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청정도론)에 앞선 40가지 명상 주제에서 땅의 까시나와 사종선 오종선을 이어 설명.
4. Pathavīkasiṇaniddeso
제 4장 땅의 까시나
Idāni yaṃ vuttaṃ ‘‘samādhibhāvanāya ananurūpaṃ vihāraṃ pahāya anurūpe vihāre viharantenā’’ti
여기에 앞에서 설하셨다. ‘삼매를 닦는데 적당하지 않은 사원을 떠나 적당한 사원에 살면서’라고.
ettha yassa tāvācariyena saddhiṃ ekavihāre vasato phāsu hoti, tena tattheva kammaṭṭhānaṃ parisodhentena vasitabbaṃ.
이제 여기서 스승과 같은 사원에서 사는 것이 편하면 그곳에서 명상주제를 분명하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
Sace tattha phāsu na hoti, yo añño gāvute vā aḍḍhayojane vā yojanamattepi vā sappāyo vihāro hoti, tattha vasitabbaṃ.
만약 편하지 않으면 1/4유순이나 아니면 반 유순이나 1 유순 정도 내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Evañhi sati kammaṭṭhānassa kismiñcideva ṭhāne sandehe vā satisammose vā jāte kālasseva vihāre vattaṃ katvā antarāmagge piṇḍāya caritvā bhattakiccapariyosāneyeva ācariyassa vasanaṭṭhānaṃ gantvā
이렇게 하면 명상주제의 어떤 부분에 의심이 생기거나 잊어버리더라도 알맞은 시간에 사원의 의무를 행한 뒤 가는 도중에 탁발을 하여 공양을 마치고 스승의 숙소로 가서는
taṃdivasamācariyassa santike kammaṭṭhānaṃ sodhetvā
그 날 스승의 곁에서 명상주제를 분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utiyadivase ācariyaṃ vanditvā nikkhamitvā antarāmagge piṇḍāya caritvā akilamantoyeva attano vasanaṭṭhānaṃ āgantuṃ sakkhissati.
그리고 다음날 스승께 절을 올린 뒤 출발하여 돌아오는 도중에 탁발하여 지치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올 수 있다.
Yo pana yojanappamāṇepi phāsukaṭṭhānaṃ na labhati, tena kammaṭṭhāne sabbaṃ gaṇṭhiṭṭhānaṃ chinditvā suvisuddhaṃ āvajjanapaṭibaddhaṃ kammaṭṭhānaṃ katvā
그러나 1유순 내에서도 편히 살 곳을 얻지 못한 이는 명상주제에 대해서 어려운 점을 모두 해결하여 명상주제를 아주 분명하게 하고, 명상주제로 확고하게 轉向하고는
dūrampi gantvā
더 먼 곳으로도 가도 된다.
samādhibhāvanāya ananurūpaṃ vihāraṃ pahāya anurūpe vihāre vihātabbaṃ.
[거기서도] 삼매를 닦기에 적당하지 않은 사원을 피하고 적당한 사원에서 살아야 한다.
Ananurūpavihāro
적당하지 않은 사원
Tattha ananurūpo nāma aṭṭhārasannaṃ dosānaṃ aññatarena samannāgato.
적당하지 않은 것은 18가지 허물 중의 하나를 가진다.
Tatrime aṭṭhārasa dosā –
이것이 18가지 허물이다.
mahattaṃ,
1. 큰 것,
navattaṃ,
2. 새 것,
jiṇṇattaṃ,
3. 낡은 것,
panthanissitattaṃ,
4. 길가에 있는 것,
soṇḍī,
5. 약수터가 있는 것,
paṇṇaṃ,
6. 야채,
pupphaṃ,
7. 꽃,
phalaṃ,
8. 과일,
patthanīyatā,
9. 유명한 곳,
nagarasannissitatā,
10. 도시부근에 있는 곳,
dārusannissitatā,
11. 삼림부근,
khettasannissitatā,
12. 경작지부근,
visabhāgānaṃ puggalānaṃ atthitā,
13. 화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paṭṭanasannissitatā,
14. 항구부근
paccantasannissitatā,
15. 변방,
rajjasīmasannissitatā,
16. 국경부근,
asappāyatā,
17. 적합하지 않은 곳,
kalyāṇamittānaṃ alābhoti
18. 선우들을 얻지 못하는 곳이다.
imesaṃ aṭṭhārasannaṃ dosānaṃ aññatarena dosena samannāgato ananurūpo nāma.
이것이 18가지 허물로 적합하지 않은 허물들이다.
Na tattha vihātabbaṁ.
이런 곳에 살아서는 안된다.
Kasmā?
왜 그런가?
Mahāvihāre tāva bahū nānāchandā sannipatanti,
큰 사원에는 갖가지 목적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모인다.
te aññamaññaṃ paṭiviruddhatāya vattaṃ na karonti.
그들은 서로 대립하여 의무를 충실히 하지 않는다.
Bodhiyaṅgaṇādīni asammaṭṭhāneva honti.
보리수 아래의 단 등이 청소되지 않은 채로 있고,
Anupaṭṭhāpitaṃ pānīyaṃ paribhojanīyaṃ.
마실 물과 허드렛물이 준비되어있지 않다.
Tatrāyaṃ gocaragāme piṇḍāya carissāmīti pattacīvaramādāya nikkhanto sace passati vattaṃ vā akataṃ pānīyaghaṭaṃ vā rittaṃ, athānena vattaṃ kātabbaṃ hoti, pānīyaṃ upaṭṭhāpetabbaṃ.
‘탁발 가는 마을로 탁발을 가야지’라고 의발을 수하고 나가다가 아직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을 보거나 물 항아리가 비어있음을 보면 그가 그 의무를 행해야 하고 물을 준비해야 한다.
Akaronto vattabhede dukkaṭaṃ āpajjati.
그가 하지 않으면 의무를 게을리 한 잘못을 범하게 된다.
Karontassa kālo atikkamati,
의무를 행하면 시간을 놓쳐버린다.
atidivā paviṭṭho niṭṭhitāya bhikkhāya kiñci na labhati.
너무 늦게 도착하면 걸식이 끝나버려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Paṭisallānagatopi sāmaṇeradaharabhikkhūnaṃ uccāsaddena saṅghakammehi ca vikkhipati.
한거에 들었는데도 사미와 젊은 비구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대중공사로 인해 산만해진다.
Yattha pana sabbaṃ vattaṃ katameva hoti, avasesāpi ca saṅghaṭṭanā natthi. Evarūpe mahāvihārepi vihātabbaṃ.
그러나 모든 의무가 충실하게 실행되고 다른 방해가 없는 그런 곳이라면 큰 사원에도 살 수 있다.
Navavihāre bahu navakammaṃ hoti,
새로 지은 사원에는 새 일거리가 많다.
akarontaṃ ujjhāyanti.
거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비난한다.
Yattha pana bhikkhū evaṃ vadanti ‘‘āyasmā yathāsukhaṃ samaṇadhammaṃ karotu, mayaṃ navakammaṃ karissāmā’’ti evarūpe vihātabbaṃ.
그러나 ‘스님은 편안하게 공부하십시오. 불사는 우리가 하겠습니다.’라고 비구들이 말하는 그런 곳에서는 살아도 된다.
Jiṇṇavihāre pana bahu paṭijaggitabbaṃ hoti,
낡은 사원에는 수리해야 할 일이 많다.
antamaso attano senāsanamattampi appaṭijaggantaṃ ujjhāyanti,
최소한 자기의 숙소라도 수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비난한다.
paṭijaggantassa kammaṭṭhānaṃ parihāyati.
수리하다보면 명상주제를 놓치고 만다.
Panthanissite mahāpathavihāre rattindivaṃ āgantukā sannipatanti.
길가에 있는 사원: 대로변에 있는 사원에는 밤낮으로 객들이 붐빈다.
Vikāle āgatānaṃ attano senāsanaṃ datvā rukkhamūle vā pāsāṇapiṭṭhe vā vasitabbaṃ hoti.
시도 때도 없이 온 객들에게 자기의 숙소를 내어주고 나무 아래나 돌 위에서 지내야 한다.
Punadivasepi evamevāti kammaṭṭhānassa okāso na hoti.
다음 날도 역시 그와 같다. 명상주제를 들 기회가 없다.
Yattha pana evarūpo āgantukasambādho na hoti, tattha vihātabbaṃ.
그러나 이와 같은 객들로 인한 방해가 없는 곳이면 살아도 된다.
Soṇḍī nāma pāsāṇapokkharaṇī hoti,
약수터란 바위의 샘물을 말한다.
tattha pānīyatthaṃ mahājano samosarati,
그곳에 물을 마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nagaravāsīnaṃ rājakulūpakattherānaṃ antevāsikā rajanakammatthāya āgacchanti,
왕실로부터 후원을 받는 도시에 사는 장로들의 제자들이 옷감을 물들이기 위하여 온다.
tesaṃ bhājanadārudoṇikādīni pucchantānaṃ asuke ca asuke ca ṭhāneti dassetabbāni honti,
그들이 용기와 목판과 함지 등을 찾을 때 어느 곳에 있다고 보여줘야 한다.
evaṃ sabbakālampi niccabyāvaṭo hoti.
이와 같이 항상 대기해 있어야 한다.
Yattha nānāvidhaṃ sākapaṇṇaṃ hoti, tatthassa kammaṭṭhānaṃ gahetvā divāvihāraṃ nisinnassāpi santike sākahārikā gāyamānā paṇṇaṃ uccinantiyo visabhāgasaddasaṅghaṭṭanena kammaṭṭhānantarāyaṃ karonti.
갖가지 야채가 있는 곳에서 낮 동안에 명상주제를 들고 앉아있을 때 그의 곁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나물을 캐는 여자들이 이성의 소리로 침해하여 명상주제를 방해한다.
Yattha pana nānāvidhā mālāgacchā supupphitā honti, tatrāpi tādisoyeva upaddavo.
갖가지 꽃의 덤불이 만발한 곳에도 역시 그와 같은 위험이 있다.
Yattha nānāvidhaṃ ambajambupanasādiphalaṃ hoti, tattha phalatthikā āgantvā yācanti,
갖가지 망고-잠부-잭 과일 등 과일이 있는 곳에는 과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와서 달라고 한다.
adentassa kujjhanti, balakkārena vā gaṇhanti,
주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우격다짐으로 가져간다.
sāyanhasamaye vihāramajjhe caṅkamantena te disvā ‘‘kiṃ upāsakā evaṃ karothā’’ti vuttā yathāruci akkosanti. Avāsāyapissa parakkamanti.
저녁 무렵에 경내를 경행하면서 그들을 보고 ‘청신사들이여, 왜들 이러시오?’라고 하면 그들은 화를 내고 싶은 만큼 맘껏 화를 내고 그를 쫓아내려고 할 것이다.
Patthanīye pana leṇasammate dakkhiṇagirihatthikucchicetiyagiricittalapabbatasadise vihāre viharantaṃ ayamarahāti sambhāvetvā vanditukāmā manussā samantā osaranti,
유명하고 세상에 잘 알려진 닥키나기리-핫티꿋치-쩨띠야기리-찟딸라빱바따 같은 사원에 머물면 ‘이분은 아라한이시다’라고 존경하면서 참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든다.
tenassa na phāsu hoti,
그러므로 편하지 않다.
yassa pana taṃ sappāyaṃ hoti, tena divā aññatra gantvā rattiṃ vasitabbaṃ
그러나 그곳이 적당하면 낮에는 다른 곳에 갔다가 밤에는 살아도 된다.
Nagarasannissite visabhāgārammaṇāni āpāthamāgacchanti,
도시부근에 있는 곳에는 異性이라는 대상이 나타난다.
kumbhadāsiyopi ghaṭehi nighaṃsantiyo gacchanti, okkamitvā maggaṃ na denti,
물 긷는 하녀들이 항아리로 부딪히면서 지나가고, 그가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issaramanussāpi vihāramajjhe sāṇiṃ parikkhipitvā nisīdanti.
저명인사들이 경내에 돗자리를 펴고 앉는다.
Dārusannissaye pana yattha kaṭṭhāni ca dabbupakaraṇarukkhā ca santi, tattha kaṭṭhahārikā pubbe vuttasākapupphahārikā viya aphāsuṃ karonti,
판재와 목재로 사용될 나무가 있는 삼림부근에 있는 곳에는 나무를 구하는 사람들이 앞서 설한 야채와 꽃을 따는 사람들처럼 편하지 않게 한다.
vihāre rukkhā santi, te chinditvā gharāni karissāmāti manussā āgantvā chindanti.
사원에 나무가 있으면 ‘이들을 베 가지고 가서 집을 지어야지’라고 사람들이 와서 벤다.
Sace sāyanhasamayaṃ padhānagharā nikkhamitvā vihāramajjhe caṅkamanto te disvā ‘‘kiṃ upāsakā evaṃ karothā’’ti vadati, yathāruci akkosanti, avāsāyapissa parakkamanti.
만약 저녁 무렵에 선실에서 나와 경내를 경행하면서 그들을 보고 ‘청신사들이여, 왜들 이러시오?’라고 하면 그들은 화를 내고 싶은 만큼 맘껏 화를 내고 그를 쫓아내려 할 것이다.
Yo pana khettasannissito hoti samantā khettehi parivārito, tattha manussā vihāramajjheyeva khalaṃ katvā dhaññaṃ maddanti, pamukhesu sayanti, aññampi bahuṃ aphāsuṃ karonti.
사방이 경작지로 둘러싸인 경작지부근에 있는 사원에서는 사람들이 경내에 탈곡장을 만들어 놓고 타작을 하고, 그것을 앞마당에다 말리며, 남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Yatrāpi mahāsaṅghabhogo hoti, ārāmikā kulānaṃ gāvo rundhanti, udakavāraṃ paṭisedhenti,
절에 딸린 재산이 많은 곳에서는 절의 給仕들이 농가의 소를 쫒아버리기도 하고 [경작지에 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수문을 막아버리기도 한다.
manussā vīhisīsaṃ gahetvā ‘‘passatha tumhākaṃ ārāmikānaṃ kamma’’nti saṅghassa dassenti.
사람들은 벼이삭을 가져와 ‘절의 給仕들이 한 짓을 보시오’라고 대중에게 보여준다.
Tena tena kāraṇena rājarājamahāmattānaṃ gharadvāraṃ gantabbaṃ hoti,
이런저런 이유로 왕이나 대신의 문을 들락거려야 한다.
ayampi khettasannissiteneva saṅgahito.
이런 것도 경작지부근에 있는 사원에 포함된다.
Visabhāgānaṃ puggalānaṃ atthitāti yattha aññamaññaṃ visabhāgaverī bhikkhū viharanti, ye kalahaṃ karontā mā, bhante, evaṃ karothāti vāriyamānā etassa paṃsukūlikassa āgatakālato paṭṭhāya naṭṭhāmhāti vattāro bhavanti.
화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서로서로 화합할 수 없고 적개심을 품은 비구들이 사는 곳에서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스님,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제지를 받으면 ‘이 누더기를 입은 이가 온 이후로 우리는 망했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는 곳이다.
Yopi udakapaṭṭanaṃ vā thalapaṭṭanaṃ vā nissito hoti, tattha abhiṇhaṃ nāvāhi ca satthehi ca āgatamanussā okāsaṃ detha, pānīyaṃ detha, loṇaṃ dethāti ghaṭṭayantā aphāsuṃ karonti.
항구부근이거나 육지로 통하는 입구에 있는 곳에는 계속해서 배와 마차를 타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장소를 좀 달라, 물을 달라, 소금을 달라고 밀치면서 불편하게 만든다.
Paccantasannissite pana manussā buddhādīsu appasannā honti.
변방에는 사람들이 삼보에 신심이 없다.
Rajjasīmasannissite rājabhayaṃ hoti.
국경부근에는 왕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Tañhi padesaṃ eko rājā na mayhaṃ vase vattatīti paharati,
그 지역을 이쪽에 있는 왕이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공격한다.
itaropi na mayhaṃ vase vattatīti.
저쪽에 있는 왕도 역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공격한다.
Tatrāyaṃ bhikkhu kadāci imassa rañño vijite vicarati, kadāci etassa.
이 비구는 어떤 때는 이쪽 왕이 정복한 땅에서 살고 어떤 때는 저쪽 왕이 정복한 땅에서 산다.
Atha naṃ ‘‘carapuriso aya’’nti maññamānā anayabyasanaṃ pāpenti.
그러면 그 비구를 두고 ‘이 사람은 첩자다’라고 생각하면서 재앙에 빠뜨린다.
Asappāyatāti visabhāgarūpādiārammaṇasamosaraṇena vā amanussapariggahitatāya vā asappāyatā.
적합하지 않은 곳이란 이성의 모습 등의 대상을 만나거나 도깨비가 나타나는 위험 때문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Tatridaṃ vatthu.
이것이 그 일화다.
Eko kira thero araññe vasati.
한때 어떤 장로가 숲에서 살고 있었다.
Athassa ekā yakkhinī paṇṇasāladvāre ṭhatvā gāyi.
그때 한 처녀 도깨비가 풀로 만든 그의 토굴 문 앞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So nikkhamitvā dvāre aṭṭhāsi,
장로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섰다.
sā gantvā caṅkamanasīse gāyi.
그녀는 경행처의 끝으로 가서 노래를 불렀다.
Thero caṅkamanasīsaṃ agamāsi.
장로는 경행처의 끝으로 갔다.
Sā sataporise papāte ṭhatvā gāyi.
그녀는 백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Thero paṭinivatti.
장로는 돌아왔다.
Atha naṃ sā vegenāgantvā gahetvā ‘‘mayā, bhante, na eko na dve tumhādisā khāditā’’ti āha.
그러자 그녀는 급히 그를 낚아챈 뒤 ‘스님,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한 두 사람 먹어치운 것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Kalyāṇamittānaṃ alābhoti yattha na sakkā hoti ācariyaṃ vā ācariyasamaṃ vā upajjhāyaṃ vā upajjhāyasamaṃ vā kalyāṇamittaṃ laddhuṃ.
선우들을 얻지 못하는 곳은 스승이나 스승과 동등한 이, 법사나 법사와 동등한 이, 선우를 얻지 못하는 곳이다.
Tattha so kalyāṇamittānaṃ alābho mahādosoyevāti
선우들을 얻지 못함은 큰 손실이다.
imesaṃ aṭṭhārasannaṃ dosānaṃ aññatarena samannāgato ananurūpoti veditabbo. Vuttampi cetaṃ aṭṭhakathāsu –
이 18가지 허물 가운데 한 가지를 가진 것을 적당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Mahāvāsaṃ navāvāsaṃ, jarāvāsañca panthaniṃ;
큰 절, 새 절, 고찰, 길가의 절,
Soṇḍiṃ paṇṇañca pupphañca, phalaṃ patthitameva ca.
약수터, 야채, 꽃, 열매가 있는 절, 유명한 절
Nagaraṃ dārunā khettaṃ, visabhāgena paṭṭanaṃ;
도시부근, 삼림, 경작지, 화합할 수 없는 곳, 항구
Paccantasīmāsappāyaṃ, yattha mitto na labbhati.
변방, 국경, 부적합한 곳, 선우를 얻지 못하는 곳
Aṭṭhārasetāni ṭhānāni, iti viññāya paṇḍito;
이 18가지 경우라고 현자는 알고서
Ārakā parivajjeyya, maggaṃ sappaṭibhayaṃ yathāti.
위험한 길을 멀리 피해야 한다.
Anurūpavihāro
적당한 사원
Yo pana gocaragāmato nātidūranāccāsannatādīhi pañcahaṅgehi samannāgato, ayaṃ anurūpo nāma.
걸식하는 마을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등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춘 것이 적당한 곳이다.
Vuttañhetaṃ bhagavatā –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kathañca, bhikkhave, senāsa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숙소가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는가?
Idha, bhikkhave, senāsanaṃ nātidūraṃ hoti nāccāsannaṃ gamanāgamanasampannaṃ,
비구들이여, 여기 숙소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는 길이 있으며
divā appākiṇṇaṃ rattiṃ appasaddaṃ appanigghosaṃ,
낮에 거의 붐비지 않고 밤에 소리나 음성이 거의 없고
appaḍaṃsamakasavātātapasarīsapasamphassaṃ,
파리-모기-바람-햇빛-뱀과 접촉이 거의 없으며
tasmiṃ kho pana senāsane viharantassa appakasireneva uppajjanti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ā.
그 절에 살 때 의복-음식-침상과 의자-환자를 치료하는 약품을 쉽게 얻고
Tasmiṃ kho pana senāsane therā bhikkhū viharanti bahussutā āgatāgamā dhammadharā vinayadharā mātikādharā,
그 거주처에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을 호지하고 율을 호지하고, 마띠까(論母)를 호지하는 장로 비구들이 있어
te kālena kālaṃ upasaṅkamitvā paripucchati paripañhati ‘idaṃ, bhante, kathaṃ imassa ko attho’ti,
그들을 자주 찾아 뵙고 ‘존자시여,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어보고 질문하면
tassa te āyasmanto avivaṭañceva vivaranti, anuttānīkatañca uttānīkaronti, anekavihitesu ca kaṅkhaṭṭhāniyesu dhammesu kaṅkhaṃ paṭivinodenti.
그 존자들은 그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어 주고, 명백하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해주어서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법들에 대해서 의문을 풀어준다.
Evaṃ kho, bhikkhave, senāsa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hotī’’ti (a. ni. 10.11).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거주처는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춘다.’라고.
Ayaṃ ‘‘samādhibhāvanāya ananurūpaṃ vihāraṃ pahāya anurūpe vihāre viharantenā’’ti ettha vitthāro.
이것이 삼매를 닦는데 적당하지 않은 사원을 떠나 적당한 사원에 살면서 라는 구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Khuddakapalibodhā
사소한 장애를 끊음
Khuddakapalibodhupacchedaṃ katvāti evaṃ patirūpe vihāre viharantena yepissa te honti khuddakapalibodhā, tepi upacchinditabbā.
사소한 장애를 끊고: 이와 같이 적당한 사원에서 살 때, 사소한 장애라도 있으면 그것을 끊어야 한다.
Seyyathidaṃ, dīghāni kesanakhalomāni chinditabbāni.
즉, 긴 머리카락과 손·발톱과 몸의 털을 깍아야 한다.
Jiṇṇacīvaresu daḷhīkammaṃ vā tunnakammaṃ vā kātabbaṃ.
헤진 옷들을 수선하고 꿰매야 한다.
Kiliṭṭhāni vā rajitabbāni.
더러워진 옷은 빨아 물들여야 한다.
Sace patte malaṃ hoti, patto pacitabbo.
만약 발우에 녹이 슬었으면 다시 구워야 한다.
Mañcapīṭhādīni sodhetabbānīti.
침상과 의자 등을 소제해야 한다.
‘‘Ayaṃ khuddakapalibodhupacchedaṃ katvā’’ti ettha vitthāro.
이것이 ‘사소한 장애를 끊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
Bhāvanāvidhānaṃ
닦는 절차
땅의 까시나
Idāni sabbaṃ bhāvanāvidhānaṃ aparihāpentena bhāvetabboti ettha ayaṃ pathavīkasiṇaṃ ādiṃ katvā sabbakammaṭṭhānavasena vitthārakathā hoti.
여기서 닦는 모든 절차를 놓치지 않고 삼매를 닦아야 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이제 땅의 까시나를 시작으로 모든 명상주제를 통해 [그 닦는 절차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Evaṃ upacchinnakhuddakapalibodhena hi bhikkhunā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ena bhattasammadaṃ paṭivinodetvā pavivitte okāse sukhanisinnena katāya vā akatāya vā pathaviyā nimittaṃ gaṇhitabbaṃ.
이와 같이 사소한 장애를 끊은 비구는 공양을 마친 후 걸식으로부터 돌아와서 식곤증을 떨쳐버리고 한적한 곳에 편안히 앉아서 만들었거나 자연적인 땅의 표상을 취해야 한다.
Vuttañhetaṃ –
이와 같이 설하셨다.-
‘‘Pathavīkasiṇaṃ uggaṇhanto pathaviyaṃ nimittaṃ gaṇhāti kate vā akate vā
“땅의 까시나를 배울 때 땅에서 표상을 취한다. 그것은 만든 것이거나 만들지 않은 자연적인 것이다.***
sāntake, no anantake,
한계를 가진 것이지 한계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sakoṭiye, no akoṭiye,
가장자리를 가진 것이지 가장자리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savaṭṭume, no avaṭṭume,
주위를 가진 것이지 주위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sapariyante, no apariyante,
제한된 것이지 제한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suppamatte vā sarāvamatte vā.
체만하거나 찻잔만하다.
So taṃ nimittaṃ suggahitaṃ karoti, sūpadhāritaṃ upadhāreti, suvavatthitaṃ vavatthapeti.
그는 그 표상을 잘 들고, 잘 호지하고, 잘 구분한다.
So taṃ nimittaṃ suggahitaṃ katvā sūpadhāritaṃ upadhāretvā suvavatthitaṃ vavatthapetvā ānisaṃsadassāvī ratanasaññī hutvā cittīkāraṃ upaṭṭhapetvā sampiyāyamāno tasmiṃ ārammaṇe cittaṃ upanibandhati ‘addhā imāya paṭipadāya jarāmaraṇamhā muccissāmī’ti.
그는 그 표상을 잘 들고, 잘 호지하고, 잘 구분한 뒤 그 표상의 이익을 보고 보배라고 인식 하고 존경심을 내고 사랑스러워하면서 ‘틀림없이 이 도닦음으로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라고 그 대상에 마음을 묶는다.
So vivicceva kāmeh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ī’’ti.
그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 초선에 들어 머문다.”
Tattha yena atītabhavepi sāsane vā isipabbajjāya vā pabbajitvā pathavīkasiṇe catukkapañcakajjhānāni nibbattitapubbāni,
전생에 부처님 교단이나 출가한 선인들의 무리에 출가하여 땅의 까시나에 四種禪과 五種禪을 이미 일으킨 적이 있거나
evarūpassa puññavato upanissayasampannassa akatāya pathaviyā kasitaṭṭhāne vā khalamaṇḍale vā nimittaṃ uppajjati,
그러한 공덕을 갖추었고 그런 것을 강한 의지처로 가진 이는 경작된 땅이나 탈곡장과 같은 자연적인 땅에서 표상이 일어난다.
mallakattherassa viya.
말라까 장로의 경우처럼.
Tassa kirāyasmato kasitaṭṭhānaṃ olokentassa taṃṭhānappamāṇameva nimittaṃ udapādi.
장로가 경작된 땅을 쳐다봤을 때 그곳만 한 크기의 표상이 일어났다.
So taṃ vaḍḍhetvā pañcakajjhānāni nibbattetvā jhānapadaṭṭhānaṃ vipassanaṃ paṭṭhapetvā arahattaṃ pāpuṇi.
장로는 그것을 확장하여 오종선을 일으킨 뒤 禪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는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Yo panevaṃ akatādhikāro hoti, tena ācariyasantike uggahitakammaṭṭhānavidhānaṃ avirādhetvā cattāro kasiṇadose pariharantena kasiṇaṃ kātabbaṃ.
그러나 [전생에] 닦지 않았다면 그는 스승 곁에서 파악한 명상주제의 절차를 놓치지 않고 네 가지 까시나의 결점을 경계하면서 까시나를 만들어야 한다.
Nīlapītalohitaodātasambhedavasena hi cattāro pathavīkasiṇadosā.
푸르고-노랗고-붉고-흰 색깔의 혼합으로 인해 땅은 네 가지 결점을 갖는다.
Tasmā nīlādivaṇṇaṃ mattikaṃ aggahetvā gaṅgāvahe mattikāsadisāya aruṇavaṇṇāya mattikāya kasiṇaṃ kātabbaṃ.
그러므로 푸른색 등의 흙으로 만들지 말고 강가 강의 흐름에 있는 흙과 같은 새벽 색깔을 가진 흙으로 까시나를 만들어야 한다. ***
Tañca kho vihāramajjhe sāmaṇerādīnaṃ sañcaraṇaṭṭhāne na kātabbaṃ.
사미 등이 다니는 사원의 중앙에서 그것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Vihārapaccante pana paṭicchannaṭṭhāne pabbhāre vā paṇṇasālāya vā saṃhārimaṃ vā tatraṭṭhakaṃ vā kātabbaṃ.
사원 모서리의 가려진 곳이나 산 속 굴이나 풀로 만든 토굴에서 만들어야 한다. ***
Tatra saṃhārimaṃ catūsu daṇḍakesu pilotikaṃ vā cammaṃ vā kaṭasārakaṃ vā bandhitvā
tattha apanītatiṇamūlasakkharakathalikāya sumadditāya mattikāya vuttappamāṇaṃ vaṭṭaṃ limpetvā kātabbaṃ.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으로 만들거나 고정되게 만들고는 이 가운데서 휴대용 까시나는 네 개의 막대기 위에다 누더기나 가죽이나 가는 거적을 묶어서 그곳에 풀과 뿌리와 자갈을 모래가 제거된 "반죽이 잘 된 흙으로 이미 설한 크기의 원반"을 잘라서 만들어야 한다. ***휴대용 흙 까시나
Taṃ parikammakāle bhūmiyaṃ attharitvā oloketabbaṃ.
그것을 준비할 때는 땅에다 펴놓고 보아야 한다. ***
Tatraṭṭhakaṃ bhūmiyaṃ padumakaṇṇikākārena khāṇuke ākoṭetvā vallīhi vinandhitvā kātabbaṃ.
고정된 까시나는 연꽃받침 모양으로 땅속에 막대기를 박고 덩굴로 묶어 만들어야 한다. ***땅속에 흙 까시나
Yadi sā mattikā nappahoti, adho aññaṃ pakkhipitvā uparibhāge suparisodhitāya aruṇavaṇṇāya mattikāya vidatthicaturaṅgulavitthāraṃ vaṭṭaṃ kātabbaṃ.
