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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로 가라(마7:13,14)
저는 지난 주에 기독교연합회 임원수련회에 참석해서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성결교에서 유일한 문준경전도사님의 순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성결교회의 순교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6.25때 공산군이 점령하였을 때 공산군에 붙잡힌 교인들을 염려해서 목포에 있던 전도사님이 그곳에 들어가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문준경전도사님은 여성의 몸으로 신안군에 있는 14개섬을 돌면서 18년동안 전도를 하시고 목회를 하셨는데 그로 인해서 지금은 100여개의 교회가 개척되었고 그 강퍅한 섬사람들의 90%가 예수를 믿어 그야말로 신앙의 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목포에 있을 때 성결교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성봉목사님이 섬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려도 그 곳에 있는 성도들을 염려해서 그들을 살리겠다고 자원해서 찾아가서 공산당들에게 순교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십니다(목사 151명, 장로 89명).
마치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많은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시면 안된다고 가시면 순교의 제물이 된다고 그렇게 말렸어도 사도바울은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그의 고백은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한 주간동안 저도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좁은 길인가 곰곰히 생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내가 좁은 길을 걷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그길을 걷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분명한 것은 넓은 문, 좁은 문, 우리가 선택한 문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찾지 않는 그 문, 우리의 육신이 원하지 않는 그문, 그 문을 찾아서 우리는 좁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좁은 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기에 은혜로 알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문에 들어서서 어느 길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가고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좁은 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저는 지난 한 주간동안 좁은 문, 좁은 길을 묵상하며 내가 가는 이 길이 진정 좁은 길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가끔은 내가 넓은 길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지난 주에 에스라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진정 말씀을 읽으면서 두려워 떨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넓은 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내가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하심에 여러분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좁은 길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좁은 길이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은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론적으로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을 걸어가시고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마음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하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격이 부드러워서 남에게 싫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또 좀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해서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이 되지않는 사람이 떠오르기 때문에 "온유하다"고 하면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온유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프라오스(praos)라는 말인데 그 뜻은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고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성품"을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가 충동을 받으면 야생마처럼 난폭하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난폭해지기 쉬운 우리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 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말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강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 주심으로 잘 다스려지는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마음이 조금 부드럽다고 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보면 그 안에 온유가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믿음, 온유한 마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온유할 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일반적으로 낮아짐입니다. 그러나 이 낮아짐도 무력해서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비움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길을 간다고 할 때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언제나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예수님이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요즘 묵상하는 느헤미야의 아름다운 신앙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으로 바사왕국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폐허로 큰 환란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쌓아야 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금식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4개월을 기도합니다. 자기의 일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한 다음 왕에게 나아가 간청을 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쌓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합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느헤미야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마음은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집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보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뒤를 따라갈수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기독교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몽골의 선교사인 이용규선교사의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내려놓음"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최고의 대학인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입니다. 그런데 학위를 수여받자마자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가족 모두가 몽골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님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깨달은 이야기를 책으로 쓴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가장 좋은 것을 붙들기 위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다는 것입니다. 그의 경험과 지식도 그가 자기고 있었던 명예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도 다 내려놓았더니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을 발견하였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의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욕망도, 나의 욕심도 내가 뭔가를 안다고 하는 지식도 경험도 하나님앞에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혜롭다고 하는 솔로몬의 겸손을 저는 잠언3:5-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나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저하게 범사에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인정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네길을 지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삶에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양문교회의 희망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여기에 한국교회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한알의 밀알처럼 100배의 결실을 맺는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좁은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 가장 큰 장애가 무엇입니까? 나 자신입니다. 나의 경험과 나의 지식, 내 생각, 내 뜻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무엇을 행하든지 항상 거기에 내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시각으로 지금 분석하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 이것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어, 아, 이것은 옳지만 내생각과는 다르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아니야. 아 이것은 내가 행할 거야, 여러분은 제가 지금 설교를 해도 여러분의 생각에 따라 행동여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소리에 나라는 자아가 걸러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옳다고 해도 내가 아니라 하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내 자아입니다. 이 자아가 옳다고 하는 것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입니다. 선악을 내가 분별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내 삶을 통치하고 싶은 욕망, 교만의 죄가 우리 인간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생각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앞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을 명령하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자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대는 사탄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사탄과 싸워 이긴 사람도 자기라는 우상 앞에 패배하기 쉽습니다. 철야하고 금식하고 회개하고 성경공부하고 말씀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앞에서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쾌락을 좋아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예를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에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처음사역을 시작하시려고 할 때 나타난 적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나타난 적은 사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이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이 잔을 피할 길은 없습니까? " 하나님의 뜻은 그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와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컸던지 땀방울이 피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7 이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7-9).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미련, 성공에 대한 미련, 삶에 대한 미련 등이 버려지지 않으면 좁은 길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결국 다 두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세 끼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 놓고 자기는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상의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하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깨달아지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송가에 나오는 찬양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가야 할 그 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좁은 길을 걸을 때 진정으로 우리 영혼의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합력하시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통해서 무엇으로 이루십니까? 선을 이루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한 사람은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그 문도 좁고 그 길도 협착하여 가기도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통의 길입니다.
이 길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생명의 가진 사람은,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핍박과 오해를 각오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15:18-19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또한 "내가 온 것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보면 또 좁은 길이있습니다. 이 길은 평생 걸어야 할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갑자기 부모가 핍박자로 변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이 비난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핍박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서 선한 사람에게는 무한히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천국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양면성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좁은 길을 간다 하여도 끊임없는 유혹하고 시험하는 것은 넓은 길입니다. 그 길은 넓고 커서 가기도 쉽습니다. 편안합니다. 육신은 바로 그런 길을 원합니다. 육신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쉴 틈을 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넓은 길로 가라고 유혹해 옵니다. 여러분, 육신의 사망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 성공같되 실패요. 먼 훗날 지난 날을 돌아보며 후회할 것입니다. 아니 고통스럽게 그 날을 바라보며 땅을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매우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결심해도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에 버거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곁에 오셔서 나를 돕는 도우미이고 나를 깨닫게 해주시는 진리의 영이시고 나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영이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결심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현실에 부닥치면 거품처럼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8절 말씀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길을 내 힘으로 갈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좁은 문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에의 초청을 말합니다. 산상설교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좁은 길로 가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은 따라가는 길입니다.
2.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3.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걸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넓은 길의 유혹이 있을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좁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 좁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좁은 길을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이 아무리 원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고 순례자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