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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데니엘 데닛.Daniel Clement Dennett(1942~ ) [감수의 글] -장대익
최근에 대닛은 의식을 다중원고에 비유하는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명성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명성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뇌에 의식이 발생하는 과정 역시 정확한 시점을 추정할 수 없다. 또한 많은 사람이 경쟁하여 그중 소수만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구성하는 다양한 메커니즘도 우리 몸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을 펼친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메커니즘이 의식이라는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승리를 쟁취한 메커니즘이 데카르트 극장의 객성 한가운데에 앉아 모든 것을 통제하던 그 난쟁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세계는 군주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가깝다. 각 메커니즘은 다른 것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가 의식을 차지하는 기간은 길지 않으며, 각각의 메커니즘은 수시로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든다. 그리고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이될 때 그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동안 왜 철학자들은 의식을 과학이 접근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하며, 데카르트 극장에서 생겨나는 1인칭 대상으로 인식해온 것일 까? 데닛은 한마디로 그것은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화폭에 찍혀 있는 점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림의 전체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메커니즘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의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에서 벗어나 시각을 면의 수준으로 넓히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식을 마치 1인칭적 질적 속성인 것처럼 느끼는 것은 지향적 수준에서는 뇌의 메커니즘 간의 협력이 상당히 일관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관적 의식이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후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정신 작용이 통합되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뇌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메커니즘 속에 분산되어 있다.
[1부 의식의 문제에 접근하다] (1장 의식에 관한 해명)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인간의 의식은 거의 마지막 남은 신비 중 하나다. 물론 인간의 의식 외에도 풀지 못한 신비는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근원, 생명과 생식 작용의 신비, 잔연의 오묘한 섭리와 시간. 공간. 중력의 불가사의가 그렇다.
일단 비밀에 새버리면 그전까지 두근두근 마음 졸이게 하던 재미가 사라져 버린다.
-뇌를 움직이는 정신 질료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속에 형상을 떠올렸다면 그것을 세심하게 살핀 후 다음 질문에 답하라. 이제 눈을 감은 다음 가능한 상세하게 보라색 소르르 상상하라. 상상했는가? 그럼, 질문을 보자. 1) 소가 왼쪽을 보고 있는가, 오른쪽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머리를 쳐들고 있는가? 2) 소가 여물을 씹고 있는가? 3) 소 젖통이 보이는가? 4) 소가 옆은 보라색인가, 짙은 모라색인가?
지시에 잘 따랐다면 위의 네 가지 질문에 억지로 답을 지어내지 않고도 술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가지 질문이 모두 당황스러울 정도로 대답하기 곤란했다면, 당신은 아마 보라색 소를 상상하는 수고를 전혀 하지 않고 대충 ‘나는 보라색 소를 상상하고 있어’ 또는 ‘이게 보라색 소를 상상하는 거지’하고 생각만 하고 말았거나, 딱히 설명은 못해도 그 비슷한 일을 한 것이리라.
상상한 소를 존재하게 했던 매개체는 뇌 물질이 아니라 분명 ‘정신 질료’였다.
-이원론의 치명적 오류
빅토리아 시대, 교령회(죽은 사람의 혼령과 교류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영매가 이상하고 끈적이는 물질인 심령체를 끄집어내곤 했다. 심령세계의 기본 물질이라고 추정되는 심령체는 유리 항아리에 담아둘 수도 있었고, 일반 물질처럼 흐르거나 습기에 젖기도, 빛을 ㅂ나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에 불과한 그 물질을 무조건 믿으라고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2장 현상학의 정원에 방문하다.)
-정서적 경험
눈을 감고 누군가가 당신을 발로 걷어찼다고 상상해보라. 앞부분이 금속으로 덧대진 부츠를 신은 발에 왼쪽 정강이를 세게 차여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온다고 가능한 한 상세하게 상상하라. 눈물이 나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다. 통증이 너무 심하고 날카로워서 속이 매슥거리고 온몸이 통증에 점령당한 것 같다. 당신은 통증을 느꼈는가? 사람들이 이 실험에 반응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실제로 통증을 느꼈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다소 불쾌함을 느꼈다고 했지만, 대부분 이런 심리실험이 그저 재미있었다고 했다.
꿈에서의 통증은 진짜 통증인가, 상상의 통증인가? 아니면 그 중간의 어떤 것인가? 최면으로 유도한 통증은 또 어떤가?
분노, 두려움, 증오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면 좀 더 복잡한 예로 ‘공감’을 생각해 보라. 어원학상으로 그 말은 고통을 함께 한다는 의미다.
자식이 심한 모욕감을 느끼거나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자식 못지않게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같은 정서가 온몸을 휩쓸고, 생각을 잠식하며, 평상심을 흔들어 놓는다. 부모는 같이 싸우거나 울거나 무언가를 사정없이 내려치고 말 것이다. 이는 공감의 극단적인 형태다. 왜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설계된 것일까? 그 현상은 대체 무엇일까?
-왜 유쾌함과 웃음이 필요한가?
모든 동물은 삶을 지속하기를 원한다. 어떤 조건에서도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삶을 즐기고 재미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종은 몇 되지 않는다.
