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도 있었다. 긴 장대를 가진 남자들이 바다를 향해 찍어 낼 때 마다 고기가 잡혀 올라오고 여자와 아이는 바구니에 담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 왔다.
“원주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원주민들은 온순해서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웃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보자.”
첸바오의 말을 듣고 손을 흔들면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꿱! 하는 이상스런 소리를 지른 그 들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멈춰 서서 웃는 몸짓으로 친근함을 보여 주었다.
한참이나 쳐다보던 원주민 중 한 명이 웃으며 손짓을 하면서 말을 걸어 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나 환영의 뜻인 것 같아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갔다.
호주에 오기 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는 홍콩에서 흑인 또는 백인의 모습을 많이 보았지만 이곳 원주민들 모습을 보는 순간 모두들 깜짝 놀랐다. 헝클어진 머리, 넓적한 코, 볼품없는 못생긴 얼굴, 빠진 앞니 등 그 몰골이 낯설었으나 선한 눈으로 웃는 모습은 순진한 어린애를 보는 것 같다.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바구니 비슷한 그릇에 제법 큰 물고기가 여러 마리 들어 있었다. 고기 잡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손짓 발짓을 했더니 눈치를 챘는지 씩 웃고 끝이 뾰족한 장대를 높이 쳐들고 물속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원주민 발 근처에 작은 물고기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의아해서 살펴보니 털 뽑힌 죽은 갈매기 한 마리가 원주민 발에 묶여있어 이것을 작은 물고기들이 뜯어먹고 있는 중이다.
얼마 있으니 큰 물고기가 쏜살같이 달려와 작은 물고기를 삼키려 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장대가 날아갔다. 몇 번 실패를 한 다음 큰 물고기 하나를 찍어 내는 재빠른 손놀림이 대단해서 박수를 치며 칭찬을 하니 씩 웃었다.
마침 가는 방향이 같아 함께 가면서 이들이 살아가는 지혜, 이동할 때 불을 꼭 가지고 다니는 것, 밤에 바람을 막을 정도로 나무나 나무껍질로 엉성하게 만들어 자는 것 등을 배우면서 3일을 같이 다녔다.
당시 원주민인 Aborigine들의 생활은 자연환경에 의존해서 살았으며, 강이나 바닷가에 살던 원주민들은 바다의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기도 하고 어떤 부족들은 뱀장어를 길러서 먹었다.
이들은 유칼립터스 나무에 노란 꽃이 피면 봄이 온 것을 알고 꽃이 떨어지고 추우면 겨울이 된 것을 알 뿐이다.
원주민들은 바다의 물고기 보다는 육지의 짐승을 잡아먹는 것을 좋아했고, 풀이나 나무 씨앗을 맷돌로 갈아서 만든 가루로 빈대떡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야생 꿀을 발라 먹었다. 그 외에 닭고기 맛과 비슷한 도마뱀을 잡아먹는 법, 캥거루, 왈로비, 포슘, 비단뱀, 조개, 게, 굴, 새알, 거북이 알, 날아다니는 박쥐, 나무속의 곤충애벌레 등을 잡아 생식으로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원주민들은 애들을 다리고 다니면서 사냥을 가르쳤는데 이것을 보고 첸마오 일행도 사냥기술을 익혔으며, 글씨는 없지만 그림으로 서로 의사 표시를 잘해서 그들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그들과 작별을 하고 이동하면서 원주민과 같은 방식을 따르니 견디기가 수월해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들 원주민들은 약 2만 년 전 해빙기가 시작되면서 해면이 약 200여 미터 상승하게 되자 아시아 대륙과 호주대륙 사이의 연결이 끊겨 대륙으로부터 완전 고립상태에서 호주 전역에 흩어져 수천 년을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뺏은 캥거루 살코기와 원주민으로부터 배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곤충 채취와 낚시로 얻은 물고기로 굶주림을 면한 일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3주 넘게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가 어울려진 바닷길을 묵묵히 걷던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우뚝 서고 말았다.
멀리 보이는 백사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아! 저기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풀숲에 몸을 숨겼다.
“이런 곳에 웬 사람들이지?”
첸바오는 긴장하면서 움직이는 물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서서 걷고는 있으나 걷는 모양이 좀 이상스럽게 뒤뚱거리고 있는 것 같아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등은 까맣고 배는 하얀 작은 짐승들이 서서 걷기도 하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면서 어울리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 앞에 아연해 넋을 잃고 말았다.
“저것은...”
Melbourne지역에 서식하는 펭귄들을 본 것이다.
이 펭귄은 현재 멸종 위기에 있어 특별히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몸통이 작아 요정 같이 보인다고 페어리 펭귄(Fairy Penguin)이라고 한다.
펭귄을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방해를 하지 말고 돌아서 가자”
첸바오는 일행을 이끌고 수풀언덕을 힘겹게 올라 정상에 이르니 넓은 벌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굴뚝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Melbourne에 도착한 것이다.
“이젠 살았다. 들키면 잡힐지도 모르니 근처 숲 속까지 몸을 숨겨 다가가자”
첸바오의 말에 따라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죽여 움직였다.
Melbourne에 발을 붙이다.
판잣집과 움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첸바오는 혼자 몸을 사리면서 동네로 내려가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 일터에 나갔는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동네는 쓰레기 처리장 보다 더한 냄새가 진동했다. 조금 가니 사방에 오물과 인분이 뒤엉켜 있는 더미를 뒤지고 있는 송아지만한 개가 이쪽을 흘깃 보더니 관심을 두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경계태세를 취했던 첸바오는 멀쑥한 기분으로 동네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을 찾던 중, 옷을 벗고 쭈그리고 앉아 이를 잡고 있는 검정머리가 보였다.
인기척에 놀라 뒤 돌아 보는 맥 빠진 초라한 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마타오. 티오가 맞지?”
너무나 반가워 기절할 뻔 했다.
“우첸바오. 첸바오 네가 어떻게...”
둘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타오를 만나는 일이 제일 시급한 일인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어 앞날에 서광이 비치리라는 기대로 용기가 났다.
첸바오와 타오는 1832년생 동갑으로 황하강 하류 작은 강가 동네에서 자랐다.
큰 홍수로 전답이 떠내려가 함께 광산 노동자로 떠돌다가 홍콩까지 내려와 어렵게 살던 중, 이 년 전 타오가 금광 붐이 일어난 호주에 가기 위해 홍콩을 떠 날 때 곧 뒤따라간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 동안 연락도 못하다가 Melbourne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타오라니 꿈만 같아 서로 마주보며 눈물 반, 웃음 반으로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첸바오야! 어떻게 들어 왔니? 요즘 입국세를 받고 있어 우리 동포들이 들어올 길이 막혀 버렸는데...”
“목숨 걸고 왔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고 여기까지 오는 도중 딩고 떼와 싸우다 한 명이 죽었지만 열 한 명은 살아남아 저 쪽 숲 속에 숨어 있는데 은신처부터 마련해 다오.”
“열 한 명이라니. 큰 일 이구나.”
타오는 난처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숨어있을 장소를 생각해라. 이 근처 숨을 만한 굴은 없는지?”
타오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앞장 서 후미진 산속으로 달려갔다.
“저 쪽에 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가보고 결정하자.”
타오를 쫓아 가 보니 폐광으로 방치된 굴인데 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실 수 있는 물이냐?”
“그렇다. 여기서는 저런 물을 마시고 산다.”
안을 살피니 20 명 정도는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가 숲으로 가려져 있어 사람 눈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로 적합했다.
“됐다. 여기로 정하자.”
“먹을 음식은 가지고 있겠지?“
Melbourne까지 오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간추려 얘기하고 난 후, 타오와 헤어져 일행이 있는 숲 속으로 향했다.
마음조리며 기다리던 일행은 첸바오를 보자 다가왔다.
“살 곳을 마련했다. 작은 굴인데 우리들이 숨어 있을만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지금 즉시 그리로 이동하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나누어서 따로따로 가자.”
일행은 지녔던 짐을 챙기고 삼삼오오 따라 나섰다.
각자 가지고 다니는 보따리는 적어도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과 각종 살림도구가 간직되어 있는 보물창고인 것이다.
폐광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자 각자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자리 준비, 취사할 화덕 준비, 굴 밖 후미진 곳에 변소까지 마련하느라고 분주히 움직였다.
각자 맡은 일을 어김없이 마치고 풍성한 식사로 포식 한 후 꿈나라로 빠져 들었다.
“어젯밤 잘들 잤냐?”
