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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대속의 고난
이사야 53:4~6
우리는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대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로부터 시작되어 53장에 이르는 긴 여호와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고난당하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을 보면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짧게 이렇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온갖 고난과 멸시를 받았고 극심한 고난을 당함으로 비참하게 매맞고 일그러지고 흉측해졌기에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둥병자를 보면 두려움과 혐오감으로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리듯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도 외면할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처참하게 그리스도가 고난당한 것일까요? 정작 그렇게 고난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 53장 4절 이하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 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서 이제 하나님의 영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당한 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원문에서 강조된 것은 ‘그는’입니다. 여호와의 종 그는 사실은 우리의 질고를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우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그리스도는 질고를 아는 자 곧 체험적으로 질병을 겪은 자였는데, 그가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체험적으로 그렇게 겪은 것 역시 우리의 질병을 친히 겪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3절에 우리가 보았듯이 그는 ‘고난의 사람, 슬픔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생애 전체가 그토록 고난과 슬픔 속에 살았던 까닭은 바로 우리의 슬픔, 우리의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시면서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말구유를 요람으로 삼았고 태어나자마자 헤롯 왕의 칼날을 피하여 저 애굽으로 급하게 도망치게 되어 그곳에서 가난한 두 젊은 부부의 손에 의하여 가난한 움막 같은 곳에서 근근히 우유나 챙겨 먹으면서 자라나시고 혹시라도 해꼬지를 당할까봐 숨어서 나사렛 동네에 들어와서 그렇게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자라가셨습니다. 자녀들은 오죽 많습니까? 마리아와 요셉 밑에서 장남 예수님 말고도 남자 동생만 네 명이고 누이들도 여럿 있는데, 당시 가만한 목수의 수고비로는 먹거리를 장만한다는 것이 빠듯했을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역시 소년시절부터 육신의 보호자 요셉 곁에서 목수 일을 도우면서 손마디가 굵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만물의 창조주요 통치자시지만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처럼 비천하고 고단한 삶을 사셨으니, 참으로 우리 주님이 그처럼 질병과 슬픔을 겪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병의 고통을 몸으로 겪으셨고 슬픔, 고난을 겪다 못해 고난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처럼 겪으신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4절 후반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뭐라고 그를 두고 생각하였느냐면, 그가 그처럼 가혹한 슬픔과 고난을 처참하게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악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당연한 징벌을 받아서 그렇게 매 맞고 형벌을 당한 것이라고 치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에 동족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 것, 그처럼 수난과 멸시를 당하고 피 흘려 죽게 된 것은 당연히 그가 범한 성전 모독죄,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신성모독죄,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 제국의 압제를 더하게 하는 정치적 위험을 가중시킨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의 고난은 대속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의 대속적인 고난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히브리 접속사 ‘웨’가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그 뜻은 ‘그러나’로 해석함이 적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사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라고 선지자는 증거합니다. 여기서도 ‘그’와 ‘우리’가 대조되어 진술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여호와의 종이 깊이 찔림을 당합니다. 이 단어 ‘할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창으로 라합과 같은 괴물을 찔러 죽인다는 문장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매우 강력하게 찌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무참하게 도살되듯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처럼 무참하게 도살되듯이 찔려 죽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허물,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상함’이라는 히브리어 ‘따카’는 부숴뜨린다는 의미입니다. 철저히 부서뜨려서 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1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통회하는 마음’이 바로 ‘따카 레브’입니다. 티끌처럼 잘게 부서뜨려진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이 그처럼 티끌처럼 부서질 정도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잡히시는 그 날 밤부터 군인들과 대제사장의 종들로부터 수많은 폭력을 당하셨으니, 얼굴을 수건 같은 것으로 가리고 주먹으로 때리는 일도 겪으셨고, 로마 병정들에게 놀이개감 신세가 되어서 가시로 머리를 두르고 갈대로 그 머리를 때리고 채찍질로 온 몸을 맞는 일을 겪으셨습니다. 잘게 잘게 부서지고 먼지 티끌에 뒹그셨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온통 처절하게 부서졌으니, 그것 역시 우리의 죄악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죄악’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아욘’은 구부러지고 뒤틀린 죄, 부정하고 더러운 죄를 가리킵니다. 깊은 내면적인 패역한 죄악을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심히 비틀려진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픕니다. 상대방이 강하면 비굴해지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사죄하면 도리어 더 강해져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화평을 청하면 도리어 더 강경해집니다. 자기의 권력과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의 참호 속에서 무참하게 죽어가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심히 비틀려진 존재입니다. 온갖 더러움과 교만과 헛된 욕심과 자기 자랑들과 같은 심히 왜곡되어 있는 인간의 죄악들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처참하게 부서지는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 지옥불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하는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처참하게 티끌처럼 부서지신 것입니다.