눈밭에서 미끄럼을 타고 노는 활달한 수달, 장난을 좋아하는 새끼사자, 인간의 친구인 개와 고양이가 있지만, 거미나 물고기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
소와 양은 보통 지루해 보이거나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얼마나 좋고 감사할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새가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재미는 사소한 개념이 아니지만, 아직까지 철학자들로부터 세심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를 즐겁게 살게 해주는 재미가 우리에게 하는 역할을 설명하지 않고는 의식에 관해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3장 3인칭 적 과학 방법론)
-1인칭 복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진지한 현상학은 명확 중립적인 방법으로 설명 분석되어야 한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다르고, 말에서는 누구나 다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주변 시야에 실제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 있는 것을 직접 봤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을 분명하게 직접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상적인 조건에서 시야에 커다란 공백이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곳마다 색깔이 있는 무언가가 있었고, 거기에 눈에 띌 정도로 채색되지 않은 영역이 있었다면 분명 그 차이를 눈치 챘을 것이다. 당신의 주관적 시야가 기본적으로 색깔 있는 형태로 구성된 내면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면, 캔버스의 모든 부분이 어떤 색으로든 채색되어 있는 것이 이치에 맞다.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라도 색깔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시야의 모호한 모형에서 끌어낸 결론이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에 특권적 접근법을 갖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가 실제보다 오류에 훨씬 더 둔감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다.
-3인칭 시점,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다.
아무리 단순한 생각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고, 그 사람의 생각은 그의 말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므로 정신적 사건과 관련한 사실은 과학적인 데이터로 볼 수 없다. 객관적인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허구 세계와 타자현상학적 세계
[2부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다] (4장 데카르트 극장을 넘어 다중원고 모형으로)
-관찰자 시점 의식적인 마음에는 반드시 ‘시점’이 있다. ~~~~의식적인 마음은 그곳에 있는 모든 정보 가운데 한정된 하위 항목을 취하는 관찰자다. 관찰자는 끊임없이 흐르는 우주의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순간에 이용 가능한 정보를 취한다.
뇌 안에는 모든 정보가 모이는 한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뇌 안에는 관찰자가 없다 데카르트는 관찰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었다. ~~데카르트는 뇌에 중추 영역이 있다고 단정했다. 그 중추가 바로 송과선이고, 이곳이 의식적인 마음에 이르는 관문 구실을 한다고 생각했다. 송과선은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쌍으로 있지 않고 뇌 중앙에 오직 하나만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크기는 완두콩보다 작고, 뇌의 후부 가운데에 다른 신경계 부분에 붙은 채로 자리하고 있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송과선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데카르트가 송과선의 역할 한 가지를 제시했다. 인간이 어떤 일을 의식하려면 감각 기관에서 들어온 정보가 마음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물질적인 뇌와 비물질적인 마음 간에 기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이 송과선으로 본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신체 반응에 의식적인 마음의 중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도 오늘날 우리가 반사라고 부르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는지, 반사 작용은 송과선 처리본부를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송과선은 영혼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팩스도, 뇌에 자리한 대통령 집무실도 아니다. 뇌 어디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영역은 없다. 한마디로 뇌 안에는 관찰자가 없다.
의식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뇌에 특별한 중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계속해서 다른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여러 이유를 들이대며 자기주장을 펼친다. 이 생각은 우리가 의식의 단일함을 사적이고, 자기 성찰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나오고, 우리에게 여기 안과 저 바깥이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나와 저 바깥 세계 사이의 고지식한 경계는 피부와 눈의 렌즈이지만, 우리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으면서 거대한 외부가 침입해 들어온다. 내가 여기 안에서 팔을 들어 올리려고 해보지만 저 바깥에서 잠에 빠져 있거나 마비되어 있다면 팔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신경이 어떤 이유로든 절단 되었다면 내 눈이 멀쩡하더라도 사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시각 경험을 한다는 것은 명백히 내 눈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당신에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분명 내 눈과 목소리 사이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이 행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밖으로 향하는 과정을 개시하기 직전, 안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이 종결되는 지점에 위치해야 한다는 기하학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일까?
-다중원고 모형, 무엇이 다른가? 다중원고 모형에 따르면, 다양한 인지 작용, 다시 말해, 모든 다양한 사고와 정신 활동은 뇌에서 감각 정보를 해석하고 정교화 하는 병렬적이고 다중 경로를 거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신경계로 유입되는 정보는 계속해서 편집 중이다. 우리의 머리도 조금씩 움직이고, 눈동자는 더 자주 움직이므로 우리 망막에 맺히는 상은 지속적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우리 눈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1초에 다섯 번 정도 급속한 단속성 안구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눈동자에서 의식으로 가는 중에 일찌감치 편집된다.
뇌에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산되어 일어나는 내용 확정은 시간상, 공간상으로 모두 정확하게 위치를 추적할 수 있지만, 그 시초가 내용이 의식되는 시초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뇌가 판별한 특정 내용이 의식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타날지 말지는 언제나 미결 문제다. 그것이 언제 의식되느냐 하는 것도 혼란스러운 문제다. 이렇게 분산된 내용 판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순서 같은 것을 산출하고, 뇌 전반에 걸쳐 있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편집중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런 편집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이런 내용의 흐름은 그 다양성 때문에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다. 뇌의 여로 곳에는 다양한 편집 단계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 조각의 원고가 있다.