이른 아침 타오의 목소리로 일어난 일행은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금 일 가는 길이다. 나는 현장 소장 집에서 잡일을 해 주고 있다. 너희들 일자리는 한꺼번에는 힘들고 한 사람씩 마련해 보려고 한다. 광산 일은 불가능하고 우선은 광부들 집의 빨래, 청소 등을 하는 잡일부터 해야 한다. 좀 시간이 걸리니 그 동안 기름진 땅을 골라 밭을 만들어 채소농사를 해라. 이곳은 채소가 아주 귀하므로 생활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은 많은 씨앗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
첸바오는 마음을 써 주는 타오가 믿음직스럽고 고마워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침을 해 먹고 농사를 지을 밭을 일구자”
옝옝이 신이 나서 일행을 이끌었다.
폐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굴에서 나온 돌과 흙을 쌓아 놓았던 돌무더기를 치우고 살피던 옝옝이 밝은 얼굴로
“땅이 기름지고 습하다. 농사짓기 좋은 땅이니 이곳부터 개간하자.”
그리고 작업지시를 했다.
“돌을 가장자리로 옮겨 돌담을 쌓아라. 바람막이가 될 뿐 아니라 야생동물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
농사 경험이 있는 옝옝의 지시를 모두들 열심히 따랐다.
일주일 걸려 돌을 치어 담을 쌓고 보니 크지는 않았지만 일행들이 먹을 채소를 심을 만한 훌륭한 텃밭이 되었다. 의외로 땅이 기름지고 폐광에서 흐르는 물을 담을 웅덩이까지 만들고 보니 용기가 생겨 더 많은 땅을 개간하여 내다 팔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가지고 온 씨앗을 파종했다.
배추와 파, 부추 등 각종 채소를 심은 나머지는 밀을 심었는데, 내년에 밀농사를 할 종자씨앗을 얻기 위해서다.
한편 폐광 곳곳에 철사를 발견한 응우가 눈을 반짝이며 철사를 꾸부려 올무를 만들더니 “올무를 많이 만들어 숲속을 다니면서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설치해 두자.”고 제안하고 모두에게 올무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살 길이 보여 모두의 눈은 빛났으며 희망에 차 많은 땅을 개간하는데 힘을 쏟고 틈을 내어 많은 올무를 만들어 설치했다.
땅을 개간하면서 나무뿌리, 연한 풀들을 가려서 시식 해 보고 먹을 만한 것을 찾는 일에도 힘쓰고, 가지고 온 캥거루, 딩고 고기와 심심치 않게 올무에 걸려든 토끼가 많아 항상 푸짐한 식단을 꾸밀 수 있었다.
천대받는 중국인들
Victoria주는 광산 노동조합들의 횡포가 극심해져, 중국인들의 고용을 막아 이들은 허드렛일로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노동력이 부족했던 다른 주에서는 중국인들을 받아 들였다.
호주 북부 Darwin에서 Pine Creek까지 철도를 건설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하여 중국인 3천명을 고용하여 철도를 놓아, 열악한 기후 조건이었지만 Darwin쪽에 많은 중국인들이 정착하게 되었으나 Victoria주처럼 차별 대우를 받지 않아 마음 놓고 살았다.
그러나 Victoria주의 금광주들은 싼 임금의 중국인 광부를 쓸 수 없게 되자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고전을 하는데 임금이 높은 백인 광산노동자들의 잦은 파업으로 곤란을 겪자 정부에 건의하여 1854년 홍콩에서 중국인 광부 3천 5백 명을 데리고 왔다. Victoria주에서 규모가 제일 컸던 Bandingo금광의 경우, 광부 1만 5천 명 중 중국인이 2천 명이나 되었다. 이런 중에도 계속 중국인 광부들이 들어와서 위협을 느낀 유럽광부들은 중국인들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856년에는 중국인 광부가 1만 5천으로 급증하자 백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중국인들은 물을 너무 쓰고 있어 먹을 물이 부족하다’ 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했다.
데모가 폭력으로 변해 첸바오 일행이 오기 2년 전 Victoria 주 버클랜드에서 중국인 숙소를 불태우며 닥치는 대로 중국인들을 죽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식민정부는 주동자 한 명만 겨우 9개월 징역형을 주면서 오히려 백인들 편에 서서 중국인들이 받는 박해를 모르는 척 해 버렸다.
영국식민정부는 중국인광부를 백인광부들의 견제용과 저임금용으로 써 먹으면서 경멸하고 핍박을 주어 백인들에게 환심을 사는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이런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계속 중국인들이 몰려 든 것은 중국 황하 유역의 범람으로 매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여, 거리에는 살길을 찾아 헤매는 꾸리(거지)들이 길거리에서 생활했으며 돈 버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백인들의 박해가 극에 달하자 중국인들도 ‘중국인연맹’을 만들고 ‘왜 우리 중국인에게만 세금을 10파운드를 물어야 하는가? 중국인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호주에 공헌하고 있으며 우리들도 인간이다. 우리도 호주 법을 잘 지키며 영국인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인과 같이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항의하자 오히려 불법데모를 했다고 주동자를 전원 구속시켜 버렸다. 그 이유는 중국인들은 돈을 벌어서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가며 호주에는 집을 사거나 농토를 사지 않으므로 호주로서는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인들은 그럴 돈이 없어 집과 땅을 살 수가 없었다.
광산에서 일을 해야 몫 돈을 만지는데 광산노동조합에서는 중국인들의 채용을 막아 대부분 백인 광부들의 옷을 빨아 주고 수선하는 일, 나무를 자르는 일과 같이 저임금 허드레 일에 종사했으며 극소수만이 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 폐광시킨 금광을 인수해서 일을 했지만 큰돈을 만들지 못했다.
더구나 1890년 호주 언론은 중국인들이 호주에 오면 안 되는 이유로 저임금으로 백인들의 직업을 좀 먹어 가고, 돈을 벌면 첩을 얻기 때문에 남녀평등의 사상이 없어지며 위생관념이 없어 전염병을 옮기고 모두 아편 중독자이며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다고 나열했다.
특히 호주 노동조합(Union)은 아시아인들의 이민을 적극 반대 하였는데,
첫째, 아시아인들은 미개하여 노동을 신성화하지 않아 노동을 신성화하는 백인사회에 암적 존재가 된다.
둘째, 백인들이 사는 곳에 유색이종이 사는 것은 백인들의 사기문제로 자존심을 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민 대상을 영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사람으로 정하고 이들을 데려 올 때는 오히려 정부에서 이민비용 전액을 보조해 주었던 것이다.
광산노동조합은 물론 양털깎기 노동조합 등 각 조합에서는 중국인을 쓰지 못하는 규례를 만들었고 물건을 만들어도 백인이 만든 것은 백인이라는 표시를 해 놓고 그것만 쓰게 하고 중국인들이 만든 상품은 사지 못하게 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신분증을 만들어 달고 다니게 하면서 거주지도 제한을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구두수선, 야채장사, 그릇 닦기, 등과 같은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목숨을 이어 가고 있었다.
타오로 부터 자세한 실정을 들은 첸바오는 어떤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살 길이 막힐 뿐 아니라 하루 끼니조차 해결할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고심하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돈을 공동 관리하여 저축한 것으로 폐광을 사서 금을 캐는 길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일행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가 살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돈을 벌게 되면 전액 공동 관리를 해서 한 푼이라도 모으자. 나와 타오는 금광에서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러므로 돈을 모아 폐광을 사서 금을 캐자.”
첸바오와 타오는 금맥형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이 경험을 살려 꿈을 이루어 나가자고 설득 모두로부터 찬성을 받아냈다.
지구가 식을 때 금과 중석은 무거워 맨 아래로 흘러 내려 어느 지점에 가서 고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석이 있는 곳에는 항상 금이 있게 마련이고 이것은 딱딱한 차돌이 있는 곳에 고여 있게 되며, 아래로 내려가 고이는 과정에 흘러내린 자국이 생기며 이런 실금을 따라 굴을 뚫어 나가면 금덩어리가 뭉쳐있는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타오의 주선으로 하나 둘 일자리를 마련했다.
옝옝은 어렸을 때 농사짓던 경험을 살려 츄우와 함께 채소를 가꾸어 내다 파는 일을 했고, 구두수선을 했던 잉잉은 도구를 마련하여 거리점방을 차렸다.
음식솜씨가 뛰어난 쮜엔과 타이지는 요리사로 나머지도 청소부등으로 돈 벌이에 나서 작은 공동체는 활기가 넘쳤다.
유럽인들은 대 규모 금광에서 돈을 벌면 터득한 기술을 살려 소규모로 금광개발에 뛰어 들어 운이 좋을 경우 거부가 되는 경우가 있어 굴 파는 일에 너도 나도 덤벼들지만 성공률은 아주 낮았다, 이 대열에 아이랜드 출신 에드워드가 허가를 득해 금광을 시작하면서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라고 여긴 첸바오가 일꾼으로 취직이 되어 전원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금광을 인수 하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광부들을 디져(Digger)라고 하는데, 디져(Digger)란 땅을 파는 광부들을 말하며, 군인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개인방공호를 파서 은신하므로 호주에서는 군인을 디져(Digger)라 한다. 이런 디져들이 온 산을 파헤치는 대열에 첸바오도 끼어 해가 질 때까지 땅을 파고 또 팠다.
