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03
흥선대원군 6 - 조대비와 개혁
이 편은 흥선대원군 1편에 썼던 '흥선대원군 뒤에는 효명세자가 있었다'와 조금 중복이 되지만 조대비 입장에서만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세계 어디나 비슷했지만 지난 과거시대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특출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나라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남존여비를 가르치는 유교가 본격적으로 우리의 사상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조선시대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남녀평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kbs주몽이라는 드라마서 보듯이 고구려, 백제 건국신화도 '소서노'라는 여성에 의해서 거의 이루어 진다.
고구려시대는 데릴사위제가 일반적인 결혼풍습이었고,
통일신라시대는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재산분배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단군신화도 환웅이 곰으로 표현되는 부족의 여성과 결혼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건국신화부터 우리나라는 여성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였다.
그 뒤에도 우리 역사상 정치 뒷 면에는 항상 여성들이 있었고 정치 전면에 나선 경우도 많았다. 인수대비, 장녹수, 대장금, 정난정, 개시, 장희빈, 동이, 명성황후 등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방영된 궁중드라마도 거의 여성들이 주인공 이었다.
지금 현재도 여성이 대통령인 시대였고 대통령을 업은 한 여성이 국정을 농단했다 하여 현직 여성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고 그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나 역사상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조선 오백년 역사상 가장 큰 일을 한 여성이 있었다.
바로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을 쥐어 주고 흥선군이 개혁정치를 하게 한 신정왕후라 불리는 조대비이다.
조대비는 풍양조씨(豊壤趙氏) 조만영의 딸로서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있었으나 효명세자가 스물두살의 젊은 나이에 왕도 되지 못하고 요절을 하고 난 뒤 왕비도 못 해보고 나머지 인생을 과부로 산 비운의 여인이다.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헌종에 대한 섭정은 안동김씨 가문 출신이자 시어머니인 대왕대비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맡는다. 그리고 헌종도 후사없이 요절하자 순원왕후는 아무 연고도 없는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왕으로 지명해서 안동김씨 세상을 계속 이어가게 만들고 만다.
조대비는 그 기간동안 숨 죽이고 살아야 했다
철종 8년 순원왕후가 죽자 조대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도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 당시 조대비는 궁중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자기 친정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에게 밀려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였다. 보잘것없는 남은 종친들이 모두 안동 김씨에게 빌붙어 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간파한 눈치빠른 흥선군은 조대비의 친정동생 조성하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그리고 조대비에게 다리를 놓게 했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기는 안동 김씨에게 빌붙지 않았음을 알리고, 둘째 아들 개똥이가 영특함을 은근히 자랑했다. 한편 어린 둘째 아들에게는 제왕의 몸가짐과 학문을 끊임없이 연마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흥선군은 그의 꿈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해서 술청이나 투전판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염탐하고 민심의 동태를 끊임없이 파악했다.
또 안동 김씨 가운데 김좌근 · 김병익 부자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불만에 차 있는 김병학 · 김병국과의 사이를 두텁게 해 두기도 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철종이 죽은 것이다.
1863년 겨울, 흥선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관계기록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철종의 죽음을 안동 김씨들보다 한 발 먼저 알아냈다. 그는 조성하를 통해 조대비를 만나 각본을 짜 주는 한편, 원로대신이면서 안동 김씨가 아닌 정원용 · 조두순에게 흥정을 했다. 개똥이, 아니 재황(載晃, 고종)의 대통(大統)논의에 반대하지 않는 대가를 제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재빠른 행동에 발 맞추어 조대비는 옥새를 거두어 안동 김씨의 반대 기회를 봉쇄하고, 일사천리로 재황의 왕위 계승을 공표했다.
자기 패라고 믿었던 정원용 · 조두순까지 흥선대원군 아들 개똥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는 모습을 본 안동 김씨 세력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흥선군이 와신상담하면서 감추어 둔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대비가 마음 먹기 따라 흥선군은 방안퉁수가 될 수 도 있었다.