만약 좋은 흙이 부족하면 안에 다른 흙을 넣고 그 윗부분에 깨끗이 걸러진 새벽 색깔의 흙으로 한 뼘과 손가락 네 마디의 직경을 가진 원반을 만들어야 한다. ***흙의 원반 크기- 한 뼘과 손가락 네 마디의 직경의 원반
Etadeva hi pamāṇaṃ sandhāya ‘‘suppamattaṃ vā sarāvamattaṃ vā’’ti vuttaṃ.
이 크기에 관하여 [앞서] 체만하거나 찻잔만하다라고 설했다.
‘‘Sāntake no anantake’’tiādi panassa paricchedatthāya vuttaṃ.
한계를 가진 것이다, 한계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등으로 설한 것은 한정된 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Tasmā evaṃ vuttappamāṇaparicchedaṃ katvā rukkhapāṇikā visabhāgavaṇṇaṃ samuṭṭhapeti.
그러므로 이와 같이 앞서 설한 크기대로 한정한 후 나무로 만든 흙손을 사용하면 [흙의] 색깔이 변한다.
Tasmā taṃ aggahetvā pāsāṇapāṇikāya ghaṃsetvā samaṃ bherītalasadisaṃ katvā taṃ ṭhānaṃ sammajjitvā nhatvā āgantvā kasiṇamaṇḍalato aḍḍhateyyahatthantare padese paññatte vidatthicaturaṅgulapādake suatthate pīṭhe nisīditabbaṃ.
그러므로 돌로 만든 흙손으로 문질러 북의 표면처럼 평평하게 만든 후 만든 곳을 청소하고 목욕하고 돌아와서 까시나의 원반으로부터 2.5완척 떨어진 곳에 마련된 좌대에 앉아야 한다. 좌대는 한 뼘과 손가락 네 마디의 높이이고 잘 펴진 것이어야 한다.(*1척은 약 30.3cm, 완척은 약48-50cm 2.5완척은 약1.5m 거리, 좌대높이 25cm)
Tato dūratare nisinnassa hi kasiṇaṃ na upaṭṭhāti, āsannatare kasiṇadosā paññāyanti.
[왜냐하면] 그보다 더 먼 곳에 앉으면 까시나가 드러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앉으면 까시나의 결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Uccatare nisinnena gīvaṃ onamitvā oloketabbaṃ hoti, nīcatare jaṇṇukāni rujanti.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앉으면 목을 숙여서 보아야 하고,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앉으면 무릎에 통증이 온다.
Tasmā vuttanayeneva nisīditvā ‘‘appassādā kāmā’’tiādinā nayena kāmesu ādīnavaṃ paccavekkhitvā kāmanissaraṇe sabbadukkhasamatikkamupāyabhūte nekkhamme jātābhilāsena buddhadhammasaṅghaguṇānussaraṇena pītipāmojjaṃ janayitvā //‘‘ayaṃ dāni sā sabbabuddha paccekabuddha ariyasāvakehi paṭipannā nekkhammapaṭipadā’’ti paṭipattiyā sañjātagāravena ‘‘addhā imāya paṭipadāya pavivekasukharasassa bhāgī bhavissāmī’’ti ussāhaṃ janayitvā samena ākārena cakkhūni ummīletvā nimittaṃ gaṇhantena bhāvetabbaṃ.
그러므로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앉은 뒤 “감각적 욕망은 달콤함이 적고(M.i.130)"라는 방법대로 감각적 욕망에서 위험을 반조하여 감각적 욕망으로부터의 출구와 모든 괴로움을 극복하는 수단인 출리에 대한 열망을 갖고 불·법·승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희열과 기쁨을 일으킨 후 ‘이제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벽지불, 성스러운 제자들이 실천 수행한 출리의 도닦음이다.’라고 이 도닦음에 대해 존중심을 내면서, ‘틀림없이 이 도닦음으로 한적함에서 생긴 행복의 맛을 경험하리라’고 분발심을 낸 후 적당하게 두 눈을 뜨고 표상을 취하여 닦아야 한다.
Atiummīlayato hi cakkhu kilamati, maṇḍalañca ativibhūtaṃ hoti,
만약 눈을 너무 크게 뜨면 눈이 피로해지고 원반이 지나치게 분명해진다.
tenassa nimittaṃ nuppajjati.
그래서 표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Atimandaṃ ummīlayato maṇḍalamavibhūtaṃ hoti, cittañca līnaṃ hoti,
눈을 너무 작게 뜨면 원반이 분명해지지 않고, 따라서 마음이 졸리게 된다.
evampi nimittaṃ nuppajjati.
이런 경우에도 표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Tasmā ādāsatale mukhanimittadassinā viya samenākārena cakkhūni ummīletvā nimittaṃ gaṇhantena bhāvetabbaṃ,
그러므로 거울의 표상에서 자기 얼굴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적당한 형태로 두 눈을 뜨고 표상을 취하야 닦아야 한다.
na vaṇṇo paccavekkhitabbo, na lakkhaṇaṃ manasikātabbaṃ.
색깔을 반조해서도 안되고 특징에 주의를 기울여도 안된다.
Apica vaṇṇaṃ amuñcitvā nissayasavaṇṇaṃ katvā ussadavasena paṇṇattidhamme cittaṃ paṭṭhapetvā manasi kātabbaṃ.
색깔을 무시하지는 않고 그 색깔의 의지처인 [땅]에 색깔을 포함시켜 [땅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에 [땅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Pathavī mahī, medinī, bhūmi, vasudhā, vasundharātiādīsu pathavīnāmesu yamicchati, yadassa saññānukūlaṃ hoti, taṃ vattabbaṃ.
빠타위, 마히, 메디니, 부미, 와수다, 와순다라 등 땅의 이름 가운데 그가 좋아하고 인식하기에 좋은 것을 불러도 된다.
Apica pathavīti etadeva nāmaṃ pākaṭaṃ,
그래도 빠타위라는 이름이 분명하다.
tasmā pākaṭavaseneva pathavī pathavīti bhāvetabbaṃ.
그러므로 분명한 [이름으로] ‘빠타위, 빠타위’하면서 닦아야 한다.
Kālena ummīletvā kālena nimīletvā āvajjitabbaṃ.
때로는 눈을 뜨고 [쳐다보고는] 때로는 눈을 감고 [마음에]전향해야 한다.
Yāva uggahanimittaṃ nuppajjati, tāva kālasatampi kālasahassampi tato bhiyyopi eteneva nayena bhāvetabbaṃ.
익힌 표상이 일어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 보다도 더 많이 이러한 방법으로 닦아야 한다.
Tassevaṃ bhāvayato yadā nimīletvā āvajjantassa ummīlitakāle viya āpāthamāgacchati, tadā uggahanimittaṃ jātaṃ nāma hoti.
이렇게 수행하면서 눈을 감고 마음으로 전향할 때도 눈을 뜨고 쳐다볼 때처럼 영역에 나타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익힌 표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Tassa jātakālato paṭṭhāya na tasmiṃ ṭhāne nisīditabbaṃ.
그것이 일어난 후로는 그곳에 더 이상 앉으면 안된다.
Attano vasanaṭṭhānaṃ pavisitvā tattha nisinnena bhāvetabbaṃ.
자기의 거처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앉아 닦아야 한다.
Pādadhovanapapañcaparihāratthaṃ panassa ekapaṭalikupāhanā ca kattaradaṇḍo ca icchitabbo.
발 씻는 것 때문에 [수행이] 산만하게 됨을 피하기 위해 한 개의 밑창을 가진 신발과 걸을 때 갖고 다니는 지팡이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Athānena sace taruṇo samādhi kenacideva asappāyakāraṇena nassati, upāhanā āruyha kattaradaṇḍaṃ gahetvā taṃ ṭhānaṃ gantvā nimittaṃ ādāya āgantvā sukhanisinnena bhāvetabbaṃ,
만약 얕은 삼매가 어떤 부적합함 때문에 흩어져버리면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그곳으로 가서 표상을 취한 뒤 돌아와 편안하게 앉아서 닦아야 한다.
punappunaṃ samannāharitabbaṃ, takkāhataṃ vitakkāhataṃ kātabbaṃ.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고, 사유와 일으킨 생각으로 자극을 주어야 한다.
Tassevaṃ karontassa anukkamena nīvaraṇāni vikkhambhanti, kilesā sannisīdanti,
이렇게 닦을 때 서서히 장애들이 억압되고 오염원들이 가라앉는다.
upacārasamādhinā cittaṃ samādhiyati, paṭibhāganimittaṃ uppajjati.
근접삼매를 통해 마음은 삼매에 든다. 닮은 표상이 일어난다.
Tatrāyaṃ purimassa ca uggahanimittassa imassa ca viseso,
앞의 익힌 표상과 닮은 표상의 차이점은 이와 같다.
uggahanimitte kasiṇadoso paññāyati,
익힌 표상에는 까시나의 결점이 나타난다.
paṭibhāganimittaṃ thavikato nihatādāsamaṇḍalaṃ viya sudhotasaṅkhathālaṃ viya valāhakantarā nikkhantacandamaṇḍalaṃ viya meghamukhe balākā viya uggahanimittaṃ padāletvā nikkhantamiva tato sataguṇaṃ sahassaguṇaṃ suparisuddhaṃ hutvā upaṭṭhāti.
닮은 표상은 마치 상자로부터 꺼낸 맑은 거울처럼, 잘 닦은 조가비의 접시처럼, 구름으로부터 나온 밝은 달처럼, 먹구름을 배경으로 한 학처럼. 마치 익힌 표상을 부수고 나오는 것처럼 그보다 백 배, 천 배 더 청정하게 나타난다.
Tañca kho neva vaṇṇavantaṃ, na saṇṭhānavantaṃ. Yadi hi taṃ īdisaṃ bhaveyya, cakkhuviññeyyaṃ siyā oḷārikaṃ sammasanupagaṃ tilakkhaṇabbhāhataṃ, na panetaṃ tādisaṃ.
만약 그것이 색깔과 형태를 가지면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거친 것이고, [위빳사나를 통해] 명상할 수 있고,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 제압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Kevalañhi samādhilābhino upaṭṭhānākāramattaṃ saññajametanti
다만 이것은 삼매를 얻은 이의 인식에서 생긴 것이고, 나타남의 한 형태일 뿐이다.
Uppannakālato ca panassa paṭṭhāya nīvaraṇāni vikkhambhitāneva honti, kilesā sannisinnāva, upacārasamādhinā cittaṃ samāhitamevāti.
그러나 이것이 일어난 후부터 반드시 장애들은 억압되고 오염원들은 가라앉으며 근접삼매를 통해 마음이 삼매에 든다.
Duvidho hi samādhi upacārasamādhi ca appanāsamādhi ca.
삼매는 두 종류인데, 근접삼매와 본삼매이다.
Dvīhākārehi cittaṃ samādhiyati
두 가지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
upacārabhūmiyaṃ vā paṭilābhabhūmiyaṃ vā.
근접의 경지와 획득의 경지에서 든다.
Tattha upacārabhūmiyaṃ nīvaraṇappahānena cittaṃ samāhitaṃ hoti. Paṭilābhabhūmiyaṃ aṅgapātubhāvena.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므로 마음은 근접의 경지에서 삼매에 들고 禪의 구성요소들이 나타나므로 획득의 경지에서 삼매에 든다.
Dvinnaṃ pana samādhīnaṃ idaṃ nānākāraṇaṃ,
두 종류의 삼매의 차이점은 이와 같다.
upacāre aṅgāni na thāmajātāni honti,
근접삼매에서 [禪의] 구성요소들은 견고하지 않다.
aṅgānaṃ athāmajātattā, yathā nāma daharo kumārako ukkhipitvā ṭhapiyamāno punappunaṃ bhūmiyaṃ patati, evameva upacāre uppanne cittaṃ kālena nimittamārammaṇaṃ karoti, kālena bhavaṅgamotarati.
구성요소들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놓으면 계속해서 땅바닥에 넘어지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근접이 일어날 때 마음은 때로는 표상을 대상으로 삼았다가 때로는 잠재의식으로 들어갔다 한다.
Appanāyaṃ pana aṅgāni thāmajātāni honti,
그러나 본삼매의 구성요소들은 견고하다.
tesaṃ thāmajātattā, yathā nāma balavā puriso āsanā vuṭṭhāya divasampi tiṭṭheyya, evameva appanāsamādhimhi uppanne cittaṃ sakiṃ bhavaṅgavāraṃ chinditvā kevalampi rattiṃ kevalampi divasaṃ tiṭṭhati, kusalajavanapaṭipāṭivaseneva pavattatīti.
그들이 견고하기 때문에 본삼매가 일어나면 마음은 한 번 잠재의식의 흐름을 끊고는 밤과 낮이 다하도록 계속되고 유익한 속행의 흐름으로 일어난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종일 서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Tatra yadetaṃ upacārasamādhinā saddhiṃ paṭibhāganimittaṃ uppannaṃ, tassa uppādanaṃ nāma atidukkaraṃ.
근접삼매와 함께하는 닮은 표상을 일으키기란 아주 어렵다.
Tasmā sace teneva pallaṅkena taṃ nimittaṃ vaḍḍhetvā appanaṃ adhigantuṃ sakkoti, sundaraṃ.
그러므로 가부좌한 그 자리에서 그 표상을 확대시켜 본삼매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No ce sakkoti, athānena taṃ nimittaṃ appamattena cakkavattigabbho viya rakkhitabbaṃ.
만약 이를 수 없다면 부지런히 그 표상 보호하기를 마치 전륜성왕이 될 태아를 보호하듯 해야 한다.
Evañhi –
이와 같이-
Nimittaṃ rakkhato laddha-parihāni na vijjati;
Ārakkhamhi asantamhi, laddhaṃ laddhaṃ vinassati.
표상을 보호하는 이는 이미 얻은 근접삼매를 잃지 않는다.
보호하지 않는 이의 경우 이미 얻은 것도 잃어버린다.
Sattasappāyā
일곱 가지 적·부적
Tatrāyaṃ rakkhaṇavidhi –
이제 이것이 보호하는 방법이다.
Āvāso gocaro bhassaṃ, puggalo bhojanaṃ utu;
숙소, 탁발 가는 마을, 담론, 사람, 음식, 기후
Iriyāpathoti sattete, asappāye vivajjaye.
자세 라는 이 일곱가지가 부적당하면 피해야 하고
Sappāye satta sevetha, evañhi paṭipajjato;
일곱 가지가 적당하면 그것을 의지해야 한다.
Nacireneva kālena, hoti kassaci appanā.
이와 같이 도닦을 때 머지않아 본삼매를 얻는다.
Tatrassa yasmiṃ āvāse vasantassa anuppannaṃ vā nimittaṃ nuppajjati, uppannaṃ vā vinassati, anupaṭṭhitā ca sati na upaṭṭhāti, asamāhitañca cittaṃ na samādhiyati, ayaṃ asappāyo.
어떤 숙소에 머물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표상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난 것마저도 사라지거나, 아직 확립되지 않은 마음챙김이 확립되지 않거나 아직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 삼매에 들지 않는 그런 숙소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Yattha nimittaṃ uppajjati ceva thāvarañca hoti, sati upaṭṭhāti, cittaṃ samādhiyati nāgapabbatavāsīpadhāniyatissattherassa viya, ayaṃ sappāyo.
그러나 그곳에서 표상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더욱더 견고해지고, 마음챙김이 확립되고, 마음이 삼매에 드는 그런 곳은 적당한 곳이다. 나가 산에 머물던 빠다니야 띳사 장로처럼.
Tasmā yasmiṃ vihāre bahū āvāsā honti, tattha ekamekasmiṃ tīṇi tīṇi divasāni vasitvā yatthassa cittaṃ ekaggaṃ hoti, tattha vasitabbaṃ.
그러므로 만약 사원에 숙소가 많이 있으면 각각의 숙소에 3일 동안 머문 뒤 어떤 곳에서 그의 마음이 하나됨을 얻으면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Āvāsasappāyatāya hi tambapaṇṇidīpamhi cūḷanāgaleṇe vasantā tattheva kammaṭṭhānaṃ gahetvā pañcasatā bhikkhū arahattaṃ pāpuṇiṃsu.
땀바빤니 섬의 쭐라나가레나에 머물던 500명의 비구가 그곳에서 명상주제를 받은 뒤 아라한이 된 것은 숙소가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Sotāpannādīnaṃ pana aññattha ariyabhūmiṃ patvā tattha arahattappattānañca gaṇanā natthi.
그런데 다른 곳에서 예류자 등의 성자의 경지를 얻은 다음 이곳에 와서 아라한이 된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vamaññesupi cittalapabbatavihārādīsu.
이런 것은 찟딸라 산의 사원 등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Gocaragāmo pana yo senāsanato uttarena vā dakkhiṇena vā nātidūre diyaḍḍhakosabbhantare hoti sulabhasampannabhikkho, so sappāyo.
탁발가는 마을은 거주처로부터 북쪽이나 남쪽에 있고, 너무 멀지 않으며 1.5꼬사 정도 떨어져 있고, 탁발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적당하다.
Viparīto asappāyo.
그 반대되는 곳은 부적당하다.
Bhassanti dvattiṃsatiracchānakathāpariyāpannaṃ asappāyaṃ,
담론: 32가지 쓸데없는 담론에 속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tañhissa nimittantaradhānāya saṃvattati.
왜냐하면 그것은 표상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Dasakathāvatthunissitaṃ sappāyaṃ, tampi mattāya bhāsitabbaṃ.
10가지 논의의 주제를 의지한 담론은 적당하지만 정도에 맞게 해야 한다.
Puggalopi atiracchānakathiko sīlādiguṇasampanno, yaṃ nissāya asamāhitaṃ vā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aṃ vā cittaṃ thirataraṃ hoti, evarūpo sappāyo.
사람: 쓸데없는 담론을 않고, 계행 등의 덕을 가지며, 그 사람과 사귀어서 삼매에 들지 않았던 마음이 삼매에 들거나 혹은 삼매에 든 마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이런 사람은 적당하다.
Kāyadaḷhībahulo pana tiracchānakathiko asappāyo.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쓸데없는 담론을 하는 이는 부적당하다.
So hi taṃ kaddamodakamiva acchaṃ udakaṃ malīnameva karoti,
왜냐하면 진흙이 맑은 물을 흐리게 하듯 그런 사람은 교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tādisañca āgamma koṭapabbatavāsīdaharasseva samāpattipi nassati, pageva nimittaṃ.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만나 꼬따 산에 머물던 젊은 비구는 증득한 것도 잃어버렸는데 하물며 표상이야 말해서 뭣하겠는가?
Bhojanaṃ pana kassaci madhuraṃ, kassaci ambilaṃ sappāyaṃ hoti.
음식: 어떤 사람에게는 단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 것이 적당하다.
Utupi kassaci sīto, kassaci uṇho sappāyo hoti.
기후: 어떤 사람에게는 차가운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것이 적당하다.
Tasmā yaṃ bhojanaṃ vā utuṃ vā sevantassa phāsu hoti, asamāhitaṃ vā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aṃ vā thirataraṃ hoti, taṃ bhojanaṃ so ca utu sappāyo.
그러므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기후에 살아서 편안하게 되고 삼매에 들지 않았던 마음이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든 마음이 견고해지면 그 음식과 그 기후는 적당하다.
Itaraṃ bhojanaṃ itaro ca utu asappāyo.
그렇지 않은 음식과 기후는 부적당하다.
Iriyāpathesupi kassaci caṅkamo sappāyo hoti, kassaci sayanaṭṭhānanisajjānaṃ aññataro.
자세: 어떤 사람에게는 경행이 적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눕거나, 서거나, 앉아있는 것 중 그 어떤 것이 적당하다.
Tasmā taṃ āvāsaṃ viya tīṇi divasāni upaparikkhitvā yasmiṃ iriyāpathe asamāhitaṃ vā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aṃ vā thirataraṃ hoti, so sappāyo.
그러므로 숙소의 경우처럼 3일 동안 면밀히 조사해본 뒤 그 자세에서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 삼매에 들거나 삼매에 든 마음이 견고해지면 그것은 적당하다.
Itaro asappāyoti veditabbo.
다른 것은 부적당하다고 알아야 한다.
Iti imaṃ sattavidhaṃ asappāyaṃ vajjetvā sappāyaṃ sevitabbaṃ.
이와 같이 일곱 가지 부적당한 것은 피하고 적당한 것을 의지해야 한다.
Evaṃ paṭipannassa hi nimittāsevanabahulassa nacireneva kālena hoti kassaci appanā.
이와 같이 수행하고 표상을 반복하기를 거듭하면 머지않아 본삼매를 얻을 것이다.
Dasavidhaappanākosallaṃ
열 가지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
Yassa pana evampi paṭipajjato na hoti, tena dasavidhaṃ appanākosallaṃ sampādetabbaṃ.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하여도 본삼매를 얻지 못하면 열 가지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을 성취해야 한다.
Tatrāyaṃ nayo,
이것이 그 방법이다.
dasāhākārehi appanākosallaṃ icchitabbaṃ,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은 다음의 열 가지 측면에서 요구된다.
vatthuvisadakiriyato,
1. 토대를 깨끗이 함
indriyasamattapaṭipādanato,
2. 기능(根)을 조화롭게 유지함
nimittakusalato,
3. 표상에 능숙함
yasmiṃ samaye cittaṃ pa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paggaṇhāti,
4. 마음을 분발해야 할 때 마음을 분발함
yasmiṃ samaye cittaṃ ni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niggaṇhāti,
5. 마음을 절제해야 할 때 마음을 절제함
y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eti,
6. 마음을 격려해야 할 때 마음을 격려함
y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ati,
7. 마음을 평온해야 할 때 마음을 평온하게 함
asamāhitapuggalaparivajjanato,
8. 삼매에 들지 않은 사람을 피함
samāhitapuggalasevanato,
9. 삼매에 든 사람을 섬김
tadadhimuttatoti.
10. 삼매에 마음을 둠 이다.
61. Tattha vatthuvisadakiriyā nāma ajjhattikabāhirānaṃ vatthūnaṃ visadabhāvakaraṇaṃ.
토대를 깨끗이 함: 안팎의 토대들을 깨끗이 함이다.
Yadā hissa kesanakhalomāni dīghāni honti, sarīraṃ vā sedamalaggahitaṃ, tadā ajjhattikavatthu avisadaṃ hoti aparisuddhaṃ.
만약 그의 머리카락과 손·발톱과 몸의 털이 길거나 몸이 땀에 젖어 있으면 안의 토대가 깨끗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Yadā panassa cīvaraṃ jiṇṇaṃ kiliṭṭhaṃ duggandhaṃ hoti, senāsanaṃ vā uklāpaṃ hoti, tadā bāhiravatthu avisadaṃ hoti aparisuddhaṃ.
만약 의복이 낡고 더럽고 악취가 나거나 머무는 장소가 더러우면 밖의 토대가 깨끗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Ajjhattikabāhire ca vatthumhi avisade uppannesu cittacetasikesu ñāṇampi aparisuddhaṃ hoti,
안팎의 토대가 깨끗하지 않으면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일어날 때 지혜도 청정하지 않다.
aparisuddhāni dīpakapallikavaṭṭitelāni nissāya uppannadīpasikhāya obhāso viya.
이것은 불결한 등잔과 심지와 기름을 의지하여 생긴 등불의 빛과도 같다.
Aparisuddhena ñāṇena saṅkhāre sammasato saṅkhārāpi avibhūtā honti,
청정하지 않은 지혜로 상카라(行)들을 명상할 때 상카라들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kammaṭṭhānamanuyuñjato kammaṭṭhānampi vuḍḍhiṃ viruḷhiṃ vepullaṃ na gacchati.
명상주제에 몰입할 때 그의 명상주제도 향상과 증장과 번영을 얻지 못한다.
Visade pana ajjhattikabāhire vatthumhi uppannesu cittacetasikesu ñāṇampi visadaṃ hoti parisuddhaṃ,
그러나 안팎의 토대가 깨끗하면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일어날 때 지혜도 청정하다.
parisuddhāni dīpakapallikavaṭṭitelāni nissāya uppannadīpasikhāya obhāso viya.
이것은 청결한 등잔과 심지와 기름을 의지하여 생긴 등불의 빛과도 같다.
Parisuddhena ca ñāṇena saṅkhāre sammasato saṅkhārāpi vibhūtā honti,
청정한 지혜로 상카라들을 명상할 때 상카라들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kammaṭṭhānamanuyuñjato kammaṭṭhānampi vuḍḍ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gacchati.
명상주제에 몰입할 때 그의 명상주제는 향상과 증장과 번영을 얻는다.
62. Indriyasamattapaṭipādanaṃ nāma saddhādīnaṃ indriyānaṃ samabhāvakaraṇaṃ.
기능(根)을 조화롭게 유지함: 믿음 등의 기능(五根)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다.
Sace hissa saddhindriyaṃ balavaṃ hoti itarāni mandāni, tato vīriyindriyaṃ paggahakiccaṃ, satindriyaṃ upaṭṭhānakiccaṃ,
만약 그에게 信根이 강하고 나머지 기능들이 약하면 精進根이 노력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마음챙김의 기능(念根)이 확립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samādhindriyaṃ avikkhepakiccaṃ,
삼매의 기능(定根)이 산만하지 않는 역할을 할 수 없고,
paññindriyaṃ dassanakiccaṃ kātuṃ na sakkoti,
통찰지의 기능(慧根)이 [있는 그대로] 보는 역할을 할 수 없다.
tasmā taṃ dhammasabhāvapaccavekkhaṇena vā yathā vā manasikaroto balavaṃ jātaṃ, tathā amanasikārena hāpetabbaṃ.
그러므로 그 믿음의 기능은 법의 고유성질(自性)을 반조함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만약 作意할 때 그것이 강해진다면 作意하지 않음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Vakkalittheravatthu cettha nidassanaṃ.
왁깔리 장로의 일화가 그 보기이다.
Sace pana vīriyindriyaṃ balavaṃ hoti, atha neva saddhindriyaṃ adhimokkhakiccaṃ kātuṃ sakkoti, na itarāni itarakiccabhedaṃ,
만약 정진의 기능이 강하면 믿음의 기능이 확신하는 역할을 실행할 수 없고 나머지 기능들도 각자의 기능을 실행할 수 없다.
tasmā taṃ passaddhādibhāvanāya hāpetabbaṃ.
그러므로 편안함(輕安) 등을 수행하여 그 정진의 기능을 조절해야 한다.
Tatrāpi soṇattheravatthu dassetabbaṃ.
여기서도 소나 장로의 일화(Vin.i.179-85; A.iii.374-6)를 들어야 한다.
Evaṃ sesesupi ekassa balavabhāve sati itaresaṃ attano kiccesu asamatthatā veditabbā.
나머지도 이와 같아 하나가 강하면 나머지는 자기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알아야 한다.
Visesato panettha saddhāpaññānaṃ samādhivīriyānañca samataṃ pasaṃsanti.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통찰지,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을 권한다.
Balavasaddho hi mandapañño muddhappasanno hoti, avatthusmiṃ pasīdati.
믿음이 강하고 통찰지가 약한 이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Balavapañño mandasaddho kerāṭikapakkhaṃ bhajati,
통찰지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이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bhesajjasamuṭṭhito viya rogo atekiccho hoti.
약으로 인해서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Ubhinnaṃ samatāya vatthusmiṃyeva pasīdati.
두 가지 모두 균등함을 통해서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Balavasamādhiṃ pana mandavīriyaṃ samādhissa kosajjapakkhattā kosajjaṃ abhibhavati.
삼매는 게으름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이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Balavavīriyaṃ mandasamādhiṃ vīriyassa uddhaccapakkhattā uddhaccaṃ abhibhavati.
정진은 들뜸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이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Samādhi pana vīriyena saṃyojito kosajje patituṃ na labhati.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Vīriyaṃ samādhinā saṃyojitaṃ uddhacce patituṃ na labhati,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tasmā tadubhayaṃ samaṃ kātabbaṃ.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Ubhayasamatāya hi appanā hoti.
이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Apica samādhikammikassa balavatīpi saddhā vaṭṭati.
다시 삼매를 공부하는 이에게 강한 믿음이 적당하다.
Evaṃ saddahanto okappento appanaṃ pāpuṇissati.
이와 같이 믿고 확신하면서 본삼매를 얻는다.
Samādhipaññāsu pana samādhikammikassa ekaggatā balavatī vaṭṭati.
삼매(定)과 통찰지(慧) 가운데서 삼매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하나됨이 강한 것이 적당하다.
Evañhi so appanaṃ pāpuṇāti.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본삼매를 얻는다.
Vipassanākammikassa paññā balavatī vaṭṭati.
위빳사나를 공부하는 이에게 통찰지가 강한 것이 적당하다.
Evañhi so lakkhaṇapaṭivedhaṃ pāpuṇāti.
이와 같이 그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 대한 통달을 얻는다.
Ubhinnaṃ pana samatāyapi appanā hotiyeva.
그러나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Sati pana sabbattha balavatī vaṭṭati.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Sati hi cittaṃ uddhaccapakkhikānaṃ saddhāvīriyapaññānaṃ vasena uddhaccapātato kosajjapakkhena ca samādhinā kosajjapātato rakkhati,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정진-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tasmā sā loṇadhūpanaṃ viya sabbabyañjanesu, sabbakammikaamacco viya ca sabbarājakiccesu sabbattha icchitabbā.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Tenāha –
그래서 말씀하셨다.
‘‘sati ca pana sabbatthikā vuttā bhagavatā.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Kiṃ kāraṇā?
무슨 이유인가?
Cittañhi satipaṭisaraṇaṃ, ārakkhapaccupaṭṭhānā ca sati,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보호로 나타난다.
na vinā satiyā cittassa paggahaniggaho hotī’’ti.
마음챙김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과 절제란 없다.”라고.
63. Nimittakosallaṃ nāma pathavīkasiṇādikassa cittekaggatānimittassa akatassa karaṇakosallaṃ, katassa ca bhāvanākosallaṃ, bhāvanāya laddhassa rakkhaṇakosallañca,
표상에 능숙함: 땅의 까시나 등을 가진 삼매의 표상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이에게는 만드는데 능숙함이 있고, 이미 만든 이에게는 표상을 닦음에 능숙함이 있으며, 닦아서 얻은 이에게는 표상을 보호하는데 능숙함이 있다.
taṃ idha adhippetaṃ.