마음이 넉넉한 에드워드는 그 만큼 게으르고 고집이 세서 밑에서 일하기가 힘들었지만 첸바오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금맥은 옆으로 뻗은 것 보다 아래쪽으로 뻗은 것이 노다지를 만날 확률이 많은데 아래로 내려가면 파기 어렵다고 옆으로 뻗은 금맥 줄기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비가 보슬보슬 오는 날 에드워드가 술 생각이 난다고 주막에 간 사이 혼자서 땅을 파다가 새로운 금맥을 발견했다. 아래로 쭉 뻗은 맥으로 조금 파 보니 차돌이 나타났으며 조금만 들어가면 노다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와서 많이 망설이다 돌과 흙으로 막아 버리고 은밀히 표시를 해 두었다. 금맥을 따라가다가 차돌과 같이 딱딱한 지형이 나타나면 노다지를 만날 확률이 많다.
첸바오는 금덩어리가 뭉쳐있는 것을 노다지라고 불렀다. 그것은 할루빈 금광에서 일할 때 영국인 작업반장이 금맥을 따라 가다가 금덩어리가 나올 경우 노터치(No touch) 하면서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 금덩어리를 노다지로 알게 된 것이다.
여섯 달을 파 들어 갔지만 노다지는 나오지 않았고 에드워드의 술버릇은 점점 나빠져 신경질을 부리고 난폭해 지기 시작했다. 모아 논 돈도 떨어졌는지 지난주부터 주급도 주지 않는다. 첸바오는 기회가 왔다고 여겨 공동체 소집을 했다.
“에드워드가 금광을 포기 할 것 같다. 손들면 내가 인수할 예정이다. 나는 이 금광을 성공 시킬 수 있다. 나를 믿고 공동체 돈을 투자해 다오”
새로운 금맥이 있다는 자세한 비밀까지 털어 놓지 않았는데도 첸바오를 믿고 있는 공동체 회원들은 전적으로 찬성을 했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갔다.
한 달 넘게 주급도 받지 못했다. 첸바오는 말없이 묵묵히 땅을 파면서 에드워드의 눈치만 살폈다.
무법천지와 다름없던 광산촌도 첸바오가 왔을 무렵은 질서가 잡히고 안정된 사회로 변했으며 특히 광산개발권 체계가 잡혀 법이 정한 테두리에서 질서가 유지하고 있었다. 광맥을 발견하고 샘플을 체취 분석을 의뢰한 뒤 가치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 광산개발권 등록을 할 수 있으며, 등록승인이 나면 지하 100핵타(11만 평)의 소유권을 인정 해 주어 마음 놓고 개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에드워드는 5 광구 허가권을 득했으므로 500 핵타( 550만평)를 개발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금맥 전문가를 친구로 둔 에드워드는 금광에서 일하면서 푼푼히 저축한 이만 파운드를 투자, 광산개발권을 신청한 대담성을 보인 것은 금광전문가인 친구가 광맥을 찾은 후 성공을 보장하면서 적극 권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Melbourne에 계속 있었으면 성공했을 텐데 영국으로 돌아 가 혼자서 배운 실력으로 금광을 운영하다 보니 판단착오로 엉뚱한 곳을 파 들어갔고, 자금이 떨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것이다.
아침부터 술을 마신 에드워드가 혀 꼽으라진 소리로
“첸바오! 네가 이 금광을 인수해서 개발 해 보거라. 너는 성실하고 끈기가 있으나 성공하리라 본다. 이 금광에는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내 친구의 말을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하고는 싶지만 저에겐 그럴 자금이 없습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에드워드를 쳐다보자, 껄껄 웃으며
“내가 이 금광에 들어 간 돈이 이만 파운드인데, 이 마당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 동안 밀린 주급도 네가 안고 또 광산개발권 명예이전 비용도 네가 해결하는 조건으로 나에게는 시드니까지 갈 여비 천 파운드만 준비해 달라.”
‘천 파운드+알파’ 첸바오는 그 동안 저축한 공동체 자금으로 충분했지만 흥분을 자제하고
“저는 지금 그럴만한 돈이 없습니다. 친구들에게 의논해서 돈을 마련하여 연락 드리겠습니다.”라고 타협을 보고 헤어져 숙소로 달려오는 발길이 허공에 떠서 휘청거렸다.
숨겨 논 광맥이 눈에 아른거렸으며 노다지가 쏟아져 내리는 환상에 젖었다.
금광을 개발하다.
잔금을 치르고 이전등기까지 마쳐 광산 소유주가 된 이른 새벽 모두들 금광에 모여
“우리들이 살 길은 노다지를 캐는 일이다. 금 캐는 동안 한 건의 사고가 없기를 빌고 돈을 벌어 빚을 갚고 가족을 데려와 이곳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자. 그럴 때까지 많은 운영자금이 든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운영자금을 마련하자. 이 금광은 공동체 것임을 잊지 말자.”
공동체 일원들은 각오를 다졌다.
“금광은 경험이 있는 타오와 내가 전담할 것이며, 나머지는 하고 있는 일을 하면서 저녁에 3시간씩 도와 줘야 한다. 금맥이 터질 때까지 죽기 살기로 매달리자.”
각자 일터로 헤어지고 난 후, 타오를 데리고 발견한 금맥을 향해 깊숙이 들어갔다.
“전에 너에게만 얘기했지만 노다지가 날 금맥이 있다. 우리는 그 곳부터 착수하겠다. 너도 보면 놀랄 것이다.”
타오도 긴장된 얼굴로 침을 꼴깍 삼키면서 따라 붙었다.
통로가 좁아 기어 들어가면서 통로를 넓히는 일, 나무로 지지대를 더 튼튼히 해서 낙반 사고가 나지 않게 하는 일, 화약창고를 정비하는 일 등을 얘기하면서 천천히 금맥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곳이다. 바닥을 파자.”
조금 넓은 공간이 나오자 첸바오가 마주보며 돌무더기를 치우고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바닥을 조금 파니 거대한 차돌 암반이 나타났으며 누런 금맥이 차돌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아래로 뻗어 나간 차돌 암반에는 금맥이 가늘지만 선명하게 보이고 점점 커지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첸바오는 징을 써서 금맥 조각을 떼어내어 깨물어 보니 순금 특유의 감각이 혀에 전달되면서 온몸을 전율케 했다.
“순금이다. 너도 깨물어 봐라.”
타오도 입에 넣고 금을 깨물면서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금맥의 크기와 뻗은 방향을 더 살펴야 하는데 딱딱한 차돌 암반이 걸림돌이다.
“화약을 써야겠다. 화약은 당분간 쓸 만큼 있다.” 굴 밖 떨어진 곳에 있는 화약창고로 갔다. 광산개발권을 등록하면 지하뿐 아니라 지상도 일부를 사용할 수 있어 퇴적물을 쌓을 수 있고 제련시설, 사무실, 숙박 시설 등을 갖출 수 있다.
현재는 에드워드가 쓰던 움막집과 화약창고뿐이지만 금이 나올 경우 확장을 해야 하며 산골짜기에 광산촌이 생기는 것이다.
화약창고를 벽돌로 튼튼하게 만든 것은 허가사항 의무규정으로 큼직한 열쇠가 채워져 있다. 떡밥, 뇌관, 도화선이 가지런히 놓여 진 내부를 바라보는 첸바오와 타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한 방만 써 보자. 잘못하면 굴이 무너질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한번 쓸 떡밥과 뇌관, 도화선을 가지고 들어 가, 차돌 암반에 구멍을 뚫고 발파준비를 완료한 후 굴 밖으로 나와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하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도화선이 타 들어가는 소리에 귀를 막고 숨죽이고 있을 때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진동이 왔다. 제대로 터진 것이다.
굴 밖으로 풀썩 먼지가 나왔다.
한참을 기다려 화약 냄새가 빠진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발파장소로 달려갔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허겁지겁 거둬냈다.
“금이다”
이구동성으로 외치면서 누렇게 뻗어있는 금맥을 바라보는 두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번뜩였고 마주 잡은 손이 떨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기까지 넋을 놓고 있던 첸바오가 먼저 냉정을 찾고, 타오에게 다가갔다.
“이 사실을 당분간 비밀로 해야 한다. 이 소문이 퍼지면 우리들은 다 죽는다. 너도 내 말을 이해하겠지?”
눈물로 얼룩진 타오의 눈이 빛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할 일이 있다. 몇 달 전 봐 둔 자연동굴이 가까이 있다. 그 곳을 정리해서 공동체를 그 곳으로 옮기자.”