이런 흐름에서는 조사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만일 조사를 너무 오래 지연시키면 아무런 이야기도 남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이야기가 소화되고 재조직되어 원래의 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너무 일찍 캐물으면 뇌가 일찌감치 판별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관련 데이터를 모을 것이고, 그렇게 묻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다양하게 진행 되었을 흐름을 방해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다중원고 모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의식의 실제 흐름이라고 공인된 단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웰식 기억 수정인가, 스탈린식 여론 조작인가? 일요일의 파티에서 사실은 본 적도 없는 모자 쓴 여자를 보았다는 가짜 기억을 삽입했다고 가정해보라. 월요일에 파티를 회상하다가 그 여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의심할 만한 아무런 내적 근거가 없는데도 우리는 당신에게 당신이 일요일에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화요일에 우리는 당신이 파티에서 모자 쓴 여자를 보았다는 생생한 의식적인 경험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었다고 주장한다(당신은 도대체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신경외과 수술로 가짜 기억을 삽입할 능력은 없지만, 외과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기억의 장난으로 저절로 뇌 안에서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런 경험 이후의 오염 또는 기억의 수정을 오웰식이라고 부르자. 조지 오웰의 오싹한 소설<1984>에 나오는 진실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오웰식 수정이 후세대를 속이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라면, 또 다른 방식은 거짖 증언과 허위 자백, 모의 증거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세심하게 짠 각본 하에 여론 조작용 재판을 여는 것이다. 이런 조작을 스탈린식이라고 하자.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위조의 형태가 오웰식인지 스탈린식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허위 정보 조작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신문에서 떠드는 이야기가 전혀 일어난 적이 없는 일에 관한 오웰식 설명인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가짜 여론 조작용 재판을 열어 조작한 이야기인지 구별할 수 없다. 신문, 비디오테이프, 개인의 회고록, 묘비에 새겨진 비문, 살아 있는 자의 증언을 통틀어 모든 흔적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면, 우리는 애초에 정보 조작이 일어나서 우리의 틀림없는 역사가 여론 조작용 재판으로 조작되었는지, 아니면 즉결처형 후에 역사 조작으로 그 행위가 은폐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신이 길 모퉁이에 서 있는데 긴 머리 여자가 획 지나갔다고 치자. 이런 일이 있은 직후, 전에 본 안경 낀 짧은 머리 여자에 관한 잠재 기억이 방금 본 여자에 관한 기억을 오염시켰다. 잠시 후에 방금 본 여자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하자 당신은 진지하게 그 여자가 안경을 끼고 있었다고 잘못된 정보를 보고했다.
-현상학적 공간으로의 투사 나는 세상에 실제로 움직이는 점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보면 단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또한 나는 그 점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것을 알고, 따라서 그 점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내 판단에 더해서 내가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사건이 있다는 것도 안다. 바로 그 점이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건이다. 진짜로 움직이는 것은 없었으므로 내 판단의 근거가 된, 진짜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있어야 한다.
-다중원고 모형 실행 예를 들어 개 사진을 판별했다면, 그것이 인식의 틀을 형성하여 다른 그림을 보았을 때 개를 더 쉽게 알아보게 해주거나, 특정한 의미 영역을 활성화하여 ‘bark'라는 단어를 나무껍질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로 파악할 확률을 일시적으로 더 높여준다.
이런 다중경로를 거치는 과정은 몇 백 밀리초에 걸쳐 일어나면서 다양한 내용이 다양한 순서로 첨가되고 통합되며, 수정되고 다시 쓰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야기의 흐름이나 순서가 산출되고, 그것이 뇌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과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편집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이 생겨나 수정되고, 다른 내용을 해석할 때나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을 조절하는데도 영향을 미치며, 그 과정에서 기억에 흔적을 남긴다. 결국에는 그것이 소멸되거나,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후속 내용에 섞이거나 다시 쓰인다. 이런 내용의 실타래는 그 다양성 때문에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다. 언제 어느 때고 뇌의 여러 곳에는 다양한 편집 단계에 있는 다양한 원고가 있다.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수정되므로 단 하나의 공인된 버잔은 없으며, 피실험자의 의식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나온 초판본과 달라진 모든 왜곡은 본문이 오염된 것이다.
(5장 다중원고 모형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이론)
-메타대조 현상과 피부에서 뛰는 토끼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일이 일어났을 때 뇌는 단순화하여 가정한다.
(6장 의식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 뇌의 표상 능력 뇌의 변동성이 필요한 이유는 환경의 주요한 변동적 특징을 어떻게든 등록하거나 추적하려는 두뇌 활동의 순간순간 변화하는 양상을 전달할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뇌에 있는 무언가가 변해야 날아가는 새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대기의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알아챌 수 있으며, 혈당이 떨어지거나 폐에 이산화탄소 수치가 올라가는 등의 상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진정한 표상을 가능케 하는 지렛대다.
사자를 본 얼룩말은 사자가 어디 있는지, 사자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일을 언제 잠시라도 멈출 수 있을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사자 또한 얼룩말이 어디 있는지 잊지 않는다.
바퀴, 옷 입기, 피의 복수, 직각 삼각형, 알파벳, 달력..... 이런 것들은 다소간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문화 단위다. 단위는 신뢰성과 생식력을 갖고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요소이며, 도킨스는 그런 단위를 지칭하기 위해 ‘밈’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인간의 의식은 대부분 자연선택의 산물이기보다는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밈, 인간의 뇌를 바꾸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밈을 선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밈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빛의 속도로 퍼지고 있고, 초파리와 이스트 세포가 복제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복제되고 있다
-의식의 밈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복잡한 밈이다. 그 원리는 원래 그런 활동을 위해 설계되지는 않았더라도 뇌의 병렬 구조로 실행되는 폰 노이만식 가상 기계의 작동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가상 기계 덕분에 그것을 운용하는 유기체의 하드웨어 역량도 크게 향상되었으며,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특징과 특히 그 제한점의 많은 부분이 클루지kludge 의 부산물로 설명될 수 있다.
(7장 언어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뇌에는 전문가 뇌 회로들이 짜깁기 되어 있다. 이 회로들은 일부분은 문화에 의해, 또 일부분은 개인의 자기 탐색으로 주입된 습관 덕분에 대체로 질서 정연하고, 어느 정도 효율적이며, 다소 설계된 가상 기계인 조이스식 기계를 만들어 낸다.
윌리엄 제임스는 뇌의 어딘가에 교황 뉴런이 있다는 생각을 맹렬히 풍자하면서 그것에 조의를 표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뇌의 상하 종속 체계에 관한 업무 설명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통제 책임과 의사 결정은 어떤 식으로든 뇌 전역으로 분배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소란스럽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선원들을 태우고 표류하는 배가 아니다 .