이것[보호하는 데 능숙함]이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64. Kathañca yasmiṃ samaye cittaṃ pa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paggaṇhāti?
어떻게 마음을 분발해야 할 때 마음을 분발하는가?
Yadāssa atisithilavīriyatādīhi līnaṃ cittaṃ hoti, tadā passaddhisambojjhaṅgādayo tayo abhāvetvā dhammavicayasambojjhaṅgādayo bhāveti.
정진 등이 너무 느슨하여 마음이 헤이하면 輕安覺支 등 세 가지를 닦지 않고, 擇法覺支 등을 닦는다.
Vuttañhetaṃ bhagavatā –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parittaṃ aggiṃ ujjāletukāmo ass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작은 불을 지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so tattha allāni ceva tiṇāni pakkhipeyya, allāni ca gomayāni pakkhipeyya, allāni ca kaṭṭhāni pakkhipeyya, udakavātañca dadeyya, paṃsukena ca okireyya, bhabbo nu kho so, bhikkhave, puriso parittaṃ aggiṃ ujjāletunti?
그가 그곳에 젖은 풀을 놓고, 젖은 소똥을 놓고, 젖은 막대기를 놓고, 물을 뿌리고, 흙먼지를 뿌린다면, 그 사람이 작은 불을 지필수 있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vameva kho, bhikkhave, yasmiṃ samaye līnaṃ cittaṃ hoti, a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헤이할 때 輕安覺支를 닦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akālo samādhi…pe… a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삼매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를 ...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를 닦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dusamuṭṭhāpayaṃ hoti.
비구들이여, 헤이한 마음은 이 법들로는 분발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Yasmiṃ ca kho, bhikkhave, līn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이할 때 법을 선택하는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kālo vīri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Līn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samuṭṭhāpayaṃ hoti.
비구들이여, 해이한 마음은 이런 법들로 쉽게 분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parittaṃ aggiṃ ujjāletukāmo ass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작은 불을 지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so tattha sukkhāni ceva tiṇāni pakkhipeyya, sukkhāni ca gomayāni pakkhipeyya, sukkhāni ca kaṭṭhāni pakkhipeyya, mukhavātañca dadeyya, na ca paṃsukena okireyya, bhabbo nu kho so, bhikkhave, puriso parittaṃ aggiṃ ujjāletunti?
그가 그곳에 마른 풀을 놓고, 마른 소똥을 놓고, 마른 장작을 놓고, 입으로 불고, 흙먼지를 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작은 불을 지필 수 있겠는가?
Evaṃ bhante’’ti (saṃ. ni. 5.234).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Ettha ca yathāsakamāhāravasena dhammavicayasambojjhaṅgādīnaṃ bhāvanā veditabbā.
여기서 각각의 자양분으로 법을 선택하는 깨달음의 요소(택법각지) 등을 닦는 것을 알아야 한다.
Vuttañhetaṃ –
이와 같이 설하셨다.
‘‘Atthi, bhikkhave, kusalākusalā dhammā sāvajjānavajjā dhammā hīnappaṇītā dhammā kaṇhasukkasappaṭibhāgā dhammā.
“비구들이여, 유익하거나 해로운 법, 나무라야 마땅하거나 나무랄 데 없는 법, 고상하거나 천한 법, 흑백으로 상반되는 갖가지 법들이 있어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거기에 현명한 주의력(如理作意)을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택법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택법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라고.
Tathā ‘‘atthi, bhikkhave, ārambhadhātu nikkamadhātu parakkamadhātu.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vīriya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vīriya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현명한 주의력(如理作意)을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라고.
Tathā ‘‘atthi, bhikkhave, pītisambojjhaṅgaṭṭhāniyā dhammā.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pīt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pīti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현명한 주의력(如理作意_을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Tattha sabhāvasāmaññalakkhaṇapaṭivedhavasena pavattamanasikāro kusalādīsu yoniso manasikāro nāma.
여기서 개별적 특징(自相)과 보편적 특징(共相)을 통찰하여 생긴 作意를 유익한 법 등에 대한 如理作意라 한다. **
Ārambhadhātuādīnaṃ uppādanavasena pavattamanasikāro ārambhadhātuādīsu yoniso manasikāro nāma.
"시작하는 요소 등을 일으켜서 일어난 작의"가 시작하는 요소 등에 대한 여리작의이다. ***작의-일으키는 정신작용(의-법, 오문의 안이비설신 과 의문의 대경인 색성향미촉 오욕락 과 법에, 법은 '심의식'의 고짜라)
Tattha ārambhadhātūti paṭhamavīriyaṃ vuccati.
여기서 시작하는 요소(發勤界)라는 것은 처음 시작한 정진이다.
Nikkamadhātūti kosajjato nikkhantattā tato balavataraṃ.
벗어나는 요소(出離界)라는 것은 게으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강하다.
Parakkamadhātūti paraṃ paraṃ ṭhānaṃ akkamanato tatopi balavataraṃ.
분발하는 요소(勇猛界)라는 것은 더욱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강하다.
Pītisambojjhaṅgaṭṭhāniyā dhammāti pana pītiyā eva etaṃ nāmaṃ.
희각지를 일으키는 법이란 바로 희열이다.
Tassāpi uppādakamanasikārova yoniso manasikāro nāma.
그것을 일으키는 작의를 일러 여리작의라 한다.
Apica satta dhammā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일곱 가지 법들이 있어 택법각지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paripucchakatā,
1. 탐구함,
vatthuvisadakiriyā,
2. 토대를 깨끗하게 함,
indriyasamattapaṭipādanā,
3. 기능(五根)을 조화롭게 닦음,
duppaññapuggalaparivajjanā,
4. 지혜 없는 사람을 피함,
paññavantapuggalasevanā,
5. 지혜로운 사람을 친근함,
gambhīrañāṇacariyapaccavekkhaṇā,
6. 심오한 지혜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해 반조함,
tadadhimuttatāti.
7. 이것을 확신함이다.
Ekādasadhammā vīriya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열한 가지 법이 있으니 그들은 정진각지를 일어나게 한다.
apāyādibhayapaccavekkhaṇatā,
①악처 등의 두려움을 반조함,
vīriyāyattalokiyalokuttaravisesādhigamānisaṃsadassitā,
②정진에 의지한 세간적인 수승함과 출세간적인 수승함을 증득한 이익을 봄
‘‘buddhapaccekabuddhamahāsāvakehi gatamaggo mayā gantabbo, so ca na sakkā kusītena gantu’’nti evaṃ gamanavīthipaccavekkhaṇatā,
③‘부처님과 벽지불과 대제자들이 가신 길을 나도 가야 한다. 게으른 이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가야 할 길의 과정을 반조함
dāyakānaṃ mahapphalabhāvakaraṇena piṇḍāpacāyanatā,
④ 보시한 사람을 위해 큰 결실을 가져오게 하기 위하여 탁발 음식을 공경함
‘‘vīriyārambhassa vaṇṇavādī me satthā,
⑤‘우리의 스승님은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찬탄하셨다.
so ca anatikkamanīyasāsano amhākañca bahūpakāro
그분께서는 능가할 수 없는 교단을 세우셨고, 우리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다.
paṭipattiyā ca pūjiyamāno pūjito hoti na itarathā’’ti evaṃ satthu mahattapaccavekkhaṇatā,
그분은 [내가] 도닦음으로 공경할 때에 공경되는 분이시다.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이와 같이 스승의 위대함을 반조함
‘‘saddhammasaṅkhātaṃ me mahādāyajjaṃ gahetabbaṃ, tañca na sakkā kusītena gahetu’’nti evaṃ dāyajjamahattapaccavekkhaṇatā,
⑥‘나는 정법이라는 큰 유산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게으른 이는 받을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유산의 위대함을 반조함
ālokasaññāmanasikārairiyāpathaparivattanaabbhokāsasevanādīhi thinamiddhavinodanatā,
⑦ 광명상(光明想)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자세를 바꿈, 옥외에 머묾 등으로 해태와 혼침을 없앰
kusītapuggalaparivajjanatā,
⑧ 게으른 사람을 멀리함
āraddhavīriyapuggalasevanatā,
⑨부지런히 정진하는 이를 친근함
sammappadhānapaccavekkhaṇatā,
⑩ 바른 노력을 반조함
tadadhimuttatāti.
⑪이것을 확신함이다.
Ekādasadhammā pīt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열한 가지 법이 희각지를 일어나게 한다.
buddhānussati, dhamma… saṅgha…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sīla… cāga… devatānussati,
계수념 관대함(보시)을 계속해서 생각함 천수념(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
upasamānussati,
적지수념(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
lūkhapuggalaparivajjanatā,
거친 이를 멀리함,
siniddhapuggalasevanatā,
인자한 이를 가까이 함,
pasādaniyasuttantapaccavekkhaṇatā,
신심을 일으키는 경전들을 반조함,
tadadhimuttatāti.
이것을 확신함 이다.
Iti imehi ākārehi ete dhamme uppādento dhammavicayasambojjhaṅgādayo bhāveti nāma.
이러한 방법으로 이런 법들을 일으키면서 택법각지 등을 닦는다.
Ev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pa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paggaṇhāti.
이와 같이 그는 마음을 분발해야 할 때 마음을 분발한다.
Kath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ni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niggaṇhāti?
어떻게 마음을 절제해야 할 때 마음을 절제하는가?
Yadāssa accāraddhavīriyatādīhi uddhataṃ cittaṃ hoti, tadā dhammavicayasambojjhaṅgādayo tayo abhāvetvā passaddhisambojjhaṅgādayo bhāveti.
지나친 정진 등으로 마음이 들떠 있을 때 택법각지 등 세 가지 각지를 닦지 않고 경안각지 등을 닦는다.
Vuttañhetaṃ bhagavatā –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mahantaṃ aggikkhandhaṃ nibbāpetukāmo ass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큰 불더미를 끄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치자.
so tattha sukkhāni ceva tiṇāni pakkhipeyya…pe… na ca paṃsukena okireyya, bhabbo nu kho so, bhikkhave, puriso mahantaṃ aggikkhandhaṃ nibbāpetunti?
그는 그곳에 마른 풀을 놓고 ··· 흙먼지를 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큰 불더미를 끌 수 있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Evameva kho, bhikkhave, yasmiṃ samaye uddhataṃ cittaṃ hoti, akālo tasmiṃ samaye dhammavicaya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들떠 있을 때 택법각지를 닦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akālo vīriya…pe… akālo pī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정진각지를 ··· 희각지를 닦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duvūpasamayaṃ hoti.
비구들이여, 들뜬 마음은 이들 법으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어렵기 때문이다.
Yasmiṃ ca kho, bhikkhave, samaye uddhataṃ cittaṃ hoti, kālo tasmiṃ samaye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비구들이여, 마음이 들떠 있을 때 경안각지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kālo samādh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kālo upekkhā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정각지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捨覺支를 닦는 것이 적절하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Uddhataṃ, bhikkhave, cittaṃ, taṃ etehi dhammehi suvūpasamayaṃ hoti.
비구들이여, 들뜬 마음은 이런 법들로 쉽게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mahantaṃ aggikkhandhaṃ nibbāpetukāmo ass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큰 불더미를 끄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so tattha allāni ceva tiṇāni pakkhipeyya…pe… paṃsukena ca okireyya, bhabbo nu kho so, bhikkhave, puriso mahantaṃ aggikkhandhaṃ nibbāpetunti? Evaṃ, bhante’’ti (saṃ. ni. 5.234).
그가 그곳에 젖은 풀을 놓고 ··· 흙먼지를 뿌린다면 그 사람이 큰 불더미를 끌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Etthāpi yathāsakaṃ āhāravasena passaddhisambojjhaṅgādīnaṃ bhāvanā veditabbā.
여기서 각각의 자양분으로 경안각지 등을 닦는 것을 알아야 한다.
Vuttañhetaṃ bhagavatā –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Atthi, bhikkhave, kāyapassaddhi cittapassaddhi.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passaddh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passaddhi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비구들이여,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이 있어 거기에 如理作意를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경안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일어난 경안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Tathā ‘‘atthi, bhikkhave, samathanimittaṃ abyagganimittaṃ.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samādh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samādhi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사마타의 표상과 산란함이 없는 표상이 있어 거기에 如理作意를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Tathā ‘‘atthi, bhikkhave, upekkhāsambojjhaṅgaṭṭhāniyā dhammā. Tattha yoniso manasikārabahulīkāro, ayamāhāro anuppannassa vā upekkhāsambojjhaṅgassa uppādāya uppannassa vā upekkhāsambojjhaṅgass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saṃvattatī’’ti (saṃ. ni. 5.232).
그와 같이 “비구등이여, 사각지(捨覺支)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如理作意를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사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Tattha yathāssa passaddhiādayo uppannapubbā, taṃ ākāraṃ sallakkhetvā tesaṃ uppādanavasena pavattamanasikārova tīsupi padesu yoniso manasikāro nāma.
이전에 그에게 편안함 등이 일어났던 대로 그 방법을 주시한 뒤 그들을 "일으킴을 통해서 일어난 作意"가 이 세 가지에 대한 如理作意이다. **작의
Samathanimittanti ca samathassevetamadhivacanaṃ.
사마타의 표상이란 바로 사마타와 동의어이다.
Avikkhepaṭṭhena ca tasseva abyagganimittanti.
산란함이 없는 표상도 흩어짐이 없다는 뜻에서 이것의 동의어이다.
Apica satta dhammā passaddh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일곱 가지 법이 있어 경안각지를 일어나게 한다.
paṇītabhojanasevanatā, utusukhasevanatā, iriyāpathasukhasevanatā,
1좋은 음식을 수용함 2안락한 기후에 삶 3편안한 자세를 취함
majjhattapayogatā, sāraddhakāyapuggalaparivajjanatā, passaddhakāyapuggalasevanatā,
4적절한 노력 5포악한 사람을 멀리함 6몸이 편안한 사람을 친근함
tadadhimuttatāti.
7이것을 확신함 이다.
Ekādasa dhammā samādhi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vatthuvisadatā,
열한 가지 법이 있어 정각지를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1토대들을 깨끗이 함,
nimittakusalatā, indriyasamattapaṭipādanatā,
2표상에 대한 능숙함, 3기능들을 고르게 조절함,
samaye cittassa niggahaṇatā, samaye cittassa paggahaṇatā,
4적당한 때에 마음을 절제함, 5적당한 때에 마음을 분발함,
nirassādassa cittassa saddhāsaṃvegavasena sampahaṃsanatā,
6[수행에] 활기 없는 이의 마음을 신심과 두려움으로 격려함,
sammāpavattassa ajjhupekkhanatā,
7바르게 일어난 [수행하려는 마음에 대해] 평온하게 지켜봄,
asamāhitapuggalaparivajjanatā,
8삼매에 들지 않은 이를 멀리함,
samāhitapuggalasevanatā,
9삼매에 든 사람을 친근함
jhānavimokkhapaccavekkhaṇatā, tadadhimuttatāti.
10禪과 해탈을 반조함, 11이것을 확신함 이다.
Pañca dhammā upekkhāsambojjhaṅgassa uppādāya saṃvattanti
다섯 가지 법이 있어 捨覺支를 일어나게 한다.
sattamajjhattatā,
1중생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
saṅkhāramajjhattatā,
2상카라(行)들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
sattasaṅkhārakelāyanapuggalaparivajjanatā,
3중생과 상카라들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멀리함,
sattasaṅkhāramajjhattapuggalasevanatā,
4중생과 상카라들에 대해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친근함,
tadadhimuttatāti.
5이것을 확신함 이다.
Iti imehākārehi ete dhamme uppādento passaddhisambojjhaṅgādayo bhāveti nāma.
이러한 방법으로 이런 법들을 일으키면서 경안각지 등을 닦는다.
Ev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niggahe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niggaṇhāti.
이와 같이 마음을 절제해야 할 때 마음을 절제한다.
Kath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eti?
어떻게 마음을 격려해야 할 때 마음을 격려하는가?
Yadāssa paññāpayogamandatāya vā upasamasukhānadhigamena vā nirassādaṃ cittaṃ hoti, tadā naṃ aṭṭhasaṃvegavatthupaccavekkhaṇena saṃvejeti.
통찰지의 활동이 둔하거나 고요함의 행복을 얻지 못하여 마음이 맥이 풀려 있으면, 여덟 가지 두려움을 가져올 원인을 반조하여 자극을 주어야 한다.
Aṭṭha saṃvegavatthūni nāma jātijarābyādhimaraṇāni cattāri,
여덟 가지 두려움을 가져올 원인이란, 1태어남-2늙음-3병듦-4죽음의 네 가지와,
apāyadukkhaṃ pañcamaṃ,
5악처의 괴로움이 다섯 번째요,
atīte vaṭṭamūlakaṃ dukkhaṃ,
6과거의 윤회에 뿌리박은 괴로움,
anāgate vaṭṭamūlakaṃ dukkhaṃ,
7미래의 윤회에 뿌리박은 괴로움,
paccuppanne āhārapariyeṭṭhimūlakaṃ dukkhanti.
8현재의 음식을 구함에 뿌리박은 괴로움이다.
Buddhadhammasaṅghaguṇānussaraṇena cassa pasādaṃ janeti.
그리고 불-법-승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깨끗한 믿음을 일으킨다.
Ev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sampahaṃseti.
이와 같이 마음을 격려해야 할 때 마음을 격려한다.
Kath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ati?
어떻게 마음을 평온하게 해야 할 때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가?
Yadāssa evaṃ paṭipajjato alīnaṃ anuddhataṃ anirassādaṃ ārammaṇe samappavattaṃ samathavīthipaṭipannaṃ cittaṃ hoti, tadāssa paggahaniggahasampahaṃsanesu na byāpāraṃ āpajjati,
이와 같이 수행할 때 마음이 게으르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고, 맥이 풀리지도 않고, 대상에 고르게 일어나며, 사마타의 과정에 들어있으면, 그는 분발하거나 절제하거나 격려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sārathi viya samappavattesu assesu.
마치 말들이 고르게 나아갈 때의 마부와 같이.
Evaṃ y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itabbaṃ, tasmiṃ samaye cittaṃ ajjhupekkhati.
이와 같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야 할 때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Asamāhitapuggalaparivajjanatā nāma nekkhammapaṭipadaṃ anāruḷhapubbānaṃ anekakiccapasutānaṃ vikkhittahadayānaṃ puggalānaṃ ārakā pariccāgo.
삼매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멀리함: 일찍이 출리의 도닦음에 나아가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일에 구속되어있고, 흐트러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멀리 여윔이다.
Samāhitapuggalasevanatā nāma nekkhammapaṭipadaṃ paṭipannānaṃ samādhilābhīnaṃ puggalānaṃ kālena kālaṃ upasaṅkamanaṃ.
삼매에 든 사람을 친근함: 이미 출리의 도닦음에 나아갔고, 삼매를 얻은 사람들을 수시로 친근함이다.
Tadadhimuttatā nāma samādhi adhimuttatā
이것을 확신함: 삼매를 확신함이다.
samādhigaru samādhininna samādhipoṇa samādhipabbhāratāti attho.
삼매를 존중함-삼매로 향함-삼매로 기욺-삼매에 기댄다는 뜻이다.
Evametaṃ dasavidhaṃ appanākosallaṃ sampādetabbaṃ.
이와 같이 열 가지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을 성취해야 한다.
Evañhi sampādayato, appanākosallaṃ imaṃ;
Paṭiladdhe nimittasmiṃ, appanā sampavattati.
이와 같이 본삼매에 드는 능숙함을 성취한 이가
표상을 얻으면 본삼매가 일어난다.
Evañhi paṭipannassa, sace sā nappavattati;
Tathāpi na jahe yogaṃ, vāyametheva paṇḍito.
만약 이와 같이 닦아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현자는 오직 노력해야 하고 수행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Hitvā hi sammāvāyāmaṃ, visesaṃ nāma māṇavo;
Adhigacche parittampi, ṭhānametaṃ na vijjati.
바른 정진을 버리고도 사람이 조금이라도
수승함을 얻는다 함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Cittappavattiākāraṃ, tasmā sallakkhayaṃ budho;
Samataṃ vīriyasseva, yojayetha punappunaṃ.
그러므로 지자는 마음의 일어나는 형태를 주시하면서
계속해서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Īsakampi layaṃ yantaṃ, paggaṇhetheva mānasaṃ;
Accāraddhaṃ nisedhetvā, samameva pavattaye.
조금이라도 마음이 위축되어있으면 분발해야 하고
지나친 노력은 절제해서 조화롭게 일어나게 해야 한다.
Reṇumhi uppaladale, sutte nāvāya nāḷiyā;
Yathā madhukarādīnaṃ, pavatti sammavaṇṇitā.
마치 꽃가루와 연잎과 거미줄과 배와 기름병에 대해
벌 등의 행동을 찬탄하듯이,
Līnauddhatabhāvehi, mocayitvāna sabbaso;
Evaṃ nimittābhimukhaṃ, mānasaṃ paṭipādayeti.
느슨하거나 들뜬 상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이와 같이 마음의 표상을 향하도록 닦아야 한다.
Nimittābhimukhapaṭipādanaṃ
Tatrāyamatthadīpanā –
[다섯 가지 비유] : 다음은 이 뜻에 대한 보기이다.
yathā hi acheko madhukaro asukasmiṃ rukkhe pupphaṃ pupphitanti ñatvā tikkhena vegena pakkhando taṃ atikkamitvā paṭinivattento khīṇe reṇumhi sampāpuṇāti.
예를 들면 지나치게 영리한 벌이 어떤 나무에 꽃이 만발해있음을 알고 전속력으로 날아가서는 그것을 지나쳐버려 다시 돌아와서 꽃가루가 끝난 뒤 도착한다.
Aparo acheko mandena javena pakkhando khīṇeyeva sampāpuṇāti.
다른 영리하지 않은 벌은 천천히 날아가다가 꽃가루가 끝난 뒤 도착한다.
Cheko pana samena javena pakkhando sukhena puppharāsiṃ sampatvā yāvadicchakaṃ reṇuṃ ādāya madhuṃ sampādetvā madhurasamanubhavati.
그러나 영리한 벌은 적당한 속도로 날아가서 쉽게 꽃송이에 도착하여 원하는 만큼 꽃가루를 가져와서 꿀을 만들어 꿀맛을 즐긴다.
Yathā ca sallakattaantevāsikesu udakathālagate uppalapatte satthakammaṃ sikkhantesu eko acheko vegena satthaṃ pātento uppalapattaṃ dvidhā vā chindati, udake vā paveseti.
외과 의사의 제자들이 물 쟁반 속에 담겨있는 연잎을 놓고 칼을 사용하는 실습을 할 때 어떤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급히 칼을 넣어 연잎을 두 쪽으로 자르거나 물 속으로 가라앉게 한다.
Aparo acheko chijjanapavesanabhayā satthakena phusitumpi na visahati.
다른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자르거나 혹은 물속에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칼로 그것에 닿는 것조차 할 수 없다.
Cheko pana samena payogena tattha satthapahāraṃ dassetvā pariyodātasippo hutvā tathārūpesu ṭhānesu kammaṃ katvā lābhaṃ labhati.
그러나 영리한 이는 적당한 노력으로 칼로 자르는 것을 보인 뒤 배움을 완성하고 그런 업무에 종사하여 이익을 얻는다.
Yathā ca yo catubyāmappamāṇaṃ makkaṭasuttamāharati, so cattāri sahassāni labhatīti raññā vutte eko achekapuriso vegena makkaṭasuttamākaḍḍhanto tahiṃ tahiṃ chindatiyeva.
‘네 길의 길이가 되는 거미줄을 가져오는 사람은 4천 냥을 얻을 것이다.’라고 왕이 말했을 때 어떤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급히 거미줄을 가져오다가 여기저기가 끊어진다.
Aparo acheko chedanabhayā hatthena phusitumpi na visahati.
다른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한다.
Cheko pana koṭito paṭṭhāya samena payogena daṇḍake vedhetvā āharitvā lābhaṃ labhati.
그러나 영리한 사람은 적당한 노력으로 끝부터 막대기에 말아서 가져와 상을 탄다.
Yathā ca acheko niyāmako balavavāte laṅkāraṃ pūrento nāvaṃ videsaṃ pakkhandāpeti.
어떤 영리하지 못한 선장은 바람이 강하게 불 때 돛을 활짝 펴서 배를 표류하게 만든다.
Aparo acheko mandavāte laṅkāraṃ oropento nāvaṃ tattheva ṭhapeti.
다른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약한 바람에 돛을 내려 배를 그곳에 머물게 만든다.
Cheko pana mandavāte laṅkāraṃ pūretvā balavavāte aḍḍhalaṅkāraṃ katvā sotthinā icchitaṭṭhānaṃ pāpuṇāti.
그러나 영리한 사람은 바람이 약할 때 활짝 펴고, 바람이 강할 때 반쯤 펴서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Yathā ca yo telena achaḍḍento nāḷiṃ pūreti, so lābhaṃ labhatīti ācariyena antevāsikānaṃ vutte eko acheko lābhaluddho vegena pūrento telaṃ chaḍḍeti.
‘기름을 쏟지 않고 기름병을 채우는 이는 상을 타리라’고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어떤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상을 탐내어 급히 채우다가 기름을 쏟는다.
Aparo acheko telachaḍḍanabhayā āsiñcitumpi na visahati.
다른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기름을 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름을 부을 엄두도 못낸다.
Cheko pana samena payogena pūretvā lābhaṃ labhati.
그러나 영리한 사람은 적당한 노력으로 기름병을 채운 뒤 상을 탄다.
Evameva eko bhikkhu uppanne nimitte sīghameva appanaṃ pāpuṇissāmīti gāḷhaṃ vīriyaṃ karoti,
이와 같이 어떤 비구는 표상이 일어나면 ‘급히 본삼매를 얻으리라’고 용맹정진을 한다.
tassa cittaṃ accāraddhavīriyattā uddhacce patati,
그의 마음은 지나친 정진으로 들떠버린다.
so na sakkoti appanaṃ pāpuṇituṃ.
그는 본삼매를 얻을 수 없다.
Eko accāraddhavīriyatāya dosaṃ disvā kiṃ dānime appanāyāti vīriyaṃ hāpeti,
어떤 이는 지나친 정진에 허물을 보고 ‘지금 나에게 본삼매가 왜 필요한가?’라고 정진을 놓아버린다.
tassa cittaṃ atilīnavīriyattā kosajje patati,
너무 느슨한 정진으로 그의 마음은 게으름에 빠진다.
sopi na sakkoti appanaṃ pāpuṇituṃ.
그도 본삼매를 얻을 수 없다.
Yo pana īsakampi līnaṃ līnabhāvato uddhataṃ uddhaccato mocetvā samena payogena nimittābhimukhaṃ pavatteti, so appanaṃ pāpuṇāti,
그러나 마음이 약간이라도 느슨하면 그 느슨한 상태로부터, 약간이라도 들떠있으면 그 들뜬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적당한 노력으로 표상을 향하는 이는 본삼매를 얻는다.
tādisena bhavitabbaṃ.
이와 같이 닦아야 한다.
Imamatthaṃ sandhāya etaṃ vuttaṃ –
이 뜻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설했다.-
Reṇumhi uppaladale, sutte nāvāya nāḷiyā;
Yathā madhukarādīnaṃ, pavatti sammavaṇṇitā.
마치 꽃가루와 연잎과 거미줄과 배와 기름병에 대해
벌 등의 행동을 찬탄하듯이,
Līnauddhatabhāvehi, mocayitvāna sabbaso;
Evaṃ nimittābhimukhaṃ, mānasaṃ paṭipādayeti.
느슨하거나 들뜬 상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이와 같이 마음의 표상을 향하도록 닦아야 한다.
Paṭhamajjhānakathā
초선의 주석
69. Iti evaṃ nimittābhimukhaṃ mānasaṃ paṭipādayato panassa idāni appanā ijjhissatīti bhavaṅgaṃ upacchinditvā pathavī pathavīti anuyogavasena upaṭṭhitaṃ tadeva pathavīkasiṇaṃ ārammaṇaṃ katvā manodvārāvajjanamuppajjati.
이와 같이 표상을 향해 마음을 기울여서 막 본삼매가 성취될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서 ‘빠타위(땅), 빠타위’라고 수행하여 일어난 그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Tato tasmiṃyevārammaṇe cattāri pañca vā javanāni javanti.
그 다음에 그 동일한 대상에 4-5번의 속행이 일어난다.
Tesu avasāne ekaṃ rūpāvacaraṃ, sesāni kāmāvacarāni.
이들 중 마지막 하나가 색계의 것이고, 나머지는 욕계의 것이다.
Pakaticittehi balavataravitakkavicārapītisukhacittekaggatāni yāni appanāya parikammattā parikammānītipi,
이들은 평소의 [욕계의] 마음보다 강한 일으킨 생각(尋)·지속적인 고찰(伺)·희열·행복·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을 가진다. 이들은 본삼매를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 때문에 준비의 마음이라고도 하고,
yathā gāmādīnaṃ āsannapadeso gāmūpacāro nagarūpacāroti vuccati, evaṃ appanāya āsannattā samīpacārattā vā upacārānītipi,
마치 마을 등의 가까운 지역을 마을근처, 도시근처라고 부르듯이 본삼매에 가깝기 때문에 혹은 근처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근접이라고도 하고,
ito pubbe parikammānaṃ, upari appanāya ca anulomato anulomānītipi vuccanti.
[근접의 마음보다] 이전인 준비의 마음들을 수순하고 또 이 다음의 본삼매를 수순하기 때문에 그들을 수순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Yañcettha sabbantimaṃ, taṃ parittagottābhibhavanato, mahaggatagottabhāvanato ca gotrabhūtipi vuccati.
여기서 가장 마지막 속행은 제한된 [욕계의] 종성을 초월하고 위대한 [색계의] 종성을 일으키게 하므로 고뜨라부(種性)라 한다.