첸바오와 타오는 가까이 있는 자연동굴에 들어가 살피면서 그들이 묵고 있는 폐광보다 모든 조건이 좋은 이것으로 내일이라도 옮길 결심을 했다.
“우선 광맥줄기를 돌로 가려 놓자. 소문나지 않게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둘은 다시 굴에 들어가 발파로 흐트러진 돌로 금맥을 덮어 놓는 일을 저녁 늦게 까지 하고 있을 때 일터에서 돌아 온 일행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일행이 다 모이자 자연동굴을 보여 주면서 내일 아침 일 가기 전 숙소를 옮기자고 합의를 봤다.
금광면허세
금광의 소문은 점점 전 세계로 퍼져 뜬 구름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호주에 몰려 와
1850년대 사람도 별로 살지 않던 Victoria주가 금광 발견으로 크게 번창하여 영국에서 보내온 우편물도 Melbourne에 먼저 배달되고 나서 Sydney에 배달되는 등 Sydney를 앞서 가게 되었다.
1854년 La Trobe총독 때 노동자는 물론 경찰까지도 금광으로 몰려들어 도시개발에 지장을 주자 금광면허세를 만들어 금광으로 가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후임으로 Charies Hotham 총독이 부임하자 금광 면허세가 큰 돈벌인 것을 알고 대폭 인상해서 거두어드렸으며, 금광지역에 경찰을 파견하여 면허증 검사를 철저히 하였다.
금광은 굴을 파면 바로 금이 쏟아 져 나오지 않는다. 금맥이 있다 하드라도 호박넝쿨이 뻗어 나가다가 군데군데 호박이 열리듯이 작은 금맥 줄을 따라 파 들어가면 뭉쳐있는 금덩어리를 찾게 된다.
파고 또 파도 실금은 나오나 노다지가 있는 지점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금맥의 특징이다. 그래서 수 십 길을 파게 되며 그 소요 기간이 6개월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금을 캐러 온 사람들은 금이 나오지 않으면 실의에 빠져 있게 되며, 물도 없는 산속에서 병들어 사망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면허세는 갈수록 올라가고 경찰이 매주 두 번씩 와서 면허증을 보자고 하는데 수 십 길이나 되는 지하에서 면허증을 보여 주기 위해 올라와야 하므로 이런 불편을 완화 해 달라고 금광 개혁 연맹을 만들어 정부에 항의를 했던 것이다.
그 해 10월 Melbourne에서 112킬로 떨어진 Ballarat에 있는 Eureka Hotel에서 술을 마시던 광부 James Scobie가 호텔 주인인 James Bently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격분한 호텔주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살인을 한 호텔주인이 재판장과 경찰을 매수해서 정당방위로 무죄가 선고되자, 이를 지켜 본 광부들이 분노하여 호텔에 불을 질러 버렸다
사태가 커져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총독이 무마하기 위해 호텔 주인을 살인죄로 체포 했고, 대신 호텔에 불을 지른 광부에게도 죄를 물어 수감하자 광부들은 더욱 분노하여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 난 것이다.
‘재판을 편파적으로 한 식민정부가 잘못이지 광부는 잘못이 없다’고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했으나 식민정부는 거절했다.
동료 석방이 거절되자 개혁 연맹의 투쟁은 더욱 거칠어져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군대와도 충돌을 하게 되었다,
특히 조상 때부터 영국인과 사이가 나쁜 아이러시계통의 광부들은 군인 마차를 넘어뜨려 군수물자를 훔치고 총과 대검도 뺏어 대항하다가 군인 한 명을 죽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총독이 대표를 만나자고 해서 회담을 했고, 대표들이 회담 결과를 발표할 때 모여든 사람이 10,000 명이 넘었는데, 총독은 말뿐이지 이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자, 영국국기 대신 남십자성 기를 만들어 게양하면서 영국에 정식으로 대항하는 극한투쟁이 일어났고, 광부들에게 발부되어 가지고 다니던 금광 면허증도 다 태워 버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해 11월 남십자성 밑에 굳게 뭉친 광부들은 조직적으로 대항하려면 리더가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로 최고 책임자를 토목 기사인 35세의 Peter Lalor를 추대하고 정부군과 대치하게 될 때 참여한 극한 투쟁자가 800명이었다.
총책임자인 Peter는 영국에서의 폭동 경험을 살려 조직적으로 대항을 했다.
“우리는 무기가 없다. 총 대신 칼과 창을 만들어 대항하자”고 하면서 대장장이들에게 무기를 만들게 하여 무장하고 또한 데모대원에게 남십자성 아래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서약을 받고 시내를 행진할 때 밴드까지 동원하여 프랑스 혁명 때 자유와 평등을 노래한 Marseillaise를 부르면서 시위를 했으며 주민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사태가 점점 험악해 지자, 천주교 신부들이 나서서 강경진압을 하면 인명피해가 심해지니 자제를 해달라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은 30명의 기병대와 152명의 보병, 24명의 경찰이 데모대를 공격했다.
70자루에 총과 30자루의 권총과 다수의 칼과 창은 가졌으나 실탄이 없는 광부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만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신문들은 대 학살이라고 영국군을 공격했고 주민들은 식민지정부의 잔혹상에 치를 떨었다.
이 사건 후 연쇄적으로 이웃 광산인 Bandingo에서 금광 면허증을 태워 버리고 대항하자 다른 광산도 함께 대항을 하여 데모규모가 전 Victoria주에 퍼져 수습불가 상태가 되었다.
이에 굴복한 영국 정부는 금광 면허세를 취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호주가 독립하는 동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호주 노동조합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이다.
첸바오 일행이 왔을 때는 금광 면허증은 없어졌으나, 금광 붐으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무법천지로 변해 깡패들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노상강도가 기승을 부렸다. 1860년부터 1880년까지 근 20년 동안 NSW주 남쪽과 Victoria 주 북쪽에 많은 노상강도가 성행하여 왕래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이한 것은 부자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오히려 의적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점이다.
NSW주는 Ben Hall과 Frank Gandiner가 의적으로 유명했고, Victoria 주는 Ned kelly가 유명해서 추앙을 받는 의적이 되었으며, Ned Kelly가 1860년 잡혀서 그 해 11월 Melbourne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애도 물결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렇게 강도들이 사방에 들끓고 있어, 이런 어수선한 때에 큰 금맥을 그것도 중국인들이 발견했다는 소문이 나면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것을 안 첸바오는 금맥 보안조치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공동체 동료들에게도 금맥 발견을 숨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금 제련을 하다.
금 중계상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쮜엔을 은밀히 불렀다.
“쮜엔! 주인아저씨와 사이가 좋으냐?”
“좋은 편으로 가까이 지내고 있다.”
“그러면 좋다. 우리는 작은 금맥을 찾아냈는데, 발굴할 시설자금과 운영자금이 필요하다. 소문나지 않게 금 판매 길을 물색해 다오. 우리가 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죽음뿐이니 각별히 조심하여라.”
“주인아저씨는 양식이 있는 사람으로 내가 부탁하면 십중팔구 들어 주겠지만 걱정이 된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올 때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간청하고 은밀하게 부탁을 하여라.”
원석을 주면서 기회를 보다가 아무도 없을 때 타협을 보되 비밀로 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하라는 당부를 했다.
저녁에 돌아 온 쮜엔은 원석을 순금으로 제련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낮은 가격을 받아왔지만 비밀보장이 되고 계속 금을 사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금을 팔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헐값에 팔 수 밖에 없는 아쉬움으로 금 제련을 직접 하는 길이 없을 까 궁리 할 때,
“응우의 집안이 대대로 대장간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 번 얘기를 나누어 보자”는 쮜안의 말을 듣고 응우를 불렀다.
“응우 대장일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나 했냐?”
“어렸을 때부터니까 10년이 넘는다.”
“그럼 제련까지 할 수 있느냐?“
“철은 많이 해 봤다. 대개 고철 제련을 많이 했으나 철광석도 제련한 경험이 있다”
“그럼 금도 되겠구나.”
해 보지는 않았어도 금은 용해온도가 철 보다 낮아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작은 용광로와 큼직한 바람 통 그리고 땔감으로 쓸 코크스만 있으면 가능하다며 자료를 구입해 주면 제련을 해 보겠다고 나섰다.
용기를 얻은 첸바오는 응우에게 자료 살 돈을 건넸다.
그리고 쮜안에게는 원석을 조금씩 주면서 팔아오게 했다.
발견한 금맥은 거의 40%에 육박하는 원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더 파 들어가면 100% 순금까지 나올 확률이 있지만, 당장은 채굴을 중단하고 채취한 원석을 한 두 덩어리씩 팔아 시설자금을 마련했다.
자연동굴로 이사한 공동체 일행은 첸바오와 타오가 화약을 터트려 놓으면 정리하는 것으로 매일 저녁 굴 통로를 넓히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금맥이 있는 곳은 숨겨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응우는 고물상에서 용광로를 구해왔고 며칠 후 풀무까지 마련한 후 진흙을 구해다 설치작업에 들어갔다.