사실 뇌에는 언어 생성을 지배하는 명령 계통이 없다(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주장과 질문, 그리고 다른 언어 행위를 그 한사람의 공으로 여기고 있지만, 데카르트 극장을 무너뜨리려면 그런 행위의 원천에 관한 더 현실적인 설명을 찾아야 한다.
-레벨트의 관료제 모형 말은 한 번에 한 단어씩 설계하고 실행하는 일괄처리로 생성되지 않는다. 말하기 체계에 제한적으로나마 미리보기가 가능한 것은 발화에서 주어지는 강세 덕분이다.
-말이 스스로 말하기 원할 때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일부는 그것이 그런 뜻이어서가 아니라 내 말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한 말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8장 인간 마음의 구조를 보다)
-의식 연구에서 마주치는 논란들 지금까지 내가 전개한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추의 의미부여자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모든 것이 한데 모이는 ‘중앙본부도 없고, 데카르트 극장도 없으므로 하나의 단일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흐름도 없다. 그런 단일한 흐름 대신 전문가 회로들이 병렬식 복마전 구조로 다양한 일을 하는 다양한 채널이 있고, 그 회로들이 일을 해나가면서 다중원고가 만들어 진다.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 원고 대부분은 현재 진행되는 활동이 조정되면서 그 역할이 짧게 끝나고 말지만, 일부는 뇌에 있는 가상 기계의 활동으로 빠르게 후속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더 나은 기능을 하게 한층 더 나아간다. 폰 노이만식 특징인 이 기계의 순차성은 내장형 설계 특징이 아니라, 전문가 회로 연합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나온 결과다. 기본적인 전문가 회로는 우리의 동물적 유산이다. 그것은 글을 읽고 쓰는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을 수행하기 위해 발달하지 않았다. 몸을 숨기고, 포식자를 피하고, 안면을 식별하고, 쥐거나 던지고, 딸기를 파는 것과 같은 생명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발달했다. 이 회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타고난 재능에 적합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 그 결과가 대혼란이 아닌 이유는 이 모든 행위에 부과된 경향 자체가 설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계 가운데 일부는 선천적이고, 다른 동물도 공유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설계는 확대될 뿐 아니라 엄청난 중요성을 띠기도 하는데, 일부는 자기 탐색의 결과로, 또 일부는 이미 설계되어 있는 문화의 산물로 개인 내에서 발달한 사고와 미세한 습관 덕분이다. 대부분 언어에 의해 태어났지만, 무언의 이미지나 다른 데이터 구조로도 태어난 수천개의 밈은 개개인의 뇌에 자리를 잡고 그 사람의 성향을 형성하면서 그것을 마음으로 바꾼다.“」
이 이론은 심리학, 신경생물학, 인공지능, 인류학, 그리고 철학 분야 연구자들이 개발한 모형에서 도출한 것이다. 내가 모형을 빌려온 해당분야 연구자들은 과감한 절충주의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나는 함께 연구하는 동료들이 다른 분야 연구자들을 향해 불손한 언사를 표현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실마리 개요로 방향 잡기 이 책에서 내 주요한 과제는 철학적인 것이다. 진정으로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 자세한 세부 모두 담은 이론을 제공하거나 확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이론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어준(적어도 내게는)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실증적 연구를 빌려오지 않았더라면 구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추의 의미부여자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모든 것이 한데 모이는 중앙 본부도 없고, 데카르트 극장도 없으므로 하나의 단일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흐름도 없다.”
뇌 안에 데카르트의 송과선을 상기시키는 곳은 없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하면서도 이 말에 들어 있는 함의는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터무니없이 무시해버리는 일이 많다.
다중 체계에는 실제로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세상에서 만나는 잡음 영상을 용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이다. 내가 이런 아이디어를 설명할 때 잘 이용하는 비유는 술 취한 사람 둘이다. 두 사람은 모두 부축을 받지 않고는 걸을 수 없지만, 둘이 서로를 부축해주면 목표지점을 향해 비틀비틀 나아갈 수 있다.
심리철학자 제리 포더(1983)는 인간 마음의 많은 부분은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내장되어 있고, 특수한 목적을 가지며, 입력된 정보 분석을 위한 ‘캡슐에 싸인’ 시스템이다.
포더에 따르면, 인지의 진정으로 사려 깊은 활동은 모두 비모듈적이다.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내기, 가설적인 상황에 관해 추론하기, 갖고 있는 자료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기, 자신의 세계관 수정하기 등과 같은 모든 활동은 신비로운 중앙 시설에서 일어난다. 더군다나 포더는 철학을 포함하여 어떤 인지과학 분야도 이 중앙 시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해서는 어떤 실마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보를 중앙 처리에 적절한 형태로 옮기는 표상의 전환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보가 거기에 도달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기계 안으로 더 깊숙이 귀신을 쫓아 들어갔지만, 쫓아내 버리지는 못했다(fodor. 1983.p127)」
이론가들은 그의 모듈을 데카르트적 환상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폐기해버렸다.
- 전역 작업 공간과 뇌의 다중 기능성 철학자 오언 플래너건이 새로운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부른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뇌가 자기 조직을 이해하기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런 주장은 옳지 않으며, 뇌가 작용하는 방식을 알아내기란 극도로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는 그것이 어느 정도 다중적이고 중첩된 기능을 하면서 번성할 수 있는 과정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역공학의 시각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신경해부학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영역이 활성화 되는지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이 하는 역할까지 보여주는 뇌의 연관성지도를 채워왔다. 몇몇 영역이 의식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중뇌의 망상체와 그 위에 위치한 시상이 뇌를 잠에서 깨우거나, 새로운 것이나 응급 상황에 반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지금은 그 경로가 더 잘 지도화 되었으며, 더 자세한 가설이 수립되고 검증되었다. 한 예로 크릭(1984)은 시상에서 피질의 모든 부분으로 방사되는 가지들은 탐조등 역할에 적당하다고 말했다. 특정한 전문가 영역을 다르게 각성하거나 강화하여 현재 필요한 목적에 동원한다는 것이다.