Agahitaggahaṇena panettha paṭhamaṃ parikammaṃ, dutiyaṃ upacāraṃ, tatiyaṃ anulomaṃ, catutthaṃ gotrabhu.
얻은 것을 다시 얻는 [반복을] 피하면 첫 번째가 준비이고, 두 번째가 근접이고, 세 번째가 수순이고, 네 번째가 고뜨라부이다.
Paṭhamaṃ vā upacāraṃ, dutiyaṃ anulomaṃ, tatiyaṃ gotrabhu,
혹은 첫 번째가 근접이고, 두 번째가 수순이고, 세 번째가 고뜨라부이다.
catutthaṃ pañcamaṃ vā appanācittaṃ.
[후자의 경우] 네 번째, [전자의 경우] 다섯 번째가 본삼매의 마음이다.
Catutthameva hi pañcamaṃ vā appeti, tañca kho khippābhiññadandhābhiññavasena. Tato paraṃ javanaṃ patati.
왜냐하면 오직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의 속행이 본삼매에 들기 때문이며, 이것은 초월지가 빠른 것과 초월지가 둔한 것에 따른 것이다.
Bhavaṅgassa vāro hoti.
그 후에 속행은 사라지고 잠재의식이 일어난다.
Ābhidhammikagodattatthero pana ‘‘purimā purimā kusalā dhammā pacchimānaṃ pacchim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āsevanapaccayena paccayo’’ti (paṭṭhā. 1.1.12) imaṃ suttaṃ vatvā āsevanapaccayena pacchimo pacchimo dhammo balavā hoti,
아비담마의 대가인 고닷따 장로는 “각각의 앞의 유익한 법들은 각각의 뒤의 유익한 법들에게 반복하는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라는 성전을 인용하여 ‘반복하는 조건 때문에 각각의 뒤의 법은 강해진다.
tasmā chaṭṭhepi sattamepi appanā hotīti āha,
그러므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도 역시 본삼매가 있다’라고 말했다.
taṃ aṭṭhakathāsu ‘‘attano matimattaṃ therasseta’’nti vatvā paṭikkhittaṃ.
주석서에서는 ‘이것은 단지 장로 자신의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논파했다.
Catutthapañcamesuyeva pana appanā hoti.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에서 본삼매가 있을 뿐이다.
Parato javanaṃ patitaṃ nāma hoti,
그 후에 속행은 사라진다.
bhavaṅgassa āsannattāti vuttaṃ.
‘이것은 잠재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설했다.
Tameva vicāretvā vuttattā na sakkā paṭikkhipituṃ.
이것은 이와 같이 고찰한 뒤 설했기 때문에 논파할 수 없다.
Yathā hi puriso chinnapapātābhimukho dhāvanto ṭhātukāmopi pariyante pādaṃ katvā ṭhātuṃ na sakkoti papāte eva patati,
마치 사람이 깍아지른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다가 멈추기를 원하지만 낭떠러지 끝에서 발을 딛고 멈출 수가 없어 떨어지고 만다.
evaṃ chaṭṭhe vā sattame vā appetuṃ na sakkoti, bhavaṅgassa āsannattā.
그와 같이 여서서 번째 혹은 일곱 번째에서 삼매에 들 수 없다. 잠재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Tasmā catutthapañcamesuyeva appanā hotīti veditabbā.
그러므로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에서 본삼매에 든다고 알아야 한다.
Sā ca pana ekacittakkhaṇikāyeva.
또한 이 본삼매는 하나의 마음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Sattasu hi ṭhānesu addhānaparicchedo nāma natthi
기간의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다음의 일곱 가지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paṭhamappanāyaṃ, lokiyābhiññāsu, catūsu maggesu, maggānantaraphale, rūpārūpabhavesu bhavaṅgajjhāne, nirodhassa paccaye nevasaññānāsaññāyatane, nirodhā vuṭṭhahantassa phalasamāpattiyanti.
그것은 1첫 번째의 본삼매, 2세간적인 초월지, 3네 가지 도, 4도 다음의 과, 5색계와 무색계 존재에 있는 잠재의식의 禪, 6멸진정의 조건인 비상비비상처, 7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한 뒤의 과의 증득이다.
Ettha maggānantaraphalaṃ tiṇṇaṃ upari na hoti.
여기서 도 다음의 과는 세 마음순간을 넘지 않는다.
Nirodhassa paccay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dvinnamupari na hoti.
멸진정의 조건인 비상비비상처는 두 마음순간을 넘지 않는다.
Rūpārūpesu bhavaṅgassa parimāṇaṃ natthi, sesaṭṭhānesu ekameva cittanti.
색계와 무색계 존재의 잠재의식은 헤아릴 수 없다. 나머지 경우에는 오직 하나의 마음이다.라고.
Iti ekacittakkhaṇikāyeva appanā.
이와 같이 본삼매는 오직 하나의 마음순간의 것이다.
Tato bhavaṅgapāto.
그 이후에 잠재의식으로 들어간다.
Atha bhavaṅgaṃ vocchinditvā jhānapaccavekkhaṇatthāya āvajjanaṃ, tato jhānapaccavekkhaṇanti.
그 다음에 전향이 잠재의식을 끊고 禪을 반조하기 위해서 일어나고 그 다음에 禪을 반조한다.
Ettāvatā ca panesa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dha. sa. 160; dī. ni. 1.226).
이때에(본삼매에 들었을 때) :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림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Evamanena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tividhakalyāṇaṃ dasalakkhaṇasampannaṃ paṭham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ṃ.
이와 같이 그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各支)들을 버렸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진, 땅의 까시나를 가진 초선을 얻는다.
Tattha vivicceva kāmehīti kāmehi viviccitvā vinā hutvā apakkamitvā.
여기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란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린 뒤, 감각적 욕망을 없애버리고,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나서 라는 뜻이다.
Yo panāyamettha evakāro, so niyamatthoti veditabbo.
여기서 완전히라는 단어는 확정하는 뜻이라고 알아야 한다.
Yasmā ca niyamattho, tasmā tasmiṃ paṭhamajjhānaṃ upasampajja viharaṇasamaye avijjamānānampi kāmānaṃ tassa paṭhamajjhānassa paṭipakkhabhāvaṃ kāmapariccāgeneva cassa adhigamaṃ dīpeti.
확정하는 뜻을 가졌기 때문에 초선에 들어 머물 때에는 비록 감각적 욕망들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 [감각적 욕망]들은 초선과는 정반대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고, 아울러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버림을 통해서만 초선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Kathaṃ? ‘‘Vivicceva kāmehī’’ti evañhi niyame kariyamāne idaṃ paññāyati,
어떻게?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고 결정적인 뜻이 전해질 때 이 뜻이 설명된다.
nūna jhānassa kāmā paṭipakkhabhūtā yesu sati idaṃ nappavattati,
확실히 감각적 욕망들은 禪과 반대된다. 그들이 있을 때 이 禪은 일어나지 않는다.
andhakāre sati padīpobhāso viya.
마치 어둠이 있을 때는 등불이 없는 것처럼.
Tesaṃ pariccāgeneva cassa adhigamo hoti, orimatīrapariccāgena pārimatīrasseva.
그들을 버릴 때만 이 禪을 얻는다. 이쪽 기슭을 버림으로 저쪽 기슭에 도달하는 것처럼.
Tasmā niyamaṃ karotīti.
그러므로 확정하는 뜻이 된다.
Tattha siyā,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kasmā panesa pubbapadeyeva vutto, na uttarapade,
‘왜 완전히라는 단어가 앞의 구절에만 사용되었고, 두 번째 구절에는 사용되지 않았나?
kiṃ akusalehi dhammehi aviviccāpi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āti?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지 않고서도 禪에 머물 수 있다는 말인가?’
Na kho panetaṃ evaṃ daṭṭhabbaṃ.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Taṃnissaraṇato hi pubbapade esa vutto.
이것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첫 번째 구절에 사용되었다.
Kāmadhātusamatikkamanato hi kāmarāgapaṭipakkhato ca idaṃ jhānaṃ kāmānameva nissaraṇaṃ.
왜냐하면 감각적 욕망의 요소(界)를 초월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과 반대되므로 이 禪은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Yathāha,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kāmānametaṃ nissaraṇaṃ yadidaṃ nekkhamma’’nti (dī. ni. 3.353).
“출리란 곧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남이다.”라고.
Uttarapadepi pana yathā ‘‘idheva, bhikkhave, samaṇo, idha dutiyo samaṇo’’ti (ma. ni. 1.139; a. ni. 4.241) ettha evakāro ānetvā vuccati, evaṃ vattabbo.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 [eva 가 없는] 것도 “비구들이여, 여기에만 오직(eva) 사문이 있고, 여기에 두 번째 사문도 있다.”라는 구절에서도 ‘eva(오직)’라는 단어는 [앞 구절에만 나타나고 두 번째 구절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인용하여 설명해야 한다.
Na hi sakkā ito aññehipi nīvaraṇasaṅkhātehi akusaladhammehi avivicca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uṃ.
감각적 욕망이 아닌 다른 장애들이라 불리는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지 않고 禪에 들어 머물 수는 없다.
Tasmā ‘‘vivicceva kāmehi vivicceva akusalehi dhammehī’’ti evaṃ padadvayepi esa daṭṭhabbo.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완전히 떨쳐버린 뒤’라는 두 구절 모두에 이 [완전히(eva)라는 단어는] 적용되어야 한다.
Padadvayepi ca kiñcāpi viviccāti iminā sādhāraṇavacanena tadaṅgavivekādayo, kāyavivekādayo ca sabbepi vivekā saṅgahaṃ gacchanti, tathāpi kāyaviveko cittaviveko vikkhambhanavivekoti tayo eva idha daṭṭhabbā.
비록 두 구절에서 모두 사용된 떨쳐버리고라는 단어는 공통적인 단어로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떨쳐버림 등과 몸으로 떨쳐버림 등 모든 떨쳐버림을 포함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1몸으로 떨쳐버림, 2마음으로 떨쳐버림, 3억압으로 떨쳐버림의 세 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Kāmehīti iminā pana padena ye ca niddese ‘‘katame vatthukāmā, manāpiyā rūpā’’tiādinā (mahāni. 1) nayena vatthukāmā vuttā,
감각적 욕망들이라는이 단어는 닛데사(義釋)에 “무엇이 [충족시킬]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들인가? 그것은 마음에 드는 형상(色)들이다.”라는 방법으로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을 설했다.
ye ca tattheva vibhaṅge ca ‘‘chando kāmo, rāgo kāmo, chandarāgo kāmo, saṅkappo kāmo, rāgo kāmo, saṅkapparāgo kāmo, ime vuccanti kāmā’’ti (mahāni. 1; vibha. 564) evaṃ kilesakāmā vuttā,
그곳과 위방가(분별론)에서 “열의인 감각적 욕망, 탐욕인 감각적 욕망, 열의와 탐욕인 감각적 욕망, 생각인 감각적 욕망, 탐욕인 감각적 욕망, 생각과 탐욕인 감각적 욕망, 이들을 일러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라고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을 설했다.
te sabbepi saṅgahitāicceva daṭṭhabbā.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감각적 욕망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알아야 한다.
Evañhi sati vivicceva kāmehīti vatthukāmehipi viviccevāti attho yujjati,
이럴 경우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뜻을 나타낸다.
tena kāyaviveko vutto hoti.
이렇게 하여 몸으로 떨쳐버림을 설했다.
Vivicca akusalehi dhammehīti kilesakāmehi sabbākusalehi vā viviccāti attho yujjati,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들과 모든 해로운 법을 떨쳐버리고라는 뜻을 나타낸다.
tena cittaviveko vutto hoti.
이렇게 하여 마음으로 떨쳐버림을 설했다.
Purimena cettha vatthukāmehi vivekavacanato eva kāmasukhapariccāgo, dutiyena kilesakāmehi vivekavacanato nekkhammasukhapariggaho vibhāvito hoti.
그리고 전자를 통해서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림을 나타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행복을 버림과, 후자를 통해서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림을 나타내기 때문에 출리에 대한 행복마저도 버림이 설명되었다.
Evaṃ vatthukāmakilesakāmavivekavacanatoyeva ca etesaṃ paṭhamena saṃkilesavatthuppahānaṃ, dutiyena saṃkilesappahānaṃ.
이와 같이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과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이라는 뜻으로부터 첫 번째 단어에 의해 [갈애 등] 오염의 대상을 버림이 두 번째에 의해 오염 자체를 버림이 설해졌다고 알아야 한다.
Paṭhamena lolabhāvassa hetupariccāgo, dutiyena bālabhāvassa.
첫 번째에 의해 [형상 등에서] 갈애가 일어날 원인을 버림이, 두 번째에 의해서 원인인 무명을 버림이 설해졌다고 알아야 한다.
Paṭhamena ca payogasuddhi, dutiyena āsayaposanaṃ vibhāvitaṃ hotīti viññātabbaṃ.
첫 번째에 의해 노력의 청정이, 두 번째에 의해서 성향의 청정이 설해졌다고 알아야 한다.
Esa tāva nayo kāmehīti ettha vuttakāmesu vatthukāmapakkhe.
‘감각적 욕망들’이라고 설해진 감각적 욕망들 가운데서 이것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의 측면을 설한 방법이다.
Kilesakāmapakkhe pana chandoti ca rāgoti ca evamādīhi anekabhedo kāmacchandoyeva kāmoti adhippeto.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의 측면에 관해서는 열의, 탐욕 등 여러 분류를 가진 욕탐(kāmacchanda)이 바로 감각적 욕망(kāma)을 뜻한다.
So ca akusalapariyāpannopi samāno ‘‘tattha katamo kāmo chando kāmo’’tiādinā (vibha. 564) nayena vibhaṅge jhānapaṭipakkhato visuṃ vutto.
물론 이것은 해로운 법에 포함되지만 위방가에서는 “무엇이 감각적 욕망인가? 열의가 감각적 욕망이다.”라는 방법으로 禪과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했다.
Kilesakāmattā vā purimapade vutto, akusalapariyāpannattā dutiyapade.
혹은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이기 때문에 [욕탐이 감각적 욕망이라는] 첫 번째 문장에서 설했고, 해로운 법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문장에서 언급되었다.
Anekabhedato cassa kāmatoti avatvā kāmehīti vuttaṃ.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라는 단수] 대신에 감각적 욕망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했다.
Aññesampi ca dhammānaṃ akusalabhāve vijjamāne ‘‘tattha katame akusalā dhammā, kāmacchando’’tiādinā nayena vibhaṅge upari jhānaṅgānaṃ paccanīkapaṭipakkhabhāvadassanato nīvaraṇāneva vuttāni.
물론 다른 법들에도 해로운 상태가 존재하지만, “무엇이 해로운 법들인가? 욕탐이 ···”라는 방법으로 위방가에서 높은 禪의 구성요소들과 반대되고 양립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장애들(五蓋)을 설했다.
Nīvaraṇāni hi jhānaṅgapaccanīkāni,
왜냐하면 장애들은 禪의 구성요소들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tesaṃ jhānaṅgāneva paṭipakkhāni viddhaṃsakāni vighātakānīti vuttaṃ hoti.
禪의 구성요소들은 그들과 양립하지 못하고, 그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부순다고 설했다.
Tathā hi samādhi kāmacchandassa paṭipakkho, pīti byāpādassa, vitakko thinamiddhassa, sukhaṃ uddhaccakukkuccassa, vicāro vicikicchāyāti peṭake vuttaṃ.
그래서 “삼매는 욕탐(감각적 욕망)과 양립하지 못하고, 희열은 악의와, 일으킨 생각은 해태·혼침과, 행복은 들뜸·후회와, 지속적인 고찰은 의심과 양립할 수 없다”고 빼따까(藏釋論, Pe)에서 설했다.
Evamettha vivicceva kāmehīti iminā kāmacchandassa vikkhambhanaviveko vutto hoti.
이와 같이 여기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욕탐을 억압함에 의한 떨쳐버림을 나타냈다.
Vivicca akusalehi dhammehīti iminā pañcannampi nīvaraṇānaṃ,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다섯 가지 장애들(五蓋)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냈다.
agahitaggahaṇena pana paṭhamena kāmacchandassa, dutiyena sesanīvaraṇānaṃ.
그러나 반복을 피하자면, 첫 번째 구절은 욕탐(감각적 욕망)을,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장애들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Tathā paṭhamena tīsu akusalamūlesu pañcakāmaguṇabhedavisayassa lobhassa, dutiyena āghātavatthubhedādivisayānaṃ dosamohānaṃ.
마찬가지로 첫 번째 구절은 세 가지 해로운 뿌리 가운데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대상으로 가진 탐욕을, 두 번째 구절은 [아홉 가지] 원한의 원인을 가진 성냄과 어리석음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Oghādīsu vā dhammesu paṭhamena kāmoghakāmayogakāmāsavakāmupādānaabhijjhākāyaganthakāmarāgasaṃyojanānaṃ, dutiyena avasesaoghayogāsavaupādānaganthasaṃyojanānaṃ.
폭류의 법 등에서 첫 번째의 구절은 감각적 욕망의 폭류-감각적 욕망의 속박-감각적 욕망의 번뇌-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간탐의 몸의 매듭-감각적 욕망의 족쇄를,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폭류·속박·번뇌·취착·매듭·족쇄를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Paṭhamena ca taṇhāya taṃsampayuttakānañca, dutiyena avijjāya taṃsampayuttakānañca.
첫 번째 구절은 갈애와 또 갈애와 함께한 법들을, 두 번째 구절은 무명과 또 무명과 함께한 법들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Apica paṭhamena lobhasampayuttānaṃ aṭṭhannaṃ cittuppādānaṃ, dutiyena sesānaṃ catunnaṃ akusalacittuppādānaṃ vikkhambhanaviveko vutto hotīti veditabbo.
첫 번째 구절은 탐욕과 함께한 여덟 가지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들이 일어남을,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네 가지 해로운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일어남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고 알아야 한다.
Ayaṃ tāva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īti ettha atthappakāsanā.
이것이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에 대한 뜻을 설명한 것이다.
Ettāvatā ca paṭhamassa jhānassa pahānaṅgaṃ dassetvā idāni sampayogaṅgaṃ dassetuṃ savitakkaṃ savicārantiādi vuttaṃ.
이제까지는 초선에서 버려진 구성요소들을 보였고, 이제부터는 함께하는 구성요소를 보이기 위하여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라는 등을 설하셨다.
Tattha vitakkanaṃ vitakko, ūhananti vuttaṃ hoti.
여기서 생각함이 일으킨 생각이다. 친다는 뜻이라고 설했다.
Svāyaṃ ārammaṇe cittassa abhiniropanalakkhaṇo, āhananapariyāhananaraso.
이것은 마음을 대상을 향하여 기울이는 특징을 가진다. 앞으로 향하여 치고, 뒤로 뒤집어서 치는 역할을 한다.
Tathā hi tena yogāvacaro ārammaṇaṃ vitakkāhataṃ vitakkapariyāhataṃ karotīti vuccati.
그러므로 ‘수행자가 일으킨 생각으로 대상을 앞으로 향하여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뒤로 뒤집어 친다.’라고 설했다.
Ārammaṇe cittassa ānayanapaccupaṭṭhāno.
마음을 대상으로 인도함으로 나타난다.
Vicaraṇaṃ vicāro,
지속함이 지속적인 고찰이다.
anusañcaraṇanti vuttaṃ hoti.
계속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라고 설했다.
Svāyaṃ ārammaṇānumajjanalakkhaṇo,
이것은 대상을 계속해서 문지르는 특징을 가진다.
tattha sahajātānuyojanaraso,
함께 생긴 법들을 대상에 묶는 역할을 한다.
cittassa anuppabandhanapaccupaṭṭhāno.
마음이 [대상에] 계속해서 일어남으로 나타난다.
Santepi ca nesaṃ katthaci avippayoge oḷārikaṭṭhena pubbaṅgamaṭṭhena ca ghaṇḍābhighāto viya cetaso paṭhamābhinipāto vitakko.
비록 어떤 마음에는 이 둘은 분리되지 않지만 [지속적인 고찰보다] 거칠다는 뜻에서 또 [지속적인 고찰보다] 앞선다는 뜻에서, 마치 종을 치는 것처럼, 처음으로 마음이 [대상을 향하여] 돌진함이 일으킨 생각이다.
Sukhumaṭṭhena anumajjanasabhāvena ca ghaṇḍānuravo viya anuppabandho vicāro.
미세하다는 뜻에서, 또 고찰하는 고유성질로, 마치 종의 울림처럼 계속해서 일어남이 지속적인 고찰이다.
Vipphāravā cettha vitakko paṭhamuppattikāle paripphandanabhūto cittassa ākāse uppatitukāmassa pakkhino pakkhavikkhepo viya padumābhimukhapāto viya ca gandhānubandhacetaso bhamarassa.
여기서 일으킨 생각은 움직임을 가진다. [특정 대상을 향해서] 처음 마음이 일어날 때에 마음이 진동하는 상태이다. 이것은 마치 허공에 날기를 원하는 새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고, 마음으로 향기를 따라간 벌이 연꽃을 향하여 내려오는 것과 같다.
Santavutti vicāro nātiparipphandanabhāvo cittassa ākāse uppatitassa pakkhino pakkhappasāraṇaṃ viya, paribbhamanaṃ viya ca padumābhimukhapatitassa bhamarassa padumassa uparibhāge.
지속적인 고찰은 고요한 상태이다. 마음의 심한 움직임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허공에 나는 새가 날개를 펴는 것과 같고, 연꽃을 향해 내려 온 벌이 연꽃 위에 윙윙거리며 나는 것과 같다.
Dukanipātaṭṭhakathāyaṃ pana ‘‘ākāse gacchato mahāsakuṇassa ubhohi pakkhehi vātaṃ gahetvā pakkhe sannisīdāpetvā gamanaṃ viya ārammaṇe cetaso abhiniropanabhāvena pavatto vitakko.
『둘의 모음』의 주석서에서, “허공을 날 때 [바람이 강하면] 큰 새가 두 날개로 바람을 받으면서 날개를 [펴서] 고정시키고 움직이는 것처럼, 일으킨 생각은 대상에 마음을 얹어두는 상태로 일어난다.
Vātaggahaṇatthaṃ pakkhe phandāpayamānassa gamanaṃ viya anumajjanabhāvena pavatto vicāro’’ti vuttaṃ,
[그러나 바람이 약할 때는] 바람을 받기 위해 날개를 흔들면서 날아가는 것처럼 지속적인 고찰은 [대상을] 문지르는 성질로 일어난다.”라고 설했다.
taṃ anuppabandhena pavattiyaṃ yujjati.
이것은 계속해서 일어남이 있을 때 해당된다.
So pana nesaṃ viseso paṭhamadutiyajjhānesu pākaṭo hoti.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다섯으로 분류한 禪의] 초선과 제2선에서 분명하다.
Apica malaggahitaṃ kaṃsabhājanaṃ ekena hatthena daḷhaṃ gahetvā itarena hatthena cuṇṇatelavālaṇḍupakena parimajjantassa daḷhagahaṇahattho viya vitakko, parimajjanahattho viya vicāro.
녹이 난 청동 그릇을 한 손으로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루와 기름과 양털로 만든 솔로 문지를 때 그 사람의 꽉 잡은 손은 일으킨 생각과 같고, 문지르는 손은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Tathā kumbhakārassa daṇḍappahārena cakkaṃ bhamayitvā bhājanaṃ karontassa uppīḷanahattho viya vitakko, ito cito ca sañcaraṇahattho viya vicāro.
마찬가지로 도공이 막대기를 저어서 바퀴를 돌려 도자기를 만들 때 흙덩어리를 누르는 손은 일으킨 생각과 같고, 그것을 이러저리 돌리는 손은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Tathā maṇḍalaṃ karontassa majjhe sannirumbhitvā ṭhitakaṇṭako viya abhiniropano vitakko, bahi paribbhamanakaṇṭako viya anumajjano vicāro.
마찬가지로 원을 그릴 때 중앙에 고정시켜 박혀 있는 못은 [대상으로] 기우는 일으킨 생각과 같고, 바깥 둘레를 도는 못은 계속해서 문지르는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Iti iminā ca vitakkena iminā ca vicārena saha vattati rukkho viya pupphena phalena cāti idaṃ jhānaṃ ‘‘savitakkaṃ savicāra’’nti vuccati.
이와 같이 이 [초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함께 일어난다. 마치 나무가 꽃과 열매와 함께하듯이 이 초선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한다.
Vibhaṅge pana ‘‘iminā ca vitakkena iminā ca vicārena upeto hoti samupeto’’tiādinā (vibha. 565) nayena puggalādhiṭṭhānā desanā katā.
그러나 위방가에서는 “그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졌고, 구족했다.”라는 방법으로 사람을 지칭하면서 가르침을 설했다.
Attho pana tatrāpi evameva daṭṭhabbo.
그러나 거기서도 뜻은 이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Vivekajanti ettha vivitti viveko, nīvaraṇavigamoti attho.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떨침이 떨쳐버렸음이다. ‘장애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Vivittoti vā viveko, nīvaraṇavivitto jhānasampayuttadhammarāsīti attho.
혹은 떨쳐졌음이 떨쳐버렸음이다. ‘장애가 떨쳐진 禪과 함께한 법의 더미’라는 뜻이다.
Tasmā vivekā, tasmiṃ vā viveke jātanti vivekajaṃ.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는 ‘그런 떨쳐버렸음으로부터 생긴', 혹은 ‘그런 떨쳐버렸음에서 생긴’이라는 뜻이다.
72. Pītisukhanti ettha pīṇayatīti pīti.
희열과 행복이 있고: 유쾌하게 하는 것이 희열이다.
Sā sampiyāyanalakkhaṇā,
충분히 유쾌함이 그 특징이다.
kāyacittapīnanarasā,
몸과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pharaṇarasā vā, odagyapaccupaṭṭhānā.
혹은 [수승한 형상 등으로 몸을] 충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의기양양함으로 나타난다.
Sā panesā khuddikā pīti, khaṇikāpīti, okkantikāpīti, ubbegāpīti, pharaṇāpītīti pañcavidhā hoti.
희열은 다섯 가지이다. 즉 1작은 희열, 2순간적인 희열, 3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희열, 4용약하는 희열, 5충만한 희열이다.
Tattha khuddikāpīti sarīre lomahaṃsamattameva kātuṃ sakkoti.
여기서 작은 희열은 몸의 털을 곤두서게 할 수 있다.
Khaṇikāpīti khaṇe khaṇe vijjuppādasadisā hoti.
순간적인 희열은 순간순간 번개 불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Okkantikāpīti samuddatīraṃ vīci viya kāyaṃ okkamitvā okkamitvā bhijjati.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희열은 해안의 물결처럼 자주 자주 몸에 나타났다가 부서진다.
Ubbegāpīti balavatī hoti
용약하는 희열은 강하다.
kāyaṃ uddhaggaṃ katvā ākāse laṅghāpanappamāṇappattā.
몸을 들어 올려서 공중에 뛰어 오르도록 한다.
Tathā hi puṇṇavallikavāsī mahātissatthero
이것은 뿐나왈리까에 머물던 마하띳사 장로에게 일어났다.
puṇṇamadivase sāyaṃ cetiyaṅgaṇaṃ gantvā
그는 보름날 저녁에 탑전으로 가서는
candālokaṃ disvā mahācetiyābhimukho hutvā
달빛을 본 뒤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대탑을 향하여
‘‘imāya vata velāya catasso parisā mahācetiyaṃ vandantī’’ti pakatiyā diṭṭhārammaṇavasena buddhārammaṇaṃ ubbegāpītiṃ uppādetvā sudhātale pahaṭacitrageṇḍuko viya ākāse uppatitvā mahācetiyaṅgaṇeyeva patiṭṭhāsi.
‘지금 이 시간에 사부대중은 대탑에 예배를 드리겠구나’라고 전에 [대탑에서] 본 대상을 통해서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용약하는 희열을 일으키고 회로 만든 바닥에서 색칠한 공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허공에 뛰어올라서 대탑 앞에 섰다.
Tathā girikaṇḍakavihārassa upanissaye vattakālakagāme ekā kuladhītāpi balavabuddhārammaṇāya ubbegāpītiyā ākāse laṅghesi.
그와 같이 기리깐다까(가시나무 산) 사원 근처에 있는 왓따깔라까 마을의 한 선여인에게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처님을 대상으로 강력한 용약하는 희열을 통해 공중에 뛰어올랐다.
Tassā kira mātāpitaro sāyaṃ dhammassavanatthāya vihāraṃ gacchantā ‘‘amma tvaṃ garubhārā akāle vicarituṃ na sakkosi, mayaṃ tuyhaṃ pattiṃ katvā dhammaṃ sossāmā’’ti agamaṃsu.
어느 날 저녁에 그녀의 부모는 법을 듣기 위해 사원으로 가면서 ‘사랑스런 딸아, 너는 임신 중이니 부적당한 시간에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구나. 우리가 너를 위해 법문을 듣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나갔다고 한다.
Sā gantukāmāpi tesaṃ vacanaṃ paṭibāhituṃ asakkontī ghare ohīyitvā gharājire ṭhatvā candālokena girikaṇḍake ākāsacetiyaṅgaṇaṃ olokentī
그녀는 비록 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 남아 정원으로 가서 달빛으로 기리깐다까에 있는 아까사(허공) 탑을 보았다.
cetiyassa dīpapūjaṃ addasa, catasso ca parisā mālāgandhādīhi cetiyapūjaṃ katvā padakkhiṇaṃ karontiyo
탑에 등불을 공양하는 것을 보았고, 사부대중이 꽃과 향으로 탑에 헌공한 뒤 오른쪽으로 탑돌이 하는 것을 보았다.
bhikkhusaṅghassa ca gaṇasajjhāyasaddaṃ assosi.
비구승가가 함께 염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Athassā ‘‘dhaññāvatime, ye vihāraṃ gantvā evarūpe cetiyaṅgaṇe anusañcarituṃ, evarūpañca madhuradhammakathaṃ sotuṃ labhantī’’ti muttarāsisadisaṃ cetiyaṃ passantiyā eva ubbegāpīti udapādi.
