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7. 고려후기의 신앙결사
정혜.백련결사 태동 … 귀족 중심 불교 ‘탈피’
■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과제
천태종 스님인 원묘요세스님은 전남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를 이끌었다.
고려 귀족사회는 인종대 이후 제모순으로 말미암아 이자겸난과 묘청난이 일어나고 뒤이어 무신난에 의해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노정되었다. 정중부난을 시작으로 전개된 무인정권은 1196년 최씨정권이 들어서면서 막부체제로서 전형화되었다. 한편 13세기에 들어와 고려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대외적인 요인은 유목민족인 몽고가 동아시아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함으로써 그에 따른 고려와 몽고간의 약 30여 년에 걸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 고려.송.금을 중심축으로 비교적 안정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였던 체제를 무너뜨린 몽고족이 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야기된 것이었다. 고려는 13세기 전반에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몽고와 근 30여 년에 걸친 항전을 전개하였고, 원종 11년(127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원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30여년 대몽항전 사회 변화
불교안팎 모순 극복 움직임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상계를 주도하던 불교계는 불교 내부와 외적인 사회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나름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심축은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전개된 신앙결사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과 사상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중국의 경우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334~416)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백련결사를 그 시초로 본다. 이후 백련사는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사회변동과 관련한 신앙결사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말한다. 곧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로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전개된 지눌(1158~1210)의 정혜결사(수선사)와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점에서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서 지방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이들의 성격을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기존 교단 개혁 운동 실천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지눌스님은 당시 불교계 타락을 비판하며 송광산 길상사(현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결성했다.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에 힘썼는데 특히 거조사에서는 ‘정혜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1190, 명종 20)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몇 년 뒤인 1204년 최충헌 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고려왕실에 의해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 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수선사는 1196년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당시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수선사를 크게 부각시킨 이유는 수선사가 당시 사회에서 기존의 여타 종파에 비해 크게 호응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최우 정권이 그들의 세력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서서히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불교계에서 유행하던 간화선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시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 영향을 주었다. 둘째,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곧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공덕과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포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어 있던 지방사회의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사상적인 내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수선사가 독서층과 지방사회의 향리층, 일반 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한편 간화경절문을 궁극으로 하는 지눌의 사상체계는 고려불교에 간화선을 정착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수선사가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은 지눌의 사상체계가 불교사상뿐 아니라 사회사상으로서 당시 지식인 사회를 주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를 계승한 혜심에게서 두드러지며, 그의 사상체계를 집약하고 있는 <선문염송>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사상만을 견지하였다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실천공덕신앙과 밀교적인 요소도 포용하는 탄력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 백련결사의 전개
백련사는 천태종 스님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에 승선에 합격하고 그 뒤 1198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여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 출발했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1208년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서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진 만덕산 중심 활동
대중적인 불교로 ‘진전’
요세는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해 특히 실천행을 강조했는데 그 방향을 수참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 <법화삼매참의>와 지례의 <관무량수경초>에서 찾았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계기로 하여 요세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지원에 따라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다.
이와 같이 백련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 민들을 주요 단월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13세기 전후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주도세력의 출신 성분이 그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려 불교계가 전환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지눌과 요세의 경우, 각각 황해도 서흥군의 독서층과 경상도 합천의 호장층 출신인데, 이는 왕족과 문벌귀족 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양대결사의 계승과 역사성
이러한 경향은 지눌과 요세를 계승한 제자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주목되는 인물들로 수선사의 2세인 혜심(1178~1234)과, 백련사의 2세인 천인(1205~1248)과 4세인 천책(1206~?)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 독서층의 자제들이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거 불교계에 투신한 것은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적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기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대두하여 자각, 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은 내용상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간에 출가인들의 본분이기 때문에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특히 실천적인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채 상 식 / 부산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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