고종이 어린 나이라 조대비 자신이 직접 섭정을 하고 그녀 풍양조씨 가문에게 모든 실권을 줄 수도 있었지만 어떤 마음에서 인지 조대비 자신이 직접 섭정하지 않고 흥선군에게 모든 실권을 주었다.
아마 자기 친정 풍양조씨가 세도정치를 하다 비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직접 풍양조씨에게 실권을 주지 않고 흥선대원군에게 맡겼을 것이다.
어쩟든 신정왕후는 남편 효명세자가 이루지 못한 꿈을 흥선대원군을 통해 하나씩 실현해 나간다
섭정 이하응, 국태공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전적으로 조대비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제 그는 조선 500년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강력한 왕권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조선 500년 최대 개혁정치가 시작된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을 통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기구인 비변사를 혁파한다.
영조, 정조도 큰 문제점은 알고 있었지만 유생들이 두려워 감히 해내지 못했으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시절 시도했던 서원철폐를 단행한다.
효명세자가 시도 하려했던 부정부패로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정비한다.
효명세자가 삼정이정청까지 설치해 삼정문란을 극복하려했던 것을 흥선대원군을 통해 삼정문란을 정리한다.
조선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게 하기위해 조대비가 손수 내탕금 십만냥을 내 놓고 착수시키게한다.
대왕대비라는 궁중 최고의 자리에서 흥선대원군을 통해 남편의 뜻을 좇은 신정왕후, 그녀의 손 끝에서 효명세자의 꿈이 실현 되고 있었다.
다행히 흥선군은 그런 개혁을 추진할 만할 카리스마와 생각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흥선대원군 초기 개혁에는 흥선군과 조대비의 손발이 잘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게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개혁정치를 해 갈수록 권력의 추는 흥선대원군에게 완전히 쏠렸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조종만 당할 만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조대비는 조씨 가문이 힘 있었던 풍양조씨 세도시절에 친정 세력들을 대거 기용되었다가 그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가문이 쇠락해졌을 때도 궁궐에서 찬밥 신세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었다.
조대비는 남편 자식 다 먼저 보내고 한스러운 세월을 보내다 다시 기회를 잡아 부군 효명세자 한은 풀었지만 그것도 잠시 권력을 독덤하려는 흥선군에 의해 조대비는 또 다시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런 흥선대원군도 물러나고 조대비는 당시로서는 모질게도 오래 살아 남아 구한말 말년에는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빨리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가 정치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조대비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권력 실권을 잡고 득세한 후에는 명성황후의 질투를 두려워 한 대왕대비가 고종을 피했다고 한다.
순조, 철종, 헌종 시대 경험이 조대비를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조대비는 고종27년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대비 일생을 따라가보면 조선말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시대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의 족적을 모두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대비는 단 한번도 권력의 전면에 서 본적이 없다
단 햔 번의 권력의 기회가 왔을 때 흥선군이라는 탁월한 인물을 선택해 조대비 부군이었던 효명세자의 한을 풀어 주었을 뿐이다.
조대비에게는 개인적인 한풀이 였을지 모르지만 조선오백년 역사상 이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거대한 개혁 한풀이였다.
흥선대원군 개혁정치의 진정한 주역이었던 조대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설이나 티브드라마,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조대비는 티브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인수대비와 비슷한 생을 살았지만 조대비가 인수대비보다 우리 역사에 훨씬 더 큰 긍정적 흔적을 남겼다.
최근에 효명세자 이야기를 다루어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 픽션일뿐이지만)에서 처음으로 조대비 젊은시절이 나온다.
하지만 소설에 불과한 이 드라마에서 조차도 부군 효명세자와 같은 주연도 못하고 조연으로 나와 효명세자 사랑마저 다른 여자(극중 김유진이 맡은 여장내시 홍라온 )에게 빼앗기는 비련의 세자빈(극중 채수빈이 맡은 조하연이 조대비)으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조대비 일생에 대한 역사적, 드라마적 재조명이 필요하다.
이어서 명성황후 1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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