그때 그녀가 ‘사원에 가서 이러한 탑전에서 거닐고, 이렇게 감미로운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이들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진주 덩어리와 같은 탑을 볼 때 용약하는 희열이 생겼다.
Sā ākāse laṅghitvā mātāpitūnaṃ purimataraṃyeva ākāsato cetiyaṅgaṇe oruyha cetiyaṃ vanditvā dhammaṃ suṇamānā aṭṭhāsi.
그녀는 공중에 뛰어올라 그녀의 부모보다 먼저 공중에서 탑전으로 내려 탑에 예배한 뒤 법을 들으면서 서있었다.
Atha naṃ mātāpitaro āgantvā ‘‘amma tvaṃ katarena maggena āgatāsī’’ti pucchiṃsu.
그때 그녀의 부모가 도착하여 ‘사랑하는 딸아, 어느 길로 왔느냐?’고 물었다.
Sā ‘‘ākāsena āgatāmhi, na maggenā’’ti vatvā
그녀는 ‘길이 아니라 공중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amma ākāsena nāma khīṇāsavā sañcaranti, tvaṃ kathaṃ āgatā’’ti vuttā āha –
‘번뇌 다한 이들이나 공중으로 다닌다. 어떻게 네가 공중으로 왔냐?’라고 묻자 답하기를
‘‘mayhaṃ candālokena cetiyaṃ ālokentiyā ṭhitāya buddhārammaṇā balavapīti uppajji.
‘제가 달빛으로 탑을 바라보면서 서있을 때 부처님을 대상으로 크나큰 희열이 생겼습니다.
Athāhaṃ neva attano ṭhitabhāvaṃ, na nisinnabhāvaṃ aññāsiṃ,
그때 저는 제 자신이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몰랐습니다.
gahitanimitteneva pana ākāse laṅghitvā cetiyaṅgaṇe patiṭṭhitāmhī’’ti.
제가 얻은 표상으로 공중에 올라 탑전에 서게 되었습니다.’ 라고.
Evaṃ ubbegāpīti ākāse laṅghāpanappamāṇā hoti.
이와 같이 용약하는 희열은 공중에 뛰어오를 수 있다.
Pharaṇāpītiyā pana uppannāya sakalasarīraṃ dhamitvā pūritavatthi viya mahatā udakoghena pakkhandapabbatakucchi viya ca anuparipphuṭaṃ hoti.
충만한 희열이 일어날 때 온 몸을 두루 적신다. 마치 가득 찬 물집처럼, 극심한 홍수가 침입한 산의 동굴처럼.
Sā panesā pañcavidhā pīti gabbhaṃ gaṇhantī paripākaṃ gacchantī duvidhaṃ passaddhiṃ paripūreti kāyapassaddhiñca cittapassaddhiñca.
이 다섯 가지 희열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두 가지 편안함, 즉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을 성취한다.
Passaddhi gabbhaṃ gaṇhantī paripākaṃ gacchantī duvidhampi sukhaṃ paripūreti kāyikañca cetasikañca.
편안함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두 가지 행복, 즉 육체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을 성취한다.
Sukhaṃ gabbhaṃ gaṇhantaṃ paripākaṃ gacchantaṃ tividhaṃ samādhiṃ paripūreti khaṇikasamādhiṃ upacārasamādhiṃ appanā samādhinti.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세 가지 삼매, 즉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성취한다.
Tāsu yā appanāsamādhissa mūlaṃ hutvā vaḍḍhamānā samādhisampayogaṃ gatā pharaṇāpīti, ayaṃ imasmiṃ atthe adhippetā pītīti.
이 가운데서 본삼매의 뿌리가 되고 증장하면서 삼매와 함께하는 충만한 희열이 이 뜻에 부합하는 희열이다.
Itaraṃ pana sukhanaṃ sukhaṃ, suṭṭhu vā khādati, khanati ca kāyacittābādhanti sukhaṃ,
나머지 [술어인] 행복이란 행복해 함이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몽땅 먹어버리고 뿌리째 뽑아버리기 때문에 행복이라 한다.
taṃ sātalakkhaṇaṃ,
이것은 기쁘게 함이 특징이다.
sampayuttānaṃ upabrūhanarasaṃ,
함께한 법들을 증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anuggahapaccupaṭṭhānaṃ.
도움으로 나타난다.
Satipi ca nesaṃ katthaci avippayoge iṭṭhārammaṇapaṭilābhatuṭṭhi pīti. Paṭiladdharasānubhavanaṃ sukhaṃ.
비록 어떤 [마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지만 원하는 대상을 얻음에 만족이 희열이고, 얻어서 맛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Yattha pīti, tattha sukhaṃ.
희열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Yattha sukhaṃ, tattha na niyamato pīti.
그러나 행복이 있는 곳에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Saṅkhārakkhandhasaṅgahitā pīti. Vedanākkhandhasaṅgahitaṃ sukhaṃ.
희열은 行蘊에 포함되고, 행복은 受蘊에 포함된다.
Kantārakhinnassa vanantudakadassanasavanesu viya pīti.
희열은 사막에서 목말라 기진맥진한 사람이 숲 속의 물을 보거나 혹은 들을 때와 같고,
Vanacchāyāpavesanaudakaparibhogesu viya sukhaṃ.
행복은 숲 속의 그늘에 들어가 물을 마실 때와 같다.
Tasmiṃ tasmiṃ samaye pākaṭabhāvato cetaṃ vuttanti veditabbaṃ.
이런 각각의 경우에 [이 둘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언급했다고 알아야 한다.
Iti ayañca pīti idañca sukhaṃ assa jhānassa, asmiṃ vā jhāne atthīti idaṃ jhānaṃ pītisukhanti vuccati.
이와 같이 ‘이런 희열과 이런 행복은 이 禪의 것이거나, 혹은 이 禪에 있다’라고 해서 이 禪은 ‘희열과 행복이 있고’라는 용어로 한정하여 설하였다.
Atha vā pīti ca sukhañca pītisukhaṃ, dhammavinayādayo viya.
혹은 ‘희열과 행복’이란 합성어는 ‘희열’과 ‘행복’으로 따로따로 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법과 율’이란 합성어 등을 [법과 율로 따로따로 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듯이.]
Vivekajaṃ pītisukhamassa jhānassa, asmiṃ vā jhāne atthīti evampi vivekajaṃpītisukhaṃ.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은 이 禪에 속한 것이거나 이 禪에 있기 때문에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다.
Yatheva hi jhānaṃ, evaṃ pītisukhampettha vivekajameva hoti,
마치 ‘떨쳐버렸음에서 생긴’이란 [술어가] 禪을 [한정하듯이] 그것은 희열과 행복을 한정할 수도 있다.
tañcassa atthi,
그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은] 이 [禪에] 속한다.
tasmā ekapadeneva ‘‘vivekajaṃpītisukha’’ntipi vattuṃ yujjati.
그러므로 단 한 구절인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라 하는 것도 타당하다.
Vibhaṅge pana ‘‘idaṃ sukhaṃ imāya pītiyā sahagata’’ntiādinā (vibha. 567) nayena vuttaṃ.
그러나 위방가에서는 “이 희열과 함께한 이 행복”이라는 방법으로 설했다.
Attho pana tatthāpi evameva daṭṭhabbo.
그곳에서도 뜻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Paṭhamaṃ jhānanti idaṃ parato āvibhavissati.
초선: 이것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Upasampajjāti upagantvā, pāpuṇitvāti vuttaṃ hoti.
구족하여: 도착하여, 증득하여라는 뜻이다.
Upasampādayitvā vā, nipphādetvāti vuttaṃ hoti.
혹은 성취하여, 생기게 하여라는 뜻이다.
Vibhaṅge pana ‘‘upasampajjāti paṭhamassa jhānassa lābho paṭilābho patti sampatti phusanā sacchikiriyā upasampadā’’ti vuttaṃ.
위방가에서 “‘구족하여’란 ··· 초선을 얻음, 획득함, 도달함, 다다름, 닿음, 깨달음, 성취함이다.”라고 설했다.
Tassāpi evamevattho daṭṭhabbo.
그곳에서도 뜻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Viharatīti tadanurūpena iriyāpathavihārena itivuttappakārajhānasamaṅgī hutvā attabhāvassa iriyaṃ vuttiṃ pālanaṃ yapanaṃ yāpanaṃ cāraṃ vihāraṃ abhinipphādeti.
머문다: 그 禪에 어울리는 자세로 머물면서 앞서 설한 것과 같은 禪을 갖추어 그는 자신의 자세, 행실, 보호, 부양, 유지, 행위, 머묾을 생기게 한다.
Vuttañhetaṃ vibhaṅge ‘‘viharatīti iriyati vattati pāleti yapeti yāpeti carati viharati, tena vuccati viharatī’’ti (vibha. 540).
위방가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머문다’는 것은 자세를 취한다, 나아간다, 보호한다, 부양한다, 유지한다, 움직인다, 머문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문다’라고 설했다.”
Pañcaṅgavippahīnādi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렸음 등의 설명
Yaṃ pana vutt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nti,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렸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라고 앞서 설했다.
tattha kāmacchando, byāpādo, thinamiddhaṃ, uddhaccakukkuccaṃ, vicikicchāti imesaṃ pañcannaṃ nīvaraṇānaṃ pahānavasena pañcaṅgavippahīnatā veditabbā.
여기서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이라는 이 다섯 가지 장애들(五蓋)을 버림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림이라고 알아야 한다.
Na hi etesu appahīnesu jhānaṃ uppajjati.
이들을 버리지 않으면 禪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Tenassetāni pahānaṅgānīti vuccanti.
그러므로 이들을 ‘버리는 구성요소’라 부른다.
Kiñcāpi hi jhānakkhaṇe aññepi akusalā dhammā pahīyanti, tathāpi etāneva visesena jhānantarāyakarāni.
물론 禪의 순간에 다른 해로운 법들도 모두 다 버려지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이들이 禪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Kāmacchandena hi nānāvisayappalobhitaṃ cittaṃ na ekattārammaṇe samādhiyati.
애욕으로 인해 여러 대상을 탐하는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모이지 않는다.
Kāmacchandābhibhūtaṃ vā taṃ na kāmadhātuppahānāya paṭipadaṃ paṭipajjati.
혹은 애욕에 사로잡힌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요소(欲界)를 버리기 위해 도를 닦지 않는다.
Byāpādena cārammaṇe paṭihaññamānaṃ na nirantaraṃ pavattati.
악의로 인해 대상에 분개하는 마음은 장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Thinamiddhābhibhūtaṃ akammaññaṃ hoti.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은 [수행에] 적합하지 않다.
Uddhaccakukkuccaparetaṃ avūpasantameva hutvā paribbhamati.
들뜸과 후회에 붙들린 마음은 침착하지 못하여 방황한다.
Vicikicchāya upahataṃ jhānādhigamasādhikaṃ paṭipadaṃ nārohati.
의심에 부딪친 마음은 禪의 증득을 성취하는 도닦음에 올라서지 않는다.
Iti visesena jhānantarāyakarattā etāneva pahānaṅgānīti vuttānīti.
이와 같이 특히 禪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오직 이들을 두고 버리는 구성요소라고 했다.
Yasmā pana vitakko ārammaṇe cittaṃ abhiniropeti, vicāro anuppabandhati,
그러나 일으킨 생각은 마음이 대상을 향하여 기울게 하고, 지속적인 고찰은 지속하게 한다.
tehi avikkhepāya sampāditappayogassa
[이렇게 하여] 이 마음은 이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때문에 [다른 대상으로] 흩어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성취한다.
cetaso payogasampattisambhavā pīti pīṇanaṃ, sukhañca upabrūhanaṃ karoti.
마음이 이런 노력을 성취하여 생긴 희열은 그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행복은 그 마음을 증장하게 한다.
Atha naṃ sasesasampayuttadhammaṃ etehi abhiniropanānuppabandhanapīṇanaupabrūhanehi anuggahitā ekaggatā ekattārammaṇe samaṃ sammā ca ādhiyati,
대상을 향하여 기울임과 지속함과 만족과 증장의 도움을 받은 [마음의] 하나됨이 마음과 함께한 다른 법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고르고 바르게 모이도록 한다.
tasmā vitakko vicāro pīti sukhaṃ cittekaggatāti imesaṃ pañcannaṃ uppattivasena pañcaṅgasamannāgatatā veditabbā.
그러므로 일으킨 생각(尋), 지속적인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 이라는 이 다섯 가지가 일어나는 것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Uppannesu hi etesu pañcasu jhānaṃ uppannaṃ nāma hoti.
이들이 일어날 때 비로소 禪이 일어났다고 한다.
Tenassa etāni pañca samannāgataṅgānīti vuccanti.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졌다고 한다.
Tasmā na etehi samannāgataṃ aññadeva jhānaṃ nāma atthīti gahetabbaṃ.
그러므로 이들을 가진 다른 어떤 것이 禪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Yathā pana aṅgamattavaseneva caturaṅginī senā, pañcaṅgikaṃ tūriyaṃ, aṭṭhaṅgiko ca maggoti vuccati, evamidampi aṅgamattavaseneva pañcaṅgikanti vā pañcaṅgasamannāgatanti vā vuccatīti veditabbaṃ.
단지 구성요소에 따라 네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군대, 다섯 가지의 구성요소를 가진 음악,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도(팔정도)라 부르듯이, 이와 같이 이 禪도 단지 구성요소에 따라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있는’ 혹은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진’ 禪 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Etāni ca pañcaṅgāni kiñcāpi upacārakkhaṇepi atthi, atha kho upacāre pakaticittato balavatarāni.
물론 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근접의 순간에도 있고, 또한 근접의 순간에는 평소의 [욕계] 마음보다는 더 강하다.
Idha pana upacāratopi balavatarāni rūpāvacaralakkhaṇappattāni.
그러나 여기서는 근접의 순간보다 더 강하고 색계의 특징을 얻는다.
Ettha hi vitakko suvisadena ākārena ārammaṇe cittaṃ abhiniropayamāno uppajjati. Vicāro ativiya ārammaṇaṃ anumajjamāno. Pītisukhaṃ sabbāvantampi kāyaṃ pharamānaṃ.
왜냐하면 일으킨 생각은 지극히 청정한 형태로 마음이 대상을 향하여 기울이면서 일어나고, 지속적인 고찰은 대상을 더욱 문지르면서, 희열과 행복은 온 몸에 스며들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Tenevāha –
그래서 말씀하셨다.
‘‘nāssa kiñci sabbāvato kāyassa vivekajena pītisukhena apphuṭaṃ hotī’’ti (dī. ni. 1.228).
“온 몸에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Cittekaggatāpi heṭṭhimamhi samuggapaṭale uparimaṃ samuggapaṭalaṃ viya ārammaṇesu phusitā hutvā uppajjati,
마음의 하나됨도 마치 상자 윗부분의 뚜껑이 상자 아랫부분의 표면에 닿는 것처럼 대상에 완전히 닿으면서 일어난다.
ayametesaṃ itarehi viseso.
이것이 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서로 다른 점이다.
Tattha cittekaggatā kiñcāpi savitakkaṃ savicāranti imasmiṃ pāṭhe na niddiṭṭhā, tathāpi vibhaṅge ‘‘jhānanti vitakko vicāro pīti sukhaṃ cittassekaggatā’’ti (vibha. 569) evaṃ vuttattā aṅgameva.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이란 [구성요소가] ‘일으킨 생각이 있고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의 구절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위방가에 “禪이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다.”라고 설했기 때문에 이것도 당연히 구성요소이다.
Yena hi adhippāyena bhagavatā uddeso kato, soyeva tena vibhaṅge pakāsitoti.
세존께서 개요를 설하실 때 가지셨던 바로 그 [의도가] 위방가에서 드러난 것이다.
Tividhakalyāṇaṃ
Tividhakalyāṇaṃ dasalakkhaṇasampannanti ettha pana ādimajjhapariyosānavasena tividhakalyāṇatā.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여기서 세 가지로 좋음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음이고,
Tesaṃyeva ca ādimajjhapariyosānānaṃ lakkhaṇavasena dasalakkhaṇasampannatā veditabbā.
그 처음과 중간과 끝의 특징에 따라 열 가지 특징을 가졌다고 알아야 한다.
Tatrāyaṃ pāḷi –
이것이 성전의 [말씀이다.]
‘‘Paṭhamassa jhānassa paṭipadāvisuddhi ādi, upekkhānubrūhanā majjhe, sampahaṃsanā pariyosānaṃ,
“초선에서 도닦음의 청정이 처음이고, 평온의 증장이 중간이며, 만족이 끝이다.
paṭhamassa jhānassa paṭipadāvisuddhi ādi, ādissa kati lakkhaṇāni?
초선에서 도닦음의 청정이 처음이다. 처음은 얼마나 많은 특징을 가졌는가?
Ādissa tīṇi lakkhaṇāni,
처음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yo tassa paribandho, tato cittaṃ visujjhati, visuddhattā cittaṃ majjhimaṃ samathanimittaṃ paṭipajjati, paṭipannattā tattha cittaṃ pakkhandati.
1그 [禪의] 장애로부터 마음이 청정해진다. 2청정해지기 때문에 마음은 중간인 사마타의 표상을 닦는다. 3닦기 때문에 마음은 그곳으로 들어간다.
Yañca paribandhato cittaṃ visujjhati, yañca visuddhattā cittaṃ majjhimaṃ samathanimittaṃ paṭipajjati, yañca paṭipannattā tattha cittaṃ pakkhandati. Paṭhamassa jhānassa paṭipadāvisuddhi ādi, ādissa imāni tīṇi lakkhaṇāni.
禪의 장애로부터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중간인 사마타의 표상을 닦고, 닦기 때문에 마음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초선에서 도닦음의 청정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처음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Tena vuccati paṭhamaṃ jhānaṃ ādikalyāṇañceva hoti tilakkhaṇasampannañca.
그러므로 ‘초선은 처음이 좋고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라고 설했다.”
‘‘Paṭhamassa jhānassa upekkhānubrūhanā majjhe, majjhassa kati lakkhaṇāni?
“초선에서 평온의 증장이 중간이다. 중간은 얼마나 많은 특징을 가지는가?
Majjhassa tīṇi lakkhaṇāni,
중간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visuddhaṃ cittaṃ ajjhupekkhati,
1(4)청정한 마음을 침착하게 본다.
samathapaṭipannaṃ ajjhupekkhati,
2(5)사마타에 든 마음을 침착하게 본다.
ekattupaṭṭhānaṃ ajjhupekkhati.
3(6)하나로 나타남을 침착하게 본다.
Yañca visuddhaṃ cittaṃ ajjhupekkhati, yañca samathapaṭipannaṃ ajjhupekkhati, yañca ekattupaṭṭhānaṃ ajjhupekkhati.
청정한 마음을 침착하게 보고, 사마타에 든 마음을 침착하게 보고, 하나로 나타남을 침착하게 보는 것-
Paṭhamassa jhānassa upekkhānubrūhanā majjhe, majjhassa imāni tīṇi lakkhaṇāni.
이것이 초선에서 평온의 증장이 중간이라는 것이다. 중간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Tena vuccati paṭhamaṃ jhānaṃ majjhekalyāṇañceva hoti tilakkhaṇasampannañca.
그러므로 ‘초선은 중간이 좋고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라고 설했다.”
‘‘Paṭhamassa jhānassa sampahaṃsanā pariyosānaṃ, pariyosānassa kati lakkhaṇāni?
“초선에서 만족이 끝이다. 끝은 얼마나 많은 특징을 가지는가?
Pariyosānassa cattāri lakkhaṇāni,
끝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진다.
tattha jātānaṃ dhammānaṃ anativattanaṭṭhena sampahaṃsanā,
1(7)초선에서 생긴 법들을 서로서로 능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만족하고,
indriyānaṃ ekarasaṭṭhena sampahaṃsanā,
2(8)기능(根)들이 동일한 역할을 가졌다는 뜻에서 만족하고,
tadupagavīriyavāhanaṭṭhena sampahaṃsanā,
3(9)그것에 적절한 정진을 쏟았다는 뜻에서 만족하고,
āsevanaṭṭhena sampahaṃsanā.
4(10)반복한다는 뜻에서 만족하는 것,
Paṭhamassa jhānassa sampahaṃsanā pariyosānaṃ,
이것이 초선에서 만족이 끝이라는 것이다.
pariyosānassa imāni cattāri lakkhaṇāni.
끝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진다.
Tena vuccati paṭhamaṃ jhānaṃ pariyosānakalyāṇañceva hoti catulakkhaṇasampannañcā’’ti (paṭi. ma. 1.158).
그러므로 ‘초선은 끝이 좋고 네 가지 특징을 가진다.’라고 설했다.”
Tatra paṭipadāvisuddhi nāma sasambhāriko upacāro.
어떤 이들은 설명하기를 ‘여기서 도닦음의 청정이란 부속된 것들(즉, 준비단계의 수행)을 포함한 근접삼매다.
Upekkhānubrūhanā nāma appanā.
평온의 증장이란 본삼매다.
Sampahaṃsanā nāma paccavekkhaṇāti evameke vaṇṇayanti.
만족이란 반조다.’라고 한다.
Yasmā pana ‘‘ekattagataṃ cittaṃ paṭipadāvisuddhipakkhandañceva hoti upekkhānubrūhitañca ñāṇena ca sampahaṃsita’’nti (paṭi. ma. 1.158) pāḷiyaṃ vuttaṃ,
그러나 “하나가 된 마음은 도닦음의 청정에 들어가고, 평온에 의해 증장하며, 지혜에 의해 만족한다.”라고 성전에서 설했기 때문에,
tasmā antoappanāyameva āgamanavasena paṭipadāvisuddhi,
본삼매 내에서 [준비의 마음의] 근접으로 도닦음의 청정을 알아야 하고,
tatramajjhattupekkhāya kiccavasena upekkhānubrūhanā,
중립적인 평온의 역할로 평온의 증장을 알아야 하고,
dhammānaṃ anativattanādibhāvasādhanena pariyodāpakassa ñāṇassa kiccanipphattivasena sampahaṃsanā ca veditabbā.
법들을 서로서로 능가하지 않는 상태 등을 성취하여 깨끗해진 지혜의 역할을 성취함으로 만족을 알아야 한다.
Kathaṃ?
어떻게?
Yasmiñhi vāre appanā uppajjati, tasmiṃ yo nīvaraṇasaṅkhāto kilesagaṇo tassa jhānassa paribandho, tato cittaṃ visujjhati.
장애라 불리는 오염원의 더미가 있어 禪을 방해한다. 1본삼매가 일어날 때 그 방해로부터 마음이 청정해진다.
Visuddhattā āvaraṇavirahitaṃ hutvā majjhimaṃ samathanimittaṃ paṭipajjati.
2청정해졌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져, 중간인 사마타의 표상을 닦는다.
Majjhimaṃ samathanimittaṃ nāma samappavatto appanāsamādhiyeva.
고르게 일어나는 본삼매 그 자체가 중간인 사마타의 표상이다.
Tadanantaraṃ pana purimacittaṃ ekasantatipariṇāmanayena tathattamupagacchamānaṃ majjhimaṃ samathanimittaṃ paṭipajjati nāma,
그러나 바로 이전의 마음이 하나의 상속을 통해 발전하여 그 본삼매의 상태에 다가간다. 이것이 중간인 사마타의 표상을 닦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evaṃ paṭipannattā tathattupagamanena tattha pakkhandati nāma.
3이와 같이 닦기 때문에 그 상태에 다가가므로 그곳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Evaṃ tāva purimacitte vijjamānākāranipphādikā paṭhamassa jhānassa uppādakkhaṇeyeva āgamanavasena paṭipadāvisuddhi veditabbā.
이와 같이 실제로 초선이 일어나는 순간에 접근을 통해서 이전의 [고뜨라부] 마음에 있던 형태를 성취함이 도닦음의 청정이라고 알아야 한다.
Evaṃ visuddhassa pana tassa puna visodhetabbābhāvato visodhane byāpāraṃ akaronto visuddhaṃ cittaṃ ajjhupekkhati nāma.
이와 같이 그가 청정해진 禪의 마음을 다시 청정하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청정하게 하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청정해진 마음을 침착하게 본다라고 한다.
Samathabhāvupagamanena samathapaṭipannassa puna samādhāne byāpāraṃ akaronto samathapaṭipannaṃ ajjhupekkhati nāma.
사마타의 상태에 도달하여 사마타에 든 마음을 다시 집중하게 하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5사마타에 든 마음을 침착하게 본다라고 한다.
Samathapaṭipannabhāvato eva cassa kilesasaṃsaggaṃ pahāya ekattena upaṭṭhitassa puna ekattupaṭṭhāne byāpāraṃ akaronto ekattupaṭṭhānaṃ ajjhupekkhati nāma.
사마타를 닦은 상태로부터 그것이 오염원과 결합함을 버린 뒤 하나로 나타난 것을 다시 하나로 나타나게 하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6하나로 나타남을 침착하게 본다라고 한다.
Evaṃ tatramajjhattupekkhāya kiccavasena upekkhānubrūhanā veditabbā.
그러므로 중립적인 평온의 역할을 통해서 평온의 증장을 알아야 한다.
Ye panete evaṃ upekkhānubrūhite tattha jātā samādhipaññāsaṅkhātā yuganaddhadhammā aññamaññaṃ anativattamānā hutvā pavattā,
이와 같이 평온이 증장하면 그 禪에서 생긴 삼매(定)과 통찰지(慧)라 불리는 쌍의 법들이 7서로서로 능가하지 않으면서 일어난다.
yāni ca saddhādīni indriyāni nānākilesehi vimuttattā vimuttirasena ekarasāni hutvā pavattāni,
8믿음 등의 기능(五根)들이 여러 가지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동일한 역할을 하면서 일어난다.
yañcesa tadupagaṃ tesaṃ anativattanaekarasabhāvānaṃ anucchavikaṃ vīriyaṃ vāhayati,
9그 [수행자는] 그것에 적절하고 그들이 서로서로 능가하지 않는 상태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상태에 알맞은 정진을 쏟는다.
yā cassa tasmiṃ khaṇe pavattā āsevanā,
10그 순간에 [禪의 마음의] 반복이 일어난다.
sabbepi te ākārā yasmā ñāṇena saṃkilesavodānesu taṃ taṃ ādīnavañca ānisaṃsañca disvā tathā tathā sampahaṃsitattā visodhitattā pariyodāpitattā nipphannāva,
이 모든 특성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 오염에서 위험을, 깨끗함에서 공덕을 본 뒤 만족하고, 청정해지고, 깨끗해졌기 때문에 완성되었다.
tasmā ‘‘dhammānaṃ anativattanādibhāvasādhanena pariyodāpakassa ñāṇassa kiccanipphattivasena sampahaṃsanā veditabbā’’ti vuttaṃ.
그러므로 ‘법들을 서로서로 능가하지 않는 상태 등을 성취함에 의해서 깨끗해진 지혜의 기능을 완성함을 통해서 만족을 알아야 한다’고 설했다.
Tattha yasmā upekkhāvasena ñāṇaṃ pākaṭaṃ hoti.
평온으로 인해 지혜는 분명해진다.
Yathāha –
그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tathāpaggahitaṃ cittaṃ sādhukaṃ ajjhupekkhati,
“그렇게 노력한 마음을 완전히 침착하게 본다.
upekkhāvasena paññāvasena paññindriyaṃ adhimattaṃ hoti,
평온과 통찰지로 인하여 통찰지의 기능(慧根)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upekkhāvasena nānattakilesehi cittaṃ vimuccati,
평온으로 인하여 여러 오염원들로부터 마음이 벗어난다.
vimokkhavasena paññāvasena paññindriyaṃ adhimattaṃ hoti.
벗어남과 통찰지로 인하여 통찰지의 기능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Vimuttattā te dhammā ekarasā honti.
해탈했기 때문에 이 법들은 동일한 역할을 갖게 된다.
Ekarasaṭṭhena bhāvanā’’ti (paṭi. ma. 1.201).
동일한 역할을 가진다는 뜻에서 수행과 [통찰지로 인하여 통찰지의 기능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Tasmā ñāṇakiccabhūtā sampahaṃsanā pariyosānanti vuttā.
그러므로 지혜의 기능을 하는 만족을 끝이라고 설한 것이다.
Idāni paṭham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nti
땅의 까시나를 가진 초선을 얻는다:
ettha gaṇanānupubbatā paṭhamaṃ, paṭhamaṃ uppannantipi paṭhamaṃ.
숫자의 순서에 따라서 처음이라 했고, 첫 번째로 일어나기 때문에 처음이라 했다.
Ārammaṇūpanijjhānato paccanīkajhāpanato vā jhānaṃ.
대상을 靜慮하기 때문에, 반대되는 것을 태우기 때문에 禪이라 한다.
Pathavīmaṇḍalaṃ pana sakalaṭṭhena pathavīkasiṇanti vuccati,
흙의 원반을 전체라는 뜻에서 땅의 까시나라고 부른다.
taṃ nissāya paṭiladdhanimittampi, pathavīkasiṇanimitte paṭiladdhajhānampi.
흙의 원반을 의지하여 얻은 표상을 땅의 까시나라고 부르고, 또 땅의 까시나의 표상에서 얻은 禪도 땅의 까시나라 부른다.
Tatra imasmiṃ atthe jhānaṃ pathavīkasiṇanti veditabbaṃ.
이러한 뜻에서 禪이 땅의 까시나를 가진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Taṃ sandhāya vuttaṃ ‘‘paṭham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nti.
이것을 두고 설하기를 ‘땅의 까시나를 가진 초선을 얻는다’라고 한 것이다.
Ciraṭṭhitisampādanaṃ
오래 머묾을 성취함
76. Evamadhigate pana etasmiṃ tena yoginā vālavedhinā viya, sūdena viya ca ākārā pariggahetabbā.
이와 같이 이 [초선을] 얻을 때 수행자는 이것을 얻는 상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Yathā hi sukusalo dhanuggaho vālavedhāya kammaṃ kurumāno yasmiṃ vāre vālaṃ vijjhati, tasmiṃ vāre akkantapadānañca dhanudaṇḍassa ca jiyāya ca sarassa ca ākāraṃ pariggaṇheyya.