코크스는 일 갔다 올 때마다 조금씩 날러 쌓아 놓았다.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자연 동굴 속에 제련공장을 꾸민 후, 불 피울 화덕을 만들고 용광로를 걸 지렛대를 설치, 완성되자 진흙 마르기를 기다려 시운전을 하기로 했다.
첸바오와 타오는 채굴한 원석을 굴속에 만든 창고 속에 감추는 일을 반복해서 수북하게 쌓여갔다.
“내일 금 제련을 할 예정인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응우의 청을 받아들여 소문을 내자 않고 제련을 시작했다.
코크스에 불을 붙이고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으니 파란 불꽃이 활활 타 올랐다.
용광로에 가득 채운 원석이 녹아 액체가 될 때까지 불꽃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를 하루 밤이 지나자 용광로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원석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밤잠도 못 자고 풀무질을 하는 응우를 도와 첸바오와 타오가 교대를 해 주었다.
“이것이 성공되면 제련 시설을 확장하자.”
용광로에 원석이 녹자 위에 뜬 불순물을 거둬냈다.
순수한 99.99의 순금이 들어나고 있었다.
고운 흙으로 만든 틀 속에 용광로 물을 흘려 넣었다.
흙이 튀고 수증기가 피어 오르고 그러면서 오랜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자 응우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통을 들고 조형물에 쏟으니 흰 수증기가 오르면서 형체가 들어났다.
“순금이다.”
순금 덩어리가 삐쭉 나아 있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한 채 있다가 첸바오가 먼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털썩 주저앉았고, 타오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응우는 성공했다는 기쁨으로 벌건 얼굴이 쇠를 녹일 듯 했다.
금 제련이 되자 금광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이시점에서 모두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첸바오는 공동체를 소집했다.
“소문이 나면 우리는 죽음만이 기다리기 때문에 숨겼는데, 실은 큰 금맥을 발견했다. 이 금맥의 크기는 가늠 못하지만 여러모로 볼 때 금 매장량이 수 십 톤을 넘을 거라 예상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 각오로 숨겨야 한다. 또 하나 금 제련도 성공해서 많은 금괴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이런 일이...”
모두들 꿈같은 현실 앞에 아연했다.
“꿈은 아니지요?”
적막을 깨고 옝옝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굴 울림으로 번져갔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첸바오를 우러러보면서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첸바오 너무나 고맙다. 너는 우리의 구세주다.”
“이제부터 쮜엔은 금 거래일을 맡아야 하므로 계속 일을 하고, 채소 농사는 틈을 내어 도우면서 모두들 금광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하던 일을 중지하고 인계 해줄 것이 있으면 뒤처리를 잘하고 직장에서 물러 나오기 바란다.”
금광 채굴작업은 첸바오를 도와 타오, 옝옝이 맡았고 제련은 응우의 조수로 츄우를 지명했다. 나머지는 주변 시설 정비에 투입했다.
우선 동굴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집을 짓기로 했다.
“사무실과 공동 숙소부터 짓자.”
앞으로 가족을 데려와 살 수 있는 집은 나중에 다시 계획을 세워 건축하기로 하고 사무실, 숙소 터를 다지고 진흙에 풀을 섞어 부록을 만들고 햇볕에 말렸다.
기둥과 서까래로 쓸 나무를 잘라 가다듬어 놨다.
문틀과 지붕용 양철을 주문해 놓았다.
그러는 동안 첸 바오와 타오, 옝옝은 채굴에 매달렸다.
파갈수록 금맥 폭이 1 미터로 넓어지면서 거의 70~80% 가까운 광물이 쏟아져 나와 순도 100%의 노다지 덩어리가 나타나리라는 기대로 부풀었다.
버럭(버려지는돌)으로 처리해 굴 밖으로 내 놓은 차돌도 5%~10%의 금이 섞여 있는 것으로 제련 시설을 확장할 경우 많은 금을 얻을 수 있어 한 쪽에 잘 쌓아 두라고 지시하고, 굴속에 굴 창고를 따로 마련하여 원석을 감추어 보관토록 했다. 굴속의 원석창고가 수 십 군데로 늘어났고 제련 시설도 확장하여 순금을 만들어 굴속에 깊숙이 파묻어 두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쮜엔을 통해 팔아 시설 확충과 운영자금으로 쓰면서 금 생산이 부진한 금광으로 위장했다.
공동체 회원의 가족이 왔을 때 살집과 일군들의 숙소를 짓기 위해 벽돌, 시멘트, 기와 등도 조금씩 사들여 공동 숙소 옆에 창고에 쌓아 놓았다.
때가 되자 사무실과 공동 숙소는 금광 구내에 건축했고, 살림집은 4Km 떨어진 경치 좋은 산기슭에 별장형식으로 50채의 집을 지어 침구와 가구까지 완벽하게 준비 했다.
채굴을 천천히 해 노다지광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1 톤이 넘는 순금을 저축한 부자 금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가족을 데려 오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첸바오는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선언했다.
첸바오의 말을 들은 일행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한 참 있더니 희열로 오열했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생시임을 확인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 동안 송금을 해서 은행 빚을 해결했고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계도 윤택해졌지만, 식민지 이민법의 높은 벽으로 상심하고 있었던 중 이민법이 완화되어 가족을 데려 올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타오가 나서서 그 동안 진행하고 있던 가족 데려오는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올 수 있게 식민지 이민법이 완화된 것을 알고 있지만 선편이 여의치 않아 고심했는데, 며칠 전 첸바오와 같이 거리에 나갔다가 일행을 태우고 왔던 윌리암 선장을 우연히 만났고 우리들의 실정을 이해시켜 돈 대신 순금으로 모든 비용을 주기로 약속하고 배를 전세 내고 일정까지 잡았다. 내가 인솔자로 가겠으니 집에 연락하여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주기 바란다. 육 개월 내에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데려 올 계획인데 친척이나 형제를 데려 올 경우 가정을 이루어 부인까지 함께 와야 한다. 미리 연락해서 신청을 해야 입국허가를 얻을 수 있으므로 데려올 사람의 인적 사항을 알려다오.”
모두들 환호하며 축배를 들자고 아우성쳤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했다. 오늘 저녁은 싫건 마시고 춤추자”
호주의 1830년대는 농토 확장으로 인한 위성도시 건설로 인해 노동력이 절실히 요구되어 영국정부에 광부보다도 건축 관계 직업인 목수, 미장이, 기와장이, 대장장이들을 이민 시켜 줄 것을 탄원했다. 이때 남자 숫자만큼 여자도 보내달라고 애원했던 것은 당시 남녀 성 비율이 남자 4명에 여자 1명으로 사회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산업혁명의 여파로 영국은 물론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에게 호주는 하루 셋 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로 조금만 노력하면 큰 부자가 된다고 부각시켰지만, 호주까지 오는데 장장 6개월이 걸리는 곳을 가족을 데리고 항해하는 것이 두려웠고, 미국이 더 호주 보다 더 좋다는 인식 때문에 기피하고 있어, 호주 이민희망자에게는 배 삯을 부담해 주고 정착금 까지도 주면서 권장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비상조치로 일처다부(一妻多夫)제도를 허용했는데 여자가 남자를 둘 이상 거느려도 사회적인 규탄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낮의 남편과 밤의 남편을 거느린 여자가 생겼으며 씨가 다른 아이들을 낳아 길렀던 것이다. 이를 돕기 위해 학교는 저녁 늦게 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특별반을 만들어 낮의 남편을 불편하지 않게 배려를 해 주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온 여자국회의원이 이런 딱한 사정을 보고 영국으로 돌아가 창녀들에게 남자를 여럿 거느리며 대우도 받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이 호주라고 대대적으로 선전 해 많은 창녀들이 몰려들었으며 어떤 여자는 실제로 많은 돈을 벌어 거부까지 되었다.
그래서 백인들은 그럭저럭 여자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광부로 온 중국인들은 100% 홀아비로 지내 식민지 정부에서도 골칫거리로 여기다 내놓은 해결책이 자비로 부인이나 여자를 데려 올 경우 입국허가를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도 광부 또는 건축기술자는 자비부담으로 올 경우 여자를 동반자로 데리고 오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타오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변호사 앞에서 월리암 선장과 배 전세계약을 맺고 은행에 순금을 위탁 해 놓았다.
조건은 전 가족이 Melbourne에 도착하여 인수인계가 끝날 시점에 변호사와 배전세비용을 주기로 한 것이다.