전두엽의 여러 영역에 손상을 입으면 전형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증상을 일으킨다. 주의 산만 또는 그 반대로 과도한 집중을 유발해 정상 생활 괘도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욕구의 충족을 지연시키는 행동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조이스식 기계의 힘 우리는 사물을 자신에게 푯아하는 방법을 가진 덕분에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배하고 실행할 수 있다. 우리는 가설적인 사고와 시나리오를 짜는 능력 덕분에 우리 정책을 미리 펼쳐볼 수 있다. 우리가 택한 정책의 기대되는 잊머과 치러야 할 대가를 머릿속에서 시연해 보고, 내키지 않는 일이거나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할 때는 자신의 결심을 일깨우는 습관으로 스스로의 의지를 굳건히 한다. 이런 리허설 습관은 상궤가 되는 기억을 형성하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심리학자들이 삽화적 기;억 이라 부르는 것에 도달하고,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을 발달시킨 덕분에 우리 조상은 미래를 좀더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조상에게 이런 높아진 예측 능력을 준 것은 회상능력이었다. 자기가 최근에 한 일 중에서 실수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도록 되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돼! 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이 경험에서 배운 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주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는 기록해두는 습관 덕분에, 더 정확하게는 자기 자극의 습관 덕분에 다른 피조물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통찰력 있게 그 배움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많은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회상능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당신이 무엇을 배웠든, 그것은 당신이 현재 직면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최소한 이상적이다. 포더는 이런 특징을 등방성이라 했고, 플라톤이라면 ‘부르면 언제나 그 새가 날아오게 하는, 적어도 노래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은 기적적으로 보이지만, 모든 무대 마술사가 알고 있듯이 마술은 일반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과장된 현상을 관객이 믿는다는 사실로 절정에 이른다.
-의식이론으로서 본격적인 출발선에 서다 지금까지 나는 의식에 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내 이론이 의식을 무엇이라고 말한다고 주장하기를 조심스럽게 피했다.
[3부 철학적 문제에 답하다.]
(9장 보는 것과 말하는 것)
-보고하기와 표현하기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우리는 데카르트 극장이라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 과정에 극히 일부분밖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조용히 혼잣말해보는 언어 행동을 시연하면서 신중하게 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올 후보 말들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튀어 나온다. 우리는 자신이 말을 이미 해버린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해야 할 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하고자 했던 말을 폐기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말을 살짝 편집한 후에 내뱉기도 하지만, 심지어는 이런 때때로의 중재 간계에서조차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통속 심리학은 한층 더 나아가 구분을 짓는다. 로젠탈과 많은 연구자가 지적했듯, 믿음은 사고와 구별된다. 믿음은 바탕이 되는 기질적 상태이고, 사고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태나 삽화적인 상태로, 일시적이다. 개가 동물이라는 당신의 믿음은 수년 동안 당신의 마음 상태로 지속되어왔지만, 내가 지금 당신이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것이 당신 안에 개가 동물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그 생각을 유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신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삽화다.
(10장 목격자 보호 프로그램 해체하기)
-데카르트 극장의 환상을 넘어서라 어디서 이해가 일어나는가? 이 질문은 17세기 이후로 논란의 중심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데카르트가 이해의 적어도 상당 부분을 뇌에서 일어나는 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도 그는 회의론의 벽에 부딪쳤다. 앙투안 아르노는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렇게 내놓았다. “늑대의 몸에서 나와 양의 눈에 비친 빛이 신경의 미세한 섬유를 움직이고, 뇌에 도달하자마자 신경을 타고 동물 ㅈ어기로 퍼지는 것으로 양이 도망칠 수 있다. 그런 일이 어떤 영혼의 도움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12장 자아의 현실)
-인간은 어떻게 자아를 만드는가? 17세기에 근대 과학이 동튼 이후, 자아라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현미경 아래에서도 보이지 않고, 자기 성찰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런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아라는 것이 ‘비물질적인 영혼’, ‘기계속의 유령’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아가 형이상학적인 열띤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일 뿐,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식이 되었든 자아라는 것이 일종의 관념이어서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 공격당할 일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우리 뇌 말고 어딘가에 우리 신체를 통제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ㄱ려정을 내리는 실체가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실증적으로 백치 소리거나(윌리엄 제임스의 교황 유령) 형이상학적 허튼 소리(길버트 라일의 기계속의 유령)다.
인간은 자아를 갖고 있다. 그럼 개도, 바닷가제도 자아를 갖고 있을까? 만일 자아가 어떤 것이라면, 자아는 존재한다.
가장 하등 생물인 아메바도 자기가 하는 일을 ㅇ니식도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나와 나머지 세상 사이에 경계를 짓는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를 다른 것과 분별하려는 이런 최소한의 성향은 생물학적 자아이고, 그런 단순한 자아조차도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추상적인 것이며, 조직의 원리일 뿐이다.
인간의 신체라는 결계 안에는 수많은 침입자가 기거하고 있다. 세균과 바이러스에서부터 피부와 두피의 생태적 틈새에서 마치 암굴 거주자처럼 살아가는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진드기며,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촌충 같은 기생충까지 다양하다.
소라게는 껍데기를 확보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설계되었다. 그 구조가 껍데기를 함축하고 있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소라게의 껍데기를 갖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소라게는 자기 표상을 위해 절대 나서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에게 자신을 표상해야 하고,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라게는 자신에게 이런 본성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인간은 외적이고 내적인 언어와 제스처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거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나타내는 데 여념이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엮고, 조절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자아만 존재하는가? 다중인격 장애에 관한 실험이다. 이 장애에서는 몸 하나가 여러 자아에 의해 공유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각각의 자아는 적당한 이름과 자전적인 이야기를 갖는다.