머리카락을 명중하는 궁수나 요리사처럼. 능숙한 궁수가 머리카락을 명중시키는 연습을 하다가 어떤 경우에 머리카락을 쏘아 맞추었다면, 그는 발을 둔 위치와 활과 활시위와 화살을 잡은 상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Evaṃ me ṭhitena evaṃ dhanudaṇḍaṃ evaṃ jiyaṃ evaṃ saraṃ gahetvā vālo viddho’’ti.
‘이와 같이 내가 섰고, 이와 같이 활을 잡고, 이와 같이 활시위를 잡고, 이와 같이 활을 잡은 뒤 머리카락을 쏘아 맞혔다.’라고.
So tato paṭṭhāya tatheva te ākāre sampādento avirādhetvā vālaṃ vijjheyya.
그 다음부턴 그런 상태들을 성취하면서 실패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Evameva yogināpi ‘‘imaṃ nāma me bhojanaṃ bhuñjitvā evarūpaṃ puggalaṃ sevamānena evarūpe senāsane iminā nāma iriyāpathena imasmiṃ kāle idaṃ adhigata’’nti ete bhojanasappāyādayo ākārā pariggahetabbā.
그와 같이 수행자도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런 분을 섬기면서 이러한 거처에서 이러한 자세로 이런 시간에 이것을 얻었다.’라고 이 음식의 적당함 등의 상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Evañhi so naṭṭhe vā tasmiṃ te ākāre sampādetvā puna uppādetuṃ, appaguṇaṃ vā paguṇaṃ karonto punappunaṃ appetuṃ sakkhissati.
이렇게 하면 그가 [禪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그 상태들을 성취하면서 일으킬 수 있고, 익숙하지 않은 [禪에] 익숙해지면서 계속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Yathā ca kusalo sūdo bhattāraṃ parivisanto tassa yaṃ yaṃ ruciyā bhuñjati, taṃ taṃ sallakkhetvā tato paṭṭhāya tādisameva upanāmento lābhassa bhāgī hoti,
솜씨 있는 요리사가 주인에게 음식을 해 올릴 때 주인이 선택하여 먹는 것을 주시한 뒤, 그 후로는 그런 종류의 음식을 올리면서 상을 받게 된다.
evamayampi adhigatakkhaṇe bhojanādayo ākāre gahetvā te sampādento naṭṭhe naṭṭhe punappunaṃ appanāya lābhī hoti.
이와 같이 수행자도 [禪을] 얻은 순간에 음식 등의 상태처럼 그 상태들을 파악한 뒤 그들을 성취하면서 [禪을] 잃어버렸을 때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
Tasmā tena vālavedhinā viya sūdena viya ca ākārā pariggahetabbā.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명중하는 궁수나 요리사처럼 상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Vuttampi cetaṃ bhagavatā –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rājānaṃ vā rājamahāmattaṃ vā nānaccayehi sūpehi paccupaṭṭhito assa ambilaggehipi tittakaggehipi kaṭukaggehipi madhuraggehipi khārikehipi akhārikehipi loṇikehipi aloṇikehipi.
“비구들이여, 마치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요리사가 왕이나 대신에게 갖가지 맛있는 국을 받들어 올렸다고 치자. 즉 신 것, 쓴 것, 자극이 있는 것, 단 것, 얼얼하게 매운 것, 맵지 않은 것, 짠 것, 싱거운 것을.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sakassa bhattu nimittaṃ uggaṇhāti
비구들이여, 이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요리사는 자기 주인의 모습을 살필 것이다.
‘idaṃ vā me ajja bhattu sūpeyyaṃ ruccati,
‘오늘은 이 국이 내 주인의 구미에 맞았다.
imassa vā abhiharati,
이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imassa vā bahuṃ gaṇhāti,
이것을 많이 집었다.
imassa vā vaṇṇaṃ bhāsati,
이것을 격찬했다.
ambilaggaṃ vā me ajja bhattu sūpeyyaṃ ruccati,
오늘은 신 것이 내 주인의 구미에 맞았다.
ambilaggassa vā abhiharati,
신 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ambilaggassa vā bahuṃ gaṇhāti,
신 것을 많이 집었다.
ambilaggassa vā vaṇṇaṃ bhāsati
신 것을 격찬했다.
…pe…
aloṇikassa vā vaṇṇaṃ bhāsatī’ti.
싱거운 것을 격찬했다.’라고.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lābhī ceva hoti acchādanassa, lābhī vetanassa, lābhī abhihārānaṃ.
비구들이여, 그래서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요리사는 옷가지를 타고, 급교를 받고, 선물을 얻는다.
Taṃ kissa hetu?
무슨 이유인가?
Tathā hi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sakassa bhattu nimittaṃ uggaṇhāti.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요리사는 이와 같이 자기 주인의 표상을 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기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pe… vedanāsu vedanā…
··· 느낌에서 느낌을 ···
citte cittā…
마음에서 마음을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이 되어 머문다.
Tassa dhammesu dhammānupassino viharato cittaṃ samādhiyati, upakkilesā pahīyanti,
그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무를 때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사라진다.
so taṃ nimittaṃ uggaṇhāti.
그는 그 표상을 배운다.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lābhī ceva hoti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naṃ, lābhī satisampajaññassa.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현생에서 행복하게 머묾을 얻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얻는다.
Taṃ kissa hetu?
무슨 이유인가?
Tathā hi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sakassa cittassa nimittaṃ uggaṇhātī’’ti (saṃ. ni. 5.374).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표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Nimittaggahaṇena cassa puna te ākāre sampādayato appanāmattameva ijjhati, na ciraṭṭhānaṃ.
그가 표상을 파악하여 그런 상태들을 성취할 때 본삼매에 드는 것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오래 머묾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Ciraṭṭhānaṃ pana samādhiparibandhānaṃ dhammānaṃ suvisodhitattā hoti.
삼매를 가로막는 [다섯 가지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지극히 청정해질 때 오래 머물게 된다.
Yo hi bhikkhu kāmādīnavapaccavekkhaṇādīhi kāmacchandaṃ na suṭṭhu vikkhambhetvā,
비구가 감각적 욕망의 위험을 반조함 등에 의해 감각적 욕망을 미리 완전히 억압하지 않고
kāyapassaddhivasena kāyaduṭṭhullaṃ na suppaṭipassaddhaṃ katvā,
몸의 편안함으로 몸의 흥분을 미리 완전히 가라앉히지 않고,
ārambhadhātumanasikārādivasena thinamiddhaṃ na suṭṭhu paṭivinodetvā,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發勤界)를 마음에 잡도리함 등으로 해태와 혼침을 미리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samathanimittamanasikārādivasena uddhaccakukkuccaṃ na susamūhataṃ katvā,
사마타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함 등으로 들뜸과 후회를 미리 완전히 뿌리 뽑지 않고,
aññepi samādhiparibandhe dhamme na suṭṭhu visodhetvā jhānaṃ samāpajjati,
삼매를 방해하는 다른 법들을 미리 정화하지 않고 禪을 증득하면,
so avisodhitaṃ āsayaṃ paviṭṭhabhamaro viya avisuddhaṃ uyyānaṃ paviṭṭharājā viya ca khippameva nikkhamati.
그는 곧바로 나오게 된다. 마치 불결한 벌통에 들어간 벌과 청결하지 않은 정원에 들어간 왕이 곧바로 나오는 것과 같이.
Yo pana samādhiparibandhe dhamme suṭṭhu visodhetvā jhānaṃ samāpajjati, so suvisodhitaṃ āsayaṃ paviṭṭhabhamaro viya suparisuddhaṃ uyyānaṃ paviṭṭharājā viya ca sakalampi divasabhāgaṃ antosamāpattiyaṃyeva hoti.
삼매를 방해하는 법들을 미리 완전히 청정케 한 뒤 禪에 드는 이는 깨끗한 벌통에 들어간 벌처럼, 매우 청결한 정원에 들어간 왕처럼, 온 종일 증득(等至)안에 있게 된다.
Tenāhu porāṇā –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Kāmesu chandaṃ paṭighaṃ vinodaye,
Uddhaccamiddhaṃ vicikicchapañcamaṃ;
감각적 욕망과 분노와 들뜸과 혼침,
다섯 번째인 의심을 버리고
Vivekapāmojjakarena cetasā,
Rājāva suddhantagato tahiṃ rame’’ti.
한거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 [禪을] 즐거워하라.
마치 깨끗한 정원에 들어간 왕처럼.
Tasmā ciraṭṭhitikāmena paribandhakadhamme visodhetvā jhānaṃ samāpajjitabbaṃ.
그러므로 [禪에] 오래 머물기를 원하는 이는 방해가 되는 법들을 미리 깨끗이 한 뒤 禪을 증득해야 한다.
Cittabhāvanāvepullatthañca yathāladdhaṃ paṭibhāganimittaṃ vaḍḍhetabbaṃ.
마음을 닦는 수행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얻은 닮은 표상을 확장해야 한다.
Tassa dve vaḍḍhanābhūmiyo upacāraṃ vā appanaṃ vā.
그것을 확장하는 두 가지 토대가 있다. 1근접[삼매] 혹은 2본[삼매]이다.
Upacāraṃ patvāpi hi taṃ vaḍḍhetuṃ vaṭṭati appanaṃ patvāpi.
근접[삼매]에 이른 뒤 그것을 확장할 수 있고, 본삼매에 이르고 나서도 확장할 수 있다.
Ekasmiṃ pana ṭhāne avassaṃ vaḍḍhetabbaṃ.
그러나 반드시 동일한 장소에서 확장해야 한다.
Tena vuttaṃ ‘‘yathāladdhaṃ paṭibhāganimittaṃ vaḍḍhetabba’’nti.
그러므로 ‘이미 얻은 닮은 표상을 확장해야 한다.’라고 설했다.
Nimittavaḍḍhananayo
표상을 확장하는 방법
77. Tatrāyaṃ vaḍḍhananayo,
이것이 확장하는 방법이다.
tena yoginā taṃ nimittaṃ pattavaḍḍhanapūvavaḍḍhanabhattavaḍḍhanalatāvaḍḍhanadussavaḍḍhanayogena avaḍḍhetvā yathā nāma kassako kasitabbaṭṭhānaṃ naṅgalena paricchinditvā paricchedabbhantare kasati, yathā vā pana bhikkhū sīmaṃ bandhantā paṭhamaṃ nimittāni sallakkhetvā pacchā bandhanti, evameva tassa yathāladdhassa nimittassa anukkamena ekaṅguladvaṅgulativaṅgulacaturaṅgulamattaṃ manasā paricchinditvā yathāparicchedaṃ vaḍḍhetabbaṃ.
옹기-떡-밥-덩굴-천 조각을 확장하듯이 그 표상을 확장해서는 안된다. 농부가 갈아야 할 땅을 쟁기로 한정한 뒤 그 한정한 범위 내에서 갈고, 비구들이 경계를 그을 때 먼저 표식을 주시한 뒤 긋는 것처럼, 이미 얻은 표상을 차례대로 손가락 한 마디-두 마디-세 마디-네 마디 정도를 마음으로 한정한 뒤 한정한 만큼 확장해야 한다.
Aparicchinditvā pana na vaḍḍhetabbaṃ.
한정하지 않은 채 확장해서는 안된다.
Tato vidatthiratanapamukhapariveṇavihārasīmānaṃ gāmanigamajanapadarajjasamuddasīmānañca paricchedavasena vaḍḍhayantena cakkavāḷaparicchedena vā tato vāpi uttari paricchinditvā vaḍḍhetabbaṃ.
그 다음 한 뼘, 두 뼘, 툇마루, 주변의 공간, 절의 한계, 마을, 읍, 지방, 왕국, 바다의 한계를 차례대로 한정하여 확장하면서, 혹은 전 우주를 한정하면서, 혹은 그보다 더 한정한 뒤 확장할 수 있다.
Yathā hi haṃsapotakā pakkhānaṃ uṭṭhitakālato paṭṭhāya parittaṃ parittaṃ padesaṃ uppatantā paricayaṃ katvā anukkamena candimasūriyasantikaṃ gacchanti,
마치 어린 백조들이 날개가 자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차츰 짧은 거리를 날면서 연습하여 드디어 달과 해의 곁에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evameva bhikkhu vuttanayena nimittaṃ paricchinditvā vaḍḍhento yāva cakkavāḷaparicchedā tato vā uttari vaḍḍheti.
이와 같이 비구는 앞서 설한 방법대로 표상을 한정한 뒤 확장하면서 전 우주까지 확장하거나 혹은 그보다 더 확장할 수 있다.
Athassa taṃ nimittaṃ vaḍḍhitavaḍḍhitaṭṭhāne pathaviyā ukkūlavikūlanadīviduggapabbatavisamesu saṅkusatasamabbhāhataṃ usabhacammaṃ viya hoti.
이처럼 계속해서 확장할 때 땅의 우뚝 솟은 곳과 움푹 팬 곳과 협곡과 울퉁불퉁한 산의 고르지 않은 곳에서 마치 백 개의 나무못으로 팽팽하게 편 소가죽과 같은 그런 표상이 그에게 나타난다.
Tasmiṃ pana nimitte pattapaṭhamajjhānena ādikammikena samāpajjanabahulena bhavitabbaṃ,
이런 표상에서 초선을 얻은 초심자는 거듭거듭 [禪에] 들어가야 한다.
na paccavekkhaṇabahulena.
반조를 많이 해서는 안된다.
Paccavekkhaṇabahulassa hi jhānaṅgāni thūlāni dubbalāni hutvā upaṭṭhahanti.
반조를 많이 하는 이에게 禪의 구성요소들은 거칠고 힘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Athassa tāni evaṃ upaṭṭhitattā upari ussukkanāya paccayataṃ āpajjanti.
그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더 높은 것을 얻기 위한 노력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So appaguṇe jhāne ussukkamāno pattapaṭhamajjhānā ca parihāyati, na ca sakkoti dutiyaṃ pāpuṇituṃ.
익숙하지 않은 [다음 단계의] 禪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그는 초선을 잃게 되고 또 제2선도 얻을 수도 없다.
Tenāha bhagavā –
그래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ṃ.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른 산악의 소가 있다 하자.
Tassā evamassa ‘yaṃnūnāhaṃ agatapubbañceva disaṃ gaccheyyaṃ, akhāditapubbāni ca tiṇāni khādeyyaṃ, apītapubbāni ca pānīyāni piveyya’nti.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 보리라.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으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고.
Sā purimaṃ pādaṃ na supatiṭṭhitaṃ patiṭṭhāpetvā pacchimaṃ pādaṃ uddhareyya,
그는 앞발을 잘 들어놓지도 않은 채 뒷발을 들어 올릴지도 모른다.
sā na ceva agatapubbaṃ disaṃ gaccheyya, na ca akhāditapubbāni tiṇāni khādeyya, na ca apītapubbāni pānīyāni piveyya.
그러면 그는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이고, 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지 못할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지 못할 것이다.
Yasmiñcassā padese ṭhitāya evamassa ‘yaṃnūnāhaṃ agatapubbañceva…pe… piveyya’nti. Tañca padesaṃ na sotthinā paccāgaccheyya.
또 ‘전에 가 본적이 없는 ···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Tathā hi sā, bhikkhave,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ṃ,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bhikkhu bālo abyatto akhettaññū akusalo vivicceva kāmeh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uṃ.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 초선에 들어 머무는데 서투르다.
So taṃ nimittaṃ nāsevati, na bhāveti, na bahulīkaroti, na svādhiṭṭhitaṃ adhiṭṭhāti,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지 않고, 닦지 않고, 많이 [공부]짓지 않고, 바르게 확립하지 않는다.
tassa evaṃ hoti ‘yaṃnūnāhaṃ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pe…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히고 ··· 제2선에 들어 머물리라’고.
So na sakkot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pe…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uṃ.
그러나 그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히고 ··· 제2선에 들어 머물 수가 없다.
Tassevaṃ ho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yaṃnūnāhaṃ vivicceva kāmeh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 초선에 들어 머물리라’고.
So na sakkoti vivicceva kāmeh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uṃ.
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 초선에 들어 머물 수가 없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ubhato bhaṭṭho ubhato parihīno,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두 가지 모두를 잃었고 두 가지 모두로부터 떨어졌다고 한다.
seyyathāpi sā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nti (a. ni. 9.35).
마치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른 산악의 소처럼.”
Pañcavasīkathā
다섯 가지 자유자재
78. Tatrimā pañca vasiyo āvajjanavasī, samāpajjanavasī, adhiṭṭhānavasī, vuṭṭhānavasī, paccavekkhaṇavasīti.
그러므로 다섯 가지 형태의 자유자재인 1전향의 자유자재, 2입정의 자유자애, 3머묾의 자유자재, 4출정의 자유자재, 5반조의 자유자재를 닦아야 한다.
Paṭhamaṃ jhānaṃ yatthicchakaṃ yadicchakaṃ yāvadicchakaṃ āvajjeti, āvajjanāya dandhāyitattaṃ natthīti āvajjanavasī.
초선에서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기간만큼 초선으로 전향한다. 전향에 어려움이 없다. 이것이 전향의 자유자재이다.
Paṭhamaṃ jhānaṃ yatthicchakaṃ…pe… samāpajjati, samāpajjanāya dandhāyitattaṃ natthīti samāpajjanavasī. Evaṃ sesāpi vitthāretabbā.
초선에서 원하는 곳에서 ··· 입정한다. 입정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입정의 자유자재이다. 이와 같이 나머지도 상세하게 인용된다.(XXIII.§27)
Ayaṃ panettha atthappakāsanā,
여기서 이것이 그 뜻에 대한 설명이다.
paṭhamajjhānato vuṭṭhāya paṭhamaṃ vitakkaṃ āvajjayato bhavaṅgaṃ upacchinditvā uppannāvajjanānantaraṃ vitakkārammaṇāneva cattāri pañca vā javanāni javanti.
초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먼저 일으킨 생각으로 전향할 때 잠재의식을 끊고 전향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그 일으킨 생각을 대상으로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속행이 일어난다.
Tato dve bhavaṅgāni, tato puna vicārārammaṇaṃ āvajjanaṃ, vuttanayāneva javanānīti
그 다음에 다시 지속적인 고찰을 대상으로 전향이 일어나고, 앞서 설한 방법대로 속행이 일어난다.
evaṃ pañcasu jhānaṅgesu yadā nirantaraṃ cittaṃ pesetuṃ sakkoti, athassa āvajjanavasī siddhā hoti.
이와 같이 다섯 가지 禪의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연속적으로 마음을 연장시킬 수 있을 때 그의 전향의 자유자재는 성취된다.
Ayaṃ pana matthakappattā vasī bhagavato yamakapāṭihāriye labbhati, aññesaṃ vā evarūpe kāle.
그런데 정점에 이른 [전향의] 자유자재는 세존의 쌍신변(Ps.i.100)에서 발견된다. 혹은 다른 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시간에 발견된다.
Ito paraṃ sīghatarā āvajjanavasī nāma natthi.
이 보다 더 빠른 전향의 자유자재란 없다.
Āyasmato pana mahāmoggallānassa nandopanandanāgarājadamane viya sīghaṃ samāpajjanasamatthatā samāpajjanavasī nāma.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난다와 우빠난다 용왕을 항복시킬 때처럼 빨리 입정하는 능력을 입정에 자유자재라 한다.
Accharāmattaṃ vā dasaccharāmattaṃ vā khaṇaṃ ṭhapetuṃ samatthatā adhiṭṭhānavasī nāma.
손가락을 한 번 튕기거나 열 번 튕기는 순간동안만 머물 수 있는 능력을 머묾의 자유자재라 한다.
Tatheva lahuṃ vuṭṭhātuṃ samatthatā vuṭṭhānavasī nāma.
그와 같이 빨리 출정할 수 있는 능력을 출정의 자유자재라 한다.
Tadubhayadassanatthaṃ buddharakkhitattherassa vatthuṃ kathetuṃ vaṭṭati.
이 두 경우를 보여주기 위해 붓다락키따 장로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적당하다.
So hāyasmā upasampadāya aṭṭhavassiko hutvā therambatthale mahārohaṇaguttattherassa gilānupaṭṭhānaṃ āgatānaṃ tiṃsamattānaṃ iddhimantasahassānaṃ
그 스님이 구족계를 받은 지 8년이 지났을 때 테람밧탈라에 있는 마하로하나굿따 장로를 간병하기 위해 3만명의 신통을 가진 이들이 왔다.
majjhe nisinno
[장로는 ]그 속에 앉았다.
therassa yāguṃ paṭiggāhayamānaṃ upaṭṭhākanāgarājānaṃ gahessāmīti ākāsato pakkhandantaṃ
금시조 왕이 ‘장로께 죽을 공양올리는 시자인 용왕을 낚아채리라’는 의도로 하늘로부터 덥쳐왔다.
supaṇṇarājānaṃ disvā tāvadeva pabbataṃ nimminitvā nāgarājānaṃ bāhāyaṃ gahetvā tattha pāvisi.
(장로는) 그 금시조 왕을 보자마자 곧바로 산을 만든 뒤 용왕의 팔을 끌어 그 속으로 밀어 넣었다.
Supaṇṇarājā pabbate pahāraṃ datvā palāyi.
금시조 왕은 산을 들이박고 가버렸다.
Mahāthero āha – ‘‘sace, āvuso, buddharakkhito nābhavissa, sabbeva gārayhā assāmā’’ti.
대장로께서 말씀하셨다. ‘도반들이여, 만약 락키따가 없었더라면 모두 비난을 면치 못했을 걸세’라고.
Paccavekkhaṇavasī pana āvajjanavasiyā eva vuttā.
반조의 자유자재는 전향의 자유자재와 같은 방법으로 설했다.
Paccavekkhaṇajavanāneva hi tattha āvajjanānantarānīti.
속행은 여기서 설한 전향의 바로 다음이기 때문이다.
Dutiyajjhānakathā
제2선의 주석
Imāsu pana pañcasu vasīsu ciṇṇavasinā paguṇapaṭhamajjhānato vuṭṭhāya
이 다섯 가지의 자유자재를 얻은 이는 익숙한 초선으로부터 출정하여
‘‘ayaṃ samāpatti āsannanīvaraṇapaccatthikā, vitakkavicārānaṃ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이 증득은 다섯 가지의 장애(五蓋)라는 적과 가깝고 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거칠기 때문에 구성요소가 약하다’라고
ca tattha dosaṃ disvā dutiyajjhānaṃ santato manasikatvā paṭhamajjhāne nikantiṃ pariyādāya dutiyādhigamāya yogo kātabbo.
거기서 결점을 보고 나서 제2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초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2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Athassa yadā paṭhamajjhānā vuṭṭhāya satassa sampajānassa jhānaṅgāni paccavekkhato vitakkavicārā oḷārikato upaṭṭhahanti,
그가 초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거칠게 나타나고,
pītisukhañceva cittekaggatā ca santato upaṭṭhāti,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tadāssa oḷārikaṅgaṃ pahānāya santaaṅgapaṭilābhāya ca tadeva nimittaṃ ‘‘pathavī pathavī’’ti punappunaṃ manasikaroto
그 거친 구성요소를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땅)’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idāni dutiyajjhānaṃ uppajjissatī’’ti bhavaṅgaṃ upacchinditvā tadeva pathavīkasiṇaṃ ārammaṇaṃ katvā manodvārāvajjanaṃ uppajjati.
그러면 ‘막 제2선이 일어나려는’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 그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意門轉向(마노의 문을 통한 전향)이 일어난다.
Tato tasmiṃyevārammaṇe cattāri pañca vā javanāni javanti,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속행이 일어난다.
yesamavasāne ekaṃ rūpāvacaraṃ dutiyajjhānikaṃ.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색계의 속행이고 제2선에 속한다.
Sesāni vuttappakārāneva kāmāvacarānīti.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욕계의 것이다.(§74)
Ettāvatā cesa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이때에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Vbh.245)”
Evamanena dvaṅgavippahīnaṃ tivaṅgasamannāgataṃ tividhakalyāṇaṃ dasalakkhaṇasampannaṃ dutiy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ṃ.
이와 같이 그는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렸고,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땅의 까시나를 가진 제2선을 얻는다.
Tattha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ti vitakkassa ca vicārassa cāti imesaṃ dvinnaṃ vūpasamā samatikkamā, dutiyajjhānakkhaṇe apātubhāvāti vuttaṃ hoti.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라는 이 둘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극복했기 때문에, 제2선의 순간에 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Tattha kiñcāpi dutiyajjhāne sabbepi paṭhamajjhānadhammā na santi. Aññeyeva hi paṭhamajjhāne phassādayo, aññe idha. Oḷārikassa pana oḷārikassa aṅgassa samatikkamā paṭhamajjhānato paresaṃ dutiyajjhānādīnaṃ adhigamo hotīti dīpanatthaṃ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ti evaṃ vuttanti veditabbaṃ.
여기서 초선에 있는 감각접촉(觸) 등은 제2선의 감각접촉 등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초선에 속하는 법들은 아무것도 제2선에 존재하지 않지만 각각 거친 구성요소를 극복한 뒤 초선으로부터 제2선 등 다른 禪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라고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Ajjhattanti idha niyakajjhattamadhippetaṃ.
자기 내면의 것이고: 여기서 자신의 내면에 속한다는 뜻이다.
Vibhaṅge pana ‘‘ajjhattaṃ paccatta’’nti ettakameva vuttaṃ.
그러나 위방가에서 “내면적이고 개인적인(Vbh.258)”이라고 이만큼만 설했다.
Yasmā ca niyakajjhattamadhippetaṃ, tasmā attani jātaṃ attano santāne nibbattanti ayamettha attho.
자신의 내면을 뜻하기 때문에 ‘자기한테서 생긴’, ‘자기의 相續(흐름)에서 생긴’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뜻이다.
Sampasādananti sampasādanaṃ vuccati saddhā.
확신이 있으며: 믿음을 확신이라 한다.
Sampasādanayogato jhānampi sampasādanaṃ.
확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禪이 ‘확신을 가졌다.’라고 한다.
Nīlavaṇṇayogato nīlavatthaṃ viya.
이는 푸른색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옷이 ‘푸른색을 가졌다.’ 고 하는 것과 같다.
Yasmā vā taṃ jhānaṃ sampasādanasamannāgatattā vitakkavicārakkhobhavūpasamanena ca cetaso sampasādayati,
이 禪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일으킨 생가과 지속적인 고찰의 방해를 가라앉혀서 마음으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만든다.
tasmāpi sampasādananti vuttaṃ.
그러므로 이 禪을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Imasmiñca atthavikappe sampasādanaṃ cetasoti evaṃ padasambandho veditabbo.
이렇게 뜻을 분별해 보면 ‘마음이 확신이 있으며’라고 단어의 결합을 알아야 한다.
Purimasmiṃ pana atthavikappe cetasoti etaṃ ekodibhāvena saddhiṃ yojetabbaṃ.
물론 일차적으로 그 뜻을 분별하면 ‘마음의’라는 단어는 [뒤에 나오는] ‘단일한 상태’와 함께 결합해야 한다.
Tatrāyamatthayojanā, eko udetīti ekodi,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하나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이다.
vitakkavicārehi anajjhārūḷhattā aggo seṭṭho hutvā udetīti attho.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이것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상이요 최고가 되어 일어난다는 뜻이다.
Seṭṭhopi hi loke ekoti vuccati.
최고인 것을 세간에서는 ‘하나’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Vitakkavicāravirahato vā eko asahāyo hutvā itipi vattuṃ vaṭṭati.
혹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기 때문에 하나이다. 동료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Atha vā sampayuttadhamme udāyatīti udi, uṭṭhāpetīti attho.
혹은 함께한 법들을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하는’인데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Seṭṭhaṭṭhena eko ca so udi cāti ekodi,
최고라는 뜻에서 ‘하나’이고 그것은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단일한 상태라 한다.
samādhissetaṃ adhivacanaṃ.
삼매와 동의어이다.
Iti imaṃ ekodiṃ bhāveti vaḍḍhetīti idaṃ dutiyajjhānaṃ ekodibhāvaṃ.
이와 같이 이 단일함을 닦고 증장시키기 때문에 이 제2선을 단일한 상태라 한다.
So panāyaṃ ekodi yasmā cetaso, na sattassa, na jīvassa,
이 단일함은 마음에 속한 것이지 중생과 영혼에 속한 것이 아니다.
tasmā etaṃ cetaso ekodibhāvanti vuttaṃ.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의 단일한 상태라 말한다.
Nanu cāyaṃ saddhā paṭhamajjhānepi atthi,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초선에도 믿음이 있고,
ayañca ekodināmako samādhi,
이 단일한 상태라 불리는 삼매에도 있다.
atha kasmā idameva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ñcā’’ti vuttanti.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오직 이 제2선을 ‘확신이 있고, 마음의 단일한 상태’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Vuccate, aduñhi paṭhamajjhānaṃ vitakkavicārakkhobhena vīcitaraṅgasamākulamiva jalaṃ na suppasannaṃ hoti,
대답한다. 초선은 마치 잔물결로 인해 일렁이는 물처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의 방해로 확신에 차있지 않다.
tasmā satiyāpi saddhāya ‘‘sampasādana’’nti na vuttaṃ.
그러므로 비록 믿음은 있지만 확신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Na suppasannattāyeva cettha samādhipi na suṭṭhu pākaṭo,
확신에 차있지 않기 때문에 삼매도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다.
tasmā ‘‘ekodibhāva’’ntipi na vuttaṃ.
그러므로 단일한 상태라고 하지 않았다.
Imasmiṃ pana jhāne vitakkavicārapalibodhābhāvena laddhokāsā balavatī saddhā, balavasaddhāsahāyapaṭilābheneva ca samādhipi pākaṭo,
그러나 이 禪에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의 방해가 없기 때문에 믿음은 기회를 얻어 강해진다. 강한 믿음의 동료를 얻어 삼매도 분명하게 된다.
tasmā idameva evaṃ vuttanti veditabbaṃ.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Vibhaṅge pana ‘‘sampasādananti yā saddhā saddahanā okappanā abhippasādo.
