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 외 4편
정해영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이랑의 고추모종처럼
슬픔이 자라 있다
백년 전에 뿌린 씨앗도
자라 있다
어젯밤에 심은 낱알도
싹이 보인다
할머니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었다
종일 엎드린 기도로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었다
어느 날은 바람 속에서
어느 날은 햇빛 아래서
손발이 저리도록 가꾸는 일은
거두어들이게 하는 일
오래 가꾼 이 일은
할머니 농사와 같아
가꾸는 손놀림에 신귀가 붙어
반질하다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어
한들한들
비바람 앞에서도
가볍게 흔들리다
꼭두서니 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인다
*최문자 시집 자서에서 차용
식탁이 있는 풍경
정해영
새우를 튀긴다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다는 물고기
온 식구들이 좋아한다
밀가루를 입혀
끓는 기름에 넣으면
어느새 소용돌이 치는
생의 한 가운데
뜨거움의 한끝을 잡고
부풀어 오른다
바삭한 절정의 꽃
저 처럼 활짝 피고 싶은 얼굴들
부르기도 전에
둥그렇게 둘러 앉는다
식탁의 둘레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구부러진 등으로
고래를 기다리며
한 세상 건너가는 식구들
어떻게 나누어도
원이 되는 음식으로
가장자리 튼튼하다
분
정해영
삶으면 뽀얗게
분을 뒤집어 쓰는
감자
제 몸이 낸 것이다
그녀는
클래식을 듣지도
고전을 읽지도 않지만
주름살이 많아진 다음
하는 일은
산 속에 들어가
어릴 적 나물 이름을
동무처럼 불러 보거나
강가에 나가
다슬기를 잡는다
하루는 삶고
하루는 쉬고
또 하루는 국을 끓인다
비닐 속에 퍼 담아
봉지 봉지
지척에 있는 사람에게
보낸다
그녀의 몸이 내는
분이다
그녀는
삶이 자신을
바닥에 주저 앉힐 때
나물을 뜯거나
다슬기를 잡으러 간다
송편
정해영
추석 전날 송편을 만들었다
쪄낸 송편이 터져
속이 흘러
나왔다
어릴 적 선생님이 입은
언 말과 찢어진 말을 싸는
보자기라고 했었다
터진 송편은 때를 놓친 말처럼
주위를 지저분하게 했다
뜻이 새어버린 말 같아
맛이 없었다
수없이 입모양을 연습했던
그때처럼
반죽의 가장자리를
오므렸다 폈다하면
매끈한 흰 송편이 손 안에서
빠져나왔다
속을 소복이 채우는 때
하늘에는 어둠의 입에서 나온
온전한 둥근 달이 높이
떠올랐다
압화
정해영
산을 올려놓은
가슴 이었다
뱉어서는 안 될 말
가파른 높이로 쌓여
핏덩이 일 때
작은 집으로 보낸 아들
남의 식구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천륜을 막아서는 그림자
밤마다 바닥에 업드려
호랑이처럼 울었다
퉁퉁 불은 젖을
눈물로 죄다 말려버리고
일생의 울음
눌리고 눌러
납작해진 아들
신산한 가슴에
눈감아도 지지 않는
꽃으로 박혀 있다
정해영 약력: 경북 고령 출생- 경북여고, 대구교육대학을 졸업- 2009년 {애지}로 등단-시집 {왼쪽이 쓸쓸하다}(세종도서로 선정)- 현재 ‘대구문인협회 회원’,‘물빛동인’, ‘애지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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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초대석
정해영의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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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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