정상적 구조에서야 몸 하나에 자아도 하나인 것이 당연하지만, 비정상적 조건이라면 몸 하나가 자아를 하나 이상 갖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내 이론에 의하면 자아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어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해, ㅅ라아 있는 신체의 이야기 무게중심의 전기를 구성하는 수많은 속성과 해석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것으로서 자아는 살아 잇는 신체의 진행 중인 인지적 경계에서 두드러지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체가 활동하는 환경에 있는 모든 것에 관한 정신적 모형을 만들어야 하고, 행위자가 저절로 갖게 된 모형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아가 실제가 아니라면, 진짜로 진짜가 아니라면, 책임은 계속해서 여기저기로 넘겨지고, 영원히 돌고 돌지 않겠는가? 뇌에 모든 결정을 내리는 최고 결정권자가 자리한 대통령 집무실이 없다면, 우리는 이의 제기를 받으면 언제나 ‘나를 탓 하지마, 나는 여기서 일하는 것뿐이야’라고 답변하는 난쟁이들의 부조리한 관료주의에 위협당할 것이다.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굿어해야 하는 과제는 주요한 사회의 교육적 프로젝트이고, 당신은 성실성에 위협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유일한 희망은 뇌가 자기 표상을 기르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다 잘되어갈 때 뇌가 통제하는 신체를 책임 있는 자아로 무장시키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이다.
최상의 방어는 모순으로 가득한, 뚜렸이 분리되는 별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신화를 버리는 것이다.
(13장 상상한 의식)
-의식 있는 로봇 상상하기 나는 인간의 의식 현상을 ‘가상 기계’의 작동 면에서 설명했다. 뇌의 활동을 이루는 일종의 진화된(그리고 진화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뇌 안에 데카르트 극장은 없다. 데카르트 극장이 있다는 놀랍도록 끈질긴 확신은 이제는 드러나고 설명된 다양한 인지적 착각의 결과였다. 감각질은 뇌의 복잡한 기질적 상태로 대체되었고, 데카르트 극장의 관객, 중추의 의미 부여자, 목격자로 알려진 자아는 그럴듯한 추상적 관념인 것으로 드러났다. 내적인 관찰자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이론가의 허구였던 것이다.
만일 자아가 단지 이야기 무게 중심이고, 인간의 모든 의식 현상이 인간 뇌의 어마어마한 가변적 연결로 구현된 가상 기계의 활동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원리적으로는 실리콘으로 만든 컴퓨터 뇌로 적절하게 프로그램된 로봇도 의식이 있을 것이고, 자아를 가질 것이다. 몸은 로봇이고 뇌는 컴퓨터인 의식 있는 자아도 있을 것이다. 내 이론에 숨겨진 이런 함의가 어떤 사람에게는 명백하고 거부감이 없다.
로봇의 컴퓨터 뇌가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실리콘 칩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의식적인 경험에 해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기적인 인간의 뇌가 의식을 갖는다고 상상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어렵다. 어떻게 수백만 개의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복잡한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 의식적인 경험에 이르게 하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더라도 말이다.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아동문학에는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의식 있는 삶을 산다고 상상해볼 기회로 가득하다. 환상을 그리는 예술가는 보통 아이들의 상상력을 돕기 위해 이런 가짜 행위자의 얼굴에 표정을 그려넣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말하는 것은 표정 있는 얼굴이 없는 상황에서도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문제는 이것이 모두 착각이거나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내 친구도 어떻게 로봇이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웠으므로 로봇을 의식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기 꺼렸던 것이다.
어떻게 수백만 개의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복잡한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 의식적인 경험에 이르게 하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뇌가 의식이 자리한 곳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보통 철학자들이 수사적인 질문으로 다루어 왔고, 그 답은 인간의 이해를 한참 벗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책의 1차적 목적은 그런 추정을 모조리 부수자는 것이었고, 나는 당신도 뇌에서 일어나는 그 복잡한 활동을 의식적인 경험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내 주장은 직접적이다. 나는 당신에게 그 일을 하는 방법도 보여주었다. 뇌를 일종의 컴퓨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컴퓨터공학에서 얻은 개념은 자기성찰을 통해 알고 있는 현상학과, 과학이 밝혀준 우리 뇌 사이의 미지의 영역에서 비틀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의 버팀대를 제공한다. 우리 뇌를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는 뇌가 그 모든 현상을 어떻게 일으키는지 발전해나가면서 차츰 연무를 물리치고, 거대한 분수령을 넘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다. 중추의 의미부여자, 채워 넣기, 감각질 같은 솔깃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은 피해야 한다. 내가 제공한 개요에도 아직 혼란이 남아 있고, 적나라한 오류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는 이런 분수령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토머스 네이글은 생리학의 객관적인 수준에서 현상학의 주관적인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더 최근에는 콜린 맥긴이 의식이 현상학과 생리학 모두를 초월해 존재하는 감추어진 구조라고 주장하면서 이 구조가 격차를 메울 수는 있지만, 우리로서는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 책에서 이용한 소프트웨어나 가상 기계 수준의 설명은 맥긴이 설명한 중간 수준과 정확히 같은 종류다. 명확하게 생리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뇌 기계 장치에 필요한 다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고, 명확하게 현상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상학적 세계인 내용의 세계에 다리를 제공할 역량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해냈다! 우리는 뇌가 의식적인 경험을 어떻게 일으킬 수 있는지 상상했다.
일단 뇌가 어떻게 의식 현상을 일으키는지 상상해보는 어려운 과제에 얼마간 성공하고 나면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의식이 있다고 상상해보는, 그보다는 조금 쉬운 과제는 더 잘 해낼 수 있다.