순금을 위탁 할 경우 식민정부에 많은 세금을 내야하고 은행에도 고액의 보관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돈을 아끼지 않았다. 각자 가족에도 송금해서 홍콩 한 곳을 지정해 주고 다른 가족과 함께 투숙해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금광에 많은 일군이 필요해 이 기회에 일 할 수 있는 젊은 친척들까지 데려 올 수 있는 입국허가까지 만들어 100여명의 대 인원을 인솔하는 타오는 한 치의 오차도 없게 치밀하게 일을 추진했다.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난 Melbourne부두에 월리암선장의 메리호가 도착했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배에서 내려 4년여 만에 만나는 가족 상봉은 기쁨의 눈물바다로 넘쳐 흘렀다.
훌쩍 큰 첸바오의 딸 옌칭은 아버지를 낯설어 했지만 곧 폭 안겨왔다.
“옌칭! 많이 컸구나. 예쁘게 자라주어 고맙다.”
눈물지면서 아내 뚜이띠엔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은 활활 타 타올랐다.
갓 결혼해서 데리고 온 동생 슝바오와 계수 응엔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 가족과 늘어난 공동체 식구들이 이곳 호주 땅에 깊숙이 뿌리내려 우뚝 설 때까지 도와주리라 다짐하며 새로운 각오를 했다.
농토를 마련하다.
첸바오가 일행을 데리고 Melbourne에 도착한 1860년대로 그 이전부터 호주는 영국식민지에서 서서히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영국식민지 당국의 박해가 극에 달하자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개선을 요구하자 영국식민지 당국은 7년 안에 서부 호주를 제외한 호주 식민지에 맞는 정치제도를 마련 할 것을 발표하였다.
NSW주와 Victoria주, South Australia주는 이미 식민지 정부로 독립이 되었고 이어서, 1856년에는 Van Diem Land섬을 Tasmania로 이름을 바꾸어서 식민지령으로 인정했으며, 1859년 Queensland를 독립시켜 별도 정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호주는 독립된 식민지 정부가 5개로 늘어났다.
NSW, Queensland, Victoria, South Australia 그리고 Tasmania 주로 각 주정부마다 조금씩 법이 달랐으며 선거권은 돈 많은 부자들 중 남자들만 가지다가 여자들은 1894년부터 1909년 사이에 점차로 투표권을 인정해 주었다
1860년부터 남부 호주에서 농업기구를 개량하여 대량 밀농사를 성공시키자, NSW주 남쪽과 Victoria주 북쪽 농민들이 이를 배워 밀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내 소비가 과잉상태가 되자 외국으로 수출을 했으며, 호주산 양털이 영국에서 인정을 받아 얼마든지 팔 수 있게 되므로, 예를 들어 2,000 마리였던 양의 수가 1만 마리로 늘어나는 양목장이 곳곳에 생겨 많은 양털을 생산 영국에 수출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1860년부터 1890년까지 30년 동안 호주의 젖줄인 Murry강의 수원지를 활용하여 Victoria주 북쪽 Mildura는 과일생산지역으로 개발되고 많은 수확을 올렸다
1863년에는 Louis Hope가 Queensland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하여 1890년에는 5만 톤의 설탕을 해외에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일꾼이 없어서 남태평양주민들을 데려다 일을 시켰으며 이들을 Kanaka라고 부른다. 지금도 사탕수수 재배 단지를 가보면 하루 종일 차로 달려도 사탕수수밭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역이 있으며 경비행기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있다.
그 후, 금광 외에 무진장 묻혀 있는 지하자원들이 개발되기 시작해서 납, 아연, 동광이 곳곳에 생겼으며 1미터만 겉에 흙을 헤치면 석탄덩어리가 묻혀 있는 석탄광산이 NSW주에 발견되어 호주가 부자나라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노동력 부족현상이므로 호주 식민당국은 영국인들에게 이민 보조금을 지급해 주어 1860년-1890년 30년간 30만 명의 정부 보조 이민자들이 도착했다. 첸바오 일행과 가족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이민보조금의 혜택은 아니지만 노동력을 늘리려는 식민당국의 정책 때문이다.
식민당국의 이민 정책으로 인구가 1백만에서 3백만으로 늘어났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 토박이 노동자들은 이민자가 늘어나는 것을 싫어했으며 특히 중국인이나 Kanaka 이민자들을 경멸하였고, 결국은 1881년부터 1886년 사이에 각 식민지 정부들은 서부 호주만 제외하고 백호주의 법을 통과 시켰던 것이다.
인구가 많이 늘자 노상강도의 극성으로 치안은 항상 불안했으며, 밀농사는 잘 되어 수출까지 했으나 채소가 부족하여 청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실정을 감지한 첸바오는 금광 개발을 멈추고 채소 농사를 경작할 농토부터 마련키로 했다. 그 이유는 금이 있다는 것이 알려 지면 모두 떼죽음을 당할 것이 뻔해서 타오와 옝옝, 응우와 짜고 공동체에게까지 금이 더 이상 없어 폐광을 시킨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광맥지도를 세밀하게 그려 놓고 금맥이 뻗어나간 굴을 발파로 막아 놓았다.
광맥지도는 첸바오가 보관하고 금광을 재개발할 시기는 중국인들의 신분이 상승되고 사회가 안정되는 시점에 하기로 했다.
그 동안 제련하여 굴속 창고에 감춰 둔 2톤 가까운 금괴와 굴속 창고에 쌓아 둔 금 원석을 제련하면, 다른 사업에 투자할 자금이 충분하여 조금씩 금을 팔아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땅을 사들여 채소농토로 개발한 넓이가 십만 평이 넘어서는 1870년 여름, 첸바오는 아들 하이창이 태어나자 중대 발표를 했다.
첫째, 땅을 열배로 늘린다. 둘째, 요식업을 주업으로 하되, 다른 상권에도 뛰어 들것이며 무역업에도 도전한다. 셋째, 농사는 일군을 고용해서 하며, 공동체 회원들에게는 각종 상권을 맡겨 운영토록 한다.
그러기 위해 상조회를 조직해서 공동체 일원은 우선이고, 그 외 중국인은 아이디어와 기술, 운영능력이 있는 젊은이에게 운영자금을 무이자로 대출 독립시켜 중국인들의 힘을 키우기로 작정하고 금을 더 팔아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타오가 건의한 상조회 조직 계획을 보고 받은 첸바오는
“상조회에서 도와 줄 대상을 선발 면밀히 검토해 결론을 내려 자금을 조달했는데도 실패했을 때 실패원인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주변의 변수로 인한 것이면 기회를 세 번까지 더 주고 자금을 조달해 준다는 단서를 붙여라”라며 성공될 때까지 확실하게 뒷받침을 해 주자고 했다.
이것은 먼 훗날 차이나타운을 구상하면서 하나로 뭉쳐 힘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일이 중국인들이 살길이라고 첸바오는 판단했던 것이다.
이 소문이 공동체 회원뿐 아니라 Melbourne에 사는 중국인들 사이에 퍼지자 여러 분야의 사업신청이 쇄도했다.
식당과 같은 요식업, 침술을 겸한 한의원, 중국전통 의류상, 중국식 식기류 판매, 과일 채소 판매 등 다양했다.
농토를 구입 한 곳이 Melbourne 중심가를 벗어 난 백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변두리 지역이라 땅 값도 싸고 경쟁자가 없어 땅 구입이 용이해 백만 평 확보 목표를 손쉽게 이루었다.
그 곳에 상가를 만들고 자라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기관과 홀아비들이 살 수 있는 공동 숙소와 주택이 들어서는 소도시가 건설되어 갔다.
업종까지도 상조회에서 지정해 주고 시설을 해 주므로 같은 업종끼리의 경쟁이 생기지 않는 독점 기업이 되어 성장이 빨랐는데 백인들 사이에 물건 값이 싸고 음식 맛이 좋다는 소문이 퍼져 많이 찾게 되어 상가는 날로 확장이 되고 번창되었다.
이 무렵, 유럽에서 시작 된 세계 공항의 여파가 호주까지 밀려와 영국 자본가들이 호주투자를 중단하여 경제가 흔들리고 있을 때, 1888년에 불어 닥친 심한 가믐으로 농토와 목장이 황폐되어 농산물과 가축이 귀하게 되자 토끼를 사육했었는데 이것들이 야생토끼로 변신하여 급속도로 번식되어 농장과 목장의 마른 풀 까지 먹어 전 국토가 황토로 변해 갔고, 유럽 쪽의 오랜 경제공항으로 양털과 밀 값이 떨어져 은행의 융자금 회수가 안 되자, 1893년에는 은행 업무가 중단되었고 금 생산량도 줄어들어 폐광하는 곳이 늘어나 실업자 수가 30%를 육박하게 되었을 때도, 첸바오 상조회 금고만은 튼튼했던 것은 금광에 저장 해 두었던 순금의 역할로 오히려 쉽게 토지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상가를 확장하여 호경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경제불황이 계속되는 동안 피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먹고 사는 노동자들뿐이었다. 그래서 Queensland에서 시작한 노동조합이 각 식민정부와 연계하여 호주 노동연맹을 만들고 정치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현 호주 노동당의 시초를 이룬 것으로 노동운동은 애국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자본가만 잘 사는 예전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회를 이룩하여 자랑스러운 호주인이 되자는 것으로 비록 주마다 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다 같은 ‘Matership’를 발휘하도록 했다.