물론 위방가에서 “확신은 믿음이고, 믿는 것이고, 신뢰하는 것이고, 깨끗한 믿음이다.
Cetaso ekodibhāvanti yā cittassa ṭhiti…pe… sammāsamādhī’’ti ettakameva vuttaṃ.
마음의 단일한 상태는 마음의 확고함 ··· 바른 삼매다.(Vbh.258)”라고 이렇게 설했다.
Evaṃ vuttena pana tena saddhiṃ ayamatthavaṇṇanā yathā na virujjhati, aññadatthu saṃsandati ceva sameti ca, evaṃ veditabbā.
이와 같이 설한 위방가와 [본서의] 이러한 주석은 모순되지 않고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고 알아야 한다.
Avitakkaṃ avicāranti bhāvanāya pahīnattā etasmiṃ, etassa vā vitakko natthīti avitakkaṃ.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수행에 의해서 버렸기 때문에 이 [禪]에는 일으킨 생각이, 혹은 이 [禪]의 일으킨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일으킨 생각이 없다.’고 한다.
Imināva nayena avicāraṃ.
같은 방법으로 ‘지속적인 고찰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Vibhaṅgepi vuttaṃ
이것은 위방가에서도 설했다.
‘‘iti ayañca vitakko ayañca vicāro santā honti samitā vūpasantā atthaṅgatā abbhatthaṅgatā appitā byappitā sositā visositā byantikatā, tena vuccati avitakkaṃ avicāra’’nti (vibha. 576).
“이와 같이 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고요해지고, 적정해지고, 가라앉고, 없어지고, 완전히 없어지고, 소멸해버리고, 완전히 소멸해버리고, 말라버리고, 완전히 말라버리고,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러므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다’고 한다.”
Etthāha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nanu ca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ti imināpi ayamattho siddho,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이미 이 뜻을 확립했다.
atha kasmā puna vuttaṃ ‘avitakkaṃ avicāra’nti’’.
그런데 무슨 이유로 다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다.’라 라고 설했는가?’라고.
Vuccate,
대답한다.
evametaṃ siddhovāyamattho, na panetaṃ tadatthadīpakaṃ.
그렇다. 이미 이 뜻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뜻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Nanu avocumha
앞에서 이미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oḷārikassa pana oḷārikassa aṅgassa samatikkamā paṭhamajjhānato paresaṃ dutiyajjhānādīnaṃ samadhigamo hotīti dassanatthaṃ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ti evaṃ vutta’’nti.
‘각각 거친 구성요소를 극복한 뒤 초선으로부터 제2선 등 다른 禪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라고 설했다.’라고.(§140)
Apica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idaṃ sampasādanaṃ, na kilesakālussiyassa.
더욱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이 확신이 있을 따름이지 오염원의 때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Vitakkavicārānañca vūpasamā ekodibhāvaṃ, na upacārajjhānamiva nīvaraṇappahānā,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이 마음의 단일한 상태가 있을 따름이지 근접삼매에서처럼 장애를 버렸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paṭhamajjhānamiva ca na aṅgapātubhāvāti
초선에서처럼 구성요소가 나타남으로 인해 있는 것도 아니다.
evaṃ sampasādanaekodibhāvānaṃ hetuparidīpakamidaṃ vacanaṃ.
이와 같이 확신과 단일한 상태의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라는 첫 번째] 구절이 있는 것이다.
Tathā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idaṃ avitakkaṃ avicāraṃ,
마찬가지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이 禪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다.
na tatiyacatutthajjhānāni viya cakkhuviññāṇādīni viya ca abhāvāti
제3선과 제4선의 경우처럼, 또 眼識 등의 경우처럼 단지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것은] 아니다.
evaṃ avitakkaavicārabhāvassa hetuparidīpakañca, na vitakkavicārābhāvamattaparidīpakaṃ.
그러므로 [첫 번째 구절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상태의 원인을 보여주는 것이지 단순히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Vitakkavicārābhāvamattaparidīpakameva pana ‘‘avitakkaṃ avicāra’’nti idaṃ vacanaṃ. Tasmā purimaṃ vatvāpi vattabbamevāti.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라는 [두 번째] 구절은 단순히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첫 번째 구절을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Samādhijanti paṭhamajjhānasamādhito sampayuttasamādhito vā jātanti attho.
삼매에서 생긴: 초선의 삼매로부터 혹은 함께한 삼매로부터 생겼다는 뜻이다.
Tattha kiñcāpi paṭhamampi sampayuttasamādhito jātaṃ, atha kho ayameva samādhi ‘‘samādhī’’ti vattabbataṃ arahati
물론 초선도 함께한 삼매로부터 생겼지만 참으로 이 삼매야말로 삼매라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
vitakkavicārakkhobhavirahena ativiya acalattā, suppasannattā ca,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의 방해가 없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고 절대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tasmā imassa vaṇṇabhaṇanatthaṃ idameva ‘‘samādhija’’nti vuttaṃ. Pītisukhanti idaṃ vuttanayameva.
그러므로 이것을 찬탄하기 위해서 오직 이 [제2禪]을 삼매에서 생겼다고 설했다. 희열과 행복은 앞서 설한 방법과 같다.
Dutiyanti gaṇanānupubbatā dutiyaṃ. Idaṃ dutiyaṃ samāpajjatītipi dutiyaṃ.
제2: 숫자의 순서에 따라서 제2(두 번째)라 했고, 이것은 ‘두 번째에 증득한다’라고 해서 제2라 했다.
Yaṃ pana vuttaṃ ‘‘dvaṅgavippahīnaṃ tivaṅgasamannāgata’’nti, tattha vitakkavicārānaṃ pahānavasena dvaṅgavippahīnatā veditabbā.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렸고,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여기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버림에 의해서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버림’을 알아야 한다.
Yathā ca paṭhamajjhānassa upacārakkhaṇe nīvaraṇāni pahīyanti, na tathā imassa vitakkavicārā.
초선에 접근하는 순간에 장애들이 버려지듯이, 제2선에 접근하는 순간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Appanākkhaṇeyeva ca panetaṃ vinā tehi uppajjati.
오직 본삼매의 순간에 제2선은 이들 없이 일어난다.
Tenassa te ‘‘pahānaṅga’’nti vuccanti.
그러므로 이들을 제2선의 버리는 구성요소라고 부른다.
Pīti sukhaṃ cittekaggatāti imesaṃ pana tiṇṇaṃ uppattivasena tivaṅgasamannāgatatā veditabbā.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라는 이들 셋이 일어남이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짐’ 이라고 알아야 한다.
Tasmā yaṃ vibhaṅge ‘‘jhānanti sampasādo pīti sukhaṃ cittassa ekaggatā’’ti (vibha. 580) vuttaṃ, taṃ saparikkhāraṃ jhānaṃ dassetuṃ pariyāyena vuttaṃ.
위방가에서 “[제2]禪이란 확신, 희열, 행복, 마음의 하나됨이다.”라고 한 것은 그것의 부수적인 구성요소와 함께 禪을 보여주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Ṭhapetvā pana sampasādanaṃ nippariyāyena upanijjhānalakkhaṇappattānaṃ aṅgānaṃ vasena tivaṅgikameva etaṃ hoti.
그러나 확신을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설하면 靜慮하는 특징을 얻은 구성요소들에 따라 이 禪은 오직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진다.
Yathāha – ‘‘katamaṃ tasmiṃ samaye tivaṅgikaṃ jhānaṃ hoti, pīti sukhaṃ cittassa ekaggatā’’ti (dha. sa. 161; vibha. 628). Sesaṃ paṭhamajjhāne vuttanayameva.
그래서 말씀하셨다. “그때 무엇이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진 禪인가? 그것은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다.” 나머지는 초선에서 설한 방법과 같다.
Tatiyajjhānakathā
제3선의 주석
Evamadhigate pana tasmimpi vuttanayeneva pañcahākārehi ciṇṇavasinā hutvā paguṇadutiyajjhānato vuṭṭhāya
이와 같이 [제2선을] 얻었을 때에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은 뒤 익숙한 제2선으로부터 출정한다.
‘‘ayaṃ samāpatti āsannavitakkavicārapaccatthikā, ‘yadeva tattha pītigataṃ cetaso uppilāvitaṃ, etenetaṃ oḷārikaṃ akkhāyatī’ti (dī. ni. 1.96)
이 증득(等至)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라는 적과 가깝기 때문에 또 희열이 거칠기 때문에 구성요소가 힘이 없다고 거기서 결점을 본다.
vuttāya pītiyā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ca tattha dosaṃ disvā tatiyajjhānaṃ santato manasikaritvā dutiyajjhāne nikantiṃ pariyādāya tatiyādhigamāya yogo kātabbo.
“희열이든 마음의 기쁨이든 그곳에 있는 것은 거칠게 나타난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그는 제3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여 제2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3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Athassa yadā dutiyajjhānato vuṭṭhāya satassa sampajānassa jhānaṅgāni paccavekkhato pīti oḷārikato upaṭṭhāti, sukhañceva ekaggatā ca santato upaṭṭhāti. Tadāssa oḷārikaṅgappahānāya santaaṅgapaṭilābhāya ca tadeva nimittaṃ ‘‘pathavī pathavī’’ti punappunaṃ manasikaroto
그가 제2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희열이 거칠게 나타나고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그 거친 구성요소를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땅)’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idāni tatiyajjhānaṃ uppajjissatī’’ti bhavaṅgaṃ upacchinditvā tadeva pathavīkasiṇaṃ ārammaṇaṃ katvā manodvārāvajjanaṃ uppajjati.
그러면 ‘막 제3선이 일어나려는’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 그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意門轉向이 일어난다.
Tato tasmiṃyevārammaṇe cattāri pañca vā javanāni javanti,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속행이 일어난다.
yesaṃ avasāne ekaṃ rūpāvacaraṃ tatiyajjhānikaṃ,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색계의 것이고 제3선에 속한다.
sesāni vuttanayeneva kāmāvacarānīti.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욕계의 것이다.(§74)
Ettāvatā ca panesa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이때에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문다.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īti (dī. ni. 1.230; dha. sa. 163).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Evamanena ekaṅgavippahīnaṃ duvaṅgasamannāgataṃ tividhakalyāṇaṃ dasalakkhaṇasampannaṃ tatiy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ṃ.
이와 같이 그는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렸고,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땅의 까시나를 가진 제3선을 얻는다.
83. Tattha pītiyā ca virāgāti virāgo nāma vuttappakārāya pītiyā jigucchanaṃ vā samatikkamo vā.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빛바램은 앞서 설한 방법대로 희열에 대해 염오하거나 그것을 극복함이다.
Ubhinnaṃ pana antarā casaddo sampiṇḍanattho,
[희열(pīti)과 빛바램(virāga)의] 둘 사이에 있는 ‘그리고(ca)'라는 단어는 접속의 뜻을 나타낸다.
so vūpasamaṃ vā sampiṇḍet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aṃ vā.
이것은 [제2선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가라앉음’과 연결하거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음’과 연결한다.
Tattha yadā vūpasamameva sampiṇḍeti, tadā ‘‘pītiyā ca virāgā kiñca bhiyyo vūpasamā cā’’ti evaṃ yojanā veditabbā.
이 가운데서 ‘가라앉음’과 연결할 때,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더욱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라고 문장구조를 알아야 한다.
Imissā ca yojanāya virāgo jigucchanattho hoti,
이 문장구조에서 빛바램은 염오를 뜻한다.
tasmā ‘‘pītiyā jigucchanā ca vūpasamā cā’’ti ayamattho daṭṭhabbo.
그러므로 ‘희열에 대해 염오하기 때문에, 더욱이 가라앉았기 때문에’라고 이 뜻을 알아야 한다.
Yadā pana vitakkavicāravūpasamaṃ sampiṇḍeti, tadā ‘‘pītiyā ca virāgā, kiñca bhiyyo vitakkavicārānañca vūpasamā’’ti evaṃ yojanā veditabbā.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음’과 연결할 때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더욱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라고 문장구조를 알아야 한다.
Imissā ca yojanāya virāgo samatikkamanattho hoti,
이 문장구조에서 빛바램은 극복한다는 뜻이다.
tasmā ‘‘pītiyā ca samatikkamā vitakkavicārānañca vūpasamā’’ti ayamattho daṭṭhabbo.
그러므로 ‘희열을 극복하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라고 이 뜻을 알아야 한다.
Kāmañcete vitakkavicārā dutiyajjhāneyeva vūpasantā,
물론 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제2선에서 이미 가라앉았다.
imassa pana jhānassa maggaparidīpanatthaṃ vaṇṇabhaṇanatthañcetaṃ vuttaṃ.
그러나 이 禪의 도를 철저히 밝히고, 또 그것을 찬탄하기 위해서 [여기서도] 이것을 설한 것이 된다.
Vitakkavicārānañca vūpasamāti hi vutte idaṃ paññāyati, nūna vitakkavicāravūpasamo maggo imassa jhānassāti.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음이야말로 이 禪의 도가 아니겠는가?’라고 천명하기 때문이다.
Yathā ca tatiye ariyamagge appahīnānampi sakkāyadiṭṭhādīnaṃ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hānā’’ti (dī. ni. 1.373; ma. ni. 2.133; saṃ. ni. 5.184; a. ni. 3.88) evaṃ pahānaṃ vuccamānaṃ vaṇṇabhaṇanaṃ hoti, tadadhigamāya ussukkānaṃ ussāhajanakaṃ,
마치 세 번째 성스러운 도(不還道)를 얻을 때에 비로소 유신견 등을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족쇄(五下分結)를 버렸다.”라고 설하여 그 버림을 찬탄하는 말씀을 하시고, 그 [불환도]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에게 격려를 주시는 것과 같다.
evameva idha avūpasantānampi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o vuccamāno vaṇṇabhaṇanaṃ hoti.
이와 같이 비록 여기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라앉음을 언급할 때 그것을 찬탄하는 것이 된다.
Tenāyamattho vutto ‘‘pītiyā ca samatikkamā vitakkavicārānañca vūpasamā’’ti.
그러므로 ‘희열을 극복하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라고 [설했다.]
84. Upekkhako ca viharatīti ettha upapattito ikkhatīti upekkhā.
평온하게 머문다: 여기서 일어나는 대로 보기 때문에 평온이라 한다.
Samaṃ passati,
공평하게 본다,
apakkhapatitā hutvā passatīti attho.
편견을 가지지 않고 본다는 뜻이다.
Tāya visadāya vipulāya thāmagatāya samannāgatattā tatiyajjhānasamaṅgī upekkhakoti vuccati.
맑고 넉넉하고 굳건한 평온을 갖추었기 때문에 제3선에 있는 이를 평온하다고 한다.
Upekkhā pana dasavidhā hoti
평온은 열 가지가 있다.
chaḷaṅgupekkhā,
1여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
brahmavihārupekkhā,
2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의 평온,
bojjhaṅgupekkhā,
3깨달음의 구성요소의 평온
vīriyupekkhā,
4정진의 평온,
saṅkhārupekkhā,
5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
vedanupekkhā,
6느낌의 평온,
vipassanupekkhā, tatramajjhattupekkhā, jhānupekkhā, pārisuddhupekkhāti.
7위빳사나에 대한 평온, 8중립의 평온, 9禪의 평온, 10청정함의 평온이다.
Tattha yā ‘‘idha, bhikkhave, bhikkhu cakkhunā rūpaṃ disvā neva sumano hoti, na dummano, upekkhako ca viharati sato sampajāno’’ti (a. ni. 6.1) evamāgatā khīṇāsavassa chasu dvāresu iṭṭhāniṭṭhachaḷārammaṇāpāthe parisuddhapakatibhāvāvijahanākārabhūtā upekkhā, ayaṃ chaḷaṅgupekkhā nāma.
여기서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눈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평온하게 머문다.”라고 전승되어오는, 번뇌 다한 이에게 여섯 가지 문으로 원하고 싫어하는 여섯 가지 대상이 나타날 때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버리지 않은 형태의 평온을 여섯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이라 한다.
Yā pana ‘‘upekkh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atī’’ti (dī. ni. 1.556; ma. ni. 1.77) evamāgatā sattesu majjhattākārabhūtā upekkhā, ayaṃ brahmavihārupekkhā nāma.
“평온과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머문다."라고 전승되어오는,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형태의 평온을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의 평온이라 한다.
Yā ‘‘upekkhāsambojjhaṅgaṃ bhāveti vivekanissita’’nti (ma. ni. 1.27) evamāgatā sahajātadhammānaṃ majjhattākārabhūtā upekkhā, ayaṃ bojjhaṅgupekkhā nāma.
“떨쳐버림에 의지하여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라고 전승되어 오는, 함께 생긴 법들에 대해 중립적인 형태의 평온을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평온이라 한다.
Yā pana ‘‘kālenakālaṃ upekkhānimittaṃ manasikarotī’’ti (a. ni. 3.103) evamāgatā anaccāraddhanātisithilavīriyasaṅkhātā upekkhā, ayaṃ vīriyupekkhā nāma.
“때로는 평온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한다."라고 전승되어 오는, 과도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정진이라 불리는 평온을 정진의 평온이라 한다.
Yā ‘‘kati saṅkhārupekkhā samathavasena uppajjanti, kati saṅkhārupekkhā vipassanāvasena uppajjanti.
“얼마나 많은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이 삼매를 통해 일어나는가? 얼마나 많은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위빳사나를 통해 일어나는가?
Aṭṭha saṅkhārupekkhā samathavasena uppajjanti.
여덟 가지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삼매를 통해 일어난다.
Dasa saṅkhārupekkhā vipassanāvasena uppajjantī’’ti (paṭi. ma. 1.57) evamāgatā nīvaraṇādipaṭisaṅkhāsantiṭṭhanā gahaṇe majjhattabhūtā upekkhā, ayaṃ saṅkhārupekkhā nāma.
열 가지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이 위빳사나를 통해 일어난다.”라고 전승되어 오는, 장애 등에 대한 숙고함과 고요함을 취함에 중립적인 상태의 평온을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이라 한다.
Yā pana ‘‘yasmiṃ samaye kāmāvacaraṃ kusalaṃ cittaṃ uppannaṃ hoti upekkhāsahagata’’nti (dha. sa. 150) evamāgatā adukkhamasukhasaññitā upekkhā, ayaṃ vedanupekkhā nāma.
“평온이 함께한 욕계의 유익한 마음(善心)이 일어날 때”라고 전승되어오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이라 인식되는 평온을 느낌의 평온이라 한다.
Yā ‘‘yadatthi yaṃ bhūtaṃ, taṃ pajahati, upekkhaṃ paṭilabhatī’’ti (ma. ni. 3.71; a. ni. 7.55) evamāgatā vicinane majjhattabhūtā upekkhā, ayaṃ vipassanupekkhā nāma.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버리고 평온을 얻는다."라고 전승되어 오는, 식별함에 중립적인 상태의 평온을 위빳사나에 대한 평온이라 한다.
Yā pana chandādīsu yevāpanakesu āgatā sahajātānaṃ samavāhitabhūtā upekkhā, ayaṃ tatramajjhattupekkhā nāma.
함께 생긴 [법들을] 공평하게 나르는 상태의 평온을 중립의 평온이라 한다. 이것은 열의 등의 에와빠나까에(XIV.§133) 언급되었다.
Yā ‘‘upekkhako ca viharatī’’ti (dī. ni. 1.230; dha. sa. 163) evamāgatā aggasukhepi tasmiṃ apakkhapātajananī upekkhā, ayaṃ jhānupekkhā nāma.
“평온하게 머문다."라고 설한, 최상의 행복에 대해서도 편견을 내지 않는 평온을 禪의 평온이라 한다.
Yā pana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nti (dī. ni. 1.232; dha. sa. 165) evamāgatā sabbapaccanīkaparisuddhā paccanīkavūpasamanepi abyāpārabhūtā upekkhā, ayaṃ pārisuddhupekkhā nāma.
“평온으로 말미암아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이라고 전승되어오는, 모든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청정하고 반대를 가라앉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평온을 청정함의 평온이라 한다.
Tatra chaḷaṅgupekkhā ca brahmavihārupekkhā ca bojjhaṅgupekkhā ca tatramajjhattupekkhā ca jhānupekkhā ca pārisuddhupekkhā ca atthato ekā,
여기서 여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과 거룩한 마음가짐(梵住)의 평온과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평온과 중립의 평온과 禪의 평온과 청정함의 평온은 뜻으로는 동일하다.
tatramajjhattupekkhāva hoti.
바로 중립의 평온이다.
Tena tena avatthābhedena panassā ayaṃ bhedo.
문맥의 차이에 따라 이 [중립의 평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kassāpi sato sattassa kumārayuvatherasenāpatirājādivasena bhedo viya.
마치 동일한 중생에게 어린이-젊은이-어른-사령관-국왕 등의 차이가 있듯이.
Tasmā tāsu yattha chaḷaṅgupekkhā, na tattha bojjhaṅgupekkhādayo.
그러므로 이들 가운데서 여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이 있는 곳에는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평온이 발견되지 않고,
Yattha vā pana bojjhaṅgupekkhā, na tattha chaḷaṅgupekkhādayo hontīti veditabbā.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이 있는 곳에는 여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Yathā cetāsamatthato ekībhāvo, evaṃ saṅkhārupekkhā vipassanupekkhānampi.
이들이 뜻으로 동일한 것처럼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과 위빳사나에 대한 평온도 [같은 뜻을 가진다.]
Paññā eva hi sā kiccavasena dvidhā bhinnā.
왜냐하면 이들은 통찰지이며, 기능에 따라서 두 가지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Yathā hi purisassa sāyaṃ gehaṃ paviṭṭhaṃ sappaṃ ajapadadaṇḍaṃ gahetvā pariyesamānassa taṃ thusakoṭṭhake nipannaṃ disvā ‘‘sappo nu kho, no’’ti avalokentassa sovattikattayaṃ disvā nibbematikassa ‘‘sappo, na sappo’’ti vicinane majjhattatā hoti,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쇠스랑을 쥐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온 뱀을 찾다가 헛간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실제로 뱀인지 아닌지 살펴보다가 세 가지 특징을 본 뒤 에는 의심이 사라져서 뱀인지 아닌지 조사하는 것에 대해 중립적이 된다.
evameva yā āraddhavipassakassa vipassanāñāṇena lakkhaṇattaye diṭṭhe saṅkhārānaṃ aniccabhāvādivicinane majjhattatā uppajjati,
그와 같이 위빳사나를 시작한 이가 위빳사나의 지혜로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三特相, 三法印)을 볼 때에 상카라들을 무상 등으로 조사하는 것에 중립적이 된다.
ayaṃ vipassanupekkhā nāma.
이것이 위빳사나에 대한 평온이다.
Yathā pana tassa purisassa ajapadadaṇḍena gāḷhaṃ sappaṃ gahetvā ‘‘kiṃ tāhaṃ imaṃ sappaṃ aviheṭhento attānañca iminā aḍaṃsāpento muñceyya’’nti muñcanākārameva pariyesato gahaṇe majjhattatā hoti.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쇠스랑으로 단단히 뱀을 잡고서는 ‘어떻게 이 뱀을 다치게 하지도 않고 내가 이 뱀에게 물리지도 않게 버릴 수 있을까’라고 버리는 방법을 찾을 때 그 뱀을 잡는 것에 대해 중립적이 된다.
Evameva yā lakkhaṇattayassa diṭṭhattā āditte viya tayo bhave passato saṅkhāraggahaṇe majjhattatā,
그와 같이 그가 세 가지 특상을 보았기 때문에 세 가지 존재(三有)가 마치 불타는 것과 같음을 볼 때 상카라들을 잡음에 중립적이 된다.
ayaṃ saṅkhārupekkhā nāma.
이것이 상카라(行)들에 대한 평온이다.
Iti vipassanupekkhāya siddhāya saṅkhārupekkhāpi siddhāva hoti.
이와 같이 위빳사나에 대한 평온이 확립될 때 상카라들에 대한 평온도 확립된다.
Iminā panesā vicinanaggahaṇesu majjhattasaṅkhātena kiccena dvidhā bhinnāti.
이것은 조사함과 잡음에 중립적이라 불리는 기능에 따라서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Vīriyupekkhā pana vedanupekkhā ca aññamaññañca avasesāhi ca atthato bhinnā evāti.
정진의 평온과 느낌의 평온은 뜻이 서로 다르고 또 나머지와도 다르다.
Iti imāsu upekkhāsu jhānupekkhā idhādhippetā.
이런 평온들 가운데에서 禪의 평온이 여기서 요구하는 것이다.
Sā majjhattalakkhaṇā, anābhogarasā, abyāpārapaccupaṭṭhānā, pītivirāgapadaṭṭhānāti.
이것의 특징은 중립이다. 관여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희열의 사라짐이 가까운 원인이다.
Etthāha, nanu cāyamatthato tatramajjhattupekkhāva hoti,
여기서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뜻으로 볼 때 중립의 평온이 아닌가?
sā ca paṭhamadutiyajjhānesupi atthi.
그것은 초선과 제2선에도 있다.
Tasmā tatrāpi upekkhako ca viharatīti evamayaṃ vattabbā siyā, sā kasmā na vuttāti.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평온하게 머문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Aparibyattakiccato.
[대답한다.] 그곳에서는 역할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Aparibyattañhi tassā tattha kiccaṃ vitakkādīhi abhibhūtattā.
그곳에서는 일으킨 생각 등에 의해 가려져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다.
Idha panāyaṃ vitakkavicārapītīhi anabhibhūtattā ukkhittasirā viya hutvā paribyattakiccā jātā, tasmā vuttāti.
그러나 여기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희열에 의해 가려져있지 않기 때문에 마치 머리를 치켜든 것처럼 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생겼다. 그러므로 언급하고 있다.
Niṭṭhitā upekkhako ca viharatīti etassa
‘평온하게 머문다’라는 구절의 뜻을 모든 면에서 설명하여 마쳤다.
Sabbaso atthavaṇṇanā.
Idāni sato ca sampajānoti ettha saratīti sato. Sampajānātīti sampajāno.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여기서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기는 이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이다.
Puggalena sati ca sampajaññañca vuttaṃ.
여기서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사람에 속하는 것으로 설해졌다.
Tattha saraṇalakkhaṇā sati,
마음챙김은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asammussanarasā,
잃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ārakkhapaccupaṭṭhānā.
보호함으로 나타난다.
Asammohalakkhaṇaṃ sampajaññaṃ,
알아차림은 미혹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tīraṇarasaṃ, pavicayapaccupaṭṭhānaṃ.
조사하는 역할을 한다. 탐구함으로 나타난다.
Tattha kiñcāpi idaṃ satisampajaññaṃ purimajjhānesupi atthi.
비록 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앞의 禪들에도 있지만-
Muṭṭhasatissa hi asampajānassa upacāramattampi na sampajjati, pageva appanā.
잊어버리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근접삼매에도 들지 못하거늘 하물며 본삼매에 듦이랴!
Oḷārikattā pana tesaṃ jhānānaṃ bhūmiyaṃ viya purisassa cittassa gati sukhā hoti,
그 禪들은 비교적 거칠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이 쉽다. 마치 땅에 서있는 이의 행보가 [쉽듯이.]
abyattaṃ tattha satisampajaññakiccaṃ.
그곳에서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다.
Oḷārikaṅgappahānena pana sukhumattā imassa jhānassa purisassa khuradhārāyaṃ viya satisampajaññakiccapariggahitā eva cittassa gati icchitabbāti idheva vuttaṃ.
그러나 이 [제3]禪은 거친 구성요소를 버려서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마치 위기일발에 처한 사람처럼, 반드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유지된 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오직 여기서만 설했다.
Kiñca bhiyyo, yathā dhenupago vaccho dhenuto apanīto arakkhiyamāno punadeva dhenuṃ upagacchati, evamidaṃ tatiyajjhānasukhaṃ pītito apanītaṃ, taṃ satisampajaññārakkhena arakkhiyamānaṃ punadeva pītiṃ upagaccheyya, pītisampayuttameva siyā.
더군다나 어미 소를 따라가는 송아지를, 어미 소로부터 떼낸 뒤 만약 지키지 않으면 다시 어미 소에게 다가가듯이, 마찬가지로 이 제3선의 행복도 희열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것을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수호하지 않으면 다시 희열에 다가가서 희열과 함께 할지도 모른다.
Sukhe vāpi sattā sārajjanti,
혹은 중생은 행복을 동경한다.
idañca atimadhuraṃ sukhaṃ, tato paraṃ sukhābhāvā.
이 [제3선의] 행복은 지극히 달콤하기 때문에 이 이상의 행복은 없다.
Satisampajaññānubhāvena panettha sukhe asārajjanā hoti,
그러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영향으로 이 행복을 동경하지 않게 된다.
no aññathāti imampi atthavisesaṃ dassetuṃ idamidheva vuttanti veditabbaṃ.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 뜻을 설하기 위해서도 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오직 여기서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Idāni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īti ettha kiñcāpi tatiyajjhānasamaṅgino sukhapaṭisaṃvedanābhogo natthi.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제3선에 든 이는 행복을 경험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Evaṃ santepi yasmā tassa nāmakāyena sampayuttaṃ sukhaṃ.
그렇지만 정신적인 몸과 연결된 행복을 느낀다.
Yaṃ vā taṃ nāmakāyasampayuttaṃ sukhaṃ, taṃsamuṭṭhānenassa yasmā atipaṇītena rūpena rūpakāyo phuṭo, yassa phuṭattā jhānā vuṭṭhitopi sukhaṃ paṭisaṃvedeyya.
혹은 정신적인 몸과 연결된 행복에서 최상의 물질이 생긴다. 그것에 의해 그의 육체적인 몸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禪에서 출정 했을 때에도 행복을 느낀다.
Tasmā etamatthaṃ dassent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īti āha.
그러므로 이 뜻을 보이면서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라고 말씀하셨다.