-설의 중국어 방 사고 실험 맥긴은 어떻게 소프트웨어가 로봇이 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감히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철학자들도 소프트웨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바로 그런 효과를 내는 사고 실험을 고안하여 이런 태도를 더욱 조장했다. 이상하게도 가장 잘 알려진 두 가지 사고 실험이 모두 중국과 관련이 있다. 네드 블록의 ‘중국 국민’ 과 존 설의 ‘중국어 방’이다.
두 사고 실험은 모두 같은 식으로 상상력을 오도한다. 설의 중국어 방이 더 폭넓게 논의되었으므로 나는 이 사고 실험을 더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설은 우리에게 방에 갇혀서 중국어를 이해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글로 대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라고 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튜링 테스트(기계가 인공지능을 갖추었는지를 판별하는 실험으로, 1950년 영국의 앨런 튜링이 제안하였다)를 통과했다고 명기한다.
인간 상대자가 이 프로그램이 진짜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으나 모두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고 실험으로 단순히 행동을 보고 구별할 수 있다고 해서 중국어 방이 중국어를 이해한다거나 중국인의 의식이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방에 갇혀서 프로그램에 따라 프로그램의 기호열을 부지런히 조작하는 설은 그것으로 중국어를 이해하게 된 것도 아니고, 방에는 중국어를 이해하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
이 사고 실험은 설이 강한 인공지능이라 부른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려고 고안한 것이었다. 알맞은 입력과 출력으로 적절하게 프로그램된 디지털 컴퓨터는 인간이 마음을 가진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논제다. 설이 내놓은 여러 버전의 사고 실험에 엄청난 반응이 쏟아졌고, 찰학자와 이론가들은 그의 사고 실험이 논리적인 논증으로 간주될 때도 언제나 허점을 찿아 냈다. 그 결론이 많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명백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실제로 이 경우를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자세하게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진단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실험을 소개하겠다. 먼저, 튜링 테스트에서 판정자와의 대화에서 승리하는 중국어 방에서 발췌한 것을 살펴보자.
「판정자 : 요술 램프를 발견한 아일랜드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았나요?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지니가 나타나서 그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기네스 맥주 1파인트만 주시오! 라고 소원을 빌었고, 즉시 맥주가 나타났죠. 그러자 그는 얼른 맥주를 한 번 맛보고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기네스 맥주잔은 아무리 마셔도 맥주가 줄어들지 않고 기적같이 다시 차올랐어요. 얼마 후에 지니가 자 그럼 두 번째 소원을 빌어야죠! 하고 재촉했어요. 아일랜드 남자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이 맥주를 한잔 더 마시고 싶소!하고 대답했다는 군요. 중국어방 :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특정 민족을 농담거리로 삼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는 했지만, 나는 다른 주제를 논의했으면 해요. 판정자: 좋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 농담의 의미를 설명해보라고 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중국어방 : 재미 없어요, 농담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예요? 판정자: 상관없어요. 이것이 내 시험 문제예요. 그 농담이 왜 통하는지 그 이유와 ㅂ아식을 설명해보세요. 중국어 방 : 그렇게 고집한다면 설명해보죠. 기적적으로 다시 채워지는 잔은 아무리 마셔도 영원히 다시 채워지므로 아일랜드 남자는 흑맥주를 영원히 마실 수 있어요. 그것이 핵심이죠. 따라서 그가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멍청했거나(여기가 내가 반감을 갖는 부분이에요), 아니면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진 기쁨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주 번째도 같은 것을 청한 게예요. 물론 이 농담의 배경이 되는 가정은 진실이 아니지만, 이런 농담을 할 때는 기적을 믿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은 좀 뒤로 미뤄둬야 해요. 억지스럽긴 하지만, 생각을 좀 더 해본다면 그가 두 번째 소원으로 맥주를 달라고 한 것이 결국 옳았을 수도 있어요. 성대한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면 아무리 영원히 채워지는 잔이라도 한 잔 만으로는 갈증난 손님을 모두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거예요(미리 모아두는 것도 소용없어요, 맥주는 오래 두면 맛이 형편없어진다는 건 우리 모두 알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복잡한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바로 그 점이 농담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에요. 제 설명이 충분했나요?」※ 이 야기는 저자의 다름 책<직관펌프>에도 나오는 이야기라서 자세하게 내용을 서술했음.-편집자.
이 대화가 현란하지는 않았어도 판정자를 속여 넘기기에는 충분했다고 해보자.
“요술램프를 발견한 아일랜드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았나요?” 라는 문장에서 “~~ 들어보았나요?”아라는 구절이 시작되자마자 프로그램의 농담을 찾아내는 도깨비들이 활성화되었고, 이것이, ‘2차 의도’ 언어 등을 다루깅 nl한 많은 전략을 불러냈다. 따라서 요술 램프라는 말이 분석될 때 프로그램은 이미 요술 램프 같은 것은 없다고 불평하는 반응에는 우선순위를 낮게 두었다. 다양한 일반적인 지니 농담의 이야기 틀이나 스크립트가 대화를 지속하기 위한 다양한 기대를 만들면서 활성화되었지만, 그 이야기는 급소를 찌르는 핵심적인 말에 의해 설 자리를 잃었고, 더 일상적인 스크립트를 유발했다. 또한 프로그램에는 예기치 못한 반응도 있었다. 동시에 특정 민족을 농담거리 삼는 부정적인 암시에 민감한 도깨비들도 깨어나서 결국에는 중국어 방의 다음 주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화는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계속 이어졌다.