첸바오의 상조회는 노동당 보다 앞서 중국인이지만 떳떳한 호주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첸바오가 이끄는 공동체와 상조회는 평등사회로 수직이 아닌 수평사회를 구상, 노력하는 자에게는 대가가 지불된다는 철칙으로 ‘Matership’를 이룬 것이다.
영연방 호주국가 탄생
당시 호주는 식민지 주정부법이 달라 불편을 겪고 있었다.
1856년 각주의 수상들이 모여 호주연방카운슬(Federal Council of Australia)을 만든 것이 연방정부를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NSW주 수상인 Sir Henry Parkes가 연방정부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그는 가난한 이민자로 영국에서 와 노동자와 기자로 일하다가, 1854년에 NSW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872년부터 1891년까지 수상을 5번이나 했다.
그러나 앞장서 기초를 만들었을 뿐 연방정부가 세워지기 5년 전 사망하여 결과를 보지 못했다.
그는 1872년 NSW북쪽 작은 도시 Tenterfirld에서 ‘호주인들은 영국인이 아니고 호주인으로 규합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으나, 마침 불어 닥친 세계경제공항의 여파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891년 Sydney에서 Henry parkes를 위원장으로 해서 헌법초안을 작성하고 호주의 국방과 각주끼리의 관세를 철폐하는 골자의 초안은 작성했으나 경제공항으로 실행은 연기를 했다.
연방정부를 만들자는 여론이 경제공항으로 인해 연기되고 있던 때 첸바오는 육십 고개를 넘는 초로의 노인이지만 상조회를 방문해서 알게 된 나이테가 비슷했던 Henry parkes 수상의 정신을 높이 받들고 본보기로 삼아 중국노인들을 위한 복지 시설을 만들 것을 공동체 원로 열 두 명 중 살아 있는 일곱 명 원로들에게 발의했다.
“우리 몸도 쇠약해 졌지만 많은 어르신네들이 건강으로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다 세상을 뜨고 있다. 이런 노인세대를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고 싶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타오가 대 찬성을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우리끼리 의논했던 것인데, 노인들에게 무료 봉사를 하는 한의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참 좋은 생각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중국본토에 가서 한의학을 전공하고 오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을 결집해서 아예 종합 한의원을 개설하여 일반인도 이용하면서 노인들에게 무료로 봉사하면 좋을 것 같다.” 타이지가 쌍수를 들며 나섰다.
모두들 찬성하면서 기뻐했다.
노인들이 모여 환담할 수 있는 회관을 만들고 취미생활을 가르치는 평생교육원까지 만들자는 합의까지 본 후, 마지막으로 첸바오가 나서 중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요즘 오랫동안 구상했던 일이다. 현재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는 초등학교뿐인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만들 작정이다. 그리고 노인 세대를 위해 실버타운을 건설하려고 한다. 많은 자금이 필요한 계획이므로 다음 세대들이 이어 받아 이룰 수 있게 우리가 기초를 다져놓자. 이제부터 각자 업무를 분담 마지막 사업을 우리 손으로 이루자.”
이것이 후에 Melbourne뿐 아니라 Sydney까지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차이나타운의 태동이고 CASS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 후, 연방정부수립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강제 투표가 아닌 자유투표로 1898년 4개주만 실시 찬성을 얻어냈고, NSW주의 득표수가 저조하여 재투표로 1900년도에 찬성을 이끌어 냈다. 1901년 영국의회가 승인함에 따라 영국연방 호주국가의 탄생을 정식으로 선포 하였다.
호주의 연방정부는 이민문제와 통신 우편을 관장하며, 북쪽에서 식민지 확장에 주력하고 있는 프랑스, 독일과 세력이 커져가는 일본의 세력을 막기 위한 국방문제, 호주의 각 주끼리의 관세 폐지, 파업조정 등을 위한 권한을 갖게 되고 초대 연방수상으로 시드니대학을 나 온 베리시터였던 Edmond Barton이 자유당으로 당선되었다.
연방의회는 상 하 양원제로 되어있으며, 하원은 인구비례로 상원은 인구와 관계없이 각주에서 무조건 1명이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연방정부는 영국을 대표하는 총독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각주정부도 총독을 임명하여 관할하게 되어 있어 완전독립이라고 볼 수 는 없었다.
연방정부 설립의 날 1901년 1월1일 아침 일찍 기차, 전차, 훼리가 수많은 Sydney 시민들을 운반했다.
유난히 더운 날씨였으나 Centerial park을 행진할 때 양털 깎기 들이 앞장을 서서 행렬을 인도하였고 수많은 구경꾼들의 환영 속에 중국인 용춤이 인기를 끌었으며, 마오리족과 인도네시아인들의 고유의상 행렬도 이어졌다.
Sydney시민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Melbourne상조회를 본 따 만든 Sydney상조회 대표의 초대를 받아 연방정부 설립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우첸바오부부, 마타오부부, 추옝옝부부, 저우응우부부도 이 대열에 끼어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초대공동체 회원들이 차례로 타계하고, 1917년 마지막으로 85세 우첸바오가 조용히 숨 질 때, 81세인 아내 뚜이띠엔은 하반신 마비로 자리에 누워 수발을 받고 있었고, 아들 하이창은 47세로 상조회 회장을 맡아 농토와 상가를 번창시키고 있었으며, 32세 때 손자 오린이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 갓난애부터 키워 가장 사랑했던 열일곱 살짜리 증손 자오쉬의 손을 잡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백호주의가 철폐되고 호주가 다문화사회로 바뀌는 세상을 자오쉬 너는 보리라 예상하니 그 때 금광을 개발하여 너의 포부도 넓게 펴고 특히 상조회를 더욱 발전시켜 내가 바라고 원하는 차이나타운과 실버타운을 만들어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숨겨 논 금맥지도를 쥐어 주며 가족들의 애도를 뒤로 하고 영민했다.
에필로그(Apilogue)
100여 년간 유지되면서 유색인종에게 박해를 주던 이민법이 1972년 노동당 윗들람 수상에 이어 해제 되므로 미국에 이은 다민족문화권으로 바뀌고 많은 유색인종이 밀려들던 1975년 10 월 화창한 봄,
한국의 DW광산재벌그룹 회장과 절친하게 지냈던 우자오쉬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온 금광전문가 은석준이 Melbourne공항에 도착하니 마다웨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1928년생인 마다웨이는 초대공동체 획심 회원인 마타오의 증손으로 광산개발사장이며 1935년생인 석준의 7년 연배였다.
“자오쉬 회장님이 급한 용무로 출타 중이라 이틀 후 뵙게 됩니다. 제가 광산 책임자이므로 모든 것을 저와 의논해 주기 바랍니다. 지금 타고 가는 BMW와 운전기사는 석준님의 전용으로 배차했으니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광산까지 가려면 3시간 정도 걸립니다. 비행기로 밤새 오느라 못 잤을 터이니 평안히 쉬기 바랍니다.”
전형적인 호주 영어발음이지만 구수한 톤의 마다웨이의 정감 넘치는 환대에 안도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지난날을 회상했다.
석준은 대학을 나온 후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변두리 땅값이 올라 벼락부자가 된 외사촌형과 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해 보려다 실패하고 낙담해 있을 때 학부형의 권유로 대구 팔공산 기슭에 있는 금광에 투자하여 결국은 전 재산을 날린 대가로 얻은 것이 금맥 찾는 기술이다.
금맥전문가와 함께 여러 차례 금맥을 찾는 산행(山行)을 하면서 팔공산을 시작으로 백두대간을 누비고 다니면서 기술을 익혔다.
산골에 흐르는 개울 바닥에 돌덩이를 보면 금맥을 알아내는 특수기술을 배운 덕에 금광에 실패를 했지만 바로 DW광산재벌그룹에 취직을 했던 것이다.
회장은 무연탄으로 돈을 많이 벌어 재벌 대열에 섰지만, 금광에 관심이 더 많아 석준을 채용해서 금광업에 뛰어 들었으며 해외투자계획을 세워 석준을 해외파트담당으로 임명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폐광된 금광을 공략한 것이 성공해 회사는 많은 돈을 벌었고, 핵심에 있는 석준의 이름이 동남아 일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회장을 모시고 자주 동남아를 다니던 중 싱가폴에서 지인의 소개로 중국계 호주인 우자오쉬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선조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광이 있는데 기술부족으로 금맥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던 중 회장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귀사의 금맥기술자를 파견해 주기 바랍니다.”