또한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징계’란 ‘무사르’라는 히브리어 단어로서 부모가 자녀가 잘못할 때에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생을 겪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께 거역하므로 그들은 율법에 예고된 끝없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질병, 기근, 전쟁, 끝내는 외국에 다 끌려가는 일도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잘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징계를 받고 징책을 받는데, 그렇다고 해도 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완고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떨어질 그 징계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고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도리어 말씀하실수록 더욱 완고해질 것이라는 그 시대에 결국 그 예언대로 되고 그 징계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심으로써 구원의 길로 나아갑니다. 우리 구주의 징계당하심이 우리의 완고함을 돌이키는 유일한 처방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은 결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평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화평을 가리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다 당하심으로써 이제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말 듣지 않던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마음에 진노함이 사라지고 개운하고 사랑스럽고 즐거워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채찍’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히브리어로 ‘하뿌라’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결합하다, 묶다’라는 동사에서 나와서 채찍이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채찍은 한 줄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줄을 묶어서 단단히 결합된 채찍으로서 한번 내리치면 여러 줄로 결합된 각 줄의 끝이 날카롭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리 저리 찢어놓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내리친 채찍질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목과 등어리와 팔과 허벅지와 다리는 다 찢겨내리고 허연 속살이 드러나고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가 그렇게 모질고 강한 몇 겹으로 만들어진 그 가죽과 돌과 쇳가루가 묻혀진 끝이 나뉘어진 채찍질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그에게 없었는데 그가 그 모진 채찍질 아래 그토록 고통을 겪으신 까닭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여기서 ‘나음’이라는 히브리어 ‘라파’라는 단어는 ‘치료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치료를 위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모진 채찍질을 참으신 것입니다. 이 치료가 우리의 육체적 질병의 치료도 있겠지만 우리의 영혼의 치료와 우리 삶의 치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4,25 말씀에 이르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벽도 한번 치면 깊게 패이는 그 무서운 형벌 집행 도구였던 로마 군인의 채찍에 자신의 몸을 다 내어놓은 까닭은 우리를 고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우리 삶의 온갖 세상의 악한 습관들을 고치고 우리 몸도 고쳐 새롭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옛 사람의 습관으로부터 많이 달라진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이 대속의 고난 덕분입니다. 우리 영혼이 살았고 우리가 새롭게 되었으나 아직 우리가 고쳐져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자주 묵상하십시다. 그 로마 총독의 관저 안으로 끌려들어가 이리 떼처럼 희롱하는 웃음과 조롱 속에서 벌거벗겨진 채 처참하게 채찍질로 온 몸이 유린당하신 주님의 그 고난의 자리를 기억하십시오. 그 고통을 상기하십시오. 날 고치려고, 나의 못된 성품과 나의 악한 습관과 나의 교만, 나의 정욕, 나의 욕심, 나의 자랑을 고치시려고, 나의 병을 고치시려고 그토록 채찍당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6절에서는 이제 그러한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다시 한번 이렇게 정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라는 말이 6절 맨 앞에 나와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다 고집스러운 양입니다. 자기 뜻대로 행하는 양입니다. 백 마리 양이면 백 가지 길로 다 흩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 죄악을 그 곧 여호와의 종에게 담당하시키십니다. ‘담당하다’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 ‘파가’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강하게 때리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욥기 36:32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하나님께서 번갯불을 번쩍하면서 정확하게 그 정하신 목표물을 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의 ‘치다’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말의 ‘담당하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다 모아서 예수님께 번갯불로 치듯이 정확하게 때리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당할 그 죄악과 죄악의 형벌을 벼락을 맞듯이 맞으신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이렇게 크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 흠도 없으신 주님, 죄를 머리로는 알지만 결코 지어본 적이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더럽고 악하고 흉측하고 사악한 모든 죄악을 그 온 영혼과 마음과 몸에 벼락치듯 맞으셨고, 그 죄악의 모든 형벌 또한 예수님과 몸과 마음과 영혼에 다 벼락맞듯 강하게 대신 맞으셨으니, 우리 주님이 겪으신 고난의 그 깊이와 강도를 누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다시 한번 주님의 이 고난에 대한 이 예언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친히 이천년 전에 오셔서 겪으신 고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그토록 두려워하고 떨며 죽게 되었으니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는지, 왜 그렇게 땀이 변하여 피가 되도록 기도하며 신음하며 통곡하셨는지 짐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교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대속의 고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시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셨고 고치셨고 세우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살아갈 각오를 다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