위에 설명한 대화에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특별히 유연하고 정교하며 다층적인 시스템이어야 하고, 세상에 관한 지식과 상위 지식, 자신의 반응, 상대자로부터 나올 수 있는 반응과 더불어 자신의 동기와 상대자의 동기,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에 관한 상위 지식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할까? 데카르트적 이원론자는 심지어 인간의 뇌도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이해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데카르트식 견해에 따르면, 그런 기적적인 이해를 얻으려면 빗물질적인 영혼이 있어야 한다. 반면, 기적의 도움 없이 뇌가 우리 이해를 스스로 책임진다고 확신하는 유물론자라면 진정한 이해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부 체계 간의 상호작용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의식을 설명해치우다? 의식에 관한 내 설명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며, 사실 이것은 시작이 맞다. 의식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마법을 깨놓았으므로 이것은 분명 시작이다. 나는 데카르트 극장이라는 비유적인 이론을 비유적이지 않은 글자 그대로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 대치하지는 못했다. 내가 실제로 한 일이라고는 극장, 관찰자, 중추의 의미부여자, 상상의 산물이라는 은유와 이미지를 소프트웨어, 가상 기계, 다중 원고, 난쟁이들의 복마전 같은 것으로 대치한 것이 전부다. 당신은 이것이 단지 비유 전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비유는 단지 비유가 아니다. 비유는 사고의도구이고, 그것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의식을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당신은 이용 가능한 최상의 도구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한다. 우리의 도구로 이룬 일이 무엇인지 보라. 그런 도구 없이 당신이 그 모든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Review]
지난해 말 바둑 기사 이세돌 선수가 마지막 은퇴 경기를 인공지능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첫판에서 인공지능이 이세돌 선수에게 패했을 때, 프로그램 개발자는 인공지능이 접바둑에 대한 훈련이 부족해서 생긴 일로, 지금 인공지능은 다음 게임을 대비하여 밤새도록 스스로 연습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에 의해 입력한 데이터에 따라만 움직인다는 종래의 생각에서 스스로 공부를 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뇌 과학은 외과적 치료를 넘어서 심리학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 마음, 의식 ,생각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철학적인 주제 이지만 이제는 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오늘날 인공지능은 이런 과학이 만든 결과다. 자연환경에 감동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인간의 꿈이다.
저자는 철학자지만 이 분야인 인지신경과학 에서 날마다 새롭게 발표되는 과학적 기술을 발 빠르게 접목하는 실용주의자로 그의 명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철저히 진화론자이며 오래전의 일이지만 미국의 복음 주위 목사인 릭위렌 의 책 <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해서 기독교적 초월 주위를 비판하기도 했다.
과학은 인간이 느끼는 물리적 감각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냈지만, 세포 말단에 있는 시냅스 에서 전달되는 전기 화학적 신호가 어떻게 형이상학적 의식을 만들게 되는지? 또, 저장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의 한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의 가설, 소위 말하는 (데카르트의 송과선)은 허구라고 비판한다. 의식은 뇌의 특정한 부위에서 이를 관장하여 하나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변하는 하나의 작용에 불과하며, 우리의 뇌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의식의 개체가 상호작용으로 생성과 변화를 일으키고 또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식의 개체를 그의 최근작<직관 펌프 > 에서도 언급하여 인간의 모든 판단과 결정은 여기에서 발현되며 그는 생각의 도구라고 표현했다.
오늘날 관심사인 인공지능은 기계장치인 컴퓨터에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적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과 같은 의식을 지닌 컴퓨터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이 분야가 아직은 미개척분야이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도 이 분야의 과학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이 일에 인간은 계속해서 도전할 것이고 이 분야에 대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1942년생으로 고령임에도 아직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1991년 쓴 책으로 그의 이론도 많은 부분에서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겠지만 그의 2013년도 최신작 <직관 펌프>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 큰 차이는 없다.
조금은 읽기 지루하고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독자는 이런 책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의 중심에 있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마음, 의식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본문)
“뇌가 판별한 특정 내용이 의식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타날지 말지는 언제나 미결 문제다. 그것이 언제 의식되느냐 하는 것도 혼란스러운 문제다. 이렇게 분산된 내용 판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순서 같은 것을 산출하고, 뇌 전반에 걸쳐 있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편집중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런 편집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이런 내용의 흐름은 그 다양성 때문에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다. 뇌의 여로 곳에는 다양한 편집 단계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 조각의 원고가 있다.”
“다중원고 모형에 따르면, 다양한 인지 작용, 다시 말해, 모든 다양한 사고와 정신 활동은 뇌에서 감각 정보를 해석하고 정교화 하는 병렬적이고 다중 경로를 거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신경계로 유입되는 정보는 계속해서 편집 중이다. 우리의 머리도 조금씩 움직이고, 눈동자는 더 자주 움직이므로 우리 망막에 맺히는 상은 지속적으로 흔들린다.”
“예를 들어 개 사진을 판별했다면, 그것이 인식의 틀을 형성하여 다른 그림을 보았을 때 개를 더 쉽게 알아보게 해주거나, 특정한 의미 영역을 활성화하여 ‘bark'라는 단어를 나무껍질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로 파악할 확률을 일시적으로 더 높여준다. 이런 다중경로를 거치는 과정은 몇 백 밀리초에 걸쳐 일어나면서 다양한 내용이 다양한 순서로 첨가되고 통합되며, 수정되고 다시 쓰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야기의 흐름이나 순서가 산출되고, 그것이 뇌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과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편집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이 생겨나 수정되고, 다른 내용을 해석할 때나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을 조절하는데도 영향을 미치며, 그 과정에서 기억에 흔적을 남긴다. 결국에는 그것이 소멸되거나,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후속 내용에 섞이거나 다시 쓰인다. 이런 내용의 실타래는 그 다양성 때문에 마치 하나의 이야기 같다. 언제 어느 때고 뇌의 여러 곳에는 다양한 편집 단계에 있는 다양한 원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