자오쉬회장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석준이 6개월 관광 비자를 얻어 호주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깜박 잠이 든 것 같은데 광산에 도착했다.
주위를 살피니 경관이 수려하여 광산촌이라기보다 관광지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고 말았다.
광산식당에서 점심을 대접받고, 진한 향의 커피로 피로를 달랜 후 광산입구 근처에 버럭으로 내 버린 퇴적물을 살피던 석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0.3%의 금만 있어도 타산이 맞아 금광을 움직이는데, 내버린 퇴적물이 대충으로도 10%가 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노다지이고 인도네시아 광산에 나오는 광물도 이보다 못한데, 대박 났다고 축배를 들던 생각이 났다.
‘음! 호주의 광맥은 대단하구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내일을 위해 휴식에 들어갔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은 석준은 광산기술자의 안내를 받으며 굴속과 광산주변을 꼼꼼히 살핀 후, 우첸바오로부터 물려받은 금맥지도 사본을 보니, 조잡스럽게 그려져 있어 그 지도로는 발파지점을 찾을 길이 없어 처음부터 다시 금맥을 찾는 길이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 하기는 옛 어른들이 자기들 생각으로 그려놨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지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금맥줄기를 살피면서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하므로 시간이 걸립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석준님만 믿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잘 살펴주세요.”
마다웨이는 석준을 도울 광산 기술자 두 명을 붙여주며 필요한 장비를 최대로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우선 광산주변 지형부터 봐야 하니 헬리콥터가 있으면 동원해 주기 바랍니다.”
“네, 광산용으로 준비된 헬리콥터가 있습니다. 바로 띄울 준비를 하겠습니다.”
준비된 헬리콥터에 탑승해 광구지도를 보면서 살피니 어마어마하게 넓은 광구와 산세가 많은 금맥을 껴안고 있는 지형임을 보고 놀랐다.
“저 쪽 넘어도 굴이 보이는데 저곳까지도 해당이 됩니까?”
“아닙니다. 저 곳은 오래 전부터 폐광으로 문을 닫은 곳입니다.”
“얼마 동안 입니까?”
“글쎄요, 잘 모르지만 100년 정도 일겁니다.”
석준의 머릿속은 폐광된 광구까지 큰 광맥이 뻗어 있다는 확신이 오자 눈에 어른거려 침을 삼키고 틈내어 답사해 보리라 다짐했다.
아침부터 금맥 탐사를 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조금 있으면 자오쉬회장이 도착한다고 해 내일로 미루고 회장을 만나기 위해 광산 사무실로 갔다.
호주가 다문화국가로 유색인종까지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사면령을 내려 대량으로 영주권을 주자, 증조할아버지 첸바오의 유언을 받들어 2년 전에 50여 년 동안 중단했던 광산을 열고 옛 초창기 공동체 어른들이 채굴하여 굴속에 묻어 둔 원석을 제련하는 일로 광산촌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석준님만 믿으니 할아버지 유언을 이룰 수 있게 힘껏 도와주세요.”
칠순이 넘은 나이의 자오쉬회장이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금광에 집착하는 모습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염려 마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듣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무엇을 원하던 선물로 주겠으니 잘 생각했다가 요구하세요.”
껄껄 웃으며 두툼한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오늘은 Melbourne에 나가 저녁대접을 하려고 하니 함께 나갑시다.”
점심을 광산식당에서 갖은 후 자오쉬회장과 동행했다.
저녁은 중국식 정식이 나왔다. 3시간에 걸쳐 계속 나오는 음식은 종류도 많았지만 그 맛이 형용할 수 없어 맛있게 먹으면서 호주 광산개발법에 대해 많은 상식을 얻었다.
특히 주인이 없이 버려진 폐광일 경우 정확한 금맥 지도와 채취한 샘플을 제출 개발가능성을 인정받으면 시민권 또는 영주권자에게 허가가 난다는 고무적인 말을 듣고 헬리콥터로 본 폐광을 떠 올리며 하루라도 빨리 답사해 보리라 거듭 작심했다.
아침부터 금맥 탐사로 바쁘게 움직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기술자를 데리고 굴 입구부터 뻗어 있는 금맥을 하나하나 보면서 금맥을 찾아 들어 갈 때 석준의 가슴은 요동을 쳤다.
‘이런 광맥은 처음 보는 것으로 대단하구나.’
예상한데로 광맥은 북쪽으로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 뻗어 있었다.
그러나 굴속에 원석을 쌓아 두느라 여러 갈래로 뚫려있는 굴로 인해 광맥을 찾는데 힘이 들었다.
당초 한 달이면 광맥을 찾으리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난관이 생겨 지연되고 있을 무렵 주말을 이용해 가 본 폐광을 보고 예상과 같이 자오쉬회장 광맥과 연결되어 있고 버금가는 금맥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두 달이 다 된 저녁 무렵, 금맥줄기를 찾아냈고 그 규모에 놀라 석준은 몸을 떨었으며 더욱더 폐광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광맥을 찾아냈다는 보고를 받은 자오쉬회장이 다음날 아침 일찍 광산에 도착해서 노구를 무릅쓰고 굴속 깊숙이 들어가 찾아낸 광맥의 크기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폭이 일 미터가 넘는 누런 광맥이 아래로 뻗으면서 커져가는 모습이 용이 하늘로 치솟는 듯 꿈틀거리는 것 같아 아연했으며, 이런 노다지를 보고도 발굴을 포기하고 발파로 막아 숨겨 놓아야 했던 당시 절박했던 조상 우첸바오, 마타오등의 안타까운 심정과 현명한 판단을 헤아려 보며 우자오쉬회장과 마다웨이사장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석준에게 거듭 감사했다.
“이제 초대공동체할아버지들의 숙원을 풀게 되고 우리 구릅이 탄탄대로에 굳건히 서게 되었습니다. 석준의 덕입니다. 무엇부터 도와 드릴까요?”
“저도 호주에 살고 싶습니다.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세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구릅에 일원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최상의 대우를 해 드릴 터이니 승낙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수행비서에게 지시를 내려 한 달 후 석준의 관광비자가 영주비자로 바뀌고 광산개발 상무직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신분이 해결되자 가족초청을 하고 살림집을 마련해 놓은 후, 경쟁자가 있다는 정보로 서둘러 폐광재개발 신청을 변호사를 통해 접수시켰다.
아주 순조롭게 진척되어 허가장을 받아 들고, 자오쉬회장을 찾아갔다.
긴장된 석준의 모습을 본 자오쉬회장은
“어떤 일입니까? 근심거리가 생긴 겁니까?” 미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급하게 물었다.
“제가 산 너머 폐광재개발신청을 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회장님께 미리 말씀 올리고 했어야 하는데, 경쟁자가 생겨 성사여부가 불투명해서 먼저 말씀 드리지 못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축하 드립니다. 나도 그곳을 개발해 보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쓸모가 없다고 봐서 말을 안 했는데, 가능성을 보았습니까?”
“네, 확실치는 않아도 가능성이 보여 시도해 보려는 것입니다.”
“잘 되었습니다. 최대한으로 지원해 주라고 지시해 놓겠으니 최선을 다해 광맥을 찾으세요. 그리고 개발자금이 필요하면 도와주겠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도와주겠다는 말을 듣고 기쁨과 감사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두 달 후 자오쉬회장의 광산은 50톤이 넘는 노다지광을 발견하고 폭죽을 터트리는 큰 축제가 벌어 졌다.
여섯 달이 지난 어느 주말,
석준도 자기 광산을 열심히 탐색하다가 자오쉬광산과 비슷한 광맥을 발견했다. 자오쉬회장의 금융지원을 받아 장비를 구입하고, 찾아낸 광맥의 정확한 방향을 알기 위해 보링작업까지 한 후, 본격적으로 채굴을 한 지 두 달, 10톤이 넘는 거대한 노다지광을 찾아냈다.
석준은 눈물을 흘리며 광산용 망치로 누런 덩어리를 찍었다. 손에 전달되는 끈적한 느낌을 받고 전율했다.
광맥을 찾아 일생을 헤매고 다니면서 찍을 때 끈적한 느낌을 틈만 나면 말했던 노인을 떠 올렸다,
금광을 하다 재산을 날려 빈털터리가 되어 자살을 생각했던 옛날을 회상했다.
석준은 누런 노다지 덩어리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하나님께 십일조 감사 현금을 약속했고, 평생소원인 학원재단을 설립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서원했다.
아무도 없는 굴속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벌러덩 누어 펑펑 울었다.
그리고 고생시킨 아들, 딸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아들, 딸아! 죽는 날까지 꿈꾸기를 포기하지 마라. 매일 꿈을 꾸어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꿈꾸는 자만이 비상할 수 있다. 꿈에는 한계가 없는 무한하며, 꿈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몰입하는 사람에게만 온다.
마음껏 꿈꿔라. 꿈을 꾼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