86. Idān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ettha yaṃjhānahetu yaṃjhānakāraṇā taṃ tatiyajjhānasamaṅgipuggalaṃ buddhādayo ariyā ācikkhanti desenti paññapenti paṭṭhapenti vivaranti vibhajanti uttānīkaronti pakāsenti, pasaṃsantīti adhippāyo.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여기서 이 禪 때문에, 이 禪을 이유로 그 제3선을 가진 사람을 부처님 등 성자들이 “묘사하고, 가르치고, 공고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설하고, 설명하고, 밝힌다.”(Vbh.259) 그것을 찬탄한다는 뜻이다.
Ki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어떻게?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 라고.
Taṃ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īti evamettha yojanā veditabbā.
그런 제3선에 들어 머문다와 연결하여 문장구성을 알아야 한다.
Kasmā pana taṃ te evaṃ pasaṃsantīti?
그러면 왜 그들은 그를 이처럼 찬탄하는가?
Pasaṃsārahato.
찬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Ayañhi yasmā atimadhurasukhe sukhapāramippattepi tatiyajjhāne upekkhako,
그는 지극히 달콤한 행복과 행복의 절정에 이른 제3선에 대해 평온하다.
na tattha sukhābhisaṅgena ākaḍḍhiyati.
그래서 행복을 좋아하여 거기에 끌리지 않는다.
Yathā ca pīti na uppajjati, evaṃ upaṭṭhitasatitāya satimā.
그는 희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확립된 마음챙김으로 마음챙김을 갖춘 이다.
Yasmā ca ariyakantaṃ ariyajanasevitameva ca asaṃkiliṭṭhaṃ sukhaṃ nāmakāyena paṭisaṃvedeti,
성자들이 좋아하고 성자들이 받들어 행하는 티없는 행복을 정신적인 몸으로 경험한다.
tasmā pasaṃsāraho hoti.
그러므로 그는 찬탄 받을 만하다.
Iti pasaṃsārahato naṃ ariyā te evaṃ pasaṃsāhetubhūte guṇe pakāsento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evaṃ pasaṃsantīti veditabbaṃ.
이와 같이 찬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성자들이 찬탄 받을 만한 덕을 드러내면서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그를 찬탄했다고 알아야 한다.
Tatiyanti gaṇanānupubbatā tatiyaṃ, idaṃ tatiyaṃ samāpajjatītipi tatiyaṃ.
제3: 숫자의 순서에 따라서 제3(세 번째)이라 했고, 이것은 ‘세 번째에 증득한다’라고 해서 제3이라 했다.
Yaṃ pana vuttaṃ ‘‘ekaṅgavippahīnaṃ duvaṅgasamannāgata’’nti, ettha pītiyā pahānavasena ekaṅgavippahīnatā veditabbā.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리고,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지며: 라는 여기서 희열을 버림이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림이라고 알아야 한다.
Sā panesā dutiyajjhānassa vitakkavicārā viya appanākkhaṇeyeva pahīyati.
제2선의 [본삼매의 순간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버려지듯이 희열도 [제3선의] 본삼매의 순간에 버려진다.
Tena nassa sā pahānaṅganti vuccati.
그러므로 이것을 제3선의 버리는 구성요소라 한다.
Sukhaṃ cittekaggatāti imesaṃ pana dvinnaṃ uppattivasena duvaṅgasamannāgatatā veditabbā.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라는 이 둘이 일어남이,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Tasmā yaṃ vibhaṅge ‘‘jhānanti upekkhā sati sampajaññaṃ sukhaṃ cittassekaggatā’’ti (vibha. 591) vuttaṃ, taṃ saparikkhāraṃ jhānaṃ dassetuṃ pariyāyena vuttaṃ.
그러므로 위방가에서 “[제3]禪이란 평온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과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다.” 라고 설하신 것은 그것의 부수적인 것들과 함께 禪을 보여주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Ṭhapetvā pana upekkhāsatisampajaññāni nippariyāyena upanijjhānalakkhaṇappattānaṃ aṅgānaṃ vasena duvaṅgikamevetaṃ hoti.
그러나 평온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제외하고 직접적으로 설하면 정려라는 특징을 얻은 구성요소들에 의해서 이 禪은 오직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Yathāha –
그래서 말씀하셨다.
‘‘katamaṃ tasmiṃ samaye duvaṅgikaṃ jhānaṃ hoti,
“그때 무엇이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진 禪인가?
sukhaṃ cittassekaggatā’’ti (dha. sa. 163; vibha. 624).
그것은 행복과 마음의 하나됨이다.”
Sesaṃ paṭhamajjhāne vuttanayameva.
나머지는 초선에서 설한 방법과 같다.
Catutthajjhānakathā
제4선의 주석
87. Evamadhigate pana tasmiṃpi vuttanayeneva pañcahākārehi ciṇṇavasinā hutvā paguṇatatiyajjhānato vuṭṭhāya
이와 같이 이것을 얻었을 때에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은 뒤 익숙한 제3선으로부터 출정한다.
‘‘ayaṃ samāpatti āsannapītipaccatthikā,
이 증득(等至)은 희열이라는 적과 가깝기 때문에 거기서 결점을 본다.
‘yadeva tattha sukhamiti cetaso ābhogo, etenetaṃ oḷārikaṃ akkhāyatī’ti (dī. ni. 1.96) evaṃ vuttassa sukh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행복이라는 그곳에 있는 마음의 현상은 거칠게 나타난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ca tattha dosaṃ disvā catutthaṃ jhānaṃ santato manasikatvā tatiyajjhāne nikantiṃ pariyādāya catutthādhigamāya yogo kātabbo.
거기서 결점을 보고는 제4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여 제3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4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Athassa yadā tatiyajjhānato vuṭṭhāya satassa sampajānassa jhānaṅgāni paccavekkhato cetasikasomanassasaṅkhātaṃ sukhaṃ oḷārikato upaṭṭhāti, upekkhāvedanā ceva cittekaggatā ca santato upaṭṭhāti, tadāssa oḷārikaṅgappahānāya santaaṅgapaṭilābhāya ca tadeva nimittaṃ ‘‘pathavī pathavī’’ti punappunaṃ manasikaroto
그가 제3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행복이 거칠게 나타나고 평온한 느낌과 마음의 하나됨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그 거친 구성요소들을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땅)’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idāni catutthaṃ jhānaṃ uppajjissatī’’ti bhavaṅgaṃ upacchinditvā tadeva pathavīkasiṇaṃ ārammaṇaṃ katvā manodvārāvajjanaṃ uppajjati.
그러면 ‘막 제4선이 일어나려는’ [그 순간에] 잠재의식을 끊고 그 땅의 까시나를 대상으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Tato tasmiṃyevārammaṇe cattāri pañca vā javanāni uppajjanti, yesaṃ avasāne ekaṃ rūpāvacaraṃ catutthajjhānikaṃ, sesāni vuttappakārāneva kāmāvacarāni.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속행이 일어난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색계의 속행이고 제4선에 속한다.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욕계의 것이다.
Ayaṃ pana viseso,
그러나 이것이 차이점이다.
yasmā sukhavedan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āsevanapaccayena paccayo na hoti,
행복한 느낌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게 반복하는 조건으로 조건이 되지 않는다.
catutthajjhāne c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uppajjitabbaṃ,
제4선에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반드시 일어난다.
tasmā tāni upekkhāvedanāsampayuttāni honti.
그러므로 그 [속행의 마음]들이 평온한 느낌과 결합한다.
Upekkhāsampayuttattāyeva cettha pītipi parihāyatīti.
오직 평온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희열이 사라진다.
Ettāvatā cesa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dī. ni. 1.232; dha. sa. 165).
이때에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초월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Evamanena ekaṅgavippahīnaṃ duvaṅgasamannāgataṃ tividhakalyāṇaṃ dasalakkhaṇasampannaṃ catutthaṃ jhānaṃ adhigataṃ hoti pathavīkasiṇaṃ.
이와 같이 그는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렸고,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땅의 까시나를 가진 제4선을 얻는다.
88. Tattha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ti kāyikasukhassa ca kāyikadukkhassa ca pahānā.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육체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버리고,
Pubbevāti tañca kho pubbeva, na catutthajjhānakkhaṇe.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ti cetasikasukhassa ca cetasikadukkhassa cāti imesampi dvinnaṃ pubbeva atthaṅgamā, pahānā icceva vuttaṃ hoti.
그 이전에 이미: 제4선의 순간이 아닌, 그 이전에 반드시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정신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괴로움이라는 이 둘을 그 이전에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버렸으므로.
Kadā pana nesaṃ pahānaṃ hotīti.
언제 그들을 버리는가?
Catunnaṃ jhānānaṃ upacārakkhaṇe.
네 가지 禪들에 근접하는 순간에 버린다.
Somanassañhi catutthajjhānassa upacārakkhaṇeyeva pahīyati.
기쁨은 제4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Dukkhadomanassasukhāni paṭhamadutiyatatiyajjhānānaṃ upacārakkhaṇesu.
괴로움과 슬픔과 행복은 각각 초선과 제2선과 제3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Evametesaṃ pahānakkamena avuttānampi indriyavibhaṅge pana indriyānaṃ uddesakkameneva idhāpi vuttānaṃ sukhadukkhasomanassadomanassānaṃ pahānaṃ veditabbaṃ.
이와 같이 이들을 버리는 순서대로 설하지는 않았지만 인드리야 위방가(根分別)(Vbh.122) 에서 기능(根)들의 개요를 설한 순서에 따라 여기서 설한 행복과 괴로움과 기쁨과 슬픔의 버림을 알아야 한다.
Yadi panetāni tassa tassa jhānassa upacārakkhaṇeyeva pahīyanti, atha kasmā ‘‘ka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이 오직 각각의 禪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면, 왜 [아래의 인용문에서 말하기를] 오직 그 禪에서 소멸한다고 했는가? 즉,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p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 초선에 들어 머문다.
E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Kattha cuppannaṃ domanassindriyaṃ sukhindriyaṃ s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pe…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a cuppannaṃ s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ī’’ti (saṃ. ni. 5.510) evaṃ jhānesveva nirodho vuttoti?
일어난 정신적 고통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 제2선에서] ···일어난 즐거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 제3선에서] ···일어난 기쁨의 즐거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기쁨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라고.
Atisayanirodhattā.
[대답한다.] 완전한 소멸이기 때문이다.
Atisayanirodho hi nesaṃ paṭhamajjhānādīsu, na nirodhoyeva.
그들은 초선 등에서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Nirodhoyeva pana upacārakkhaṇe, nātisayanirodho.
근접의 순간에도 소멸하지만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Tathā hi nānāvajjane paṭhamajjhānupacāre niruddhassāpi dukkhindriyassa ḍaṃsamakasādisamphassena vā visamāsanupatāpena vā siyā uppatti,
여러 가지 전향을 가진 초선의 근접에서 비록 괴로움의 기능이 소멸했다하더라도 파리와 모기 등에게 물리거나 혹은 불편한 자리로 인한 피로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na tveva antoappanāyaṃ.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그렇지 않다.
Upacāre vā niruddhampetaṃ na suṭṭhu niruddhaṃ hoti,
혹은 근접삼매에서 그들이 소멸했다하더라도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paṭipakkhena avihatattā.
반대의 [기능인 행복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ntoappanāyaṃ pana pītipharaṇena sabbo kāyo sukhokkanto hoti,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희열의 충만으로 온 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있다.
sukhokkantakāyassa ca suṭṭhu niruddhaṃ hoti dukkhindriyaṃ,
온 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에게 괴로움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한다.
paṭipakkhena vihatattā.
반대의 [기능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Nānāvajjaneyeva ca dutiyajjhānupacāre pahīnassa domanassindriyassa yasmā etaṃ vitakkavicārapaccayepi kāyakilamathe cittupaghāte ca sati uppajjati.
여러 가지 전향을 가진 제2선의 근접에서 정신적 고통의 기능을 버렸다하더라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조건으로 몸이 피로하거나 마음이 상할 때 정신적인 고통의 기능이 일어난다.
Vitakkavicārābhāve ca neva uppajjati.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을 때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Yattha pana uppajjati, tattha vitakkavicārabhāve, appahīnā eva ca dutiyajjhānupacāre vitakkavicārāti tatthassa siyā uppatti,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은 일어난다. 제2선의 근접에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na tveva dutiyajjhāne,
그러나 제2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pahīnapaccayattā.
조건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Tathā tatiyajjhānupacāre pahīnassāpi sukhindriyassa pītisamuṭṭhānapaṇītarūpaphuṭakāyassa siyā uppatti,
마찬가지로 제3선의 근접에서 즐거움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희열과 [함께한 마음에서] 생긴 수승한 물질로 충만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즐거움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na tveva tatiyajjhāne.
그러나 제3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Tatiyajjhāne hi sukhassa paccayabhūtā pīti sabbaso niruddhāti.
제3선에서는 행복의 조건인 희열이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Tathā catutthajjhānupacāre pahīnassāpi somanassindriyassa āsannattā appanāppattāya upekkhāya abhāvena sammā anatikkantattā ca siyā uppatti,
마찬가지로 제4선의 근접에서 기쁨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가깝기 때문에, 또 본삼매를 얻은 평온이 없어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기쁨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 지도 모른다.
na tveva catutthajjhāne.
그러나 제4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Tasmā eva ca etth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īti tattha tattha aparisesaggahaṇaṃ katanti.
그러므로 일어난 괴로움의 기능이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각각의 경우에 남김없이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Etthāha ‘‘athevaṃ tassa tassa jhānassupacāre pahīnāpi etā vedanā idha kasmā samāhaṭā’’ti?
이와 같이 물을지도 모른다. ‘만약 각 禪의 근접에서 이 느낌들이 버려진다면 무슨 이유로 여기 [제4선에] 모아놓았는가?’라고.
Sukhaggahaṇatthaṃ.
[대답한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Yā hi ayaṃ adukkhamasukhanti ettha adukkhamasukhā vedanā vutt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라는 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sā sukhumā duviññeyyā na sakkā sukhena gahetuṃ,
그것은 미세하여 알기 어렵고, 쉽게 이해할 수 없다.
tasmā yathā nāma duṭṭhassa yathā vā tathā vā upasaṅkamitvā gahetuṃ asakkuṇeyyassa goṇassa sukhaggahaṇatthaṃ gopo ekasmiṃ vaje sabbā gāvo samāharati, athekekaṃ nīharanto paṭipāṭiyā āgataṃ ‘‘ayaṃ so gaṇhatha na’’nti tampi gāhayati,
예를 들면, 사나운 황소를 바로잡을 수 없을 때 그 소를 쉽게 잡기 위해 목동은 모든 소를 우리 속에 몰아넣은 뒤 한 마리씩 내 보내면서 그 황소를 잡을 차례가 되면 ‘이놈이다, 이 놈을 잡아라.’고 소리치면서 그것을 잡는 것과 같다.
evameva bhagavā sukhaggahaṇatthaṃ sabbā etā samāhari.
그와 같이 세존께서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다섯 가지] 느낌들을 모두 [여기에] 모아놓으셨다.
Evañhi samāhaṭā etā dassetvā yaṃ neva sukhaṃ na dukkhaṃ na somanassaṃ na domanassaṃ, ayaṃ adukkhamasukhā vedanāti sakkā hoti esā gāhayituṃ.
이와 같이 모아놓은 느낌들을 보이신 뒤 ‘행복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이것이 바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파악할 수 있게 하셨다.
Apica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paccayadassanatthañcāpi etā vuttāti veditabbā.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心解脫)의 조건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 느낌들을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
Dukkhappahānādayo hi tassā paccayā.
괴로움을 버림 등이 이것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Yathāha –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cattāro kho, 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Idh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pe…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me khvāvuso, cattār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ma. ni. 1.458).
도반이여, 여기 비구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 제4선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들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한 네 가지 조건입니다.(M.i.296)
Yathā vā aññattha pahīnāpi sakkāyadiṭṭhiādayo tatiyamaggassa vaṇṇabhaṇanatthaṃ tattha pahīnāti vuttā,
혹은 유신견 등은 그 이전의 도에서 이미 버렸지만 세 번째 도(불환도)를 찬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버렸다고 언급했다.
evaṃ vaṇṇabhaṇanatthampetassa jhānassetā idha vuttātipi veditabbā.
이와 같이 이 제4선을 찬탄하기 위해 그들을 여기서 언급했다고 알아야 한다.
Paccayaghātena vā ettha rāgadosānamatidūrabhāvaṃ dassetumpetā vuttāti veditabbā.
혹은 조건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여기 [제4선에서] 탐욕과 성냄을 아주 멀리 여의었음을 보이기 위해 이들을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Etāsu hi sukhaṃ somanassassa paccayo, somanassaṃ rāgassa. Dukkhaṃ domanassassa paccayo, domanassaṃ dosassa.
이 가운데서 행복은 기쁨에게 조건이 되고, 기쁨은 탐욕에게, 괴로움은 슬픔에게, 슬픔은 성냄에게 조건이 된다.
Sukhādighātena cassa sappaccayā rāgadosā hatāti atidūre hontīti.
행복 등을 없애버려서 제4선에서 탐욕과 성냄이 그 조건과 함께 멸했기 때문에 멀리 여의었다고 한 것이다.
Adukkhamasukhanti dukkhābhāvena adukkhaṃ. Sukhābhāvena asukhaṃ.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음이고,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즐겁지 않음이다.
Etenettha dukkhasukhapaṭipakkhabhūtaṃ tatiyavedanaṃ dīpeti,
이 단어로 괴로움과 즐거움(행복)의 반대인 세 번째 느낌을 나타낸다.
na dukkhasukhābhāvamattaṃ.
[이 술어는] 단지 괴로움과 즐거움(행복)이 없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Tatiyavedanā nāma adukkhamasukhā, upekkhātipi vuccati.
세 번째 느낌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평온이라고도 한다.
Sā iṭṭhāniṭṭhaviparītānubhavanalakkhaṇā,
이것은 원하거나 원하지 않음의 반대인 [중립인데, 대상을] 경험하는 특징을 가진다.
majjhattarasā, avibhūtapaccupaṭṭhānā, sukhadukkhanirodhapadaṭṭhānāti veditabbā.
중립적인 역할을 한다. 분명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즐거움(행복)의 소멸이 가까운 원인이라고 알아야 한다.
Upekkhāsatipārisuddhinti upekkhāya janitasatiyā pārisuddhiṃ.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평온에서 생긴 마음챙김의 청정함.
Imasmiñhi jhāne suparisuddhā sati,
이 禪에서 마음챙김은 지극히 청정하다.
yā ca tassā satiyā pārisuddhi, sā upekkhāya katā, na aññena.
이 마음챙김의 청정함은 평온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Tasmā etaṃ ‘‘upekkhāsatipārisuddhi’’nti vuccati.
그러므로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이라고 했다.
Vibhaṅgepi vuttaṃ
위방가에서도 설하셨다.
‘‘ayaṃ sati imāya upekkhāya visadā hoti parisuddhā pariyodātā. Tena vuccati upekkhāsatipārisuddhī’’ti (vibha. 597).
“이 마음챙김은 평온 때문에 맑고 청정하고 깨끗해졌기 때문에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한다.(Vbh.261)”
Yāya ca upekkhāya ettha satiyā pārisuddhi hoti, sā atthato tatramajjhattatātiveditabbā.
여기서 마음챙김을 청정하게 하는 그 평온은 뜻으로는 중립의 [마음부수]라고 알아야 한다.
Na kevalañcettha tāya satiyeva parisuddhā, apica kho sabbepi sampayuttadhammā,
그것은 오직 마음챙김만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법들을 청정하게 한다.
satisīsena pana desanā vuttā.
그러나 마음챙김을 상수로 하여 가르침을 설했다.
Tattha kiñcāpi ayaṃ upekkhā heṭṭhāpi tīsu jhānesu vijjati.
물론 평온은 낮은 세 가지 禪에도 있다.
Yathā pana divā sūriyappabhābhibhavā sommabhāvena ca attano upakārakattena vā sabhāgāya rattiyā alābhā divā vijjamānāpi candalekhā aparisuddhā hoti apariyodātā, evamayampi tatramajjhattupekkhācandalekhā vitakkādipaccanīkadhammatejābhibhavā sabhāgāya ca upekkhāvedanārattiyā appaṭilābhā vijjamānāpi paṭhamādijjhānabhedesu aparisuddhā hoti.
그러나 마치 낮에도 초승달은 있지만 태양의 빛으로 가려져있고, 부드러운 것으로도 자신과 동류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도 자신과 동류인 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는 것처럼, 중립인 평온의 초승달도 일으킨 생각 등의 자신과 반대가 되는 법들의 빛에 가려져있고, 자신과 동류인 평온한 느낌이라는 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초선 등의 분류에서도 있지만 청정하지 않다.
Tassā ca aparisuddhāya divā aparisuddhacandalekhāya pabhā viya sahajātāpi satiādayo aparisuddhāva honti.
그것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낮에 청정하지 않은 초승달의 빛처럼 함께 생긴 마음챙김 등도 청정하지 않다.
Tasmā tesu ekampi ‘‘upekkhāsatipārisuddhi’’nti na vuttaṃ.
그러므로 그 [처음의 세 禪]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하지 않았다.
Idha pana vitakkādipaccanīkadhammatejābhibhavābhāvā sabhāgāya ca upekkhāvedanārattiyā paṭilābhā ayaṃ tatramajjhattupekkhācandalekhā ativiya parisuddhā.
그러나 여기서는 일으킨 생각 등의 자신과 반대되는 법들의 빛에 가리지 않고, 자신과 동류인 평온한 느낌이라는 밤을 얻었기 때문에 이 중립인 평온의 초승달은 지극히 청정하다.
Tassā parisuddhattā parisuddhacandalekhāya pabhā viya sahajātāpi satiādayo parisuddhā honti pariyodātā.
이것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달빛처럼 함께 생긴 마음챙김 등도 청정하고 깨끗하다.
Tasmā idameva ‘‘upekkhāsatipārisuddhi’’nti vuttanti veditabbaṃ.
그러므로 오직 이 [제4선을]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하다’고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Catutthanti gaṇanānupubbatā catutthaṃ. Idaṃ catutthaṃ samāpajjatītipi catutthaṃ.
제4: 숫자의 순서에 따라서 제4(네 번째)라 했고, 이것은 ‘네 번째에 증득한다’고 해서 제4라 했다.
Yaṃ pana vuttaṃ ‘‘ekaṅgavippahīnaṃ duvaṅgasamannāgata’’nti, tattha somanassassa pahānavasena ekaṅgavippahīnatā veditabbā.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렸고, 두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여기서 기쁨을 버림이 하나의 구성요소를 버림이라고 알아야 한다.
Tañca pana somanassaṃ ekavīthiyaṃ purimajavanesuyeva pahīyati.
이 기쁨은 한 인식과정 이전의 속행인 근접에서 버려진다.
Tenassa taṃ pahānaṅganti vuccati.
그러므로 이것은 ‘버려진 구성요소’라고 한다.
Upekkhāvedanā cittassekaggatāti imesaṃ pana dvinnaṃ uppattivasena duvaṅgasamannāgatatā veditabbā.
평온한 느낌과 마음의 하나됨이라는 이 두 가지가 일어남이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짐이라고 알아야 한다.
Sesaṃ paṭhamajjhāne vuttanayameva. Esa tāva catukkajjhāne nayo.
나머지는 초선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이 넷으로 분류한 禪(사종선)에 대한 설명이다.
Pañcakajjhānakathā
다섯으로 분류한 禪(五種禪)
Pañcakajjhānaṃ pana nibbattentena paguṇapaṭhamajjhānato vuṭṭhāya ‘‘ayaṃ samāpatti āsannanīvaraṇapaccatthikā, vitakk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ca tattha dosaṃ disvā
다섯으로 분류한 禪을 일으키는 자는 익숙한 초선으로부터 출정하여 “이 증득(等至)은 장애라는 적과 가깝고 일으킨 생각이 거칠기 때문에 구성요소가 힘이 없다”고 거기서 결점을 본다.
dutiyajjhānaṃ santato manasikaritvā paṭhamajjhāne nikantiṃ pariyādāya dutiyādhigamāya yogo kātabbo.
그는 제2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여 초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2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Athassa yadā paṭhamajjhānā vuṭṭhāya satassa sampajānassa jhānaṅgāni paccavekkhato vitakkamattaṃ oḷārikato upaṭṭhāti, vicārādayo santato.
그가 초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일으킨 생각만 거칠게 나타나고 지속적인 고찰 등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Tadāssa oḷārikaṅgappahānāya santaṅgapaṭilābhāya ca tadeva nimittaṃ ‘‘pathavī pathavī’’ti punappunaṃ manasikaroto vuttanayeneva dutiyajjhānaṃ uppajjati.
그 거친 구성요소를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러면 앞서 설한 방법대로 그에게 제2선이 일어난다.
Tassa vitakkamattameva pahānaṅgaṃ. Vicārādīni cattāri samannāgataṅgāni. Sesaṃ vuttappakārameva.
오직 일으킨 생각만이 이 禪에서 버려진 구성요소이고 지속적인 고찰 등 네 가지는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이다. 나머지는 이미 설했다.
Evamadhigate pana tasmimpi vuttanayeneva pañcahākārehi ciṇṇavasinā hutvā paguṇadutiyajjhānato vuṭṭhāya
이와 같이 이것을 얻었을 때에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어 익숙한 제2선으로부터 출정한다.
‘‘ayaṃ samāpatti āsannavitakkapaccatthikā, vicār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ca tattha dosaṃ disvā
이 증득은 일으킨 생각이라는 적과 가깝기 때문에 또 지속적인 고찰이 거칠기 때문에 구성요소가 힘이 없다고 거기서 결점을 본다.
tatiyaṃ jhānaṃ santato manasikaritvā dutiyajjhāne nikantiṃ pariyādāya tatiyādhigamāya yogo kātabbo.
그는 제3선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여 제2선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제3선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Athassa yadā dutiyajjhānato vuṭṭhāya satassa sampajānassa jhānaṅgāni paccavekkhato vicāramattaṃ oḷārikato upaṭṭhāti, pītiādīni santato. Tadāssa oḷārikaṅgappahānāya santaṅgapaṭilābhāya ca tadeva nimittaṃ ‘‘pathavī pathavī’’ti punappunaṃ manasikaroto
그가 제2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禪의 구성요소들을 반조할 때 지속적인 고찰이 거칠게 나타나고 희열 등이 고요하게 나타나면 그 거친 구성요소를 버리고 고요한 구성요소를 얻기 위하여 바로 그 표상에 대해 ‘빠타위(땅), 빠타위’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
vuttanayeneva tatiyaṃ jhānaṃ uppajjati.
그러면 앞서 설한 방법대로 그에게 제3선이 일어난다.
Tassa vicāramattameva pahānaṅgaṃ catukkanayassa dutiyajjhāne viya pītiādīni tīṇi samannāgataṅgāni.
오직 지속적인 고찰만이 이 禪에서 버려진 구성요소이고 넷으로 분류한 禪의 제2선에서처럼 희열 등 세 가지는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이다.
Sesaṃ vuttappakārameva.
나머지는 이미 설했다.
Iti yaṃ catukkanaye dutiyaṃ, taṃ dvidhā bhinditvā pañcakanaye dutiyañceva tatiyañca hoti.
이와 같이 사종선의 두 번째를 둘로 나누어 오종선의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된다.
Yāni ca tattha tatiyacatutthāni, tāni ca catutthapañcamāni honti.
[사종선의]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오종선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된다.
Paṭhamaṃ paṭhamamevāti.
첫 번째는 각각의 경우에 첫 번째가 된다.
Iti sādhujanapāmojjatthāya kate visuddhimagge
Samādhibhāvanādhikāre
Pathavīkasiṇaniddeso nāma
Catuttho paricchedo.
어진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의
삼매수행의 표제에서
땅의 까시나에 관한 해설이라 불리는
제4장이 끝났다.
|
맨위↑까시나 만들기★★
휴대용은 4개의 막대기 위에다 누더기나 가죽이나 가는 거적을 묶어서 그곳에 풀과 뿌리와 자갈을 모래가 제거된 반죽이 잘된 흙으로,
고정된 까시나 만들기는★★연꽃받침 모양으로 땅속에 막대기를 박고 덩굴로 묶어 만들어야 한다.
만약 좋은 흙이 부족하면 안에 다른 흙을 넣고 그 윗부분에 깨끗이 걸러진 새벽 색깔의 흙으로,
한 뼘과 손가락 네 마디의 직경을 가진 원반을 만들어야 한다.
연꽃 모양 흙의 원반 크기- 한 뼘과 손가락 네 마디의 직경의 원반 크기 22-25cm에 체 or 찻잔만하다고 설했다.
돌로 만든 흙손으로 문질러 북의 표면처럼 평평하게 만든 후 만든 곳을 청소하고 목욕하고 돌아와서 까시나의 원반으로부터 2.5완척 떨어진 곳에 마련된 좌대에 앉아야 한다. 좌대는 한 뼘과 손가락 4마디의 높이이고 잘 펴진 것이어야 한다.(*1척은 30cm, 완척은 약48-50cm 2.5완척은 약1.5m거리, 좌대높이 25cm)
왜냐 그보다 더 먼 곳에 앉으면 까시나가 드러나지 않고,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앉으면 까시나의 결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앉으면 목을 숙여서 보아야 하고, 더 낮은 곳에 앉으면 무릎에 통증이 온다
위↑칠각지에서 여리 작의,
“비구들이여,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와 벗어나는 요소와 분발하는 요소가 있어 거기에 현명한 주의력(如理作意)을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각지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정진각지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라고.
비구들이여,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확립시키는 법들이 있어 거기에 현명한 주의력(如理作意_을 많이 [공부]지으면, 이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일어나도록 하고, 이미 일어난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를 늘리고 드세게 만들고 닦고 성취하는 자양분이다.”
여기서★★개별적 특징(自相)과 보편적 특징(共相)을 통찰하여 생긴 作意★를 유익한 법 등에 대한 如理作意라 한다. *
"시작하는 요소(정진)등을 일으켜서 일어난 작의"가 시작하는 요소 등에 대한 여리작의이다. ***작의-일으키는 정신작용(의-법, 오문의 안이비설신 과 의문의 대경인 색성향미촉 오욕락 과 법에, 법은 '심의식'의 고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